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중략)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길 中
자아 상실
정여진
목적을 위해 인사치레를 하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는 일, 원하지 않는 일에 열중하는 일. 신념과 행동의 단절.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정신 분열로 볼 수 있는 모습을 강요받는 사회 속에서 자아를 잃은 채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다. 삶이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이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맹목적으로 시간을 보낸다. 본인이 지금 하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관성적으로 하던 일을 계속해서 행하는, 아무런 목적 없는 집착증과 강박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 ‘고3병’, ‘고시병’ 등이 현대 사회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몸이 힘들어도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지키고, 소외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어딘가 소속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무 이유도, 의미도 없이 불안과 고독감을 초래하여, 소속감에 목매는 사람들을 만든다.
인간은 복잡한 심리 구조를 가지며, 이는 ‘자아’라고 불리는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자아는 개인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형성하며, 자아의 발달과 유지는 개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때로는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자아가 상실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증상들로 나타나고, 그러한 상태를 "자아 상실"이라고 한다. 자아 상실은 일시적인 상태에서부터 만성적인 심리적 문제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일시적인 자아 상실은 주로 극적인 충격이나 외부의 강력한 영향으로 인해 발생하여, 개인이 자기 정체성을 잃고 주변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만성적인 자아 상실은 정신적인 문제나 심리적인 장애로 인해 발생하며, 자아의 발달이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거나 자아의 구성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자아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개인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기 어렵고, 주변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개인의 심리적 안녕과 삶의 만족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대학에 입학한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면서도 동시에 잃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새로 만나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지내면서, 이전까지 내가 갖고 있던 나의 색들이 은연중에 지워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당장 눈앞에 주어진 것들을 쳐내면서 잊었다 떠올리기를 반복했다. ‘상실’을 인터넷 창에 검색하며 ‘자아 상실’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그 길로 ‘자아 상실’의 상태에 대해 알아보았다.
개인적으로 때로는 본인의 심리 상태를 일반적인 단어로 정의함으로써 실마리를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한다. 글이 두서없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따금 혼란스러울 때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을 소개하고 싶었다. 꼭 인터넷에 검색하거나 책을 찾아 읽으라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문득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 때, 차분히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정의 내려 보는 것. 그렇게 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Picasso, 'Girl Before a Mirror'
당신은 당신이 시달린 상실으로부터 치유될 것이며, 스스로를 재건할 것이다. 당신은 완전해질 것이지만, 결코 이전과 같게 되지는 않는다.
-Elisabeth Kubler-Ross, David Kessler
고유를 잃지 않는 방법
심지후
6월호의 주제를 ‘상실’로 정하고 나서, 상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상실이란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됨’ 혹은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실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요즘의 나는 정체성의 상실을 제일 무서워하는 듯하다. 스스로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나만의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자아정체성이, 주관이 뚜렷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다. 나부터도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 사람의 모든 구성 요소가 그 사람을 말해 주는 것만 같은, 색채가 확고한 사람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등을 항상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며 끊임없이 성찰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자아정체성이 뚜렷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내가 바라보는 나 자신은 그리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타인의 특징들을 쉽게 흡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열심히 사는 것이었다. 남들과는 구별되는, 나만이 가진 특징은 꾸준함과 성실함(어쩌면 약간의 독기까지)이라고 생각했나보다. 열심히 살기 위해,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에게 주어진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고 끝까지 해냈다. 초반에는 좋았다. 무언가를 해낸 이후 오는 뿌듯함과 자아효능감은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 주었고, 내가 나의 자아를 붙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며 열심히 사는 것이 도리어 나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면 극도로 불안해졌고, 휴식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생겼다. ‘열심히’의 기준이 과도하게 높아져 아무리 애를 써도 스스로 열심히 산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몸을 혹사하며 일했다. 그러나 애당초 기준이 너무 높게 설정돼 버렸기에 내가 분투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내 기준에 도달하는 순간 아마 나는 과로사로 죽었을 것이다.
열심히 살면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럼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 난 최선을 다했는데 왜 스스로를 좋아할 수가 없지? 번아웃이 찾아왔고, 한동안 무기력한 시간을 보냈다. 물론 현재 번아웃은 극복했지만, 아직도 강박적인 워커홀릭 기질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은 날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며, 꾸준히 부지런하게 산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지탱한다. 많이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몇 년 전부터 해왔지만, 생각만으로 쉽게 고쳐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건강을 위해 내려놓아야 하기에, 성인이 된 이후로는 나름대로 많이 노력 중이다. 덜 열심히 산다고 해서 나만의 특색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여전히 나니까. 오히려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더니 진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편안하고 행복한지를 놓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독서와 영화가 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최근 깨달았다. 유튜브는 나랑 잘 맞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혼자 정갈하게 차려진 밥을 먹고 예쁜 카페에 가서 조각케이크를 먹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혼자가 중요하다).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곳과 음주는 자연스럽게 피하는 모습에서 나는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선호한다는 걸 받아들였다. 때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렇게 쉬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여러 경험들을 통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하나씩 알아나간다. 정신건강을 지키면서도 고유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중이다. 아직도 배워나갈 것이 많아 가끔은 힘에 부치지만, 계속해서 배워나가고 싶다.
한없이 성장하고 싶다. 인생은 나를 찾는 여행인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든다. 나만의 여행을 나만의 방식으로 마무리하는, 굳건한 무게추를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무거운 추를 하나 달고 있어 쉽사리 흔들리지 않고 평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융통성 없이 한 자리에만 박혀 있지는 않아서 자유롭게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사람(해인 언니의 표현이 뇌리에 박혀 빌려와 본다). 지금은 평형을 유지하지도, 자유롭게 이동하지도 못하는 것 같지만,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Picasso, 'Guernica'
비명. 어두움이 자욱한 한 공간을 가로지르는. 난자당한 사람은 바닥에 흩어져 있다. 오른쪽 화면에 그려진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을 하늘로 펼친다. 머리에서 뻗은 손에 촛대를 잡고 있는 사람이 화면의 상단에 배치되었고, 손이 머문 곳에 말이 있다. 말은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뒤튼다. 뒤틀어진 고개로 비명이 튕겨져 나온다. 왼쪽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황소의 뿔이다. 그 황소 밑에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있다. 하늘을 향한 그녀의 얼굴, 입에서 배어나오는 것 또한 비명이다. 흑백의 톤. 어둠은 그렇게 왔다, 비명으로.
상실이란 무엇인가?
이효준
의욕 상실, 자유 상실, 입맛 상실, 활력 상실, 매력 상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한다. 이는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상실은 피해져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부정적으로 느껴지니까 말이다. 상실은 꼭 부정적일까?
MBTI는 복잡함의 상실이다. 단절적 설명은 연속적 대화가 된다. 밸런스 게임은 일상의 상실이다.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는, 상상적 자유를 허락한다. 방탈출은 자유의 상실이다. 자발적 구속은 역설적으로, 잃었던 목표 의식을 되찾게 한다. 보드게임은 평등의 상실이다. 게임 속 불평등은 관계를 공고히 한다. 노래방은 평온의 상실이다. 스스로 시끄러워지면서 내면을 치유한다. 우리의 일상이 상실을 조건으로 한다면, 다시 한번 묻자. 상실은 꼭 부정적일까?
상실이란 무엇인가? 잃어버리는 것이다. 상실을 뜻하는 영단어 loss의 어원은 파괴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잃어야 한다. 파괴된 것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파괴해야 한다. 범박하게 말해볼까? 통쾌한 복수를 위해서는 답답한 억압이 있어야 한다. 즐거운 A+을 위해서는 잔인한 로드가 있어야 한다. 편안한 방학을 위해서는 불행한 학기가 있어야 한다. 행복을 위해서는 불행이 있어야 한다. 너를 위해서 내가 있어야 한다. 함께 있기 위해서는 혼자 있었어야 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한다고? 먼저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인가? 상실이다.
사회 없이 살아갈 수 없듯, 정치 없이 살아갈 수 없듯, 감정 없이 살아갈 수 없듯,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없듯, 상실 없이도 살아갈 수 없다. 채운 것을 비워야 하듯, 공짜가 존재하지 않듯, 상실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상실이 단순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물론 타당하다. 상실의 사회적 합의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고자 할 의지조차 잃어버린 극단적 의미를 지향하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갖춘 자가 현실에 없다면, 모든 것을 잃을 자 역시 현실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상실이라는 단어의 근원에는, 간신함에도 불구한 희망, 아니, 간신하기 때문에 가능한 희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님의 침묵>은 말한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다고. 슬픔이 있어야 희망이 있다. 또다시 한번 물어보자. 상실은, 꼭, 부정적인가?
우리네 삶의 원동력이 희망이라면? 그런데 지금 희망이 없다면?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점을 볼 수도, 타로에 맡길 수도, 운명을 받아들일 수도, 혹은 초월적 존재에 의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선택지는 없을까? 한번 잃어버려보면 어떨까?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다. 버려보면 어떨까? 희망을 완전히, 버려버리는 것이다. 누군가 희망을 준다고 해도 받지 않고, 입에 강제로 넣어도 뱉는 것이다. 침을 뱉듯 가래를 뱉듯 희망을 가차 없이, 미련 없이 뱉는 것이다. 진정한 희망은 상실로부터 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상실했기 때문에, 희망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상실을 정말로 느끼도록 스스로 허락할 때까지, 당신은 상실으로부터 진정으로 치유될 수 없다.
-Mandy Hale
상실, 그것은 획득의 다른 말
이찬혁
저에게 어떻게 그렇게 매사에 밝냐, 긍정적이냐, 걱정없이 사냐 등등의 질문을 하는 이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제가 가지고있는 정말 여러가지 가치관 중 ‘상실’과 관련된 하나를 꺼내보려 합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
변화가 일어나기 전 물질의 총 질량과 변화가 일어난 후
원자의 배열은 바뀌지만 물질의 총 질량은 서로 같다.
매우 단순하고 당연한 말 같지만 수많은 과학 이론들의 받침이 되는 아주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법칙입니다. 저는 이 법칙의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본적인 삶에서도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보자면, 여러분이 무언가를 잃었을때 그 부분이 너무 공허하게 느껴져 내 삶의 일부가 사라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부분은 잃었을지 몰라도 다른 부분에서 “배열만 달라졌을 뿐” 잃은 만큼 반드시 무언가를 얻고 채워집니다. 가벼운 예시부터 시작해봅시다. 어느날 에어팟을 잃어버렸다면, 내 통학길을 책임져주던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슬픔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조각 사이로 채워지는 그동안은 노이즈 캔슬링에 막혀왔던 자연의 소리, 사람 사는 소리를 얻게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앞으로는 에어팟을 안 잃어버리게 항상 가방에 링으로 달아놓는 습관을 얻게 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 무거운 예시를 들어보자면, 저의 새내기때의 일입니다.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지만 저는 연애에서 꽤나 많은 실패를 겪었습니다. 첫 썸녀가 저를 어장에 넣으려는 것 같은 느낌을 깨닫고서는 결국은 제 손으로 그녀를 ‘상실’했습니다. 여러모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면 저는 고통스러웠던 만큼 엄청나게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그 전까지 좋든 싫든 항상 관계를 끊어본 적이 없던 저는 사람을 제 손으로 쳐내는 법과 타이밍을 깨닫게됩니다. 또한 자기 관리를 시작할 동기를 얻었죠. 그 결과 한두달만에 거의 6kg를 감량하기도 했었습니다. (어머나! 체중도 상실했군요!) 이처럼 그 당시에는 정말 큰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만큼 얻는 것도 많았습니다. 어쩌면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상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원래 왔던 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무언가를 상실했다면, “상실”에 집중하여 우울에 빠지지말고, 새로 채워질 다른 무언가를 찾아보는 건강한 마음가짐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상실”했다면 외치세요! “오히려 좋아!”
프리다 칼로, '우주, 대지, 디에고, 나,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
잃는다는 것은 곧 얻는 것입니다
공규범
누군가 ‘상실’에 대해 말해보라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검정치마’를 떠올릴 겁니다. 깊고도 따스한 사랑을 노래했던 ‘TEAM BABY’의 뒤를 이은 후속작으로 등장한 ‘THIRSTY’는 그런 사랑의 이면을 거침없이 뱉어냅니다. ‘THIRSTY’를 듣는 내내 무언가 공허하고 텅 빈 듯한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는데 그 커다란 구멍이 바로 상실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검정치마의 두 앨범을 같은 화자의 이야기로 이어서 읽는다면 마음속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상실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앨범 내내 고조되어가던 감정은 마지막 곡인 ‘피와 갈증’에서 고요히 폭발합니다. ‘나’를 기다린 줄 알았던 사람들의 줄이 줄어들고 둘만 남자 술이 가득한 눈으로 사랑을 말하던 ‘너’는 결국 미워한다고 말하며 떠나버립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자신을 기다릴 줄 알았던 유일한 ‘너’가 떠난 뒤 혼자가 된 주인공에게는 아득했던 사랑의 깊이만큼 깊게 패인 허탈함과 무력감만이 남습니다. ‘피와 갈증’에서는 상실 직후의 주인공의 혼란과 후회를 느낄 수 있다면, 앨범의 두 번째 곡인 ‘Lester Burnham’에서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상실의 구멍이 어떻게 되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자신이 얼마나 상실의 대상을 아껴왔고 상실 이후에도 재회를 그려왔는지 털어놓습니다. 소중한 존재를 상실한 뒤 주인공의 세상은 계속해서 흔들려왔고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지만, 그 구멍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며 괜찮다는 말을 꺼내보는 주인공이었습니다. ‘피와 갈증’이 금방이라도 부서질듯한 멜로디로 위태롭게 이어졌다면, ‘Lester Burnham’은 강렬하지만 어딘가 공허한 듯한 기타 리프로 상실 이후의 감정을 노래하는 듯합니다. 검정치마의 ‘THIRSTY’ 앨범에는 다른 지배적인 해석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상실’이라 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 조금은 새로운 해석을 감히 건네보았습니다.
노랫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끔찍이도 아끼고 마음을 바쳤던 존재가 사라진다면 그 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을 것만 같은 아리고 후회 가득한 구멍이 되어 버립니다. 그게 사람이든, 사랑이든, 시간이든, 공간이든 진심의 무게만큼 그 구멍의 깊이는 더 깊이 내려앉습니다. 상실의 무게를 어떻게 덜어내야 할까요? 보통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빨리 시간이 흘러 상실의 구멍이 덮이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것이죠. 혹은 어떻게든 구멍의 빈자리를 무엇으로든 메우려 성급히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상실이 불러일으킨 감정들에 직면하지 않고 시간에게 그 책임을 무작정 위임했을 때 온전히 상실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또한 한 번 가득 충만히 채워졌던 그 공간을 다시금 메울 대체제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버거울 겁니다. 이런 악순환은 상실의 부정적인 측면에만 집중했기에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설적으로 상실의 순기능에 대해 받아들인다면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김수영의 ‘파밭 가에서’ 속에 ‘얻는다는 것은 곧 잃은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얻는’ 행위의 양면성에 대해 말하는 듯한 이 문장은 반대로 생각하면 상실의 순기능에 대해 넌지시 말해주는 듯합니다. 상실은 채워져 있던 마음을 도려냄으로써 쓰라린 아픔을 주지만 동시에 그 공간을 비워냄으로써 숨을 트이게 해줄 수 있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고스란히 간직해오는 것들의 가치도 소중하지만, 때로는 고이고 묵은 것들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새로움도 존재하기 때문이죠. 상실은 묵은 마음을 비워줌으로써 마음 속에 새로움을 불어넣어 줄 기회를 만들어줍니다. 다분히 결과론적인 이야기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를 찾아온 상실에 잠식되고 무력화되기보다는 다시금 일어설 수 있게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해버리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미 생겨난 구멍은 하나의 유적지로서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검정치마의 ‘Lester Burnham’의 화자는 더 이상 상실의 구멍을 채우려 하지 않고 원래 그 구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상실의 대상의 실재는 사라졌지만, 그 대상과의 기억과 시간은 고스란히 그 자리에 남을 것이기에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그 대상과 그의 상실 모두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실의 순기능을 인지하고 상실이 남기고 간 것들을 온전히 품어줄 수 있다면 또 어느 순간 훌쩍 찾아올지 모르는 또다른 상실의 순간을 더 단단히 맞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구멍’의 정의는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인 동시에 ‘어려움을 헤쳐 나갈 길’을 일컫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양면이 있듯 상실 또한 우리에게 아픔만을 주는 것이 아님을 되새겨봅니다. ‘잃는다는 것은 곧 얻는 것입니다’
‘줄이 그새 줄어들었네. 나를 기다린 줄 알았던 사람들은 떠나가고 다시 우리 둘만 남았네. 술이 가득한 눈으로 날 사랑한다 말했었지.’ - 검정치마, love is all
‘줄은 처음부터 없었네. 나를 기다릴 줄 알았던 사람은 너 하나였는데 이제 난 혼자 남았네. 술이 가득한 눈으로 날 미워한다 말했었지.’ - 검정치마, 피와 갈증
‘그날 이후 내 마음엔 커다란 구멍이 생겼어. 괜찮아 거긴 원래 아무것도 안 들어 있었어.’ - 검정치마, Lester Burnham
Something that is loved is never lost.
-Toni Morri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