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50주년 기념 특강 1, 하느님 나라와 주님의 기도 -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님
✠ 하느님 나라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각자 이유는 조금씩 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에 닿게 됩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이벽, 정약종, 권철신 같은 분들을 통해 신앙이 시작되었지만, 그 근원은 바로 복음서에 있습니다. 복음서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나 역사책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선포하는 책이며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한 신앙의 원천입니다.
그중에서도 요한복음 21장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사형 선고 후 제자들은 실패감에 젖어 갈릴래아로 돌아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다시 고기 잡는 삶으로도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돌아가시고 실패했다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밤새 낚시를 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낙담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에 순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오른편'은 단순한 방향이 아니라 '옳은(Right) 편', 즉 주님의 뜻에 맞는 방향으로 돌아오라는 부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제자들이 고기를 153마리 잡았다고 합니다. 왜 하필 153마리일까요? 성 예로니모(St. Hieronymus)는 당시 세상에 알려진 모든 물고기의 종류가 153종이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것이 '세상의 모든 민족'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사도들과 교회가 온 인류를 낚는 어부가 되어 구원해야 함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혀 꾸짖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왜 도망갔느냐”, “왜 나를 버렸느냐”는 말씀은 전혀 없이 조용히 아침을 차려 주시고 다시 불러 주십니다.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Carlo Maria Martini) 추기경은 이를 두고 "우리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라 고백합니다. 숯불을 피워 아침을 차려 주신 주님은 질책 대신 당신의 사랑을 먼저 건네셨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열정으로 불타올라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을 만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을 만나시고도 질책하셨다면, 제자들은 용서받지 못했을 것이고 복음이 전파되는 일도, 교회가 생기는 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찾아가시어 용서하셨기에 교회가 부활 신앙 위에서 새롭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전하고 우리가 받아들인 복음의 주인공은 예수님이고 복음의 주제도 예수님이지만, 정작 주님께서 선포하신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께선 스스로 당신의 사명을 이렇게 고백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물론 정확히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늘 나라’, ‘아버지의 나라’ 등으로 표현되긴 하지만 복음서 안에서는 100번 정도 언급된 것을 통해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신 것은 무려 41가지나 되는데, 왜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셨을까요?
비유야말로 어렵고 신비적인 것을 손쉽게 알려 줄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피자를 설명할 때 전이나 호떡에 비유하고, 스파게티를 설명할 때 가락국수에 비유할 수 있는 것처럼 잘 모르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좋은 방법이 비유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비유라 할지라도 그건 비유하는 바를 완전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피자를 전과 호떡으로 설명하려 해도 완전히 같을 수 없듯이, 하느님 나라에서 오는 기쁨을 비유로 설명한다 한들 그 기쁨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쁨을 다 알 수 없고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비유로 설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설명 중 그래도 가장 훌륭한 설명은 마태오 복음 12장 28절의 설명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마귀의 세력과는 반대되는 것이며, 마귀가 쫓겨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는 나라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쫓겨나고 악의 세력이 물러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사명이자 12제자, 72제자에게 주셨던 사명이 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셨다.’(루카 9,1-2 참조)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1.2.9 참조) 곧 우리만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도 하느님 나라를 알 수 있도록 전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자 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오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말씀만으로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활동으로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말만으로 이 사명을 수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활동을 통해 아픈 이가 치유되고, 굶주린 이가 허기를 채우며, 소외된 이가 위로받는 순간마다 악의 세력은 한 걸음 물러나고 하느님 나라는 그만큼 우리 곁으로 다가옵니다.
✠ 주님의 기도
이제 주님의 기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유일하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님의 기도를 시작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을 멀고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며 이름을 부르기도 어려워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사건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가 자기가 믿는 신을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우리밖에는 없습니다. 비천하고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 고귀하시고 선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법적으로 같은 권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가르침을 예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대한민국 헌법과 유엔헌장은 인간이 존엄하다고 선언하지만 그 근거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존엄하다고 가르칩니다. 똑똑하든 머리가 나쁘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장애가 있든 없든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두가 동등하게 존엄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스스로가 존엄하다는 사실도,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도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분명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오늘 미사 중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나는 자동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 하느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수녀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시작하시던 중에 더 이상 기도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멈추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내 아버지시라면, 내가 무언가를 말씀드리기도 전에 이미 다 아실 것이고 모두 준비하실 텐데, 더 이상 기도를 이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온전하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자녀로서,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주교요지」 상권 제4장 ’천주 만민지대부(天主 萬민之大父, 천주는 모든 백성의 큰 아버지이시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의 능력만으로는 자식을 낳을 수 없다. 비유하자면 장인이 그릇을 만들 때 자기 재주로 마음대로 만들 수 있어 크게 하려면 크게 하고, 작게 하려면 작게 한다. 만일 사람이 자식을 낳는 것이 장인이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자기 능력대로 되는 것이라면, 자식을 낳는 것도 마음대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아들을 낳고 싶어도 딸을 낳고, 잘 낳고 싶어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는가? 이것을 보면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천주의 조화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복자께서는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은 맞지만 그 근본은 하느님께 있기에 땅의 아비보다 하늘의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은 저서 「예언자」의 한 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의 아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딸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통하여 왔지만, 당신에게서 온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의 소유는 아닙니다.”(Your children are not your children. They are the sons and daughters of Life’s longing for itself. They come through you but not from you, And though they are with you yet they belong not to you.).
이 사람 역시도 진정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실로 하느님을 마음속으로부터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실로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아버지시라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나의 형제자매일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내 혈육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역시도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형제자매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 경쟁자가 되고 원수가 되고 있진 않습니까? 캘커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는 그 도시 전체의 빈민들을 돌보고 사랑으로 아껴 주셨던 분입니다. 성녀에게 있어서는 캘커타라는 도시 전체가 하느님 나라였을 텐데, 과연 나에게는 어디까지가 하느님 나라입니까?
-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나라의 이름을 드높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누군가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잘 먹고 잘 살게만 해 준다면 기뻐하며 그 사람들의 이름을 대고 나라의 이름을 빛낸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보다도 묵묵히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하며,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표리부동하지 않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애국자고 나라의 이름을 드높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자녀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만 집중하고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게 자신의 사명을 다하며 주님의 이름을 드높여야 하는 존재들임을 떠올려야 합니다. 이름의 중요성은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에서 드러낸 바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름은 그 존재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을 통해 그분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고 그분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 이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시다시피 하느님 나라, 하늘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뜻이 충만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천사들과 성인들에 의해서 하느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땅에서는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신앙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느냐에 그 결과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신학교 원감 신부로 재직할 때, 신학교 기숙사는 ‘조규만의 나라’였습니다. 신학생들의 외출 권한, 문화생활 권한 등등 모든 것들을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내 나라라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바로 신앙입니다. 성모님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할 수 있는 그 신앙 안에서만 하느님은 당신 뜻을 펼치실 수 있습니다. 다른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이렇게 온전히 내어 맡기는 신앙 안에서만 하느님 뜻이, 하느님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이웃 종교인 불교는 윤회설을 믿습니다. 만약 내가 나쁜 업을 쌓으면 다음 생이 계속되어서 그것을 계속 갚아 나가야만 합니다. 반대로 선업을 쌓으면 극락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 한 번으로는 택도 없는 일입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15km인 바위에 100년마다 한 번씩 선녀가 내려와 비단처럼 부드러운 옷깃으로 스칩니다. 그렇게 해서 그 돌이 다 마모되어 없어질 때까지 걸린 시간을 1겁이라 합니다. 극락왕생하기 위해선 1겁은 커녕 1억 겁의 시간도 부족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단 한 번의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희망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느님 나라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슨 공로가 있다고 스스로 한 번의 인생으로 하느님 나라를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죄가 용서받는 것만큼,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나에게 잘못한 저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못해.’라는 그 마음 안에 평화가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 안에 어떻게 하느님 나라가 시작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 부류의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중에 제가 생각하기엔 하느님 사랑이 가장 어렵습니다.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2,37 참조) 먼 옛날 순교자들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는 용기가 나지 않고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다음으로 어려운 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9,19 참조) 그렇게 사랑하기 어려우니 나 자신을 더 미워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에 비해 원수는 그저 사랑하라고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랑에 비해 훨씬 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랑의 어려움을 반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수 사랑하기를 가장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예뻐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원수 생각 때문에 하느님 나라가 아닌 지옥에 살고 있는 나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잘만 타고 다니던 자동차가 광고 한 편에 초라해 보이는 것처럼 세상의 유혹들은 다른 곳으로 자꾸만 눈을 돌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유혹이란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끊임없이 결핍을 느끼게 합니다.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 역시도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악도 마찬가지로 아무 예고 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작가는 아들을 사고로 잃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원망하며 악의 구렁텅이에 빠질 뻔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이 모두 지나고 회고록에서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없애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받는 우리 곁에서 함께 울어 주시는 분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악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악에 빠졌더라도 하느님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곳에서 나올 수 있다면 그는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먼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아버지'라 고백하고, 내 곁의 이웃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활동을 통해 나만이 아니라 모든 형제자매가 하느님 나라에 있을 수 있도록 살아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