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2023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최우수상
부동의 원동자
법학과
20182767 한재은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붉은 해가 보였다. 해류 속에 휘말린 인간의 산물들이 허옇고 거뭇하게 옥빛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낡은 그물이라든가 부표, 산호의 백화 따위였다. 체형에 비해 여유 있는 검은색 블루종과 청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사륜구동 스포츠용 차량에서 내려 일출을 바라보았다.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인상의 남자는 귓전을 두드리는 파도의 소음이 기껍지 않았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옷에 걸치고, 고요한 해안 도로 가장자리에 있는 울타리에 몸을 기댔다. 여름을 넘어서서 부쩍 차가워진 바닷바람이 반쯤 돌아간 고개를 침범해가며 새까만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좌천된 곳의 경치가 이렇게 좋아서야 되나.
통합사회미디어 언론사 <한국>의 사회부 사건팀은 여느 메이저 언론사가 그러하듯 쉴 틈이 없었다. ‘24시간 5분 대기조’라는 이름을 달고 예측불허하게 처리해야 하는 외부적인 일이 차고 넘치는 것은 물론 사내정치와 같은 자잘한 내부 사정은 소속 기자들의 피로감을 더하기 일쑤였다. 특히 잦은 인력 교체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비교적 익숙한 정치인이나 연예인, 사업가를 상대하는 다른 기자들과 달리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취재를 주야장천 감당해야 했으므로 사람이 남아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거기다 정치계 연줄을 통해 사건팀에 들어온 김창석은 열정적인 신입 기자들을 쫓아내는 데 탁월한 재능―직장 내 괴롭힘, 성희롱 및 성추행, 독단적인 투고―을 보였다. 원미정은 잔뼈 굵은 기자들도 마다하는 사건팀의 팀장 자리를 단숨에 꿰찬 유능한 여자였다. 자극적인 사건 위주의 보도 방식과 더불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내정치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팀장으로 발령받자마자 제도권 언론 특유의 적폐이자 사내정치의 온상인 ‘낙하산’ 김창석을 처리하고자 했다.
김창석의 후배 기자 신우건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사건팀에 있으면서 연줄 없고 흠도 없는 선배 기자들의 말로를 오랫동안 봐온 탓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콕 집어 사무실로 불러낸 팀장의 지시에 흔쾌히 응했다. 김창석의 뒤를 봐주는 정치인이 그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게 만들라는 지시였다. 자세한 사정이야 김창석과 그의 기사 두 사람만이 알겠지만, 신우건은 걸릴 것 하나 없겠냐는 배짱으로 김창석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보내 압박을 줬다. 아니나다를까 자신의 유일한 동아줄과 얼씨구나 긁어 부스럼을 만든 김창석은 며칠 초조해 하는가 싶더니 괜한 데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연관도 없는 신우건의 업무 방식에 강력히 항의하는 식이었다. 팀장은 지금까지 상황이 따라줬고 정치적 개입의 여지도 차단해 놨으니 남은 건 자멸을 기다리는 것뿐이라며 김창석을 달래듯 신우건을 임시 좌천시켰다. 다 된 밥에 재 뿌릴 수 없는 팀장의 결정은 이해하나 속이 쓰린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게 신우건은 선거철을 앞두고 재조명된 ‘연고 없는 시체’ 사건에서 잠시 손을 뗐다. 강에서 남성의 시체 한 구가 발견된 사건인데, 신원을 조회해 보니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데다 가족마저 존재하지 않아서 사인 추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사건은 신우건에게 문제를 제기한 김창석이 맡게 됐다.
그 대신 신우건은 지지부진한 ‘대암산 모녀 살인 사건’을 맡았다. 범인이 대암산 등산로에 시체를 담은 검은 비닐봉지를 버렸고 감식 결과 두 명의 피해자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현재 용의자로 지목된 남자는 네 번의 결혼을 거듭한 피해자의 남편인데, 그가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그의 숨겨진 아들이 사주를 받고 범행 도구를 가지고 도망쳤다는 추측이 난무할 뿐이었다. 실제로 두 번째 부인은 남자의 호적에는 없는 아들과 함께 행방이 묘연했다. 최근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우편에 부친 발신자 불명의 제보가 언론사에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신우건은 용의자의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해안 마을로 향했다. 그들의 행적을 쫓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까지는 아니어도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 수준은 됐다. 그러므로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든 암묵적으로 허락된 휴가든 말만 좌천이었다.
‘전화했어요? 기내라서 못 받았어요.’
전파를 타고 오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어깨를 으쓱여 귀에 댄 핸드폰의 위치를 올바르게 고정하고 차량에 시동을 걸었다. 상대는 날 대신해 ‘연고 없는 시체’ 사건을 비공식적으로 맡아줄 탐정사무소의 정직원이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인데, 하필 김창석이 그 사건을 담당하게 된 게 마뜩찮아 부탁했다. 마침 어제 출장을 마치고 귀국했으니 시의적절했다.
“이륙했나 싶어서요.”
대꾸하며 흘긋 손목시계를 봤다. 어제 저녁 여섯 시쯤 전화를 걸었으니까 벌써 열두 시간도 전이었다.
“사택으로 곧장 간댔죠?”
‘네. 이제 출발합니다. 최우광 탐정님에게는 미리 말해 뒀으니까 따로 연락할 필요 없어요.’
“그래요. 피곤하지는 않고?”
상대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세요? 걱정 마세요, 신 기자님. 저한테 일 맡기는 거 한두 번도 아니잖아요.’
전적을 굳이 짚어주는 태도가 얄궂다. 내가 상대를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꼬는 게 틀림없었다. 운전대를 돌리며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을 했다.
“이번에는 진짜 부탁할 사람이 없었어.”
상대가 소리 내어 웃었다.
‘쓸데없는 짓 안 할게요. 혜윤 PD 심기 건드리지 않기, 일은 시킨 것만 하기. 걱정하는 게 이거 맞죠?’
그녀가 언급한 권혜윤은 ‘연고 없는 시체’ 사건을 범죄 저널리즘 프로그램에 싣고자 하는 PD였다. 필드 매뉴얼에 민감하고 절차와 규범을 중시하는 성격이라서 그녀와는 상극이었다.
“하나 더. 사건이랑 관련 없는 정보 캐고 다니지 마. 이 일 아니면 그 사람들이랑 볼일 없잖아.”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그녀는 우연히 알게 된 타인의 약점을 스스럼없이 써먹는 질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헤어진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농담이 불쾌했다.
“천태금 씨.”
‘알았어요. 그런데 아직도 이런 거 좋아해요?’
“헛소리할 거면 끊습니다.”
‘귀양 조심히 다녀와요. 당신 팀장님이 좋은 결정을 한 거야.’
전화가 끊어졌다. 목소리 좀 들었다고 되찾은 적막이 어색했다.
탐정사무소 <광명>은 경찰이 그러하듯 언론사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었다. 책임자는 최우광 탐정인데 타 언론사를 포함해 사회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발 빠른 남자였다. 예민하고 가리는 게 많으며 사사로운 정이 없는 괴짜라서 키가 조금 작다는 것만 빼면 아서 코난 도일의 추리 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천태금에게 들은 바로는 촌구석 무당 집안의 기둥이 될 뻔했는데 고등학생 때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그 팔자를 면했단다. 성인이 되는 해 세례성사를 받아서 지금은 가톨릭 신자라고 했다. 아무튼 특이한 이력이었다. 천태금과는 탐정사무소를 드나들면서 알게 됐다. 그녀는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미인에 6 피트 언저리를 선회하는 장신이었다. 최대 장점은 뛰어난 화술과 증거품 수집 그리고 변장으로,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거’ 좋아해요?
‘이런 거’란 아마도 분야를 막론한 자극일 테다. 몇 년 전에 나는 천태금과 교제하면서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초반부 상담의 이유는 교제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하게 만드는 천태금의 만행 때문이었지만, 가면 갈수록 그 양상이 달라져서 후반부 상담은 내 과거라든가 성향 따위를 파헤치는 쪽으로 나아갔다. 쉽게 끝낼 일을 엉망으로 만들거나 위험한 도박을 감행하게 하는 그녀의 태도가 본래 성향이라기보다는 날 교제 관계에 잡아두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담자는 내가 위험을 감수하고 저지르는 모든 종류의 일에서 비정상적인 쾌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에 비해 보여지는 인생이 크게 엇나가지 않았으니 내적으로 다양한 갈등을 겪었을 거라고도. 하지만 기자로 지내는 일은 내게 무엇보다도 많은 쾌감을 선사했다. 명목은 정의와 대중을 위한 것이었으나 자기만족이었다. 천태금은 나를 꿰뚫어 봤다. 그러나 그런 짓을 벌여야지만 나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울 리 없었다. 해가 완전히 뜨자 어둡게만 보였던 바다가 밝아졌다. 새벽의 공기가 짭짤했다. 운전하는 내내 틈이 날 때마다 바깥을 바라보면서 불안을 자초하는 스스로를 달랬다. 비록 과거에 내 뒤통수를 쳤었지만 업계에서는 뛰어난 평가를 받는 천태금의 일처리는 확실한 만큼 대체로 잡음도 없었다. 그러니 일을 맡긴 이상 믿어야 했다.
지도를 더듬어가며 찾은 곳은 근방에 작은 항구와 해변이 위치한 마을이었다. 비포장도로 때문에 차량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마을 어디에서나 보이는 푸른 바다에 정신이 팔려 그런 걸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 뒤늦게 속이 울렁였다. 차체에 기대 물을 마시고 있으니 항구 앞쪽에 어촌 체험장이 보였다. 우정호 배낚시, 1 인 30,000 원. 회를 썰어 주겠다는 문구는 검은 마커로 지워져 있었고 그 옆에 낚시대를 제공한다는 새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정박된 배 근처로 다가가자 생선 비린내가 났다. 취재 때문에 자주 왔던 바다지만 지금만큼 오감으로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근처를 얼쩡거리니 조타실에서 사람이 나왔다. 비쩍 마른 남자아이였다. 아이가 씩씩하게 물었다.
“탈 거예요?”
고개를 흔들었다.
“아….”
“혹시 여기 적힌 주소지가 어딘지 아니?”
실망한 기색의 아이에게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아이는 종이를 받아들더니 파랗고 노란 지붕을 가진 집들 사이 골목을 가리켰다.
“올라가야 돼요.”
“얼마나?”
“한참이요.”
“그렇구나.”
“아저씨, 어디서 왔어요?”
아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연스럽게 질문에 대한 답을 넘기고 고맙다고 대꾸한 뒤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아이가 나온 조타실에서 턱에 수염이 희끗희끗하고 등이 굽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뱃사람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우정아! 우정이라고 불린 아이가 남자를 향해 뛰어갔다. 남자는 아이의 어깨를 쥐고 날 바라보는가 싶더니 깊은 눈을 껌뻑이다가 다시 조타실로 들어갔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경계하는 것도 아니고, 적대적인 것도 아니었다. 어디서 봤었나. 괜히 목덜미를 매만지면서 아이가 가리킨 골목 사이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한동안은 이곳에서 생활해야 하니 언제 한 번 말이나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것 같은 돌계단이 있었다. 절반부터는 나무로 된 계단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관리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군데군데 불쑥 튀어나온 풀이 얼굴을 쳤다. 지낼 집에 도착했을 때는 등산을 한 것이나 다름없어서 어느새 땀이 흐른 턱을 손등으로 닦아내야 했다. 바닷바람에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녹이 슨 파란 철문을 열자 창고를 개조한 고택이 보였다. 고택은 습하고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 나무 사이로 뻗치는 햇빛이나 때 지나 시든 능소화가 없으면 생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처마에 달린 종이 환영하듯 소리를 냈다. 어깨에 짊어진 가방을 마루에 내려놨다. 철문 사이로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오셨습니까.”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허술하게 셔츠를 걸친 내 또래의 남자가 수건 양끝을 잡아 젖은 머리를 털며 방에서 나왔다. 그을린 피부와 짧게 깎은 머리를 가진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였다. 남자는 물기가 묻은 손을 셔츠에 벅벅 닦고 앞으로 내밀었다.
“이혁입니다. 신우건 기자님 맞으시죠?”
“예. 반갑습니다.”
“저 구종욱 기자 동기입니다.”
“선배님이셨네요.”
“그만둔 지 오랩니다. 그냥 이혁이라고 부르세요.”
“팀장님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머물 곳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대암산 사건 때문에 오셨다면서요. 머물 곳이라고 하기는 마땅찮지만 편히 계세요. 이래봬도 이만한 경치의 집이 두 채는 없으니까요. 그럼 밤에 뵙겠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철문을 나섰다. 혼자 남은 나는 남자의 말을 곱씹었다. 구종욱 기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팀장은 이곳에 오면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게 이런 의미였을 줄은 몰랐다. 내가 언론사에 막 들어왔을 때 나에게는 존경하는 선배가 있었는데, 구종욱은 그 선배의 친우이자 대척점이었다.
‘야.’
‘예, 선배님,’
‘걔 있잖아, 네 사수.’
‘양계원 선배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걔.’
과거의 순간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구종욱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나를 쳐다봤다. 뒷담이라도 시작할 기세였다. 옥상에서의 뒷담. 클리셰가 따로 없었다. 괜한 데 끼어들기 싫어서 눈을 피했다. 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비교적 높은 건물이었기 때문에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 지금 이 집에서 해안 마을이 내려다보이듯이. 그 느린 어투의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걔 옆에 사람이 남아나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모르겠습니다.’ 아마 지나치게 성실한 점 때문이 아닐까요. 그 말은 삼켰었다.
‘자기 신념 지키겠다고 혼자 고고하게 서 있어서 그래. 그 새끼가 말하는 빌어먹을 정의 때문에 갈려나간 놈들, 괜한 일에 휘말려서 이 팀에서 빠진 거라고.’
정의라면 정의지 ‘빌어먹을 정의’는 대관절 뭐란 말인가.
‘세상에 완벽한 건 없어. 그렇게 보여도 실상은 안 그래. 그러니까 적당히 따라다니다 네 길 찾아라.’
‘예, 뭐….’
‘매번 이렇게 얘길 해도 들어먹는 새끼가 없더라.’
그때까지만 해도 막연히 구종욱이 양계원을 견제한다고만 생각했다. 구종욱이 양계원 때문에 죽지 않았으면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말 안 되면 어쩔 건데. 다른 방법이라도 있니?’
‘다시 생각해 주세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선배가 말하는 정의가 아니잖아요.’
‘누가 그래.’
‘양계원 선배님, 지금이라도 약속대로 기사 내주십시오. 사람이 죽는다고요!’
기억 속 양계원이 입을 다물고 나를 외면했다. 어떤 조치도 취할 생각이 없다는 태도였다. 눈앞이 아찔했다. 구종욱의 말이 맞았다. 양계원의 정의는 타자의 희생을 강요했다. ‘빌어먹을 정의’, 말 그대로 정말 빌어먹는 정의였을 줄이야. 룸 미러에 달린 사진 속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구종욱의 딸이었다.
‘난 이미 경고했어. 위험한 곳에 기어들어가지 말았어야지.’
양계원의 초조한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더 말할 것도 없는 명백한 꼬리 자르기였다. 이토록 비열한 자가 또 있을까! 구종욱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은 인질 때문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란 건 없다고, 방법이 있으니 시도해 보자고 했다. 웃기는 소리였다. 믿었던 새끼와 선배가 말도 안 되는 배신을 했는데, 방법은 무슨 방법. 떨리는 손으로 운전대를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에도 무전기 속의 구종욱은 말이 없었다. 정적이 이어졌다. 남은 시간은 12 분, 기사가 나와야 구종욱을 풀어줄 것이다. 그게 협상의 조건이었으니까.
‘다른 기자한테 연락하면 됩니다.’
‘놔둬라. 그쪽도 지킬 게 있는 거겠지.’
‘그럼 이대로 죽을 거예요?’
속에서부터 분노가 들끓었지만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구종욱을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다. 화를 삭이며 방법을 찾고 있는데 폐건물 입구에서 조폭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재빨리 몸을 낮추고 바깥을 살폈다.
‘그 새끼들 지금 나오고 있어요. 곧 들어갈게요.’
구종욱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나도 정의란 게 뭔지 안다.’
‘뭐라고요?’
‘누가 나한테 정의롭다고 하는 게 무서웠어. 확신이 드는 순간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아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돌아가면 조수석에 있는 거 보고 올려. 그 새끼들 분명 너까지 묻으려고 할 거다.’
그때 차창 너머로 커다란 폭발음이 났다. 시야가 하얗게 번쩍이더니 멀쩡했던 건물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파편이 차체 양옆으로 튀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구종욱과 교신했던 무전기는 끊어져 있었다. 이게 뭐지? 약속했던 시간까지 아직 5 분이나 남았는데. 큰 소리를 버티지 못한 귀에서 이명이 울리자 손으로 귀를 문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그때의 기억이 참을 수 없이 밀려들었다. 손바닥으로 식은땀을 훔치며 허리를 펴고자 노력했다.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감은 채 구역질을 했다. 이명과 바닷소리가 섞이더니 차단됐던 시야가 다시 번쩍였다. 이건 실재가 아니었다. 뇌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다. 알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눈을 뜬 것은 정오가 넘어서였다. 마루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방으로 들어섰다. 겉옷을 벗고 땀에 젖었다 말라버린 셔츠를 검은색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일회용 인공눈물을 따서 뻑뻑한 안구에 넣고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차량 없이 집을 나섰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우선은 오면서 봤던 횟집에 들렀다. 횟집 내부는 허름한 외관과 다르게 말끔했다. 새로 칠해진 하얀 벽이 빙글빙글 돌았다. 끼니를 챙기지 못해서 그런 건지 몸에 힘이 없었다. 아무 자리에 털썩 앉았다. 어딜 앉아도 바로 옆에 큰 창문이 있어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본 지 반나절밖에 안 됐지만 슬슬 지겨웠다. 손으로 미간을 잡고 주물렀다. 새벽 운전이 무리가 된 듯했다. 오전을 통으로 날린 게 아깝지만 그마저도 없었다면 이렇게 못 돌아다녔겠지. 좋게 생각하자. 합리화하며 손을 내렸다. 마침 횟집 주인이 반들거리는 앞치마를 맨 채로 트레이를 밀며 다가왔다. 물과 기본 반찬, 메뉴판을 받았다. 횟집 주인은 오십 대 정도 돼 보이는 여성이었다. 지쳐 보이는 기색을 제외하면 일평생 이곳에서 산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잘 관리된 얼굴이었다.
“저, 뭐 좀 여쭙겠습니다. 최근에 중년 여성 한 명과 이십 대 남성 한 명이 이 마을로 이사를 오지 않았나요?”
무뚝뚝하게 듣고만 있던 그녀는 내 말에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슥 훑었다.
“서울에서 왔어요?”
“아, 저는.”
“내 아들을 찾으러 왔나 보지. 저녁이 되면 등대로 가 보세요.”
횟집 주인은 마치 내가 올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태연했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등을 돌려 주방으로 사라지는 작은 등을 보자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쳤던 남자아이와 재회했다. 아이의 손에는 나무로 된 사람 조각품이 들려있었다. 자세히 보니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본뜬 것이었다. 산 것이라고 치기에는 투박했고, 직접 만든 것이라고 치기에는 정교했다. 아이는 신이 나서 내게 달려와 자신의 조각품을 자랑했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멋지지!”
“그러네. 솜씨 좋은데.”
“내가 만든 건 아니에요.”
아이는 쑥스럽다는 듯 조각품을 숨기더니 눈을 굴렸다.
“그럼?”
“해빈이 형이 줬어요.”
“그래? 해빈이 형은 지금 어디 있어?”
“몰라요. 근데 저녁에는 항상 등대에 있어요.”
“알려줘서 고마워, 우정아.”
아이가 폴짝폴짝 뛰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표정을 지우고 굽혔던 무릎을 폈다. 안해빈은 행방이 묘연한 용의자의 두 번째 부인의 아들 이름이었다. 고개를 돌려 횟집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적어도 나흘은 부지런히 돌 계획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도 않았던 두 모자를 찾았다. 두 번째 부인이 내게 서울에서 왔냐고 물었던 것은 이전에도 외부인이 찾아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내게 아들의 위치를 말해줬다는 건 그 외부인이 아무 소득 없이 얌전히 돌아갔다는 뜻이고. 자신의 전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가 살인 용의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속단하지 말자.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 동일인물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무거웠던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을 거슬러 올라간 끝에 낡은 창고에 다다랐다. 파란 페인트칠이 형편없이 벗겨진 철문 너머 이 집은 풀숲에 가려져 있어서 은밀한 죽음이 머무를 최적의 장소였다. 들고 있던 시체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몸이 인형처럼 꺾여 흙바닥에 널브러졌다. 죽은 몸을 지고 산을 오른 탓에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눈앞에서 성가시게 물결치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허리를 폈다. 건조한 시선을 옮겨 아래를 봤다. 푸르죽죽한 파도가 거대한 회백색 낙숫물을 달고 까마득히 솟구쳤다가 단숨에 내려앉았다.
‘죽었어요.’
‘뭐?’
‘죽었다고요.’
불어터진 한 구의 시체는 건설사의 유일한 내 편이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기로 했다. 직급을 괜히 단 게 아닐 테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비밀을 지켜 달라며 빚도 달았다. 그래 봤자 웃기지도 않은 조폭의 의리 부탁일 게 뻔했지만, 그 남자가 상도덕이 무엇인지 안다면 누군가에게 들킬 걱정은 없었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아래를 구기듯 잡아 담배 한 개비를 올리고 입에 물었다.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어 실패했다. 하는 수 없이 오래된 창고 안을 뒤져 공구함에서 더러워진 성냥을 찾았다. 담뱃불이 붙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성냥을 흔들어 남은 불을 껐다. 창고의 전면을 활짝 연 채 시체 옆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네가 죽였냐?’
산에 올라오기 직전 최우광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구김살 없이 소리 내어 웃었다. 벌어진 입가로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새하얗게 질려가는 얼굴이 어찌나 웃기던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한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날 믿지 못하는 걸 보면 신우건이 최우광에게 했던 경고가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저 아니에요.’
최우광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왜, 내가 사람까지 죽이는 밑바닥이 아니어서 다행이니?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차분한 얼굴로 충동을 대신했다.
‘익사했어요.’
몇 주 전, 나는 건설사로 위장한 깡패 집단에서 마약 유통의 증거를 모으기 위한 잠복 임무를 마치고 휴가를 떠났다가 탐정사무소로 들어온 급한 의뢰를 받고 복귀했다. 수뢰후부정처사죄―공무원이 수뢰 및 부정행위를 한 죄―로 붙잡히기 직전의 국회의원이 거액의 돈을 주고 위협인을 제거해 달라고 의뢰했는데, 그런 그가 나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병원이었다. 의원은 나를 만나자마자 우는 소리를 했다. 뇌물을 받아놓고 입을 닦았다가 칼을 맞았다며 안 그래도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마당에 자신을 죽이지 못해 이를 가는 깡패들까지 감당해야 하는 게 부당하다고 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일갈하고 싶었지만 일단 사무소로 돌아와 최우광에게 의견을 물었다. 최우광은 인상을 쓰고 버럭버럭 화를 냈다.
‘우리가 무슨 범법행위 집단인 줄 알아!’
‘직접 처리할 수는 없지만, 정보를 흘려서 자기들끼리 부딪히게 만들 수는 있어요.’
‘무슨 소리냐?’
‘제가 업장 카운터로 잠복했던 건설사 있죠. 조사해 보니까 위협인이 그 건설사의 반대 세력이더라고요. 그러니까 그의 약점을 건설사에 흘려 보는 게 어떤가요. 마침 건설사에서 쌓은 친분이 남아돌거든요.’
‘말이 건설사지 그놈들도 똑같은 깡패잖아. 자신들에게 득이 되는 정보를 그냥 넘길 리 없겠지. 알아서 지지고 볶고 닭대가리처럼 싸울 게 뻔하군.’
‘게다가 명확한 표적이에요.’
‘한동안은 의원이라는 놈에게 쏟을 정신이 없을 거라는 얘기지. 하지만 그놈이 죽기라도 하면? 그건 용납할 수 없어. 목숨은 목숨이다.’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설득에는 며칠이 걸렸다. 처음에는 이야기도 꺼내지 말라던 최우광은 내 계획을 반복적으로 듣더니 끝내 대꾸하지 않았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자신은 책임지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라는 허락. 나는 곧장 조사에 착수했다. 국회의원을 위협한 깡패의 약점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실 약점이라기보다는 빌미에 가까웠다. 깡패라는 족속들은 의리라면 죽고 못 살기 때문에 누군가 그들 조직의 구역이나 사람을 건드리면 갚아주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 깡패가 건설사를 건드렸다는 증거를 찾아 건설사 조직원에게 내용을 넘겼다. 건설사가 깡패에게 보복할 수 있는 빌미를 준 것이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점은 신우건이 속한 <한국>의 기자 김창석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의 연줄인 의원에게 떠벌렸다는 것이다. 의원이 내게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전화를 걸었을 때 간과하지 말았어야 했다. 깡패가 병원에 있던 의원을 습격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처가 빨랐다. 사전에 고용한 경호원에 의해 구출된 의원은 담요를 두르고 벌벌 떨다가 실토했다.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면서 내 정체를 깡패에게 불었다고. 게다가 그 말이 진짜라는 각서까지 썼다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깡패는 살기 위해 나와 건설사의 조직원을 배신자로 싸잡을 것이다. 더 이상 그곳 소속이 아닌 나는 그렇다고 쳐도, 그 조직원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배신자의 죽음은 건설사에서 잠복하면서 수도 없이 봐왔다. 익사(溺死)였다.
해안 마을에 장례조차 치르지 못할 시체를 땅에라도 묻어 달라며 넘긴 이후, 내가 죽게 만든 그 시체는 어째선지 양지바른 무덤이 아닌 멀리 떨어진 강에서 발견됐다.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최우광은 신우건이 이 사건을 맡았다고 했다.
‘연고 없는 시체 사건이란다.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아주….’
‘그 사람 제정신이 아니네요. 아직도 자기 선배가 죽은 일로 플래시백을 겪잖아요. 깡패라면 치를 떨 거예요.’
‘재산도 없고 가족도 없으니 알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건 너지. 고의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이 죽었어. 연관됐다는 거 들켜서 이번에야말로 연 끊기 싫으면 이 사건은 쳐다보지도 마.’
‘연을 끊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 사람이 괴로워하는 건 싫어요. 오죽하면 원미정 씨가 신우건이 요즘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을 하겠어요. 받고 있던 심리 상담이 PTSD 치료로 전환됐는데도 트라우마에 직면하지 못하고 나 때문에 상담을 받는 거라고 했어요. 그게 문제였던 거예요.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다 자길 억압할 핑계를 준 나 때문에….’
‘그만. 더는 못 들어주겠어. 정신 차리고 찬물로 세수하고 와. 네 잘못이 아니야. 알잖아. 이렇게 하자. 원미정이랑 신우건, 요즘 김창석인지 뭔지를 사건팀에서 내보내려고 한다더라. 김창석 뒤를 봐주는 그 국회의원이 자발적으로 김창석을 버리게 만들 거래. 신우건이 맡은 사건, 사람이 죽은 사건이야. 거기 연루된 김창석은 김창석 나름대로 불안해서 자기가 신우건 사건 맡으려고 할 거고, 김창석이 그 사건을 파고 다니면 의원 입장에서는 김창석한테 누명을 씌우려고 할 거다. 원미정한테 부탁해서 신우건 사건 김창석한테 넘기라고 해. 그러면 네 절절한 사랑은 깡패랑 안 엮여서 좋고, 넌 나름대로 일 마무리할 수 있어서 좋고, 원미정은 김창석 쫓아낼 수 있어서 좋고. 그치?’
그래, 더해서 신우건을 환기시키는 데도 좋을 것 같았다. 김창석의 사건을 이용한다면. 최우광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대암산 사건 어디까지 진행됐어요?”
“이거 봐라. 살아났네. 그건 왜. 완전 끝물이야. 이틀 전에 안해빈 찾았대. 범행 도구는 조각칼이고. DNA 결과 기다리는 중이라는데. 알고 보니 자기 아버지한테 사주를 받은 건 아니라더라. 그 조각칼이 원래 안해빈한테 소중한 물건이라더군. 용의자가 안해빈의 친부라는 사실이 증명되고 안해빈이 아버지를 보호하려고 했다는 증언을 한다고 가정하면, 친족 특례법 덕분에 처벌은 면할 수 있을 거다.”
“그거 아직 터뜨리지 말아요. 그 사람이 직접 찾게 해 주죠. 정이 많으니 안해빈의 사연을 들으면 안타까워할 거고, 그 심성에 경찰한테 안해빈을 못 찾았다고 하진 않을 거고, 극적으로 처벌을 면한다고 하면 기뻐하겠네요.”
“너 지금…. 아니, 똑똑한 놈이 그걸 속겠냐?”
“속을 것 같아요. 그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잘만 하면 그 사람 상태도 분명 나아질 거예요. 그렇게 하게 해 줘요.”
신우건은 등대에 기댄 남자를 쉽게 찾아냈다. 가까운 방파제 위로 파도가 쳤다. 검은 바다에 끌려들어간 바닷물의 소용돌이가 돌의 잔해를 삼키고, 수면에 부딪힌 고기잡이배의 불빛이 어떤 영광처럼 반짝였다. 남자는 등대를 벗 삼아 작은 조각칼로 나무를 깎고 있었는데, 인기척에도 신우건을 돌아보지 않았다. 신우건도 구태여 말을 걸지 않고 그냥 성인이 된 지 오 년도 채 되지 않은 게 한눈에 보이는 어린 남자의 옆에 앉았다. 고개를 숙인 남자는 조각에 열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세하게 떨리는 손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신우건은 남자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뜬 조각이 거의 완성될 무렵이었다. 신우건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신우건이 완전히 자리를 뜨기 전에 조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요.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세요?”
신우건이 대답했다.
“신이 나를 돕는 줄 알았는데, 널 보니까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서.”
그는 등대만을 위한 길을 따라 안해빈으로부터 멀어졌다. 신우건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등대에 어른거리던 남은 사람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대신에 물결치는 바다의 표면에 작은 기포가 올라오다가 그마저도 멎었다.
안해빈은 조각예술계의 기대주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들기 전까진 그랬다. 경찰이 찾은 증거물은 전문가용 삼각도였는데, 안해빈이 조각에 빠졌을 때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한 도구 제작자가 시그니처 문양까지 새겨 만든 고급 조각칼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범행을 돕기 위해 증거물을 훔쳤다는 변호사의 주장과는 다르게 안해빈은 자신의 물건이 범행에 사용됐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알게 됐다. 그의 인생을 시사하라면 남는 게 범행 도구로 전락한 조각칼뿐이라서, 단지 빼앗기지 않으려고 도망친 것이었다. 경찰은 범행 도구를 찾기 이전에 안해빈이 피의자의 아들이라는 것부터 밝혀내야 했다. 피의자가 안해빈을 향한 명목상 지원의 출처를 알 수 없도록 그 경로를 배배 꼬았으며 혹여 조각가 안해빈이 아닌 아들 안해빈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날까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부인은 피의자가 안해빈을 아들로 인정하는 녹음본을 제출했다. 세 번째 부인과 피의자의 대화를 녹음한 것이었다. 첫 번째 부인이 세 번째 부인을 설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안해빈과 함께 도망쳤던 피의자의 두 번째 부인이 안해빈의 친모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안해빈의 친모는 대암산에 버려진 네 번째 부인이었다. 그 모녀는 아버지를 제외한 안해빈의 유일한 핏줄이었는데 죽어버렸다. 이로써 안해빈은 하나뿐인 보호자에게 23 년간 방치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