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2023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우수상
감정선(感情線)
국어국문학전공
20181008 김경회
[1장. 병든 소년]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해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그들의 눈에선 초록색, 아니 그보다 더 영롱한 에메랄드빛의 선이 나와 목사와 목사 뒤에 걸려있는 십자가 모형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
‘에메랄드 빛믿음, 선망, 기대 등이 섞여있는 감정들’
나는 그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다. 공감하고 싶어도 그렇지 못한다. 내가 독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내가 느낄 수 없다. 그 감정을 그저 있는 그대로 분석하고 이해할 뿐. 사실 이해라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학습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해야하나.
나는 알렉시티미아(Alexithymia).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뇌의 편도체 라는 부분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내 첫 기억은 엄마의 손을 잡고 간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 엄마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해주고 있었고 엄마는 혹여나 내가 들을까 내 귀를 막고 심각한 표정으로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의사의 설명이 마치고 엄마의 눈을 마주본 순간 엄마의 눈으로부터 나는 보라색, 분홍색, 노란색, 의 선이 나에게 향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손으로 집으려 하는 순간 무엇인가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두려움, 미안함, 애정’
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특별한 능력이 있다. 바로 사람들의 감정이 선의 형태로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은 그 사람의 눈을 마주보면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보인다. 만약 그 감정이 무엇인지 보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 선을 만지려고 노력하거나 아니면 나도 그 선을 따라 시선을 집중하면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엄마는 나에게 수많은 감정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감정은 본래 서로 나누며 ‘교감’이라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지만 나는 해당되지 않았다. 엄마는 처음에는 본인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나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다.
“도원아 엄마는 너를 너무 사랑해. 엄마 눈에서 나오는 색은 무슨 색이야?”
“빨간색, 노란색하고 중간에 파란색 점 같은 것도 보여요”
감정은 속일 수 없다. 누군가를 ‘완전히’ 사랑한적 있는가? 그 사람에게 100% 사랑의 감정만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다.
사람들이 색을 통해 느껴지는 이미지들이 감정의 색이 되어 선으로 나타난다. 밝은 계열은 사랑과 평화, 존중과 배려 이타주의적인 마음, 정의 등 긍정적이라고 생각되는 감정들. 어두운 계열은 짜증, 우울, 좌절,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처럼 말이다.
엄마의 감정에서 나는 파란색을 보았다. 나를 향한 사랑의 감정 속에 무엇인가 부정적인 파란색이 섞여있다. 나를 사랑하지만 나를 키우며 희생되었던 자기만의 시간, 커리어 삶이 그 원인일까 아니면 나를 보면 엄마를 버리고 떠난 아빠가 생각나서 그런걸까. 엄마가 말해주지 않는 한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엄마는 우리 도원이를 100% 진심으로 사랑해”
라고 말했다. 정말 100%로 보인다면 더 좋았을텐데. 내게 보인 0.1% 파란색은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2장.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감정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다양한 감정이 공존하는 세계, 참으로 알록달록 할 것 같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짙은 회색. 공허함과 먼지 쌓인 책장을 연상케 하는 색이다. 사회에 나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선 회색의 빛이 주를 이룬다. 그들의 감정을 내가 모두 알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색의 눈을 가지고 살아간다. 14살 소년이 겪은 사회의 첫인상이었다.
감정선(내가 보이는 것들을 감정 선으로 부르기로 정의했다)은 누군가에게 연결 될 때 선의 형태로 나타난다. 대화를 하거나 교감을 할땐 선으로 나타나지만 아무와도 교감하고 있지 않거나 혼자만의 감정에 빠져있을 땐 그 눈에 머물러있는 빛의 형태로 나타난다. 고요한 회색의 눈빛. 그저 아무생각이 없거나, 혹은 누구와도 교감하지 못할 때 회색빛의 눈이 나타난다.
‘도시의 불빛들이 사람들의 감정을 빼앗아 간 것만 같다.’
사연은 감정을 보다 세밀하게 학습할 수 있게 도와준다. 사람들은 각자마다의 사연을 지니고 살아간다. 사연을 많이 겪은 사람의 눈은 검은색에 가까운 빛을 낸다. 색의 삼원색처럼. 감정들이 섞이면 섞일수록 검은 빛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감정선은 삼원색의 법칙을 따르는 듯 하다)
언젠가 한번 노숙자와 대화를 할 일이 생겼다. 대학교 전공수업 과제로 현재 소외받고 있는 계층의 고충과 그들이 생겨난 원인을 분석하고 있었다. 지하철역을 누비며 많은 노숙자들의 눈빛을 보았다. 삶의 의지를 잃은 회색빛의 눈. 술에 취해 현실을 도피하고 싶지만 그렇게 될 수 없음을 끝없이 되뇌이는 이의 짙은 황갈색의 눈빛. 한쪽에는 차가운 푸른색의 눈, 한쪽에는 누구라도 잡아먹을 듯한 맹수의 눈같이 붉게 타오르는 눈을 한 주변을 살피며 극도로 경계하는 눈도 있었다. 서로 반대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 중에 내가 처음 본 ‘암흑에 가까운 검은색’의 눈을 한 이가 있었다.
검은색이라니. 흥미로웠다. 무슨 사연을 저렇게 깊게 가지고 있었는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검은색의 눈.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말을 걸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노숙자는 경계하는 표정도 없었고, 그저 자신의 낡은 기타만을 끌어안고 노래할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좋은 치료자 그의 눈이 머무는 곳은 내 슬픔과 고통...”
노숙자는 신에 대해서 노래하는 듯했다. 찬송가.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라고 알고 있다.
“혹시 다른 노래도 불러줄 수 있습니까?”
나는 그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과제 때문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기타 가방 안에 만원을 넣었다.
“내 노래를 듣고 싶은 것입니까?”
“노래 가사가 좋아서요.”
“교회를 다니시는 분이신가요?”
“교회는 안다닙니다. 그냥 노래가 좋아서 더 들어보고 싶네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도 교회도 안다니고 신을 믿진 않지만 그저 신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그의 눈에 집중했다. 암흑에 가까운 검은 눈. 노래를 부를수록 그의 눈에 가시 넝쿨 같이 얽힌 검은 빛이 흔들리며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했다. 그에게 나오는 검은 빛의 선은 기타의 선율을 따라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채도도 명도도 낮아서 검은색처럼 보였지만 피같이 검은 검붉은색, 남색에 가까운 보라색, 자줏빛 점들... 그리고...’
유일하게 밝은 초록색의 작은 불빛. 노숙자의 감정 선의 끝은 반딧불이 처럼 그 꼬리는 희미한 초록색으로 빛났고 그것은 사람이 아닌 하늘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신기한 광경이다. 이자는 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고 있는걸까. 그의 감정 선을 보지 않아도 귀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이 생각될 정도로 깊은 애환, 사별의 아픔이 담긴 짙은 붉은색과 배신과 실패의 고통으로 얻은 남색 베이스의 짙은 청록색. 그리고 괴로움을 끝내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에메랄드 빛 초록색’
신은 어떤 존재인가.
신이 이 세상을 만들고, 사람들을 만들었다면. 그의 피조물 중 하나가 이렇게 고통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진 피조물의 절규를 신은 듣고 있는가
많은 감정에 휩싸여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된다. 나는 감정을 느끼지 않기에 신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고통을 몰랐다.
[3장. 눈을 뜨고]
내가 어쩌다가 사회복지사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어머니는 내가 수학과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복지사도 엄연히 돈을 받고 일하는 직업이다. 따라서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된다. 어쩌면 감정을 섞지 않는 것이 효율적인 도움과 관계를 정리하는데 있어서는 더욱 도움이 될테니 말이다. 정해진 규범 이상으로, 이하로 일을 하게 되어서도 안 된다. 딱 정해진 만큼만.
근데 저 친구는 그게 잘 안되나 보다.
“제가 도와 드릴게요 할머니~”
“아니 시간도 끝났는데 어서가~ 아르바이트 있다며”
“여기서 별로 안 멀어서 금방 가요~ 아직 여유 있으니까 조금만 더 있다갈게요 제가 있고싶어서 그런거에요”
양아린. 노인복지관으로 같이 실습을 나오게 된 같은 과 학생이다.
‘할머니의 눈에 비춰진 초록색과 노란색의 조화. 그리고 약간의 보라색.’
보라색은 참으로 신비한 색이다. 보라색 선을 볼때면 항상 흥미로워 진다. 파란색과 빨간색의 중간지점. 채도가 낮아지면 검은색에 가까워지고 채도가 높아지면 분홍색에 가까워지는 오묘한 색. 본래 뚜렷한 색이 보이지 않던 할머니의 눈에선 조화로운 색들이 채워져 나가고 있었다. 감정이 전해진다는 것은 이런 것 일까. 그리고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검은색 눈동자. 그뿐.’
소녀의 눈에는 아무런 색의 빛도, 선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사람의 눈이다. 평범한 사람의 눈을 본적이 있던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런 빛도 선도 보이지 않는 그런 눈을 가졌다. 대체 이건 무엇일까. 소녀의 평범함은 나에게는 특별함으로 다가왔다.
“저기...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아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알고 있는데도 물었다. 대화를 좀 더 이어나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린이요. 양 아린.”
“아 네. 같이 실습 나왔는데 이름도 모르고 지낸 것 같아서요. 저는 강도원입니다.”
“알고 있어요 도원님. 실습명단 나왔을 때 확인했는데, 그리고 학번 보니까 저보다 선배이신 것 같더라구요”
“제가 2년정도 빠르긴 합니다.”
“아 저 아르바이트 시간에 늦어가지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음주에 뵐게요!”
여전히 아무 선도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눴겠지. 상대방의 감정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나와 다르게.
감정 선이 보이는 것의 장점중 하나는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설령 선한 목적으로 거짓말을 한다고 있다고 한들, 내게 보이는 것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초조함과 불안함의 감정만 내비칠 뿐이다. 거짓말의 유무. 그것이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길이며 이는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할 수 없으니 진정 무슨 의미로 말한 것일까 늘 고민하며 정답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오랜만에 그런 속박에서 자유로워진 순간이었다. 짧은 대화 속 나는 아무런 감정도 분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말의 속뜻을 생각해보는 고민의 순간이 없었다.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이 편안한 순간. 눈을 감을 때 외에는 느낄 수 없던 시간을 눈을 뜨고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때, 나는 새로운 것을 보았다.
[4장. 죄의 형벌]
편안하고 싶었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지각 할 수 있는 것)은 불쾌한 것과 그저 그런 것. 나름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이정도 인 듯 싶었다.
“감정이 없으면 무서운 게 하나도 없는건가? 밤길을 혼자 걸어도 아무렇지도 않은거에요?”
“편도체를 제거한 쥐와 같죠. 더 이상 천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언젠가 심리학수업을 들었던 때가 있었다. 뇌의 편도체를 제거하거나 손상을 입히면 불쾌함, 두려움 등을 느끼지 못하고 공격적이게 변하게 된다고 한다. 쥐의 편도체를 제거하면 고양이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쥐가 먼저 고양이를 공격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두려운 것이 없는가?
생각보다 쉽게 답할 문제는 아니다. 나는 ‘불쾌함’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하기 싫은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겪었을 때 많은 것이 불편해졌다. 더 이상 나의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사라졌다. 죽음은 불편하다. 하지만 두려운 것은 아닌 듯 하다.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면 동공이 확장되고, 근육이 수축되어 긴장상태를 유지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부터 벗어날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 할 때 내 몸은 이런 상태를 유지하진 않는다.
“그럼 귀신도 안 무섭겠네요?”
“무섭진 않아요. 근데 귀신을 만나는 건 만족스러운 일도 아니에요”
나는 귀신을 보았다. 가위를 눌릴 때면 나는 귀신을 본다. 가위를 눌리는 것이 나에겐 그저 ‘불쾌한’ 일이다. 몸을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없고 근육은 긴장되어 불편해진다. 그때마다 검은 형체가 나에게 다가온다. 나를 두렵게 만들려는 것일까? 그러고 싶었다. 꿈에서나마 신체적 작용이 아닌 두려움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고통이 뭔지 안다면 행복이 뭔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고통도 없다는 뜻이다.(육체적 고통은 느낀다. 나도 병에 걸리거나 다치면 몸이 아프다) 그리고 감정적인 행복도 느끼지 못한다.
“귀신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래요. 신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거죠.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해 때로는 유혹을 하기도 하고, 신과는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반대로 신과 가까워지면 귀신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나는 어떤 존재와 가까운걸까’
내가 종교를 믿으면 신은 나를 보호해 주는 것인가? 조건부 거래 같은 것일까. 신에게는 무슨 이득이 길래 그러는 것일까? 노숙자는 신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귀신을 피하고 싶은 이유는 아니었지만, 그냥 신이라는 존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행복을 몰랐다.
[5장. 세상 죄를 짊어가는]
신은 인간을 찾아온다. 눈에 띄지 않고, 왔다 간 것조차 모를 정도로 의식할 수 없게 아무도 모르게 다녀간다. 어떤 형태로든 신은 일생 중에 한번씩 찾아와 그 삶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한다.
아린은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 신자라고 한다. 아린과는 실습을 다니며 꽤 가까워 졌다고 생각한다.(그냥 만나는 시간이 늘었다) 아린과 함께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교회에서 나눠준 전단지를 받았고 그것을 아린은 나에게 건네주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라고 한다. 법을 어긴적이 없는데 죄인이라니. 그 이유를 물으니 오래전에 한 사람이 지은 죄가 우리에게 대물림 되었고, 신을 모르고 살아가면서 알지 못하는 죄를 짓게 된다고 한다. 죄없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아린씨는 구원받았나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죄가 있어서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건 죄가 있기 때문인가요?”
“만약에 제가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죄를 많이 지으면 행복을 느낄 수 없게 되는 건가요?”
“지옥에 가는 거죠. 아니면 이미 지옥에 살고 있거나. 행복하지 않은 삶을 이어 간다는게 지옥이지 않을까요?”
마치 그 노숙자처럼 말이다.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가지고 그것을 끝없이 느끼며 살아가는 삶. 이 고통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마치 죄수가 자신의 형벌을 끝나는 날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것을 바랄 수도 있는 것이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삶은 지옥과도 같다. 지옥은 형벌을 받는 곳이다. 그렇다면 나 또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해방될 날조차 모르고 가장 가혹한 무기징역의 형벌을.
“나도 가지고 싶어요. 구원 받았다는 느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죄가 너무 많아서, 모든 사람들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거래요. 자신은 죄가 없었으니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질 수 있는 거죠. 원래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분이 이 세상에 직접 내려 온 거죠.”
내가 지은 죄가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죄로 인해 나는 자유롭지 못함을 알고 있다. 수많은 감정 선들은 나를 옭아매고 있는 구속일 뿐이었다.
예수에 대해서 배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와서 많은 기적을 행했다. 병자를 고치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했다. 그들의 병은 그들의 죄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한다. 본인이 지은 죄 일수도, 아니면 그전부터 내려오는 죄일 수도 있는 죄.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가져가셨다.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기에 죄의 구속을 받는 사람들의 구속을 대신 가져갈 수 있었다.
성경책에서 본 글 귀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나는 자유로워 지고 싶었다.
[6장. 속죄의 어린양]
언젠가부터 주말에 아린이 다니는 교회에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가보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아린은 나를 교회로 데려갔다. 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긴 어려웠다. 그래도 전보단 잘 알 수 있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누가복음 22장 42절]
예수라는 사람도 죽음을 앞두고 몹시 두려워했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바꿔달라 하면서도 자기 뜻대로 하지 말라고 빌고 있다. 본인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부정하고 싶은 마음. 감정을 거스르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타내고 있다.
예수는 죄가 없었기에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형을 당했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하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숭고한 목적을 이뤘다.
아린은 내게 많은 것을 배우게 해주었다. 구원에 대해서. 혹시 나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내 삶이 변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평일에는 현장실습. 주말에는 교회. 아린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내가 생각을 멈춰도 되는 유일한 시간. 아린과 대화하고 있으면 아린의 감정이 무엇일까 궁금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아린은 내 감정이 어떠한지 묻지 않았다.
“저 할아버지는 아린씨가 오는 걸 싫어하네요. 올 때마다 화만내고”
“모든 사람이 저를 좋아할 순 없죠. 설령 내가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뭐 신경 안써요”
“누가 나를 싫어하고, 불쾌해 하는게 싫지 않은 건가요?”
“싫으니까. 신경 안써요. 저 할아버지는 저를 싫어해도 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거든요. 언젠간 알겠죠 저 분도. 자신이 도움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걸”
아린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본인의 감정에만 집중할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아린은 고통 받지 않는 법을 알았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모르고 살면 그만이었다. 아린은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삶.
나는 고통을 몰랐고, 행복도 몰랐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연연했다. 정답만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삶. 남을 배려해야 함을 ‘학습’했기에 그것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삶. 알아 버렸기에 구속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감정을 알기에 감정으로부터 구속 받는 삶과 감정을 모르기에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아린씨는 오늘 기분이 어떤가요?”
“그냥 좀 피곤하고 힘드네요. 그래도 할 건 해야지 하는 마음.”
누군가의 기분을 묻는 일은 처음이었다. 물을 필요 없었다. 궁금해 하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우울하고 힘들다고 말하는 아린의 표정은 말한 그대로의 감정이 담겨있는 듯 하다. 사람의 표정을 관찰하는 일도 처음이었다. 관찰할 필요가 없었다.
“힘들면 그만 두면 되지 않나요?”
“남을 돕는다는 것, 희생이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고 생각보다 많이 힘든 일이긴 해도. 그 힘든 것보다 내가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고, 그것을 이뤘을 때의 성취감 때문에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일을 통해 나는 더욱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거니까”
가치있는 사람은 무엇일까. 그렇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걸까? 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게 하는 사람이 된다면? 행복한 사람은 그 행복을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는 듯하다. 감정 선이 연결되어 전달되는 것처럼. 아린이라면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콰앙-
말을 이어가고 싶었다. 마음속으로 아린의 행복이 내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빌고 있었다. 신이 이 바램을 들었던 것일까.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아린의 행복을 내게 주었고 내 형벌을 아린이 가져가게 두었다.
‘빛이 보인다.’
잠시 온 세상이 하얗게 보였다가 서서히 시야가 돌아오는 듯 하다. 찰나의 순간 아린이 나를 감쌌고 그 온기가 내게 전달되고 있다. 아린의 피가 나를 적시고 있다. 그렇게 나는 눈을 뜨고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
뭐라 말을 하는 듯하며 여러 사람들이 한 사람에게 몰려들고 있다. 제대로 들리진 않지만 그 주인공은 이제 운명을 다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조차 의식이 흐려지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편안함을 느꼈다.
[7장. 구원]
나는 이번 일을 통해 내가 의문을 품고 있던 문제의 답을 찾았다. 장례식을 찾아간 나의 기분이 이상했다. 성취감이 들었지만 불쾌했다. 내가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하던 문제의 답을 찾았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고통을 안다는 건 행복을 느낄 수 도 있다는 것. 이것은 사실이었다.
검은 옷의 사람들. 그들 눈의 눈물이 보인다. 아린을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 눈물은 얼굴을 타고 흘러 땅으로 떨어진다. 투명한 색의 물방울. 그들의 눈에 슬픔이 보인다.
아린은 본인의 사고를 직감 했었을까?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받아들인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단순한 신경작용으로 인한 몸의 떨림이라기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춥지 않았다. 가위에 눌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약간 덥다고 느껴진다. 시야는 잠시 흐려졌다. 완전히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나의 볼에 온기를 느꼈다. 볼을 따라 미끄러지며 그 온기를 점점 잃어갔고 내 손에 떨어졌을 땐 차가운 물방울이 되어있었다.
‘슬픔과 기쁨’
내겐 아무 색도 보이지 않았다.
.
.
.
죄 없는 사람이 죄인의 죗값을 대신 치를 수 있다. 자유로운 사람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의 구속을 가져갈 수 있다.
신은 인간을 찾아온다. 눈에 띄지 않고, 왔다 간 것조차 모를 정도로 의식할 수 없게 아무도 모르게 다녀간다. 어떤 형태로든 신은 일생 중에 한번 씩 찾아와 그 삶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한다.
십자가가 보인다. 저 십자가는 아린이 짊어지고 갔다. 나의 형벌을 끝내주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해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