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문예창작공모전 비평 당선작
2023 문예창작공모전 비평 당선작
우수상
American Dream, American Nightmare
‘Flower Killing Moon’
인문학부
20231036 박선호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4년 만에 영화를 개봉했다. 이 감독이 눈에 보이면 바로 생각나는 거의 고정된 설정이 생각난다. 디카프리오, 갱스터, 아메리칸 드림 등 마틴 감독의 영화 배경과 연출을 담당하는 주된 요소들이다. 좋으나 나쁜 모순 덩어리들을 잘 꼬집고 보듬는 느낌을 기대했다. <플라워 킬링 문>. 또한 너무나 반갑게도 감독의 페르소나인 로버트 드 니로와 디카프리오가 한 개의 포스터에서 등장하니 작품성의 기대치를 올렸다.
사람들은 누구나 소망을 가진다. 목표가 없지만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면, 목표가 생성된다 란 삶의 교훈과도 같은 것도 존재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려는, 이루려는 것을 두고 완전함을 느끼기 위해, ‘이상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나 또한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면, 생각하는 충족감을 바라며, 이상적으로 화면을 바라보게 된다. 근데 과연 영화를 보는 관람객들은 감상 그 자체로 자신의 ‘이상’을 채우는가? 영화가 끝나면 본인은 소위 말하는 회로를 돌린다. 내용이 나의 머리를 안정시키면 돌릴 필요가 없어진다. 허나 충족시키지 못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난 스스로 날 만족시켜야 한다. 영화를 이끌고 담당하는 감독을 비난하는 것은 말 그대로 비난이지 비판도 아닌 소용없는 짓이다. 고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해석’을 시작한다.
해석이라는 것은 무조건 제쳐야 할 관문은 아니다. 관객들 중 대다수는 영화의 이미지와 감독의 화려한 복귀, 부활 등 여러 면에서 자신들을 위로할 것이다. 허나 자신이 복잡함을 느낀다면 해석을 강행한다. <플라워 킬링 문>은 미국의 실제 지역과 인물을 소재로 두고 제작된 실화 바탕의 영화다. 고로 나의 해석엔 배경지식이 필요했다. 허나 모든 실화 바탕의 영화나 다큐 영화들은 배경지식을 알고 보면 좋은 영화가 있고, 모르고 보면 더 좋은 영화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알고 보면 뻔하다는 얘기다. 연출이 그것의 공백을 채우고 관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마틴 감독은 연출과 선곡을 넘어 깨달음을 준다.
<플라워 킬링 문> 시놉시스를 보면 ‘20세기 초 석유로 갑작스럽게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된 오세이지 부족 원주민들에게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 서술되어 있다. 문장 하나가 나에게 시련을 준다. 19~20세기 미국인들의 염원, 아메리칸 드림과 미국 원주민, 석유. 여러 소재가 나에게 흥미와 어려움을 가지고 온다. 알 사람은 이번에도 마틴 감독이 작가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갱스 오브 뉴욕>과같이 미국인들 간의 괴리감이 영화를 두르는가? <좋은 친구들>과같이 갱스터 느낌이 드는 폭력적이고 사실적인 영화인가? 이 의문들은 부정적 견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 보내는 시선을 어떻게 표현해냈는지에 대한 궁금증일 뿐이다.
19세기 초 미국 오클라호마주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오세이지족’이 거주했다. 그곳엔 갑자기 석유가 솟아 나왔다. 사람들은 그 검은 액체를 맞으며 기뻐했고, 벼락부자가 된다. 그 결과 전국의 투자자, 사업가, 채무가 등 백인, 흑인 세력이 돈을 만지려 오세이지족에 다가간다. <플라워 킬링 문>은 이러한 환경에 처했던 부족과 그것에 뱀과 같이 접근하여 이득을 취하는 등장인물들을 대조하고 부각시킨다.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어니스트 버크하트’,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윌리엄 킹 헤일’은 그 당시 이득을 취하려 벌인 행각을 사실적으로, 치졸하게 표현한다.
이 둘은 이 영화의 뼈대가 된 ‘오세이지족 연쇄살인 사건’의 주동세력이며, 백인 세력의 중심이며, 위기와 절정이다. 앞에 서술한 ‘알고 보면 뻔하다’ 란 말은 바로 이 사건 때문이다. 배경지식이 전무한 관객들은 어니스트와 윌리엄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습한 관객과 달랐을 거다. 이들이 단순한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성을 따랐을 것이며, 자본주의의 평범한 결과이며, 당시 백인들의 폭력에 알맞다 란 평가가 주를 이룬다. 정답이다. 허나 마틴 감독은 단순하게 선과 악의 구도를 표현하는 감독이 아니다. 원주민과 다르게 자연의 섭리를 따르지 않고 몰상식한 면을 보여주는 백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미국을 느끼기 위해, ‘이상’을 가지기 위해,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선택했다. 마틴 감독은 이전 작품들과 같이 한 소재의 어두운 면을 꼬집는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살인 사건은 치밀하게 계획된다. 오세이지족의 어쩔 수 없는 후견인 등용, 백인에게 승인받는 행위가 그 이유다. 죽이면, 상속이 되고, 돈을 만질 수 있었던 윌리엄과 어니스트다. 이러한 부조리는, 마치 세상이 보여주는 부조리와 모순 같다. 아닌 척하며 꽃들을 짓밟는 현대 사회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역설적인 면모가 형상화되는 듯하다. 이때가 마틴 감독의 신념과 영화에 담은 속뜻을 알게 된 시점이다.
영화 관객들이 ‘이상’을 채우듯이, 20세기 미국인들도 이상을 꿈꿨다. 거대한 번영과 행복을 가지고 올 아메리칸 드림이 미국인들을 매료했다.
허나 아메리칸 드림은 욕심 많은 자들에겐 의미가 변질된다. 단결과 만인이 행복이 아닌, 그저 이용 수단이다. 미국은 신분, 인종, 권력 등 여러 격차로 인해 차별과 혐오가 판치던 사회라 표현해도 무방했다. 이는 아메리칸 드림이 없는 자에겐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있는 자에겐 끼쳤다는 말에 신뢰를 준다.
<플라워 킬링 문>에도 미국의 꿈을 꾸며 오일머니를 향해 달려간 사람들이 묘사된다. 그 꿈을 위해 사람들은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취한다. 그중 하나였던 어니스트는 내적 갈등을 수많게 하게 된다. 지폐와 석유로 이루어진 꿈인가, 사랑인가. 둘 다 어니스트에겐 달콤했다. 윌리엄, 자신의 삼촌과 자행한 살인들은 자신을 견고히 했고, 다른 사람은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었다. 허나 자신의 아내는 돈벌이로 바라보지 않았다. 허나 그런 생각은 논리에 성립하지 않았다. 오세이지족은 이미 자신의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틴 감독은 묵직하고 복잡한 아메리칸 드림을 표현하였지만, 동시에 묵직한 미국의 악몽,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를 그려내었다. 미국인엔 오세이지족도 포함됐고, 그들도 행복함을 분명 누렸었다. 허나 영화는 그 행복함을 길게 관객들에게 보여주진 않는다. 세계에서 똑같은 레퍼토리로 인종 박해와 개인,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을 날리고 꼬집는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오세이지족이 받은 절망적인 일과같이 각국에선 여전히 배려와 고려가 선행되지 않은 움직임이 나타난다. 작중에선 어니스트와 윌리엄의 시점이 아메리칸 드림의 잘못된 이상향을 표현한다면, 오세이지족 원주민들의 시점은 아메리칸 나이트메어의 사실주의적인 면모를 바라본다. 마틴 감독이 이 시점을 교차하고 복잡하게 된 어니스트와 아내의 관계, 이성을 표현하며 중반부에서 후반부까지 내적 심리를 폭발하게 만들어준다.
‘악몽’은 현실에 형상화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어니스트가 후반에 자신의 사촌이 벌인 행각을 폭로하는 것은 백인의 주체적인 입장의 허점과 폭력에 대한 반성으로 하여금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아내 완 달리 백인의 이득과 자금을 위해 수없이 죽어나간 원주민들에 대한 서술과 주체적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 스크린에 보이는 결말의 대상은 어니스트를 포함한 백인이지 원주민이 아니었다.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는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허나 원주민들이 겪은 아픔과 그 실상은 관객들에게 각인된다. 영화의 마지막엔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윌리엄과 어니스트의 행보와 북을 치며 원형으로 춤을 추는 원주민들이 그려진다. 시각적으론 두 가지가 보이지만, 청각적으론 백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치 아메리칸 드림은 현실로 이루어지려는 듯 하나,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는 보이지 않는 특징으로 하여금 추상적인 느낌만 전달하는 것 같아 보인다.
최종적으론 마틴 스코세이지는 이렇게 대립된 영화 속 소재와 사회를 빗대어 미국을 넘어 현대 사회의 문제를 묻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러 지구적 문제를 마주쳐도 미국 사회는 현재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다. 사람들은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며 나름대로 노력한다. 하지만 그 속엔 여러 가지 의미의 ‘원주민’들이 존재한다. 어니스트의 흥망성쇠와 같이 그 원주민들을 자각한 사람들은 흥하고 망하는 길을 걷게 된다. 마틴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그려내는 찌질하고 각박한 미국인들이 20세기가 아니어도 현대 사회에서 꽤 보인다. <플라워 킬링 문>의 긴 러닝타임이 가진 영화의 특색은 일반적인 영화의 특징이 다가갈 수 없는 듯하다.
마지막에 본인이 생각하게 된 또다른 생각은 인간의 본성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초기를 보면 미국인들은 철학, 도덕적 사상을 바탕으로 자유를 꿈꿨다고 한다. 인간은 긍정적인 꿈을 꿀 때, 여러 사회를 뒷받침할 수 있는 소재를 자동으로 생각해내게 된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신대륙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다. 허나 <플라워 킬링 문>은 그 기대가 모두 돈에서 흘러나온 것이란 의미를 보낸다. 작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묘사가 많이 되는 것은 어니스트의 사고와 고민이다. 그가 생각한 꿈은 자신, 곧 미국 백인의 인간성에 침해되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으로서 이 지역으로 발을 들인 것에 대해 크나큰 행복과 이성을 안겨줄 것이었는가?
위에 서술한 것과 같이 세계는 꿈을 꾸게 해주지만, 악몽도 준다. 꽃이 짓밟혀 죽듯이, 피해를 받는 쪽은 떠오르지 못하고, 이성적인 생각이 막히게 되어 자신이 꿈은 추상적인 대상으로만 해석된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디카프리오와 로버트의 명연기를 통해 세상에 질문을 던진다. 현대 사회는 무슨 꿈을 꾸는지를 말이다. 활기차게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꿈’인가? 찝찝하게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악몽인가? 그 대답을 생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