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2023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우수상
서정사(抒情思)
심리학과
20202141 조석환
이 이야기는 픽-숀으로 실재하는 사건, 사고, 인지, 인물, 언어와의 어떠한 상사의 일치함은 필시 자연의 이치요. 허나 실상은 더욱이 혹사요.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고 한다면, 내가 죽었을 때 올라오는 엔딩-크레디트에 신세를 진 사람들의 이름의 수가 많을지, 다른 사람들의 엔딩-크레디트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횟수가 많을지 나는 궁금하오. 이 둘 중 어느 영화가 나에게 더 큰 쾌락을 선사할지도 궁금하오. 더 이상 밀려 떨어질 곳조차 잃어버린 낙오자요. 정말이지 실로 유쾌하지 않을 수가 없소. 이런 때에 대기만성이라는 핑계로 낙오를 합리화하는 자위가 유쾌하오. 그렇기에 나는 글을 쓸 줄 모르오. 그저 글과 감성을 훔치는 것 밖에 모를 뿐이오. 그렇기에 나는 와해 된 언어를 끼우고, 기워서 망상을 글로 조각할 뿐이오. 그렇기에 나는 중앙선을 따라 달리는 당신들의 감성을 찬양하오리다.
나의 스승은 이리 고하였소. 굳-바이. 그것은 어떤 이모숀(뇌에서 느끼는 호르몬 같은 생리학적인 현상인지, 가슴속 심장 아래 공방에서 제조되는 감각인지, 아니면 순전히 말뿐만인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방관자 당신들의 몫이오.).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과 환경에 의해 채워지는 그 이모숀을 나는 괴로워하고 있소. 나는 아프고 아파야 나의 이모숀이 나오고, 내가 우울(당신들과는 결이 다른 우울이오. 당신들의 우울은 감기 같은 것이라면, 나의 우울은 마치 신병과도 같소.)하여 내 자신을 혐오하고, 내 정신을 자해할 때에 비로소 이모숀을 진열대에 마냥 늘어놓을 수가 있소. 그리고 그럴듯한 글자를 훔쳐 모아 어여쁘게 포장을 하오. 굳-바이.
각자의 사상이 맞닿아 생긴 분쟁지대 속에서 살아가는 당신들은 보시오. 나를 보시오. 그리고 위안을 얻어 가시오. 될 수 있거든 무리라는 것을 나에게 버리시오. 그것은 당신들이 짊어져도 되는 것이 아니 되는 것이오. 구원자라 일컬어지는 자가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를 짊어진 것처럼, 그대들의 무리를 내가 짊어지겠소. 이 세상의 그릇이 비약적인 나의 세계를 다 담지 못하니 내가 그리하는 것이 맞는 도리가 아닌가 싶소.
눈을 떴다. 정확히는 눈이 뜨였다. 죽지 못했던 아침이 방조죄를 피하려는 듯 나를 깨웠다. 만유인력에 이끌려 사과가 떨어지듯이 나의 허파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호흡을 한다. 그저 그뿐이다. 어떠한 목표나 사명감 그런 것 없이 꽃이 스스로 피고 지는 이유를 모른 채 피고 지는 것처럼 숨을 쉬고 또 숨을 쉬어지고 있다. 이리저리 말에 치이며 움직이는 것이 그나마 있는 나의 활동이다. 오히려 마-네킨 이나 괴뢰가 나보다 가치 있게 활동을 한다. 시간에 떠밀려 허무와 공허도 남지 않은 육신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또 한 번의 실패가 이어졌다. 이런 실패들의 하루가 선으로 연장되어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를 수년간하고 또 실험도 수없이 했지만 그 연구는 늘 실패였다. 이러한 실패에 너무나 물려 영원히 잠과 꿈속으로 망명하고 싶다. 국경도 비자도 없을진대 왜 그리 가기 힘든 것인지 영문을 도통 모르겠다. 한탄을 자아내고 있는 동안 매-너리즘이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일상이 통곡의 벽보다 못 한 비루한 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켜 최소한의 양치와 세수를 하고 늘 걸려있던 옷으로 환태를 하고 나왔다. 내 방을 무단 점거한 햇빛과 달리 바깥의 하늘은 너무나 눈부셔서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밖으로 나가기를 꺼렸다. 문 턱에 서서 나갈까 돌아갈까 이길까 지고말까 올라갈까 내려갈까 살고말까 죽고말까와 같은 흑백양면의 단순 사고 고민의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은 그런 갈등보다는 저 햇빛이 밝혀주는 맑은 하늘이 싫었고 기억 저편에서 앵-커가를 내려 그 시간에 정박한 공기의 냄새가 싫었다. 정확히는 점점 나를 무너뜨리고 나를 잃게 하는 시간의 감각에 지쳤고 지쳐버린 얼굴을 거리의 쇼-오 윈-도에 진열해 스와-잎를 하는 나날들에 지쳐버렸다. 하다 못 해 날이 안개로 자욱했으면 한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 속에서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물방울들을 들숨에 들이켜 마셔 나의 비강과 기도 그리고 폐포의 끝자락까지 적셔 내 뇌 속을 세척해주었으면 한다. 가습기를 틀어 온 세상을 잠기게 한 것이 아닌 오늘 같은 날은 그저 온전히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완벽한 온도와 습도 꿉꿉함과 라-벤더 향이 섞인 내 방의 퀴퀴함 속에서 갇혀 캄캄한 어둠의 요람에 안기고 어떤 원리로 작용을 하는지 이미 모든 것을 알아버려 꽉 들어 찬 내 머리로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작은 환단을 삼켜 육신에 밀어 넣고 내 망상체의 어떤 한 기능을 강화해 다른 기능들을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리고 깨어나면 날이 15센티 정도의 쇠붙이에게 팔을 내어주고 해발고도 약 45센티 정도의 높이에 매달려 경치를 감상하고 중력 가속도 9.8에게 자유낙하운동을 사과에게서 배워 겨우 도달 할 수 있는 최종적인 자기귀결을 결심하고 또 결심해 육신이 아닌 정신과 내면 그리고 저주받은 감정에게 자해의 쾌락을 탐미하고 싶을 뿐이다. 아침이 나에게 그랬듯이, 일상도 나의 쾌락을 방관하지 못하는지 밖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완강히 거부를 하고 싶었지만 딱 그 마음만 들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신세를 한탄조차 못하는 겁쟁이가 된지 이미 오래다.
나의 리비-도우와 타나토쓰가 외줄 타기를 하며 상사상애를 한지 강산이 두어 번 바뀌고 달이 지구가 태양을 감싸 안는 것을 몇 번째 관음 하는 것을 샛별이 또 몇 번째 관음을 했을 적. 나는 이 사이에서 일찍이 나태도 느껴서 나태해진 권태를 느낀지라 그저 무엇이 되었든 내가 나를 잃어버려 끝을 내든 허락받지 못 한 죽음을 탐하여 끝을 내든 아니면 나의 뇌내 기능이 정지되어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든 어떻게든 삶을 오래 쉬고 싶지만 그와 동시에 또 어떻게든 삶을 이어 가보려는 이중적이고 서로 상충하는 무언가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보이지 않는 어떤 힘인지 원리인지 이치인지 모르지만) 하나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면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다른 톱니바퀴처럼 그저 액정 화면 속에 있는 유희의 즐길 수 있는 역할처럼 자주성 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주어진 섭리를 행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무의식 속 깊이 새겼기 때문에 그저 그런 마음만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생각에 또 꼬리를 물어 이 생각을 하는 것이 내 자유의지 인지 아니면 짜여진 무언가의 일부인지를 분석을 할 수도 있지만 귀찮고 피곤해서 이 산파를 그만두기로 했다(산파가 되었든 나의 생명유지를 포기하든 말든 굴레에 의해 조종을 당하든 무엇 하나 끝나야만 하는 것은 확실하다.). 거리에 나왔기에 나는 마-아스크를 쓰고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사람들의 시선에 표상되어 맺힌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저 햇빛이 원망스럽고 싫어서다. 가야 할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가기 싫다는 불평불만을 속으로 토하는 매일 치르는 통과의례를 끝낸 후에 발걸음을 옮겼다. 수백 수천만 원의 값어치가 실로 있는지도 모르는 지식을 사고 팔고 내 시간과 몸으로 돈을 사는 시계태엽과 같은 하루의 직선이다. 이레에 두어 번 정도는 지식을 사지도 내 시간과 몸으로 돈을 사지 않는 날이 있다. 이런 날에는 방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방탕함을 음미할 때도 있고, 나의 몽중으로 떠나 도피와 몽롱함을 탐닉하기도 한다. 이 것만의 유일한 삶의 낙이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날들 만큼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의 도원향으로 떠나기 전에는 항상 눈앞에 자꾸만 뭔가 지나간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하다. 아아 이것이 흔히들 부르는 주마등 필름인가 보다. 요람에게 세를 얻었을 때 보았던 하늘의 모오빌이라던가 나의 성장을 끝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지켜봐 주었던 유희거리들 언젠가 즐거웠었던 감각을 담아준 학교 운동장의 흙 내음과 공기라던가 그런 나의 지나가버린 파편들이 담겨있는 그런 필름인가 보다. 내 두개골 속 영사실에 있는 해마체 영사기에 주마등 필름을 끼워 넣어 눈꺼풀로 암막과 스크리-인을 만들어 천천히 영사기를 돌렸다. 철이 없었기에 활력이 넘쳤었고 모르는 것이 많았기에 웃는 날이 많았으며 책임감이 적었기에 아름다웠다. 찰나에 불과한 한 때였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끝을 모르는 영겁의 행복 즐거움 같이 표현하기 어려운 좋은 감정이다. 나에게도 언젠가 목표라는 것이 있었다. 그 목표를 위한 과정들이 힘들었지만 보람찬 고생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삶이라는 것을 모았다. 그 것들을 한데 모아 엮어 배를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그러한 행위에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을 위해 상처를 입고 입히고 했지만 행복한 흉이 들었다. 텅 비어버린 지금의 나에게는 사치 그 이상의 허영심으로 더 이상은 가지지 못하는 심상에 그친다. 한 때가 한 때인지라 그 한 때를 그리워하며 반추로 곱씹을 수밖에 없다. 반추로 곱씹을 수밖에 없는지라 나는 문득 심술이 났다. 너무나도 심술이나 만인에게 걷어 차여버린 월요일 속에서 좌향좌에서 오른쪽을 보고 싶었고 여우들에게 사냥당하는 사냥개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또 단 하루의 어제를 위해 수 많은 내일들과 바꾸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싶었고 그리고 나에게 맞물려있는 톱니바퀴들에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기 싫다고 고하고 싶었다. 이 심술을 폐와 폐 사이와 횡격막 사이의 공간에 한껏 모아 한숨으로 내쉬었다. 이 한숨이 아달린과 같은 작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한숨은 바다에 빗방울 하나가 떨어져 옅어지듯이 하늘 위로 퍼져나갔다. 나의 한숨을 풀어헤친 텅빈 저 하늘이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불평을 할 수 가없었다. 불평을 할 여력은 나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 내던져진 일개 소시민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비겁한 자위를 한다. 이러는 사이에 하루가 물었다. 정말이지 나태하기 짝이 없는 하루였다. 나의 유일한 안식처인 관 짝에 돌아와 나에게 가장 생산적인 일과인 반추에 대한 반추를 할 준비를 했다. 이 일과를 하는데 무엇인가 틀어놓고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늘은 탁상 위에서 시간의 티끌에게 봉쇄 당한 텔레비죤을 깨웠다. 그러고서 그 어떤 의미나 내용을 전달받지 아니하고 반추에 내 스스로를 걸어 잠그었다. 그렇게 마지막 일과를 하는 도중 텔레비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낭만을 가득 채워주던 오래된 에-쓰에프 영화의 소리였다. 그 영화는 여러 행성과 은하를 배경으로 한 영화였다. 우주를 날아다니는 군선과 같은 첨단 기술이 있는데도 광선 입자로 이루어진 냉병기를 버리지 않고 싸우는 그런 영화였다. 정의와 악의라는 시시콜콜하고 뻔하디 뻔한 그런 이유로 주인공과 그들의 무리 악당과 그들의 무리가 서로 싸우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결말은 악당이 주인공의 모친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죽음으로 끝난다. 이 클래씩-컬한 영화는 어렸던 나에게 우주의 배경 각 행성들 마다 다른 모습들 내 짧은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은하와 행성 사이를 순식간에 이동하는 군선들이 과학자와 천문학자라는 꿈을 탁란 했다. 그렇게 탁란 된 꿈은 부화하는 듯했으나 현실의 둥지에게 거부되어 곤계란으로 변했다. 문드러진 꿈은 삶아 곪아진 껍데기로 남아 문신 같은 아물지 않는 흉터가 되어 사라졌다. 이 흉터를 씹어 볼 때마다 에-쓰에프 영화에서 주인공의 모친이 주인공에게 패배했을 때의 심정을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어른이 되어서야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준비조차 되지 않았는데 시간은 어느새 나에게 어른의 관을 씌웠기에 그 무게에 짓눌려 무엇도 되지 못한 어른이 되었다. 누군가가 이런 나를 표상해보라고 일컫는다면 크레이-욘 한 가지 색(검은색이던, 흰색이던 색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다.)으로 칠하기는 하겠다만 내 전부를 칠하지는 못 할 것이다. 칠하지 못한 여백조차도 내가 맞지만 나의 자유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칠해진 부분도 또한 내 자유의지로 어찌하지 못한다. 분명 전부 나이지만 내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자아는 파도에 떠밀려 괭이갈매기 떼에게 쪼여 먹히거나 마지막 남은 오얏나무와 대추나무로 지어진 간이역의 대합실의 난로 앞에서 그 어디로도 가지 못 하는 사치를 누리지도 못 한다. 그렇기에 수정되지 못하는 마음의 버어-그를 인두로 삼아 그 무엇도 가지지도 못한 길 잃은 사회의 방랑자라는 낙인을 스스로 찍어냈다. 이 세계에 사소한 저항도 되지 못 하는 나의 수식을 내가 실행하고 세계에 의미 없는 결과값을 도출한다. 나에게 목줄을 채우는 이 세상의 수식을 내가 실행당해 나에게 낙인뿐인 결과값을 도출한다. 수식을 실행하고 결과값을 내고 또 수식을 실행하고 처형하는 반복의 먹이사슬이 늘어진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나와 이 차원의 꼬리잡기는 권태롭지만 약간은 즐겁기에 그만두기를 쉽사리 할 수가 없었다. 내 뇌 속의 뇌가 과부화에 걸려 쉬이 피로해져서 인지 텔리비죤의 음성이 점차 쇠해지면서 나의 마지막 일과를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르는 채 도원향으로 도달해 있었다.
몸이 찌뿌둥해 일어났다(정확히는 온 몸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시끄러워서 일어났다).지금의 시간이 언제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지는 않지만 숫자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이 미안해서 지금의 때를 확인했다. 나를 위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히 뭔가를 할 정도로 적당한 때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은 작일과 달리 수동적인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작야의 반추 덕분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해 평소와 같은 인지기능을 할 수 있는 콘디-숀이 수동적인 생산적 활동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조금 좋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전두골과 두정골에 내 주먹만 한 구멍을 뚫어 두개골 속을 환기시키거나 두개골 뚜껑을 열어 내 뇌를 반죽마냥 주무르거나 냉동고에 넣어둔 얼린 쇠 주걱으로 저어서 상쾌한 반죽을 하고 싶었다. 이곳에서는 당연히 할 수 없으니 언젠가 도원향에서 하기로 미뤘다. 할 수 있는 것은 산보 말고는 결정지와 선택권이 없기에 산보를 하기로 했다. 호수가 복부를 강타하여 파열된 듯한 공원으로 나왔다. 태양이 조을적에 나와서인지 무릇 경치가 낯을 가리는 것 같았다. 낯을 가리는 경치에 문득 반항이 하고 싶어서 공원에 비대칭적인 위치에 돌기처럼 난 분수대를 향했다.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갓 순이 돋아난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내외들이 있었고 바람에 홀씨를 날려 줄기와 잎만 남은 내외들도 있었고 이제 막 저마다의 인생을 물들이기 시작한 연인들도 퍽 있었다. 각각의 한쪽에는 이들의 가벼운 여흥과 추억을 위해 공연을 하는 예술인들도 있었다. 이리저리 거닐고 있는 사이 공연을 준비하는 한 예술인의 앞에 멈춰서 그이의 공연을 기다렸다. 얼핏 듣기로는 그이가 마술 공연을 한다고 했다. 이 풍문이 바람 따라 떠돌아다녔는지 사람들이 모여 극장 못 지 않는 무대가 잉태되어 태어났다. 이때를 기다린 건지 그저 때가 된 건지 모르지만 그이는 공연을 시작했다. 시작이 시작인지라 몸풀기 같이 가볍고 소소한 마술로 아직 낭만을 지키고 있는 아이들에게 소소한 즐거움과 추억거리를 선물해 주었다. 찌들어진 나도 이미 떠나가 버린 아이였을 적의 마음을 흉내 내며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 참 예술가가 자신의 재능으로 유희를 불어넣어 줄 무렵 그이는 마지막이라며 탈출 마술을 선보인다고 선언했다. 관객들 중에서 건장한 청년 두 명(당연한 사실이지만 모두가 이 공연에서 처음 보는 물고기와 나무였다.)에게 상체를 결박하는 구속복을 입혀 달라고 하여 인형 옷 갈아입는 놀이처럼 입었고 대략 열 척 정도 길이의 쇠사슬에 자신에게 감아 달라 하여 묶였다(사실은 이때부터 꽁꽁 묶인 듯한 눈속임이 들어간 것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물쇠는 숟가락을 얹듯이 마지막에 잠겼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하는 완전 봉쇄였다. 적당히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과 함께 첫 탈출을 시도했으나 역시나 계획한 의도와 연출대로 실패를 한 척하고 관객의 호응과 동정을 사기 위해 묶인 채로 공연을 마무리하는 척을 했다. 그러자 관중에게서 한 번 더라는 메아리가 그이의 계략대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이는 큰 감명과 응원을 받은 듯한 기세로 진짜 탈출을 하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 근처의 중등학교를 마쳤고 자기네 동창들은 배움의 장으로 나가 사회인이 되고 또 가정을 꾸렸다는 이야기로 지금 현재 그이의 모습과 대비되게 살짝의 연출을 했다. 그러나 그이는 남들이 그럴 때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다른 곳에서도 공연을 하고 또 지금 여기서 공연을 한다는 끌리-쉐에를 보였다. 지금의 보여주고 있는 유희는 무료가 아니다. 그저 동냥을 얻기 위한 서사와 익살을 녹여내 호소를 이어갔다. 자신은 비록 제대로 된 무대가 아닌 공원의 변두리에서 공연을 하지만 이런 거리에서 하는 공연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이 거리에서 살아가고 바람 따라 떠도는 사람이라는 마지막 동냥을 구한 후 극적인 연출로 탈출해 공연을 마쳤다. 공연이 끝난 후 모두가 분업을 맡은 듯 떠날 사람은 떠나고 그이에게 동냥을 하는 사람을 동냥을 주고 떠났다. 그 동냥에는 그이가 불쌍하고 생계가 어려울 것 같아서라는 동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에게 즐거운 추억과 유희를 선사해 준 응당한 값과 그이가 호소한 꿈에 감응했기에 자신의 몫까지 이루었으면 하는 욕심의 조각을 양도하는 값으로 치렀을 것이다.
나 또한 그이에게 동냥을 주고 싶었지만 등을 돌려 떠났다. 내가 동냥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이의 꿈과 재능을 모독하고 싶지 않았고, 그를 비롯한 다른 예술인들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알량한 금전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미 잃어버린(어쩌면 나는 빼앗겨서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이가 걸어가는 길을 잘 알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응원과 격려가 그것뿐이었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에 그것을 폄하하지 않기 위한 내 나름의 성의 표시다.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며 동냥을 하지 않으려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게 아니냐라고 나무랄 수 있겠지만은 나는 그런 손가락질 따위에 할애할 신경은 없다. 그 또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리라. 호수의 일렁이는 물결의 표면이 월광에 홀려 명창이 되어있었다. 나는 나보다 앞서 떠나간 사람들의 뒷모습을 병풍 삼아 나 또한 자리를 떴다. 이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저 잠을 깨우기 위한 코호-피 한 잔인 걸까? 아니면 한낱 술주정뱅이의 천일야화인 걸까? 저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또 예술가 양반인 그이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만일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쉽사리 대답을 못 하거니와 명확한 답안을 찾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대한 이치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조조한 것에 지날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거대하지만 담지 못하는 그릇이 우리가 지각하지 못 하는 무언가의 선의나 악의로 설립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와 같은 고리타분하고 귀찮고 권태로운 고찰을 해야 하고 또 하이데거나 샤르트르 카뮈는 희대의 광대가 되어 찬합의 맨 아래 칸에서 나에게 주저를 부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같잖은 주저에 저주에 걸려 고찰에 대한 반추를 하고 또 반추에 대한 고찰을 하며 지도의 암실에 갇혀 진실로 귀찮음과 권태에 빠져 니힐리즘의 교주의 옆에서 시중을 들게 될 것이다. 반추와 고찰이 유일한 호오르몬 자극제이지만 이런 식으로 오염된 자극제로 내 호오르몬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없다고 비웃음을 당하면 비웃음 당한 채로 살아지면 그만이고 부족하다고 비난을 받으면 비난받은 채로 내 의지 따위 상관없는 듯 돌아가는 원심력에 나를 맡겨 반영구적으로 가속시키면 그만이다. 성층권의 마천루에서부터 나선으로 빙빙 돌아 떨어져 대류권을 부유해 대륙권에 흐르는 야기가 전신주의 하품을 신호등의 숨소리를 정류장 표지판의 선잠을 사뿐히 즈려밟은 탓에 나의 뇌수가 가히 물리학적인 저항을 버티지 못해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무릎 연골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대퇴이두근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복사근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기립근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견갑근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두판상근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후두근과 전두근이 점점 무거워졌다. 점점 무거워질수록 날개가 펼쳐져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엄중히 다가왔다. 하지만 내 다리는 중력을 이겨 낼 만큼의 양력을 낼 수가 없었기에 날기 위해서는 녹슨 고가도로(육교가 가장 완벽한 낙하운동을 할 수 있지만 어느새인가 육교는 도주해 버려 남은 곳이 없었다.)의 범 무늬 연석 위에서 낙하운동을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짧은 한탄을 하자면 어울리는 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미쓰코시 경성점의 금붕어를 보지 못 하고 옥상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에 소시민답게 무기력해진 채로 터덜터덜 밀물에 밀려 둥지로 돌아왔다. 그리 기력을 소진할 만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피로가 역하게 올라왔다. 지금이라도 당장 쓰러질 듯한 기시감이 나를 포옹해 줬고 경계선 성격장애를 앓는 화학구조 결정체들이 묘혈에 핀 동백꽃의 아찔한 향기마저도 졸도시킬 만큼의 낙을 나에게 감히 허락을 하는 듯한 환상통을 주는 기분이었다. 암흑물질 덕분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아 억울한 광자가 가정용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산실에 끌어당겨져 누웠다. 혼미하고 자몽하여 선의 경계 구분이 어려워졌다. 현관 앞에 청송을 흉내 내는 생강나무의 가지에 곧 사라질 내 날숨 하나를 망상의 실로 엮어 주술적 의미가 담긴 결계를 치듯이 금줄을 쳤다.
나의 감각과 지각을 있는 내 평행선을 살아가는 바리공주에게 담보로 내주어 도원향과 내 방의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무엇이 무엇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핑핑 돌듯이 어질어질 했다. 이만큼 유쾌함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외줄 위를 처음으로 떨어지지 않고 뛰어다녔을 때의 성취감을 맛 본 어린광대가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축포를 쏘아 올릴 필요가 있다. 가볍게 생각으로 중얼거렸는데 길을 잃은 미아의 손을 잡아 그 아해의 보호자를 찾는 것 마냥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손에 화화가 쥐어져 있었고 축포를 찾는 내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일천구백구십 칠 개의 축포 중 육백 이십 칠 개만이 축포를 올릴 화약이 장전되어 있었고 그 중에 이십 육 개의 축포만이 각혈과 토혈을 기염 없이 내뿜어 비로소 화약은 하늘의 별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마을 반대편에서 별똥별이라 착각하는 순수한 소녀가 기적을 기도 할 무렵에 화약은 언제나 항상 빛내는 우주의 야광별을 부러워했고 또 야광별은 흙에서 올라 사람들의 안자를 훔치는 화약을 시샘하는 것을 끝나기를 기다렸고 언쟁 하나 없이 조용히 끝났다. 별을 보고 온 화약은 다시 흙으로 돌아와 순간의 온기를 나에게 나누어 주었다. 재가 되어버린 화약이 쌓이고 쌓여 그동안의 내가 가진 모든 죄를 덮어 소실하려는 계략에 맞추어 진정 내가 존재해야 하는 곳을 향해 참회를 행하면 되는건가 싶었지만 기부 받은 온기는 나 발끝에서부터 기어 올라와 내 정수리까지 정복한 것에 만족을 못 했는지 수만 번 오르락내리락 했다. 따뜻함이 더움으로 변질 되었고 더움이 뜨거움으로 변질 되었다. 내 손에 똬리를 틀었던 화화가 시뻘건 속내를 드러내 본 모습인 화마가 되어 온전히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실내에서 화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줄 알았지만 현관 앞에서 화마가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우아한 모습을 품평하며 관람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넋과 혼을 뺏겨 시간의 존재를 망각한 채로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어디서인가 익숙한 새벽 세시의 라장조 멜-로디가 들려왔다. 멜-로디가 점점 선명히 들리면서 화마에게 넋을 뺏긴 사람들이 많아졌고 군중 사이로 요란한 불빛을 내며 진압꾼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고도비만이 된 불을 본 진압꾼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며 당신네끼리 무어라 말을 했다. 지금 이 광경이 나는 퍽 즐거웠다. 마치 겨우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이 풍경이 파-르스 같았다. 조명과 음악과 여흥거리가 완벽하게 삼박자를 이루었다. 실소의 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려 할 때 즈음 뒤에서 양쪽 팔을 꽈악 붙잡혔다. 잡힌 팔의 통증이 내가 화마의 식도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음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나는 화마를 잡으려는 진압꾼들에게 필사적으로 외쳤다. 제발 저 불을 자유롭게 풀어 주라고 말이다. 저 불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의미다. 그러니 부디 나를 죽이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나의 절규는 사각형 안의 사각형 안의 사각형 속 건축무한육면각체에 갇혀 전해지지 못했고 그렇게 산화되어 사라졌다. 나의 모든 것이 방전되어 검은 연기에 올라탔다. 나는 맥없이 맨땅 위에 무릎을 처박아 내렸다. 난생 처음으로 찾은 내 삶의 의미였다. 그 불꽃이 누군가에게는 재앙과 같은 화재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앞으로 나아가게 앞길을 밝혀 주는 화톳불이었다. 머릿속에 화마가 남긴 새까만 매연이 들이쳤다. 내 체온과 똑닮은 선혈이 내 관자놀이에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측면안와해골에 직경 2할 1푼 8리 정도 되는 구멍이 생긴 기분도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통증은 안 느껴졌지만 싸늘하게 식은 주검의 체온과 같은 온도가 손 끝에서 전해졌다. 총성은 파-르스 같은 풍경의 소리에 묻혀 들렸는지 안들렸는지 모른다. 또한 내 뼈에 구멍을 낸 송곳이나 총이나 총알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구멍으로 내 머릿속에 가득찬 검은 매연이 한데에 한 점으로 응축되어 빠져 나가고 있다. 나의 모든 힘이 한 점으로 빠져 나가는 그런 쾌락은 확실히 아니다. 내가 처음으로 찾은 나의 단칸방 서사시가 기록도 되지 못 한 채 사라지고 있다. 이렇게 또 다시 나는 허무병 중증 말기 환자에서 벗어나질 못 했다.
나의 허무병은 내가 가진 초능력 같은 감정의 능력에서 발병했다. 내가 예민한 것인지 감정 공감의 대역폭이 단파 라디오의 주파수 못지 않게 큰 탓인지 모르지만 나는 감정의 공명이 쉽게 되는 능력이 있다. 누군가의 작은 실소에도 크나 큰 희극을 본 것 마냥 크게 웃기도 했고, 타인의 작은 슬픔에 나에게 일어난 것 마냥 몇 날 며칠이고 눈물을 멈추지 않은 적도 있었다. 감정을 묘사할 뿐인 글자에도 내가 직접 겪은 것처럼 느꼈다. 살아있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축복처럼 느껴졌었다. 감정의 공명 덕분에 이야기에 몰입해 최대한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겪지 못 한 일들을 내가 직접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허나 그 축복은 마루 밑에 숨겨진 주인 잃은 고무신 한쪽과 같이 속죄와 천벌 같은 저주가 숨어있었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에는 유용했다. 사람과의 관계를 끊을 때에는 유용했다. 혼자 돌아설 때에는 감정의 가시나무가 자라 나에게 넝쿨을 뻗어 나갔다. 아픔에 시달려 울고 웃은 미래가 되지 못 한 밤들이 파편으로 조각난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나의 일상에 침투해 곳곳이 스며들었고 각질이 쌓인 나의 감정은 곪아졌지만 딱지가 생기지는 않았다. 아파하는 것에 이제는 지쳤기에 억지로 무감각해지고 감정을 외면하기로 했다. 그렇게 점점 나는 감정이 비어져 허무가 채워졌다. 그렇게 나의 허무병은 시작되었다. 허무병의 치료법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고 고치고 싶은 의지나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이 또한 나이기에 내가 안고 가야 하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숙명보다는 쌍둥이같이 나에게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피로하다. 조금 더 내 허무병에 대한 고찰을 하고 싶지만 이제는 기운이 없다. 암막이 내려진다. 내 아버지 고향 마당에 있는 밤나무가 보고 싶어졌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고향에 있는 온천에 내 육신을 널어두고 싶어졌다. 빠져나간 검은 매연이 요람이 되어 나를 잠식하는 움직임에 나의 정신을 온전히 맡겼다. 평소보다 격식을 차린 교과서 속 문호가 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어럼풋이 동백 내음이 만개한다. 이것이 나에게 허락되지 못한 죽음이라는 것이라면 아쉬움 하나 없이 파묻힐 것이다. 달콤하다. 그 무엇과도 감히 견줄 수 없는(굳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선악과일 것이다.) 달콤함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어 지금 이 순간이 멈췄으면 한다. 그렇게 나는 심연의 늪에 스스로 빠져들어갔다.
눈을 떴다. 정확히는 눈이 뜨였다. 죽지 못했던 아침이 방조죄를 피하려는 듯 나를 깨웠다. 만유인력에 이끌려 사과가 떨어지듯이 나의 허파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호흡을 한다. 그저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