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2023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장려상
미스 리(Miss lee)
국어국문학전공
20221080 이혜은
이세진은 남편 한영호와 딸 한수현이 집을 비운 사이, 평소처럼 집안일을 했다. 세 시간 전, 아침을 먹지 않으면 몸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로 밥을 먹인 후 한수현을 학교 보내는 데 성공했지만, 싱크대와 식탁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세진은 그것을 치우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들였고, 시계를 보니 한수현이 곧 학교 수업을 마치고 태권도장에 간다며 연락할 시간이었다.
이세진은 짧게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한수현의 전화가 아니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지만, 눈에 익은 숫자들이라 문자의 발신인이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현욱. 이세진의 아빠였다. 10년 전 걸려온 전화가 이현욱에게서 온 마지막 연락이었다. 이세진은 이현욱과의 전화를 마치고, 그 후로 이현욱의 안부를 물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10년만에 온 메시지의 내용은 부엌 전구를 갈아 끼우다가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다는 것이었다. 이세진은 이현욱이 다쳤다는 문자를 보고 울지 않았다. 단순히 울음만 터트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이세진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세진은 어떤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리듯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한수현이 태권도장에 가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세진은 한수현의 방으로 들어가 종이 한 장과 펜을 가지고 식탁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빠에게.
아빠.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이세진은 쓰다 말고 잠시 고민했다. 형식상 안부를 묻는 일이 이현욱과 자신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세진은 우리 사이에 무슨 안부를 물어, 하면서 쥐고 있던 펜으로 적었던 문장을 까맣게 칠했다.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세진은 자꾸만 튀어나올 것 같은 무언가를 누르듯 숨을 크게 들이켜고, 다시 적기 시작했다.
아빠. 잘 지내셨어요? 아빠가 보내주었던 태권도장에는 ‘대한 태권도 협회’ 글자를 크게 수놓은 깃발이 있었어요. 그 깃발을 중심으로 친구들과 두 팔을 벌려 대형을 맞추고, 도장 왼쪽에 있던 태극기 쪽으로 몸을 틀어서 항상 하는 말이 있었는데. 혹시 아빠가 그것을 기억할 지 모르겠어요. 이 얘기를 하다 보니 제가 그 문장을 사범님의 도움 없이, 친구들의 귓속말 없이 소리칠 수 있던 날 아빠에게 가서 종일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라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 문장을 오랜만에 떠올리니, 무언가 기억날 듯하면서도 막상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아서 답답해요. 아빠는 혹시 기억할까요? 끊지 않고 한번에 말하고 싶어서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고, 그걸 아끼듯 숨을 조심스럽게 내뱉던 어린 날의 저를. 저의 긴 문장 끝에 아빠가 어떤 말을 해 줬었는지, 혹시 그것도 기억할까요?
제가 도복을 벗던 날. 그러니까 학원을 가기 위해 갈아 입은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또 입겠지, 하면서 엄마가 그 도복을 깨끗하게 빨았던 날. 때 하나 묻지 않은 하얀 도복이 말끔하게 접혀 서랍 속으로 들어가던 날. 저는 도복을 다시 꺼내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울지 않았어요. 대충 우리 집 사정 같은 건 알고 있었거든요.
사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몸집보다 컸던 가방이 덩치에 딱 맞게 되었고, 그 가방 크기가 제 등보다 조금 작아졌을 때까지도 저는 사범님과 관장님 눈치를 봤어요. 태권도장을 초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부터 3학년 때까지 다녔는데, 2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가방이 순식간에 작아진 것을 보면 저는 아빠를 닮았나 봐요. 아빠를 닮아 키가 금방 자랐던 것 같아요.
어쨌든 저는 관장님, 사범님이랑 친해서 자주 휴게실 문턱을 넘어다니며 들락거리곤 했어요. 그날은 관장님이 얼른 나가서 피구 게임을 준비하라길래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관장님 손에 떠밀려 나갔고요. 생각해 보면 관장님이 제 앞에서 업무 관련해서 전화를 받으실 때가 꽤 있었는데, 그럴 때는 잠깐 웃어보이며 입가에 검지 손가락 하나를 대고 소파에 앉아 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2분 좀 안 되는 시간을 기다리면, 관장님이 애들 몰래 저에게 바나나 우유를 주곤 했는데. 그걸 먹다 친구들한테 걸려서 관장님이 한동안 애 좀 먹었죠. 관장님은 저를 되게 아끼셨던 것 같아요.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쵸, 아빠? 그런데 왜 그날은 저를 내보내셨던 걸까요.
관장님이 전화 중인 사무실 안에서는 제 이름이 언뜻 들렸어요. 문에 귀를 대고 전화를 엿들으려는 순간, 사범님이 전 시간에 쓰던 겨루기 헤드를 치우며 저를 자꾸만 불렀어요. 관장님의 입에서 계속해서 발음되는 제 이름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처럼. 저는 아직도 사범님이 제가 그 통화 내용을 못 듣게 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아빠. 아빠가 저에게 태권도 이야기를 처음 꺼낸 날, 아빠가 그랬잖아요. 운동하면서 너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그래야 우리 가족을 보호하는 멋진 어른이 된다고.
다시 이세진의 휴대전화가 짧게, 이번에는 두 번 진동했다. 이세진은 연락 하나는 한수현의 것이리라 확신했다.
엄ㅁㅏ. 나 지금 태권도 왓어요.
태권도장에 도착했다는 한수현의 연락이었다. 이세진은 오타가 난무하는 문자 메시지를 보면서 옅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세진은 다치지 말고 재미있게 운동하고 오라는 문자를 보내고 난 후, 남은 메시지 하나를 확인했다. 어떤 텍스트도 없이 사진 한 장이 도착해 있었다. 이세진의 어렸을 적 사진. 이현욱이 보낸 것이었다. 이세진은 말없이 사진을 들여다 보다가, 어느새인지 식탁 모서리 쪽으로 굴러가고 있는 펜을 발견하고 팔을 뻗어 낚아챘다.
생각해 보면 아빠를 닮아서 키가 금방 컸던 저는 먹기도 많이 먹었던 것 같아요. 지금 저는 편지를 쓰다가 사진 하나를 보고 있는데, 빠진 앞니의 빈자리를 드러내면서 환히 웃고 있는 제 사진이에요. 응, 아빠가 보내준 사진이요. 아마 사진은 초등학교 입학식 날 찍은 것 같아요. 저는 또래 친구들보다 볼과 턱에 살이 올라 있었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서 울면서 집에 돌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어요. 아마도 아빠는 친구들이 저를 놀리면서 한 대 때리기라도 할 때에는 태권도의 맛을 보여주라는 의미로 저에게 하얀 도복을 선물해 준 것이겠죠. 그런데, 아빠. 아빠는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를 외치지 않아서 가정을 지키지 못한 걸까요?
제 사진이지만, 보고 있으니 엄마가 왜 제가 먹고 싶다는 것은 다 사 주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아마 좋아하는 걸 먹고서는 이 사진보다 훨씬 밝게 웃었을 거니까. 엄마는 제가 손가락으로 문방구를 가리키면 다른 손을 마주 잡고 안으로 들어갔어요. 문을 밀며 나올 때는 먹고 싶다고 했던 것들이 검정 비닐 봉투에 담겨 제 손목에 걸려 있었고요.
하루는, 평소처럼 문방구에 들렀다가 태권도장에 가는 길에 회색 차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어요. 엄마는 위험하게 우리 앞에 정차하는 차주에게 화를 내려다, 익숙한 번호판과 운전석에 있는 사람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어요. 아빠는 창문을 내려 고개를 내밀고, 저를 ‘미스 리’ 하고 불렀죠. 아빠는 왜 저를 미스 리라고 불렀어요? 얼마 안 돼서 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 ‘미스’에 대해 배웠어요. 결혼 안 한 여자를 뜻하는 ‘Miss’ 와 아빠와 제 성씨인 ‘Lee’.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 ‘Miss lee’의 의미가 너무 궁금해서 아빠에게 물은 적이 있었어요. 아빠는 예쁜 여성에게 부르는 애칭 같은 것이라고 대답했고, 한동안 저는 미스 리가 저의 또 다른 이름인 것처럼 생각하며 지냈어요. 그 이름이 아무데나 쓰이는 건 줄 알았으면 미스 리라는 이름을 듣고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도, 저의 두 번째 이름처럼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다들 학교 수업 시간에 쓸 영어 이름을 고민할 때, 제 이름을 미스 리로 정하지 않았던 걸 아직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미스 리’ 소리에 뒤돌아보던 날, 저는 아빠가 있었던 건너편 건물 입구에 서 있었어요. 아빠는 키 때문에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거든요. 저도 그때는 반 친구들보다 꽤 커서, 아빠와 키가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빠를 보려면 고개를 꺾어야 할 정도였으니까 엄청 컸던 거겠죠. 아빠는 깃발 같기도 했어요. 제가 올려다 봐야했던 태극기, 대한 태권도 협회 같은 깃발이요. 저는 아빠를 발견하고, 그 순간만큼은 아빠가 이정표 같다고도 생각했어요.
저는 처음에 아빠가 제 쪽을 바라보고 손을 흔드는 줄 알았어요. 그 긴 팔까지 써 가며 미스 리라는 이름을 외치고 있었으니까. 그 이름은 제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아빠에게 손을 흔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빠의 시선이 조금 어긋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아빠가 나를 데리러 왔다가 이 건물 학원에 다니는 5학년 언니랑 나를 착각했구나. 저는 아빠에게 얼른 뛰어가 진짜 미스 리는 여기 있다고 알려주는 게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빠가 무슨 일이 있어도 무단횡단은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저는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며 건너편에 있는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아빠에게 달려가 안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 건지, 이유를 모를 초조함 때문인 건지...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이 느껴졌어요.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앞에⋯ 앞에⋯⋯. 몇 번씩 외워도 진정되지 않았어요.
아빠. 저는 아직도 구두를 신지 않아요.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제 뒤에서 빨간 불을 무시하고 무단횡단하던 여자가 생각나서요. 저는 가끔 일정하게 반복되는 구두 굽 소리가 나면 온몸에 소름이 끼쳐요. 그 구두를 신은 사람이 저를 지나쳐 아빠에게 안길까 봐요. 무단횡단은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발을 구르던 제 모습은 보지 못했겠죠? 기억이 안 난다면 아마 아빠는 다른 미스 리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을 거예요.
아빠는 거의 하루종일, 주말 없이 일을 했잖아요. 근데 저는 왜 계속 태권도장에 갈 수 없었어요? 매일 일하는 아빠는 그 정도의 돈이 없었던 걸까요?
내 딸 수현이도 지금 태권도를 배우고 있어요. 그때의 저보다 어리긴 하지만, 남편을 닮았는지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더 똑똑한 것 같아요. 수현이는 펄럭이는 것을 보면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 뜻도 잘 모르는 문장을 외워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아빠, 편지를 쓰다 보니 뭐 하나 생각이 났는데. 제가 어렸을 때 이 문장을 외우고 있으니까, 아빠가 얘기 끝에 했던 말이요. 드디어 떠올랐어요. 말 배우는 중이냐고, 시끄럽다고 했었죠.
10년 전, 결혼식을 한 다음 날 왜 청첩장을 주지 않냐는 아빠의 전화에 저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어요.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몰랐거든요. 고민하는 사이에 거의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아빠, 부디 잘 지내세요. 저는 더이상 미스 리가 아니에요. 미스 리는 없어요.
수현 엄마, 세진 올림.
펜을 내려놓은 이세진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흐르게 내버려 두었다. 이 편지로, 마음 속에 뭉치고 뭉쳐 단단해진 어떤 감정들을 조금은 말랑하게 만들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세진은 엄마가 깨끗하게 빨아 말끔하게 접었던 자신의 도복을 떠올리며, 쓴 편지를 세 번 접어 봉투에 넣었다. 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님 조금은 달랐을까. 이세진은 편지를 당장 부치는 것 대신 서랍에 넣어두는 것을 택했다. 종이에 자신의 마음을 적는 것 자체가 이세진에게는 용기이자, 미련을 버리는 일이었다.
아직 열리지 않은 현관문 건너에서부터 누군가 우렁차게 긴 문장을 읊는다. 불규칙한 속도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틀렸는지, 다시 처음부터 누르다 마침내 문이 열린다. 한수현이 엄마, 하고 뛰어와 이세진에게 안긴다. 이세진은 한수현의 하얀 도복에 얼굴을 묻고, 말없이 꽉 껴안는다. 엄마 숨 막혀, 하면서 버둥거리던 한수현은 이세진에게 이야기한다. 엄마 나 드디어 다 외울 수 있게 됐어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세진은 한수현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상기되는 것 같은 느낌에 그것을 감추듯 한수현을 더 꽉 끌어안는다. 낮 동안 계속해서 적었던 문장을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여태 삼키고 있었던 분노와 그를 비롯한 감정들이 흘러 넘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세진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한수현을 쓰다듬으며, 마치 스스로를 위로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멋있다, 우리 딸. 아빠 오면 또 보여 줄 수 있지? 우리 자랑하자. 분명 아빠도 엄청 좋아할 거야. 이세진은 동시에 이현욱이 자신의 유년기 시절 사진을 보낸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딸 가진 부모의 마음. 내가 지금 나쁜 딸이다, 뭐 이런 것인가.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한 이현욱. 그를 향한 동정심 따위는 ‘한세진’에게 없다.
적은 편지가 이현욱에게 닿거나, 그렇지 않거나. 어떤 결말이든 이제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한세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