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문예창작공모전 비평 당선작
2023 문예창작공모전 비평 당선작
최우수상
조개껍데기로 살아갈 용기
국어국문학전공
20221062 우지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이누도 잇신 감독이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개봉된 이후 지금까지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오히려 소설 원작보다 더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필자는 원작보다 영화가 더 큰 인기를 얻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고, 영화의 제목처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지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유를 모두 알게 되었다. 먼저, 영화로 제작된 내용이 원작 소설보다 더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유는 결말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결말로 막을 내린다. 시간이 흘러도 이 영화를 잊지 못하는 독자들은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는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언덕에서 달려 내려오는 유모차 안에 타 있던 조제와 언덕으로 오르고 있던 츠네오가 부딪히면서 전개가 시작된다. 이때, 조제는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여성이고, 츠네오는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남성이다. 그리고 조제의 곁에는 늘 그녀를 보호하며,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가 있다. 조제의 할머니는 조제와 외출할 때면 그녀를 유모차 안에 숨겨 동행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조제가 타고 있던 유모차와 츠네오가 부딪히는 순간에도 조제가 동네 사람들에게 노출될까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할머니는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조제를 숨기고 싶어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츠네오는 조제를 유별난 존재로 생각하지 않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를 극복하고 둘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다.
조제가 바라보는 세상의 크기
조제는 그동안 할머니가 이끄는 유모차에만 의존해서 세상밖에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조제에게 허용된 세상은 폭이 좁았다. 할머니는 장애가 있는 조제를 숨겨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조제를 데리고 나오는 날이면 사람들이 조제를 볼 수 없도록 담요들로 칭칭 가리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제가 볼 수 있는 세상도 제한되었다. 조제는 지금까지 눈을 뜨고 간신히 볼 수 있는 정도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츠네오는 조제의 할머니와는 달리 장애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조제가 타고 있는 유모차를 있는 힘껏 밀며 함께 달렸다. 비로소 사진처럼 멈춰있던 프레임은 츠네오가 달리는 속도와 동시에 영상으로 움직인다. 이는 영화 속에서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짧게 멈춰서 보여주는 기법을 통해 조제가 그동안 바라보던 세상이 정적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현재는 츠네오를 만남으로서 구름이 흘러가는 장면을 보여주며 그녀의 세상이 유동적으로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츠네오로 인하여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그녀는 더는 세상이 정적으로 멈춰있지 않음을 느낀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이 이제야 움직이게 된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조제는 구름마저 신기하게 느끼고는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조제에게 츠네오란 자신의 세상을 넓혀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츠네오의 등장으로 조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크기가 넓어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며 필자는 조제의 마음의 창과 같은 프레임이 움직이는 순간 뭉클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2. 방향의 연출
우리는 살아갈 때 보편적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정방향이라고 한다. 그리고 역방향을 향해 가게 되면, 어딘가 불편하고, 잘못된 듯한 느낌을 받고는 한다. 이 영화의 감독은 이러한 방향에 따른 심리를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대부분 장면이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흐르는 정방향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츠네오가 조제를 태운 유모차를 있는 힘껏 밀며 달려가는 장면과 둘이 함께 바다를 보러 여행을 가는 장면에서만 다른 방향이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역방향이 제시된 장면이 담아내고자 했던 의미는 무엇일까.
츠네오가 조제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함께 달릴 때, 우리는 함께 그들을 얽매이는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홀가분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유모차가 넘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조성된다. 우리의 걱정처럼 유모차는 엎어지게 되고, 츠네오는 언덕에서 구르고 만다. 이 모습들마저도 다소 가벼운 일화로 생각되지만, 다음에 이 장면은 그들의 관계에 복선이 된다. 두 번째 장면으로 츠네오와 조제가 바다로 떠날 때도 방향은 역방향으로 제시된다. 역방향이 의미하는 것은 둘이 항상 현실적인 요소들을 거슬러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징표가 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둘은 위태로운 만남을 이어간다.
그리고 결말 부분인 조제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에서는 다시 정방향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들은 모든 요소를 거스른 채 사랑했지만, 다시 각자의 자리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제와 츠네오는 각자로 존재함으로써 더는 불안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3. 장애인을 바라보는 두 부류의 사람들
이 영화는 사랑과 이별을 말하기도 하지만, 작품의 가장 큰 모티브는 장애일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렇듯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 조제의 장애를 바라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먼저, 그녀가 장애인으로 살아가며 느꼈을 보편적인 시선을 제공해주는 첫 번째 인물은 그녀의 할머니이다. 그녀의 할머니는 밖을 나갈 때면 늘 커다란 유모차 속에 조제를 넣고, 동네 사람들이 조제를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다 우연히 조제의 유모차와 츠네오가 부딪히면서 조제가 세상 밖으로 노출되었을 때도 할머니는 츠네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낯뜨겁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조제와 츠네오의 사이가 부쩍 가까워지게 되었을 때도 할머니는 조제에게 분개하며, 강력하게 경고한다. “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너는 망가진 몸이야! 망가진 몸에는 망가진 몸으로서의 분수가 있는 거야!”라고 말이다. 이 말에 담겨있는 할머니의 속내는 조제가 장애가 있는 사람이니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보통의 삶을 누리길 원했다가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녀의 할머니는 그동안 조제가 받아온 상처를 알기 때문에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사회로부터 더욱 고립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할머니의 행동은 오히려 조제의 자립성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할머니는 나이가 점차 들어가고, 언젠가 조제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조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고, 자연스레 세상과의 접촉이 생기게 될 것이다. 할머니가 그토록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조제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아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그녀의 삶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녀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본인의 삶을 구축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더 이상 그녀의 세계를 옥죄이다 못해, 세상과 단절시키는 행동을 그만둬야 하는 이유이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평온한 삶을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물 받지 못하는 것은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또한, 할머니의 행동은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으로부터 조제를 지키고자 한 행동이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애인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상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을 향해 할머니와 같은 시선을 취하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은 카나에이다. 그녀는 츠네오와 연인이 될 뻔했던 인물로서 조제의 장애를 더욱 강조시키는 인물이다. 그녀는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은 여대생이다. 그러므로 겉보기에는 그녀가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신과 연애할 것으로 생각했던 츠네오가 조제와 사귀게 되자, 그녀는 조제를 찾아가 뺨을 때리며 이렇게 말한다. “장애인 주제에 내 남자친구를 빼앗다니, 뭐하자는 거야? 정말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라고 말이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그녀 역시 자신의 상황에 장애인이 개입되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즉, 그녀도 장애인을 향한 차별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장애인을 향한 폭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조제를 향한 차별적인 시선을 거두기는 쉽지 않다. 그녀의 불편한 다리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동네 사람들부터 그녀의 장애를 못 본 척 애써 시선을 거두려 노력하는 호텔 종업원까지 장애인을 향한 차별적인 시선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어느 쪽도 조제를 장애인이라는 수식 없이 바라봐주는 인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정으로 그녀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애써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닌 그녀가 원래 태어난 그 자체로 바라봐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차별을 대놓고 행하는 것만의 문제가 아닌 의도적으로 은폐하려는 사실도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너무나 선명하고 아프게 느껴진다.
조제의 장애에 관해 차별적인 시선을 갖지 않는 첫 번째 인물이 있다면, 바로 츠네오일 것이다. 그는 조제를 바라보면서 조제의 장애가 극복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모두 각자 하나씩의 결점을 갖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말이다. 츠네오가 바라보는 조제는 외출할 때만 제약이 있을 뿐, 집 안에서는 자신만의 요령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츠네오는 조제의 생활을 좀 더 나아지게 해주는 보조적인 역할로서 도움을 줄 뿐이다. 츠네오는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재료들로 조제를 위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만든다. 그것들은 조제가 이동하는 것에 도움을 줄 지팡이와 조제가 ‘롤러스케이트’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츠네오는 조제의 불편함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며, 그녀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게 된다.
4. 영화의 모티프
- 유모차와 휠체어의 의미
이 영화에는 다양한 모티프가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유모차와 휠체어는 조제의 삶을 두 갈래로 나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조제가 츠네오를 만나기 전과 후로 삶이 바뀐 것처럼 말이다. 먼저, 유모차는 조제와 츠네오가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유모차와 츠네오가 충돌하게 되면서 영화의 내용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조제는 늘 유모차 속에 담겨 다니면서도 호기심이 많은 인물이다. 유모차 속에 들어있는 정체를 알기 위해서 유모차를 억지로 들춰보던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던 그녀이지만, 그녀 역시 세상 밖이 궁금했던 인물이다. 할머니가 아무리 그녀를 숨기려고 해도 그녀는 항상 구름이 움직이는 하늘을 궁금해했다. 그런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면서도 세상 밖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해준 수단이 바로 유모차이다.
휠체어 또한, 유모차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세상과 가까워지게 해주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그러나 휠체어는 조제에게 유모차와 다른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휠체어는 스스로 움직여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누군가가 밀어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모차와는 차이가 있다. 휠체어는 유모차보다 자립성을 요구하는 보조도구로써 존재한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조제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앞으로 씩씩하게 나아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씩씩하게 나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어딘가 모르게 힘이 나게 한다. 그리고 그녀를 보호하려고 했던 할머니는 조제를 유모차에 태울 것이 아니라 휠체어를 태워줬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들게 한다. 할머니가 조제를 유모차 속에 태워서 다녔던 날들이 조제를 더욱 깊은 바닷속에 빠지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5.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의미
우리가 지금까지 ‘조제’로 알았던 여주인공의 이름은 사실 ‘쿠미코’이다. ‘조제’라는 이름은 ‘쿠미코’ 본인이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다. 그녀는 할머니가 집으로 가져다주는 소설을 읽었고, 그러다 우연히 한 프랑스 소설을 접하게 된다. 프랑스 소설 속에서는 히로인을 조제라고 부르고는 하였다. 이것을 본 ‘쿠미코’는 오늘부터 본인도 ‘조제’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녀가 ‘조제’로 불리며 살기를 결심하면서 바라는 삶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포부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고, 그에 따라 개인의 인격을 부여받는다. 조제 역시 본인이 원하는 이름으로 살아갈 것을 단언하고, 이로써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투영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쿠미코’로 살아온 지금까지는 장애인으로서 타인의 도움에 의존해서 살아온 삶이었다면, ‘조제’가 된 지금부터는 삶의 주체를 자신으로 설정하고, 이전보다 능동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녀는 ‘조제’로 이름을 바꾸고 난 순간부터는 무언가 좋은 일들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을 느낀다. 앞으로의 삶이 좋은 일들로 가득하길 바라는 그녀의 소망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일어난 좋은 일은 츠네오라는 존재의 등장인 것이다. 그녀는 츠네오에게 자신을 ‘조제’라고 칭하며, 소설 속 히로인과 같은 인격을 부여받는 느낌을 받는다. 즉, 그녀는 ‘쿠미코’에서 ‘조제’가 된 후 츠네오에게 있어서 히로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조제가 꿈꿔왔던 소원 중 다른 하나는 바로 호랑이를 보는 것이다. 그녀는 츠네오의 곁에서 그가 아니었다면 평생 볼 수 없었을지 모를 호랑이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제일 무서운 것을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그런 사람이 생기면 호랑이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만약 생기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는 볼 수 없다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라고 말이다. 장애가 있는 그녀가 혼자서라면 볼 수 없었던 호랑이를 츠네오라는 존재를 통해서 보게 되었고, 조제는 이제 그토록 바라던 소원 중 하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제가 호랑이를 보고 싶어 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호랑이를 보는 것을 소망했던 것일까. 조제가 ‘호랑이’만을 보기 원했던 이유는 바로 ‘호랑이’가 그녀에게는 가장 무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조제가 ‘무서운 것’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존재였고, 조제에게 호랑이란 장애인으로서 받아온 차별과 폭력들을 의미한다. 즉, 그녀가 오로지 감당해야 했던 차별적인 시선들도 포함된다. 이것들은 그녀의 삶이 츠네오를 만나고 난 후, 이전보다 주체적으로 바뀌었어도 계속 존재했다. 또한, 츠네오의 도움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계속 두려워해 온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조제는 츠네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일 무서운 것을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무서워도 기댈 수 있으니까”라고 말이다. 조제는 츠네오와 함께 함으로써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차별적인 시선에 대항할 용기가 생겼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츠네오와 함께라면, 세상의 시선 따위는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제는 더 는 자신을 향한 온갖 차별적인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물고기들’에 해당하는 의미는 조제가 직접 언급하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제와 츠네오는 마치 깊은 바닷속에 들어온 것 같은 호텔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조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죽은 것이 되었다고 말이다. 죽은 것이 되었다고 말하며, 조제는 츠네오와 자신이 물고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조제가 말하는 ‘죽은 것’과 ‘물고기들’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조제와 츠네오는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츠네오는 차마 자신의 집안에 조제를 소개하기 주저한다. 그들은 동거하며 사실혼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만이 그들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어떠한 사회적인 통념과 문화적인 요소에 관여하지 않은 채 말이다. 즉, ‘물고기들’이라는 것은 ‘물고기들’이 되어야만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두 사람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깊은 해저 속에서만 평온하게 사랑을 할 수 있는 ‘물고기들’과 자신들을 같은 선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제에게 ‘죽음’은 ‘행복’과 직결된다. ‘죽음’과 ‘행복’을 같은 선상에 두고 바라보는 것이 보통의 관점에서는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일은 아니지만, 그녀는 행복을 느낄 때,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조제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상태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데기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아.”라고 말하는 조제를 보며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녀가 ‘물고기들’이 아닌 ‘조개껍데기’여도 일상을 담담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확신을 말이다. 그녀가 츠네오와 이별을 하더라도 독립적이고 완전한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즉,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의미는 내가 원하는 나, 두려운 세상과 나의 세상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제는 츠네오에게 자신이 원하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는 것이다. 츠네오는 단순히 그녀를 조제라고 부르는 것이어도 조제에게 이름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봐달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면서 조제는 츠네오에게 한 가지를 더 바라고 있다. 함께 호랑이를 보러 가자고 말이다. 즉, 함께 하며 뛰어넘어야 하는 여러 장애물을 같이 넘어달라는 의미이다. 조제는 그들에게 앞으로 온갖 차별과 현실이 매섭게 들이닥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을 함께 극복하고 사랑하자고 말하고 있다.
6. 서로에 의해 변화되는 캐릭터
먼저, 츠네오의 일생을 지켜보면, 그에게 이성이란 밥을 먹는 행위와 같은 의미였다. 작품 속에서 츠네오는 음식을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식은 스파게티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먹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그에게 이성은 그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와 같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음식뿐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성들도 크게 마다한 적이 없었다. 다가오면 다가오는 대로 여성들과 만남을 즐겼고, 그렇게 헤어지는 것에도 큰 슬픔을 느끼지 않던 츠네오였다. 그랬던 그에게 조제라는 존재가 생겼고, 그에게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츠네오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차별적인 시선을 갖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는 조제가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조제와 헤어지고 난 후,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 했지만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을 하고 만다. 그에게 조제는 주변 여자 중에서 가장 강하고, 자신을 가장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여자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므로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지더라도 그녀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지금껏 그래왔듯 헤어지고도 친구로 남는 연인이 있었지만, 조제와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조제를 동정이 아닌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제 역시 츠네오로 인하여 그녀의 삶에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츠네오가 만들어준 도구들 덕분에 집 밖을 나가보기도 하고,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호랑이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츠네오와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조제는 츠네오가 없어도 혼자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자립하게 되었다. 그녀는 깊은 바닷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호텔에서 츠네오에게 말했듯이 츠네오와의 이별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헤어짐이 있으면 새로운 만남이 있는 삶을 당연히 반복해온 츠네오와는 달리 조제에게는 츠네오의 존재가 컸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제는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한계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츠네오에게 의지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제에게 츠네오가 없는 삶은 더욱 큰 타격을 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조제는 이별한 후, 둘의 이별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하게 행동한다. 조제는 츠네오와 만나게 된 순간부터 그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했을 것이다. 조제는 츠네오의 도움 덕분에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지만, 그가 떠난 후에도 다시는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수많은 날을 다짐해왔을 것이다.
7. 원작과는 다른 결말
원작 소설에서는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모습을 결말로 그렸다. 그러나 영화로 제작된 결말은 결국, 조제와 츠네오가 이별을 하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원작 소설보다 영화의 결말이 여운을 더욱 길게 남겨준다고 생각했다. 조제와 츠네오의 이별이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각자 결말을 알면서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조제와 츠네오에게는 두 사람의 이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끝내 이별했고,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독자들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현실의 사랑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갈 리는 없고,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덤덤하게 흘러가는 일상이 우리를 눈물짓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별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제와 츠네오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만남을 이어가는 초반까지는 조제의 장애가 크게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둘이 함께라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츠네오는 조제가 스스로 할 수 없다면, 내가 조제의 몫까지 노력하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츠네오는 점차 지쳐 갔다. 조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벽이 너무 높았기에 그것이 그를 숨 막히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츠네오의 남동생은 츠네오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형, 지쳤어?”라고 말이다. 이 물음을 듣는 동시에 필자도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그동안 모른 척해왔지만,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츠네오가 초반에 다짐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 일찍 지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그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라도 츠네오의 상황이 되어 본다면 그와 같게 행동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조제는 오래전부터 그가 도망칠 순간을 기약해두고 있었을 것이다. 츠네오는 순간의 감정으로 미래의 모습을 자신했다. 마치 시간이 흘러도 사랑이, 자신의 마음이 변할 리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와 달리 조제는 오래전부터 이별을 준비했을 수밖에 없었다. 조제는 장애인으로 살아오며 오래전부터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녀의 할머니로부터 보통의 삶을 사는 것을 바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왔을 테니까 말이다. 조제는 “처음부터 나는 그렇게 깊은 바닷속에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외롭지는 않아.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라고 말한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조제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츠네오를 사랑했고, 끝내 이별한 것이다.
츠네오는 둘의 이별이 본인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담백한 이별이었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었지만, 사실은 단 하나, 본인이 도망친 탓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츠네오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으며, 그가 회피한 것들을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모님께 제사에 불참한다고 알리고, 조제를 끌어안던 츠네오의 마음을 우리는 전부 다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이별이 존재하고, 이렇게 담백한 이별도 존재할 것이다.
8. 결론
지금까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장애인의 성이나 사랑을 주제로 삼는 것을 조심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의 내면에 장애인은 ‘무성애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내재하여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차별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장애인을 무성애자로 바라보는 편견 하나를 지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조제가 겪어야 했던 모든 차별은 조제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장애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모든 차별은 장애인으로부터 발현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조제는 그녀의 할머니나 동네 사람들로부터 곪아간다. 그들은 모두 그녀를 보호하려 했던 사람이자 그녀의 주변 인물들이다. 이것은 굉장히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사람들은 장애인의 스트레스가 자신의 장애로부터 온다고 생각하지만, 그 스트레스는 전부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장애인에 대한 두 번째 편견까지 해소한 셈이다.
필자는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을 보며 자연스레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어떤 작품을 봐도 주인공들의 서사를 이토록 응원하지는 않았다. 영화가 시작된 초반부터 조제와 츠네오의 만남에는 여러 방해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그러나 조제와 츠네오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을 이어 갔다. 필자는 결국, 현실적인 문제를 모두 뒤로 하고 사랑하는 둘을 보며, 둘의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그러지 못했다. 둘에게도 이별은 찾아 왔고, 조제와 츠네오는 오히려 필자보다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둘의 이별이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결말이라서 모두의 마음을 울리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이별을 겪게 되어도 묵묵히 살아내고, 계속되는 일상이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아픔은 뒤로한 채, 또 다가오는 내일을 살아가는 것이 모두의 삶 아니던가.
또한, 사랑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와 착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결말이라 좋았다. 사랑은 정말로 변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그 마음이 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 사랑이 변할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사랑을 하며 받은 상처도 시간 앞에서 잊혀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 앞에서 속절없이 흐르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거대한 시간 속에서 함께 발자취를 남기고,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것을 이뤘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기에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충분하다. 조제를 통해서 배웠듯이 말이다.
조제는 츠네오를 만나고 난 후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조제는 츠네오 덕분에 홀로서기를 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츠네오 역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으니 조제와의 만남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츠네오와 이별한 후, 조제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록 그녀의 뒷모습이지만, 필자는 그녀의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의 날들을 잘 살아낼 것이라는 단호함을 말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더는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아픈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또한, 영화의 결말에서 보여주는 조제의 뒷모습이 남은 자의 모습이 아님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우리는 조제이기도 하고, 츠네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 조제처럼 결함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가며, 불안정한 존재이지만, 우리는 오늘도 꿋꿋하게 살아간다.
이 영화는 보고 나서 슬픈 여운이 가시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다시 찾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감독은 일 본 영화만의 관조적인 연출을 하며, 억지로 신파를 주입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필자는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조제와 츠네오에게 동화될 정도의 몰입을 한다. 그리고 또다시 영화의 결말을 맞이한 후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이유를 묻는다면, ‘추억’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추억을 떠올릴 때면, 아팠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즐거웠던 기억들도 떠올린다. 그러므로 그 기억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더불어 그 기억들로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기도 한다. 이것이 힘들어도 추억을 다시 재회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 영화도 이와 마찬가지다.
조제와 츠네오는 함께 ‘호랑이’를 보는 건 이뤘지만, ‘물고기’는 끝내 보지 못 했다. 그러나 함께 ‘호랑이’를 본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세상을 넓혀준 사람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둘은 어느 곳에 있든 서로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끝내 ‘물고기’를 볼 수 없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는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매 순간 노력하며 살고 있지만, 끝내 회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의 삶을 탓하지 말기를 기도한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전부 핑계가 된다고 해도 말이다. 그것이 핑계가 맞더라도 우리는 계속 때로는 도망치고, 때로는 선택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또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련의 과정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