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땅은 일부만 제외하고 1037년 셀주크 튀르키예 왕국이 설립되며 이슬람화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당시 튀르키예 땅을 정복한 튀르크 족에게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위한 군사 원조를 명분으로 제1차 십자군을 소환했습니다. 우르바노 2세가 십자군을 소환한 목적 중 하나는 무슬림이 지배하던 예루살렘을 포함한 동지중해에 대한 순례자들의 안전보장이었지만, 이것이 교황이나 십자군에 참전한 이들의 진정한 동기는 아니라고 학자들은 평합니다. 교황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열한 동방 정교회를 통합하여 자신이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을 수 있습니다. 참전한 이들은 종교적 동기 외에도 귀족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농민들은 신분 상승에 대한 희망을 꿈꿨습니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이밖에도 모험심, 약탈 욕구 등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성지 탈환 목적의 십자군은 총 9차례 있었으며 아래의 그림은 제1차 십자군의 경로를 보여줍니다.
당시에는 보급로가 길어지면서 십자군에 대한 필수 식량 등의 보급이 어려웠으며 굶주린 십자군은 노정에 주민을 살육하고 마을을 약탈했습니다. 안디옥과 같은 주요 이슬람 도시들을 탈환하면서도 많은 무슬림을 무참히 살해했고,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살육과 약탈은 극에 달했습니다.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역사가 라이나흐(Saloman Reinach)는 자신의 저서 "Orpheus; histoire générale des religions"에서 "일주일 안에 7만 명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도덕률의 우위성을 증명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라고 적었습니다. 당시의 도시 규모와 인구를 고려하면 7만 명이 죽은 것은 대대적인 살육으로 보아야 합니다.
셀주크 튀르키예 왕국으로 이슬람화되었던 튀르키예 땅은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살해당하는 등 지울 수 없는 피해를 당했습니다. 종교에 대한 탄압은 탄압받은 종교를 결속하고 그 참여자들의 신앙을 깊고 순수하게 하고 확산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튀르키예 땅의 이슬람도 십자군이라는 기독교 세계의 탄압으로 더 결속하고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을 더 강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오늘날까지 튀르키예 땅만 아니라 모든 이슬람 지역에서 선교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그리스도인의 행동, 더 나아가서는 삶의 모습이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당시 전쟁을 피할 수 없어 십자군을 일으켜 전쟁을 수행했어야만 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약탈과 민간인 살육 같은 비성경적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