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그림은 튀르키예와 그 주변의 정세와 주요 사건을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거짓 복음으로 약해진 튀르키예 땅의 교회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 없이 예수님을 믿게는 되었지만, 교회의 세속화로 진정한 복음은 더 약해졌습니다. 분열은 기독교 세계를 약화하기 위해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주요 전략입니다. 예외 없이 튀르키예 땅을 중심으로 한 당시 기독교 세계도 분열로 인해 약해졌습니다.
a) 정치적 분열
위의 표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로마 제국의 분열입니다. 제국의 분열은 이미 밀라노 칙령 이전부터 조짐이 있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전사 후 로마는 각 지역에서 군벌화한 장군들이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며 한때 4개의 로마 제국이 잠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혼란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집권하여 밀라노 칙령 후인 330년에 당시 로마의 분열과 부패를 피해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기념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바꿈 )으로 옮겼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등 5개의 교구로 구성되었고 로마 교구가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비잔티움 천도 후 종교적 정통성은 로마가, 정치적 정통성은 콘스탄티노플이 가졌으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각각 교황이 있게 되어 로마의 분열이 서서히 싹텄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은 후 서로마는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동로마는 발렌스 황제가 다스렸지만, 발렌스 황제가 378년 전사하자 테오도시우스가 동로마의 황제가 됩니다. 383년 서로마의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된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동서 로마를 모두 통치합니다. 하지만 395년 두 아들에게 각각 동로마와 서로마를 물려주면서 로마제국은 두 로마 제국으로 분열됩니다. 분열 후 476년에 용병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게르만족에게 서로마는 멸망합니다.
b) 종교적 분열
종교적 분열, 특히 기독교 내의 분열은 기독교의 약화에 더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비잔티움 천도는 로마의 정치적 분열 뿐 아니라 종교적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각각 교황이 있었음은 기독교가 분열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은 후 로마가 콘스탄티노플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기독교의 분열의 조짐은 동서 로마의 분열과 함께 더 심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서로마의 멸망 후 수많은 군소국가가 생기면서 기독교의 권위, 즉 교황의 권위는 더 올라갔습니다. 교황은 더 많은 나라와 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밀라노 칙령 이후 세속화되기 시작한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겼습니다. 교회는 세상 권력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동일체 의식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730년에 발한 성상파괴령으로 결국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로 분열했습니다. 성상파괴령은 성상을 우상으로 보고 이를 제작하고 공경하는 것을 금지할 뿐 아니라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처형했습니다. 서로마 교회는 자신들에게 기독교 정통성이 있다고 굳게 믿었고 실제로 세계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비잔티움 천도 후 정치적 우위를 앞세운 동로마가 서로마를 게르만족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간섭하고 규제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로마는 동로마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으며, 동로마의 성상파괴령은 좋은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서로마 교회는 성상이 게르만족 전도에 효과가 있다는 명분으로 성상파괴를 반대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납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의 분리는 겉으로는 신학적 차이나 사역을 위한 명분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속화한 교회의 세속적 욕망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위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4-5세기에는 기독론 논쟁으로 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가 대립하고 서로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올바른 신학을 정립하기 위한 필요한 논쟁이었지만, 당사자들의 세속적 이유가 포함된 것은 오점입니다. 로마는 분열되어 서로마는 멸망했고 교회의 세속화는 심해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622년 이슬람이 중동에서 발생하여 세력을 무섭게 확장하며 불과 16년 후인 638년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8세기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가 패권을 잡으면서 기독교 세계를 계속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상파괴령으로 서로 다투며 결국 분열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8세기경 튀르키예는 기독교보다는 샤마니즘에 가까운 텡그리(하늘)교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도 거짓 가르침과 분열로 약해졌습니다.
압바스 왕조에 참여한 많은 튀르크족 용병은 압바스 왕조의 종교인 이슬람을 받아들였습니다. 압바스 왕조가 약해지자 군사력을 장악하여 튀르키예에 자신들의 나라들을 세웠고 11세기에 이슬람을 국교로 한 셀주크 튀르키예로 통일되었습니다. 아래는 셀주크 튀르키예의 영토를 보여줍니다. 오늘날튀르키예 대부분을 포함한 거대한 땅을 다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