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티프

중력의 무지개'의 구조는 핀천의 첫 장편 소설인 V.와는 달리 어떤 특정한 형태를 띠지 않는다. 로켓의 비행경로와 같은 포물선 형태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포물선 형태를 띠지 않는 서사 구조가 어디 있을까? 다만 '중력의 무지개'의 내러티브의 차이라면 그 포물선이 목표점에 닿기 전에 오르가즘을 기다리는 타격지점의 땅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때이른 공중 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물선 형태는 여전히 이 소설의 구조 상 큰 의미를 갖는다. 포물선 형태는 이 소설의 여러 이야기를 걸어둘 수 있는 고리가 달린 하얀 벽이 된다.

포물선은 어떤 면에서 불완전한 원이며 반쪽 만다라이다. 포물선은 반쪽 무지개다. 무지개가 반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완전한 원이다. 우리는 다만 무지개의 지상으로 솟은 부분만 볼 수 있을 따름이다.

포물선은 로켓의 경로다. 그러나 로켓은 대포알처럼 수동적으로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 추진체가 장착된 로켓은 원래는 불안한 존재이다. 항상 경로를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어부가 필요하며 제어부는 로켓이 향하는 위치를 입력값으로 받아 제어 신호를 통해 로켓의 위치를 조정하고 또 그 결과값을 입력 값으로 받는 과정을 반복하는 피드백 회로를 통해 로켓을 원래의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게 한다. 로켓은 이런 제어라는 변증법을 통해 미리 정의된 목표점을 향한다. 그렇게 조건 반사에 훈련된 개들처럼 정해진 표적을 향해 간다. 이러한 여행은 편도 여행, 귀환이 없는 출발이다. 이러한 것은 자연과 역사의 여정이기도 하다.

자연을 설명하는 물리법칙은 시간의 방향과 무관하다. 즉 시간이 앞으로 흐르든 뒤로 흐르든 물리법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 그것은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시간이 갈수록 우주의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는 끊임없이 증가한다. 사용된 에너지는 복구할 수 없고 사물은 단조로움을 향해 반복을 향해가고 결국 우주는 열죽음(heat death)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한 번 발사된 로켓은 되돌아 올 수 없다.

그 세상에서 요원들은 삶의 편을 위해 동작하는 진공청소기 같은 총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방아쇠를 당기면 방금 죽은 자의 몸에서 총알이 빨려 나와 총구 속으로 들어가고, 거꾸로 된 총소리에 맞춰 시체가 다시 살아남에 이 ‘위대한 돌이킬 수 없는 현상’이 실제로 돌이켜진다


이렇게 엔트로피를 낮출 수 있는 것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현실인 듯 착각한다.

그 렇게 모든 사물은 엔트로피가 무한인 중심점을 향해 가라앉는다. 이러한 과정은 추상화의 과정, 역사화의 과정, 언어화의 과정, 학문화의 과정이다. 추상화는 진실을 지우고, 역사화는 행위를 지우고, 언어화는 인식을 지우고, 학문화는 지식을 지우는 과정이다. 색깔을 지우고, 주름 많고 여러가지 흠 많은 얼굴을 매끄러운 바비 인형의 얼굴로 바꾸는 과정이다. 바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로켓은 중력의 중심을 향해 간다. 이 소설에서 지배적인 움직임은 중심을 향한 움직임이다. 소설에는 중심을 향한 움직임에 대한 많은 묘사가 있다.

신성한 중심에 접근하는 짓이 곧 영역에서 제 1의 심심풀이 활동이 될 터였다. 그 화창한 전성기가 바로 앞에 다가왔다. 곧, 이 게임 역사상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챔피언들과 숙련자들, 마술사들이, 온갖 서열과 급수의 사람들이 운동장에 나설 것이다.


학문적 영광을 쫓는 포인츠맨은 미로를 통해 미노타우로스가 있는 중심을 향한다.

아 그래 그러니까 예전에, 그는 자기를 기다리는 미노타우르스의 존재를 믿었다. 자신이 마지막 방으로 서둘러 달려들어 가는 꿈을 꾸곤 했다. 갈고닦은 준비된 칼, 특수부대 대원처럼 비명을 지르며, 담긴 걸 마침내 모두 발산해내며―그의 내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명력이 참으로 놀라운 절정을 향해 치고 올라가고, 그 얼굴이 그를 향해 돌아보면, 그것은 고색창연하고 지친 얼굴, 포인츠맨의 인간다움 따윈 신경쓰지 않고, 오직 또 한 번 오랫동안 일상적으로 그랬듯 뿔 한 번 움찔하고, 발굽 한 번 지치며 그를 잡아먹을 준비를 하고, (하지만 이번엔 반항하리라, 미노타우르스가 피를 흘리리라, 좆같은 짐승 새끼, 그의 깊은 안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용맹스러움과 폭력성에 그 자신 놀라고)……


신비주의자들도 중심을 향한 여정에 동참한다

그 것은 곧 가지를 뻗어 10개의 서로 구별되는 구체들로, 즉, 성위들로 솎아졌어. 1부터 10까지의 숫자에 해당하는 것이었지. 이것들은 세피로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어. 신에게 돌아가기 위해선, 영혼은 이 세피로스 각각과 협상을 해야 하지. 10에서 시작해서 1까지. 마법과 신념으로 무장한 유대 신비 철학자들이 세피로스를 정복하려고 길을 떠났어. 많은 유대 신비 철학의 비밀들이 어떻게 성공적인 여정을 마칠 것인지에 관한 것과 관계가 있어.

4 세기 경부터 전해 오는 하가다의 이론에 따르면 이삭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위에서 막 그를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왕좌’로 가는 대기실들을 봤다고 한다.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신비주의자에게는, 그 방들에 대한 비전을 보고 그 방들을 하나하나씩 지나 왕좌를 향한다는 것은 끔찍하고 복잡한 일이다. 너는 암구호에 대해, 그리고 봉인들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하고, 운동과 금욕을 통해 육체적인 준비를 마쳐야 할 뿐 아니라, 결정적 순간에 결코 유약해지지 않을 단단한 결단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문간에서 천사들이 너를 돌려보내기 위해 속임수를 쓰고, 협박하고, 온갖 종류의 잔인하고 짓궂은 장난을 칠 것이다. 큘리포스는, 그 죽음의 껍데기들은, 이곳을 스쳐 지나간 네 친구들에 대한 너의 사랑 전부를 이용하여 너를 막을 것이다. 너는 능동적인 길을 택했고, 최악의 치명적인 위험과 맞닥뜨릴 때까지 비틀거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의 검은 반쪽인 엔지안을 찾아나선 치체리네도 중앙 아시아에서 중심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계속해서 계곡 속으로. 북쪽 저 멀리, 하얀 산 정상이 마지막 햇빛 안에서 윙크한다. 이 아래는 항상 그림자진 저녁.
치체리네는 키르기즈 빛에 닿겠지만 그의 출생의 순간에 이르지는 못하리라.


그의 추적은 마찬가지로 로켓이라는 중심을 향해 힘든 길을 떠난 슈바르츠코만도의 지도자 엔지안을 향한 여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중심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발기한 미노타우르스, 아니면 인간 제물이라는 철지난 의식이다. 치체리네는 중심에서 닿고 키르기즈 빛을 보지만 곧 그 존재를 잊는다.

그 러나 언젠가 그는 산들의 기억과 함께, 그에 대한 확실한 사랑의 순간으로, 순결의 순간으로 유배되어 간 젊은 여인들의 기억과 함께, 아침의 지진과 구름을 모는 바람, 숙청, 전쟁, 그의 뒤에서 사라진 수백만의 영혼들에 대한 기억과 함께, 그것에 대한 기억도 거의 모두 잃으리라.

이렇게 한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여정은 또한 기독교가 보는 역사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적 구원의 가능성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인 듯싶다.

늘 그렇듯이 길고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면서 그는 이미 로켓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신이 그를 위해 진공의 하늘에서 그것을 집어냈다. 마치 쇠로 된 바나나를 따듯.

그 러나 신은 날아가는 로켓을 되돌리지 않는다. 천사는 죽어가는 자를 구원하지 않고 대량 학살을 막지도 않는다. 천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한 번뿐, 단 한 번뿐……” 이렇게 외치는 릴케의 듀이노의 비가에 등장하는 천사인 것이다. 그러나 포물선을 따라가는 여정은 너무도 잔인한 것이기에 우리의 눈은 신이 있는 쪽을 향한다. 저 세상과의 접점을 덮은 장막을 들어올리고 거기에서 신의 은총이 담긴 빛이 흘러나오길 바란다.

그렇게 흘러나오는 빛은 여러 가지 형태이다. 신의 손일 수도 마술일 수도 있고 천사의 도래일 수도 젊은 마녀 겔리의 등장일 수도 있다. 서양의 분석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존재들이 포물선을 집어서 하나의 완성된 원을, 완성된 만다라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엔트로피는 증가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괴상한 취향을 갖고 스텐 소통 대신 멘도자 따발총이나 학버스를 갖고 다니는 것이 궁극적인 종말을 맞을 수 있는 길인가? 질문하기조차 부끄러운 질문이다. 역겨운 요리 이름을 대며 상류층이 벌이는 파티를 망쳐놓는다고 다음날 새로운 파티가 열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종말을 향한 파티는 계속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먹을 것이 떨어지고 술이 떨어지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지불한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종말을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다.

이 노래 가사는 끝없이 이어진다. 완전한 형태를 갖춘다면 그건 세상의 일들에 대한 단념을 꽤나 적절히 표현한다. 여기 하나 문제라면 괴델의 정리에 의해 목록 어딘가 빼먹은 것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라는 것, 그리고 뭘 빠트렸는지 머리 속에서 당장 떠올리긴 쉽지 않기에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그럴 듯한 일이란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 실수와 어쩔 수 없는 반복을 수정하며 자기에게 일어났음에 틀림없는 새로운 항목을 더하고, 그래서―자, 그 제목에서 말하는 “자살”은 무한정 연기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로켓을 흔들어 원래 경로에서 조금씩 이탈하게 만들 수 잇을 뿐이다. 로켓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결코 타격점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 타격점을 기준으로 오차 범위의 타원을 이루며 떨어진다는 사실, 그런 불확정성의 원리가 신의 은총일 수도 있다. 신이 선택한 자들은 올바른 경로를 따라가려 하지만 로켓이 그 경로를 벗어나게하는 힘도 존재한다는 것. 그러나 신의 은총이 없는 떨림은 서로를 파멸시킬 뿐이다. 물론 여기서 핀천이 말하는 신이 기독교의 신, 혹은 어떤 확립된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아마 내부의 신, 융이 말하는 공통의 꿈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 리는 그런 신의 은총 안에서 포물선에서 벗어나 달로 향하는 로켓을 꿈꾸며 지랄같은 삶을 살며 약간의 떨림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렇게 종말을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하찮은 자유라고 생각지 말라.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전부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