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머무는 곳
구나연(미술비평가)
침묵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소리가 있어야 한다. 소리는 침묵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침묵은 소리의 존재를 예기한다. 보는 행위 역시 유사하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전제로 현현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보이는 것을 통해 무화된다. 만일 회화가 보는 행위와의 필연을 맺어 왔다면, 그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와 관계한다는 것이다. 회화사를 복기해도 이것은 수많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특히 보이지 않는 것과 회화는 인간적 내면의 문제로부터 사회적 외면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접근을 축적해 왔다. 오늘의 회화 속에서, 임노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시적인 것의 확고함이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리가 클수록 침묵의 반향 또한 강렬해지는 이치와 같이, 가시성이 견고히 보유될 때 비로소 무색투명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의 작업은 보는 것뿐 아니라 보여지는 것의 관계, 즉 응시의 구조로 형성되는 맹렬한 가시적 관계와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투명한 존재의 출현과 관련된다.
임노식 개인전 <그림자가 머무는 곳(Where Shadows Linger)>은 '그림자'가 무언가의 현존에 대한 지표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상태의 지표가 머무는 곳을 탐색한다. 작은 쌀의 모판에서 돋아난 싹은 자연스러운 식생의 결과이자, 씨를 자라게 하고 모가 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작용의 가시화이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지만, 뚜렷한 그림자처럼 모판의 틈새에 깊숙이 내재한다. 가시적 객체의 존재는 그 자체를 추동하는 비가시적 힘이 응집될 때 온전한 총체가 된다. 이 힘은 대상이 존재하는 공간에 나 역시 존재하고, 대상의 변화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로 말미암아 현시한다.
임노식의 관심은 자신이 존재하고, 또 존재했던 공간에서 감지된 비가시적 힘의 작용을 회화의 장소 안에 응고시키는 것이다. 나와 대상,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의 물적 이해로 인해 휘발되어 온 대기와 현상은 재현적 외양과 내적 추상의 회화적 운용 가운데 '인상'과 '색채'라는 형식으로 역사화 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회화적 시도는 인상이나 색채의 잔향이 아닌 이를테면 '무색무취의 공기를 그리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이 깊은 시각적 침묵은 대상이라는 소음을 요청하게 된다. 매개가 필요하지 않은 공기와 달리, 그가 공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매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매개는 내가 대상을 보고 대상이 나를 보는 양가적 시선의 관계가 되며, 자신과 대상 간에 거리가 만들어지면서 공기에 대한 인식 또한 형성된다.
workroom 시리즈는 그가 작업실을 본 것과 작업실이 그를 본 것에서 생성된 대기의 상태이다. 그런데 먼저 '작업실이 그를 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작업실은 화가가 온전히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이며, 작업실 역시 화가를 그렇게 할 수 있다. 이곳은 화가의 절대적 몫으로서, 매일매일 그의 들숨과 날숨으로 채워지며, 그 안의 모든 것에는 그의 앎이 집약되어 있다. 화가에게 무엇에 대한 앎은 언제나 가시적인 상태로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그가 자신의 작업실을 안다는 것은 작업실 역시 자신을 보고 있음에 대한 실현 불가능한 차원을 그릴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형성된 화가의 시선과 작업실의 시선 간의 교차 가운데 보이지 않는 존재의 발현이 진행된다. workroom 86(01), (02)는 작업 도구와 화가의 얼굴에 맺힌 두 개의 시선이 각각 상하의 캔버스로 구축된다. 이중에 (01)은 화가가 지닌 일방향 시선으로 본 화구의 재현이고, (02)는 공간이 지닌 다중 시선을 지구 전도의 도법인 구드 호몰로사인 도법(Goode Homolosine Projection)에서 착안하여 화가의 두상을 평면 위에 펼친다. 그리고 두 화면은 재차 오일 스틱으로 덮여 뿌옇게 멀어지면서, 화면 위에 반복적인 붓 터치로 구현된 대상과 무한한 거리감을 형성한다. 그리는 행위이자 동시에 지우는 행위인 이 과정은 뚜렷한 재현을 시각적 잔상으로 상쇄시키며 무언가의 출현을 목도하게 만든다. 모판의 틈에 드리운 그림자의 힘과 같이, 불가능할 것 같은 존재의 앎이 관념의 형태가 아닌 이미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하여 비가시성의 시각적 조건에 관한 성찰로 얻어지는 일종의 멀어짐이 임노식의 화면 위에 전개된다. workroom 84와 85는 좌우의 두 벽면에 꽉 들어차 서로를 마주 향하고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은 화가와 작업실의 보고 보이는 관계의 틈 한복판에 서게 되는데, 흐릿해진 화면의 대기가 전시장의 공기와 혼융하며 우리의 호흡으로 이어진다. 회화와 대기의 고요에서 비롯되는 긴장과 정적은 결국 두 화면의 응시가 서로의 시선을 무한히 반영하며 후퇴할 때 감지되는 형체 없는 '존재의 존재'에 대한 지각을 재촉한다. 여기에 workroom 28은 집요하게 우리를 바라본다. 작업실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과 그를 응시하는 작업실의 시선, 그리고 우리의 시선 간의 역동적 대응을 야기하는 이러한 구도는 실제와 회화의 대기가 충돌하며 멀어지고 또한 가까워지는 딜레마를 생성시킨다.
사르트르는 "나타남은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부재 또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며, 대상이 존재를 숨기는 것도, 대상이 존재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라고 지적한다.[1] 어쩌면 공기를 그린다는 시각적 무모는 그것이 존재하는 세계를 대상을 통해 접근하려는 시도이다. 화가가 기거하는 공간의 대기란 그 안의 대상 하나 하나는 물론 화가 자신까지 내포한 세계의 존재이며, 그 투명한 '존재의 존재'가 시각적 관계라는 회화적 표상으로 체현되는 것이다. 그가 보는 것은 대상의 외양이 아닌 대상을 통해 돌출하는 대기에 대한 인식이며, 대상과 화가의 연결이 아닌 화가와 대상을 통해 드러나는 연결성의 존재이다.
임노식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보는 행위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온 것은 자신이 속한 세계와의 관계에서 그려낼 수 있는 것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2020년의 개인전 《Pebble Skipping》에서 workroom 시리즈는 본 것들의 뚜렷한 직접성으로 형성된 어느 공간을 제시했다. 작업실에서 보인 것들의 비선형적 시간과 풍경에 대한 정물적 접근은 자신이 현존하는 장소와 대면하며 맺어지는 시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후, 그에게 보는 행위는 명확한 시각적 경험에서 벗어나 객체에 대한 지각으로 확대된다. 2023년의 두 전시 《Deep Line》과 《Unfolded 긴 이야기》에서 직시의 완고함으로부터 멀어지며 점차 비대해진 응시는 대상의 앎에 대한 잠재적 시각성에 이르게 된다. 그는 자신이 있고, 자신이 아는 공간을 바라봄으로써 보는 행위의 범주를 재설정하고, 고유한 표현 방식을 모색한다. 예컨대 자신이 그리는 것을 즉각적으로 볼 수 없도록 동판화의 선묘 방식과 샌딩 기법을 이용한 GL 시리즈와 같이, 화가의 전지적 통제를 탈피한 방식은 보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는 작업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일관되게 그와 익숙하고 친숙한 현상에 밀착되어 있다. 그의 작업에서 일상적 풍경과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그 경험을 통해 각인된 표상들이 모두 자신의 회화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나 살아온 곳의 지리적 특성과 변화, 자신이 몸 담은 작업실의 풍경과 정물은 그에게 회화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이며 회화와의 관계가 거듭 갱신되며 작동하는 역학이 된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첫 개인전 <안에서 본 풍경>도 그래요. 주목받거나 인기를 끈 전시는 아닌데, 지금껏 연 다섯 번의 개인전 중 그 전시가 가장 좋았거든요. 이유를 떠올려보니 서사적인 내용이 강한 전시였는데, 그 방식이 가장 나다운 전시인 것 같아요. 표현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나만의 진정성이 조금이라도 상대방에게 전달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2]
그가 "나만의 진정성"이라 칭한 것은 자신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경험하여 축적된 앎의 세계를 회화적 대상으로 탐구하는 일이다. 그의 작업은 화가 자신의 존재가 확고한 체험의 시초로 작용한다. 그에게 본 것을 그리는 일은 존재의 존재함과 그 이면을 흔쾌히 개방하고, 그렇게 확대된 인식의 힘으로 시각적 지평을 관찰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하나의 세계가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가 나에 대한 일의적 방향을 갖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고, 인간에서 세계로 향함은 "나-로부터의-거리에-있어서 존재하는-사물"이 된다고 설명한다.[3] 그리고 임노식은 "나로부터의 거리"에 존재하는 객체와 세계 간의 변화무쌍한 관계에서 생성되는 틈에 주목한다. 회화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전제로, 나와 사물의 거리를 통해 가시화되는 힘의 지표가 회화의 대상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의 앎이 집약된 과거 작업을 끊임없이 반추하면서 작업 방향의 도약대로 삼는다. 그리고 그는 '내가 있고 내가 경험하는 세계'가 있을 때,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한한 양태를 회화적 양상으로 발견하고자 한다. 자신의 작업을 전거로 한 이 같은 반성적 태도는 그가 회화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과 선택에서 비롯된다. 회화라는 매체에 기댈 때 출현하는 '그림자가 머무는 곳'은 그 어떤 규정도 제약도 필요하지 않기에 존재를 둘러싼 설명 불가능한 지점에 닿을 수 있다.
[1] 사르트르, 『존재와 무』, 정소성 옮김, 동서문화사, 2011, 15-16.
[2] 김지영-임노식 인터뷰, 「키아프 서울에서 주목해야 할 젊은 작가 인터뷰 #1」, 『마리클레르』, 2023년 9월 13일 자(https://www.marieclairekorea.com/culture/2023/09/kiaf-limnosik/ 2024년 8월 2일 접속).
[3] 사르트르, 517-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