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동굴 안에서 구나연(미술비평가, 스페이스 애프터 디렉터) 스페이스 애프터는 2023년 프로젝트 《The New Cave: The Origin of Painting》을 연다. 이번 프로젝트는 "미술 함"에 대한 원초적 검토를 시도하기 위함이다. 나는 미술비평 활동을 하면서 많은 작가들을 만났고,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작업 세계를 구축해 가는 것을 목격해 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엇이 이들을 미술 하도록 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 개인이 인생의 항로와 여정을 결정한 계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왜 인류는 '미술'을 '하게' 되었는가,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미술 함'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가에 관한 의문이다.
이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의문이고, 미학사의 많은 어휘가 이에 대한 여러 고찰을 축적하고 있다. 또 누군가 "알겠다"고 하는 순간, 이 질문은 다소 유치하고 심드렁한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이를 질문하며 잠정적 대답을 쌓아갈 때, 미술의 존재 당위와 가치에 대한 신념을 갖고 미술계 안에 서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과거 절대주의가 지향한 순수의 가치에 대한 열망이 아니다. 오히려 왜 미술은 BC 이만 년 이전부터 현재까지 이토록 끈질기게 우리에게 '기생'하며 절대 떨어지지 않고 있는가에 대한 다소 사적이고 허심탄회한 입장의 토로이다. 요컨대 왜 나는 하필 하고많은 것 중에 '미술'에 매혹되었고, '미술'을 삶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 하찮은 '나'에게까지 끈끈한 유기체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는가 되짚기 위한 자의적 요구라고 해두자.
이런 중 나는 여러 이유로 스페이스 애프터를 개관했고, 2022-23년의 기획 주제를 '물질'로 설정한 뒤에도 한동안 품어온 위의 의문을 어떻게 전시로 풀어낼 수 있을지 막연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4월 운이 좋게도, 양정화의 개인전에 관한 비평문을 쓰게 되어 그의 스튜디오에서 두 번 정도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때 양정화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건물 옥상에서 거대한 작업을 펼쳐 진행하면서 햇빛, 비, 바람 등 외부의 변수가 작품 위에 그대로 남는 것은 물론 이로 인한 이미지의 변화까지 모두 작품의 상태로 포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미적 충동과 신체의 직관적 행위에 의해 자연의 상태에서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예술적 테크네로 '가져온 '(bringing-force) 것을 개념과 성소로 소독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하고, 그 가변 성 상에서 일어나는 양태를 목격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이것은 미술을 '하게 하는' 어떤 동력에 대한 본원적 태도와 그것이 개방된 세계로 나아감의 '쟁투'와 같았다. 이러한 쟁투 속에서 미술을 '하게 하는' 어떤 동력을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예술로서 이 앞으로 '가져온' 것과 우연적 상태에서 벌이는 이 쟁투가, 거슬러, 거슬러 가다 보면 동굴벽화로 나타난 의식가치 조차 거슬러 한 사람의 내면과 행위로 하여금 점 찍게, 선 긋게 하는 충동의 지점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그렇다면 양정화가 세계의 알 수 없는 무수한 변수를 화면 안에 받아들이고, 자신의 숨과 들썩이는 신체를 평면 위에 어떻게 풀어내는가를 목격하는 것이 미술의 시원적 발생을 목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또 그의 몸에서 거미줄처럼 뿜어 나오는 선들은 이유를 숙고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벌어지는 한 사건이므로. 이런 사유로 이번 프로젝트는 지금, 여기서 목격할 수 있는 회화의 시원에 대한 작은 해프닝이자, 묵직한 암시이다. 과거 동굴 벽화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며 실재의 이미지를 대신했다면, 갤러리는 미술의 등장과 전개를 품어 온 새로운 동굴이다. 그리고 새로운 동굴의 벽에서 일어나는 이번 시도는 미술이라는 이름 이전의 태초와 선사(先史)적 충동에 관한 무모하나 실험적인 언급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진행과정은 이렇다. 우선 양정화는 전시가 열리기 전 며칠 전부터 전시장 벽에 자신의 신체의 상태를 담은 직관적 선들로 드로잉을 시작한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 또는 작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그의 '그리기'는 캔버스의 틀을 벗어나, 완결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언제나 첨가되고 지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운동으로 스페이스 애프터의 벽에 반영된다. 따라서 이번 프로젝트는 시작도 뚜렷지 않고 끝도 없다. 그것은 '가져옴'의 나타남이자 사라짐이다. 또한 프로젝트 기간동안 이미지를 보는 것은 전과 후가 없는 새로운 동굴 벽화에 대한 목격, 즉 이미지 공간에 대한 변화무쌍한 응시가 될 것이다. 이렇게 이번 프로젝트는 내재적 변화를 복기하고, 외재적 변화와의 쟁투가 암시된다. 여기에 또다른 이미지로의 이화(異化) 역시 관찰하고자 했으나,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근본적인 욕구와 그 징후의 동기에만 집중하게 되어 큰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이(왜) '미술 하게 하는가' 속 시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답 없는 질문에 집중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사람이 이상해질 수도 있고, 혹은 작은 실마리를 찾는 행운의 경우도 있다. 이번 프로젝트가 후자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