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비평과 감각
2025. 09. 27. - 10. 26.
2025. 09. 27. - 10. 26.
기획: 정현, 구나연
글: 정현
작품: 박원주
공간 디자인: 서성협
북 디자인: 가능세계 지우인
장정: 헌책방옆제본공방
영상편집: 홍은기
주최: 스페이스 애프터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주체
비평과 감각
정현
이유가 무엇이든 글을 쓴다는 행위는 바깥에서 안으로 그리고 반대로 안에서 바깥으로 회오리치는 변증의 과정을 겪기 마련입니다. 내게 비평적 글쓰기는 일이자 동시에 일의 바깥을 향해 탈주하는 모순적인 대상입니다. 비평이 일인 이유는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글을 생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 자신에게 글을 강제해야만 글쓰기를 지속할 수 있으니까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미술비평은 학문적 지식만으로 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미술 현장은 펄떡거리는 생물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된 2000년대 초 미술 현장이야말로 마구 펄떡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는 무척 젊고 적극적이었으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21세기를 기점으로 한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도 한몫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IMF로 인해 폐허가 된 한국경제와 세계화라는 희망이 대비되던 당시에 미술은 시대를 밝히는 횃불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인터넷의 등장과 더불어 미술 현장은 기성의 관습을 버리고 현장과 곧바로 상호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방가르드적인 변화였습니다. 이렇듯 미술 현장이 역동적으로 바뀌는 덕분에 내게도 조금씩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당시만 해도 세상에 대한 눈이 밝지 못했던 터라 한 편의 리뷰를 쓰는 일은 형이상학적인 해석이라기보다 작가의 삶을 더듬는 과정이자, 이로 인해 현실에 대해 사유하고 질문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레 비평의 실천 과정은 세상을 탐색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글쓰기를 지속하다 보니 나의 관심은 현실, 제도, 정치, 경제, 도시, 국가로 확장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장 가까운 삶의 조건인 일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상은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닌 매우 취약하면서 동시에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은 카프카의 거대한 성(城)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에서 시민이 되어가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일로 시작한 비평은 세상을 향해 눈을 뜨고 현실의 문제를 감각하고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아가는 배움의 터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무엇이든 결국 계속 쓰는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글을 강제하는 것은 사실 글에 대한 애정이자 이 과정에서 얻는 사유의 포만감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포만감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게 비평이라는 행위는 시민으로서 세상을 알아가는 방식이자 나아가 앎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적잖게) 현실은 미술비평을 미적 대상을 평가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구화하기도 합니다. 문화예술 제도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적어도 내게 비평은 제도의 요구보다 어떤 대상을 어루만지면서 알뜰히 살피고 진단하는 과정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태도를 ‘돌봄’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비평의 대상을 더듬어가는 행위는 오롯이 나와 예술작품이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최초로 마주치는 순간입니다. 이 마주침이야말로 쿤데라가 말한 미학적 순간일 것입니다. 작품을 통해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의지는 세상을 더 촘촘히 읽으려는 노력이 아닐까요. 이 과정이야말로 비평의 기반일 것입니다. 그러나 비평은 해부를 통해 평균 혹은 객관성을 증명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작품 분석은 논리와 합리성에 다다르기 위한 기술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가려는 의지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알랭 바디우는 말라르메의 시에 대해 그것은 묘사도 표현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감동을 담아낸 그림도 아니고 “시는 하나의 작용(action)”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시는 주어진 누군가가 되기 위함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생성하라는 요구가 아닐까요. 나아가 바디우는 시 안으로 뛰어 들어가라고 요청합니다. 시의 해석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사유하기 위해 시 안에 뛰어들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비평의 실천도 시 안에 퐁당 뛰어 들어가는 행위와 유사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사유의 실천이니까요. (알랭 바디우, 『비미학』, 60-62)
배움의 비평
내게 2013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편집위원이 되면서 그간 써오던 방식과 다른 각도로 현장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용의 변화라기보다 편집부의 일원이 되어 시대, 제도, 기술, 미래, 역사, 시장, 공공미술 등 21세기 한국 시각예술 현장 전반을 가늠하고 다가올 것을 예측하고 사라지는 것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편집위원들과의 대화는 사유에서의 디테일을 살피게 해 주었습니다. 3년 동안의 활동은 개인으로서는 만나기 어려운 인물들을 직접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였고 규모 있는 전시가 구성되는 과정을 관찰함으로써 텍스트로서의 미술 읽기를 넘어 문화 차원의 미술 현장의 규모와 현장이 만들어지는 물리적 구조를 비평적 어휘로 번역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장애인 예술 현장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만남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장애인 미술에 대한 관심은 박사 연구 주제였던 ‘소수자 정체성’과 어느 정도 이어져 있습니다. 여전히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우정의 힘” 덕분입니다. 취재를 위한 인터뷰로 이어진 인연은 기회가 될 때마다 서로를 초대했습니다. 나는 당시 출강 중인 수업에 그들을 초청해 강연 기회를 주었습니다. 한번은 장애 미술과 단체의 활동에 관한 소개와 더불어 장애 당사자 작가가 직접 자신의 세계관을 소개하는 최초의 강연 퍼포먼스가 열리기도 합니다. 이후 한 번의 새로운 시도는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는 통로로 이어집니다. 사실 장애와 비장애는 장애라는 질병의 차이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장애를 부정하게 여기는 관습이 이 둘을 분리시켰고, 대부분의 비장애인은 이 선험적인 관습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이 퍼포먼스는 이후에도 내가 속한 협동조합 공간에서 재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퍼포머가 마치 점괘를 보듯 상담자와 대화를 나눈 후 상담자의 얼굴과 흡사한 공룡의 얼굴을 그려주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행위를 일반화된 미술 행위의 틀로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낙서나 그림을 끄적거리면서 서로를 탐색하거나 각자의 생각을 꺼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세계의 시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의미
장애인 미술 현장에서 일하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굳이 동시대 미술이라는 모호한 경향을 따르기보다 어떤 행위, 낱말, 물질, 장소, 생각 등이 서로 교환되고 나눠진다면 그것이 곧 ‘전시의 효능’이자 비평적 단서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아감벤은 ‘할 수 있음’을 의심합니다. 그는 오히려 할 수 없는 힘을 질문함으로써 무능력이라 부르는 것을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능력 대신 이러한 관성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멈추게 하고 붙드는 힘”으로 해석합니다. 그의 사유는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질문합니다. 장애인 미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장애인의 ‘할 수 있음’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할 수 있음은 항상 능력주의를 선호하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아감벤의 할 수 없음은 능력이 아니라 할 수 없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름일 것입니다. 즉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할 수 있는 힘의 내부에 존재하는 저항력이며 힘이 단순히 행위로 전이되는 것을 지지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스스로 잠재력이 되도록, 스스로 무능력을 거머쥘 수 있도록 만든다”라고 말합니다.(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 82)
이번 전시에 참여하게 되면서 나는 그간 내가 쓴 글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글을 모으면서 그동안 얼마나 내 글을 홀대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과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시에 참여하게 된 계기도 내 글을 천천히 다시 읽어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인들의 제안으로 확신 없이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모든 과정은 작가의 세계를 빌미로 세상 곳곳을 관찰하고 공감하는 배움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배움으로서의 비평은 여전히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개념이자 내가 살아온 삶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배움은 이론이나 미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이는 세계를 판독하는 방식이자 스스로를 사유하는 시간이며 예술의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나의 사유는 현실의 바깥으로, 중심의 주변으로, 풍경의 가장자리로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내 글에 담긴 사유를 더듬어가는 불확실한 여정에 여러분이 동반해 주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