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ways Returning, 2021. Yi Sa-Ra, First Editon for In Response: We Fight to Build a Free World at the Jewish Museum, New York.
나는 한국에 있는 나의 가족 만큼이나 미국이라는 나라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두 곳 모두 나에게 안정감을 주지 않았지만, 어떤 이유에서 나에게 소속과 인정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착취, 학대, 그리고 무시를 견디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 그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물속으로 빠지지 않고 있는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걷는 것과 같은 평범한 행동이 생존과 성취의 행위가 된다. 공포와 불안감 뒤에 오는 찰나의 안도감은 강렬하다. 그리고 그 정도 강도의 좌절감을 그 어디에서도 쉽게 느낄 수 없다. 그 좌절감을 극복하고 싶다는 희망이 당신을 가학적인 그 장소로 이끈다. “Trauma and Recovery”라는 책에서 미국 정신과 의사 Judith Lewis Herman 은 프랑스 심리학자 Pierre Janet 의 말을 인용한다. “그에 따르면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자신이 만족스러운 역할을 하거나 완전히 적응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계속 머물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적응에 노력을 기울인다.”어쩌면 내가 최초로 미국에 머무는 데에 실패한 후 6 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나의 자율성과 자존감을 되찾으려 했던 시도였는지 모른다. 내가 계속해서 원가족에게 돌아가며 되새기는 말처럼, “이번에는, 내가 더 노력한다면...”
I have as complicated a relationship with the U.S. as I have with my family in Korea: neither place provided me with the security I needed, yet they somehow provoked in me a desire for belonging and recognition. Enduring exploitation, abuse and disregard is like walking on a thin ice; as much as you fear it, you’re proud of yourself for not sinking down into the water. An ordinary activity, like walking, becomes an act of survival and accomplishment. The momentary sense of relief that comes after fear and insecurity is strong. And you don’t quite feel the same level of frustration elsewhere, making you gravitate towards the place that has mistreated you in hopes of making it better. In her book, “Trauma and Recovery,” American psychiatrist Judith Lewis Herman quotes French psychologist Pierre Janet, “[t]he traumatized person, he believed, “remains confronted by a difficult situation, one in which he has not been able to play a satisfactory part, one to which his adaptation has been imperfect, so that he continues to make efforts at adaptation.””1 Perhaps my return to the U.S. after six years away was my attempt to regain agency and self-worth after my initial failure to stay, in the same way I return to my family, repeating to myself, “this time, if I try harder...
육체가 없는 시선과 목소리
김홍기(미술비평가)
이방인은 숨고 싶다. 딱히 잘못한 것이 없어도 그저 조용히 공기처럼 지내고 싶다. 이국에서 학업을 이어 가는 유학생, 낯선 땅에서 정착하고자 하는 이민자, 생소한 환경에서 직장을 구하려는 구직자는 언제나 뚜렷한 이유가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이 거주지에 제대로 동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자신이 머무르는 지역의 공동체에 온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언제든지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이방인을 자꾸 숨게 만든다. 하지만 또한 이방인은 나서고 싶다. 아무 스스럼 없이 자신의 육체와 목소리를 드러내고 싶다. 낯선 장소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싶고,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언어를 전하고 싶고, 낯선 집단에서 충만한 자아의 실현을 누리고 싶다. 사실 이 이율배반적인 두 감정, 즉 숨고 싶은 감정과 나서고 싶은 감정은 이방인을 구성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이방인은 숨고 싶은 동시에 나서고 싶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감정이 모두 공동체 내에서 소속감의 결핍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핍된 소속감에 대한 자각은 이방인을 자꾸 숨게 만들고, 그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의지는 이방인을 다시 나서게 만든다.
이사라는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작가로서 활동한 경험을 토대로 이방인의 감정과 욕망을 다룬 비디오 작품을 만든다. 최근 그가 만든 세 편의 작품 <클린치>(2019), <탄성 밖으로>(2020-2021), <반복의 감각>(2023)이 이방인이라는 주제에 관한 그의 시선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이방인 삼부작’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한 이 작품들은 이방인으로 살아온 작가의 자전적 기억에서 시작해 어느 곳에서도 안도하지 못하는 이방인 일반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그에게 이방인이란 유학생이나 이민자 등 모국이 아닌 타지에 머무르는 사람들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이런 지리적, 행정적 기준에 따른 이방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국가와 가족에 대해서도 두렵고 불안정한 감정을 품는 심리적, 실존적 기준의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사라는 이 근본적인 차원의 이방인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클린치>는 뉴욕의 작은 아파트를 공유하는 집주인과 세입자 간의 갈등을 다룬다. 이들은 둘 다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동등한 이방인의 처지이지만, 집주인과 세입자라는 관계의 양상은 이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경제적 권력의 위계를 포함한다. 세입자 ‘사라’(작가 자신의 이름이기도 한)는 그 아파트를 촬영하여 작품을 만들고자 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집주인은 사적 공간의 촬영을 당장 멈춰 달라는 메시지를 ‘사라’에게 전한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촬영을 엄금하는 까닭은 이 아파트의 영상이 공개되면 벽이나 문 등 내부시설을 꼬투리 잡아 법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입자 ‘사라’는 집주인이 내비치는 불안감과 그로 인한 촬영 금지의 메시지에 뜻밖의 동질감을 느낀다. 집주인의 불안감이란 뚜렷한 잘못이 없더라도 무엇이든 들키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심리이기 때문이다.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숨고자 하는 심리, 예기치 못한 추방에 대한 불안은 집주인이든 세입자이든 상관없이 모든 이방인의 공통된 성질인 것이다. 즉, 이들은 경제적 권력관계의 관점에서는 갈등을 빚고 있는 주체들이지만, 같은 불안감을 안고 산다는 측면에서는 이방인의 공동체에 속하는 평등한 일원들이다.
이사라는 집주인과 세입자가 공유하는 아파트의 공간과 사물만을 그의 카메라로 담아낸다. 이 작품에는 그 누구의 신체도 등장하지 않는다. 텅 빈 복도와 계단, 가지런히 놓인 신발들, 집주인이 써 준 월세 영수증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싱크대의 수도꼭지 등 아파트의 구석구석이 마치 정적인 실내의 정물화처럼 등장할 뿐이다. 집주인도 세입자도 없는 주거공간을 촬영한 카메라의 시점은 대부분 고정되어 있으며, 드물게는 수평으로 서서히 이동한다. 이렇게 제한적이고 고집스러운 카메라의 시점은 감시 카메라의 시점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지금 이곳엔 아무도 없지만 카메라는 보초를 서듯 끈질기게 사물을 응시하며 집주인이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려 애쓰는 듯하다. 하지만 영상 속에 등장하는 그 무엇도 법적인 문제를 일으킬 만큼 수상스럽지 않다. 이방인의 불안은 그가 뚜렷한 잘못을 저질렀기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방인이라는 실존적 조건에서 비롯되는 근본적인 감정인 것이다. 이방인은 잘못된 사실이 없더라도 숨고 싶다.
<클린치>가 ‘사라’라는 세입자를 내세우며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유래된 이방인의 삶의 조건에 대한 성찰이라면, 이후의 두 작품은 다른 이름의 이방인을 등장시켜 작가의 주관적 성찰을 보편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한다. <탄성 밖으로>는 ‘다나’라는 이름의 한국인 이민자가 뉴욕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다니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어떤 독특한 내용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시신경을 양옆으로 너무 늘리면 끊어질 수 있고, 그러면 눈알이 몸 밖으로 튕겨져 나가 홀로 떠돌아다닐 수 있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그 육체 없는 시선은 화자의 주위를 맴돌면서 소리 없이 빨간 신호를 깜빡깜빡 보낸다고 한다. 점멸하는 빨간 신호는 그 시선이 다름아닌 카메라의 시선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시선은 육체에서 분리된 것이기에 물질성을 지니지 않는다. 이방인의 불안감은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 근원적인 감정이다. 즉, 육체 없이 주위를 맴도는 감시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인 것이다. 대도시에 설치된 수없이 많은 감시 카메라처럼 이 작품의 이미지는 주인공이 발걸음을 옮겨 면접에 응하는 모습을 고정된 시점으로 근거리와 원거리에서 끈질기게 응시한다. 이방인은 끊임없이 숨고 싶지만 육체가 없는 시선을 완벽히 피할 방법이 없다.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이 없이도 끊임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이방인 ‘다나’는 미비하지만 발칙한 해법을 시도한다. 자신이 임하는 면접 장면을 남몰래 녹음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비밀스러운 행동을 꾸며내어 자신을 괴롭히는 불안감에 특정한 원인을 부여한다. 이런 일탈적 장치는 혹시라도 들키게 되면 그를 비난과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겠지만, 이 구직자는 오히려 그의 비밀스러운 행동이 발각되기를 바라는 듯하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 이방인은 낯선 공동체 속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나서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탄성 밖으로> 안에서 ‘다나’의 이런 허구적인 서사는 이사라의 다큐멘터리적인 장면과 공존한다. 작품 속에서 축소된 프레임의 이미지로 삽입된 몇몇 장면은 실제로 이사라가 자신이 임한 취업 면접 현장과 뉴욕의 길거리를 슬쩍 촬영한 것이다. 작품을 이루는 대부분의 장면이 감시 카메라를 연상시키는 고정된 시점을 유지하는 반면, 이사라가 몰래 촬영한 면접 장면은 초점이 맞지 않는 흔들리는 이미지로 면접장의 천장이나 벽, 문을 겨우 담고 있을 뿐이다. 이 불안한 이미지는 숨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나서고 싶은 이방인의 이율배반적인 심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이 작품에 담긴 대도시의 요란한 소음 속에서 이방인은 조용히 숨죽여 걷지만, 때때로 육체 없는 시선에 맞서 카메라와 녹음기를 슬쩍 들이밀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제작된 <반복의 감각>은 이방인의 감정이 모국을 떠난 이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전세계를 휩쓴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미국에서 유학중인 ‘소요’가 한국으로 귀국하는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모든 이방인이 저절로 이방인이기를 그치는 것은 아니다. 팬데믹의 여파로 유목의 생활을 일시 중단한 작품의 주인공은 유년 시절을 보낸 동네로 귀환하지만 그를 포위한 불안과 부유의 감정은 여전하다. 자가격리를 위해 그의 오빠가 내어준 오피스텔로 들어온 ‘소요’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가족사의 악몽이 되살아난 까닭에 여전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주인공을 노려보는 육체 없는 시선은 타지에서나 고향에서나 여전히 집요하다. 고향에서 그가 맞딱뜨린 불안한 감시의 시선은 가족과 관련된 과거의 기억과 꿈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육체를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나 언어, 시차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실체 없는 공기처럼 무색무취한 시선으로 귀향한 ‘소요’를 여전히 뒤쫓는다. 끝내 완치될 수 없는 지독한 질병이 불쑥 재발하듯이 주인공의 기억과 꿈은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를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사라의 카메라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고정된 시점으로 주인공의 동선과 신체, 그가 지나가는 거리와 그가 머무르는 공간을 끊임없이 감시한다.
이방인을 숨게 만드는 불안감이 육체 없는 시선으로 형상화된다면, 이방인을 나서게 만드는 동화와 화해의 시도는 육체 없는 목소리로 표현될 수 있다. 이사라의 작품들 속에서 목소리는 대부분 보이스오버의 형식으로 전달된다. <탄성 밖으로>에서의 면접 장면을 제외한다면 모든 작품 속 주인공의 목소리는 화면 속 주인공의 모습과 별개로 흘러나온다. 보이스오버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주인공의 육체로부터 분리시킨다. 이 육체 없는 목소리는 꿋꿋이 발언을 이어 가지만 물질성을 결여한 까닭에 타자의 귓전에 가닿는다는 보장이 없다. 거의 침묵에 가까운, 고요와 별반 다르지 않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쉽게 묻혀 버리게 되는, 그런 목소리가 이방인의 육체 없는 목소리일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이방인의 입술을 거치지 않는, 무의식의 목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육체에서 분리된 독백의 목소리는 불안과 악몽뿐만 아니라 동경과 희망을 어떻게든 타전하고 있다. 이방인은 나서고 싶다.
<반복의 감각> 속 ‘소요’의 육체가 마치 그가 끌고 온 이민가방처럼 숙소의 침대에 웅크리면, 그 소진된 작은 덩어리 같은 육체에서 분리된 목소리는 역시 보이스오버를 통해 그가 진정으로 살고 있는 곳은 미국도 한국도 아닌 그의 무의식일지도 모른다고 되뇌인다. 그러자 화면은 뉴욕의 펜역(Penn Station)으로 진입하는 기차의 객실 장면으로 이어진다. 핸드헬드로 촬영된 이 장면은 이사라가 실제로 기차 안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적인 이미지이다. 허구의 이방인 ‘소요’의 무의식은 이렇듯 현실의 이방인 이사라의 여정과 겹쳐진다. 이사라는, 혹은 ‘사라’는, 혹은 ‘다나’는, 혹은 ‘소요’는 이 역에서 내릴 것이고, 또한 이 역에서 다른 어딘가로 떠날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 머물고 어디를 향하든 육체 없는 시선을 피해 계속 숨어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 없는 목소리로 계속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