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를 예감함
구나연(미술평론가)
살아 있는 도시는 순환한다. 유기체처럼 흐르고, 생성하고, 운동한다. 우리가 사는 거대한 어느 도시의 오늘과 지금 또한 그러하다. 혈관과 같이 이어진 도로 위를 매일 이동하고, 뼈대와 같은 도시의 경계 안에 터전을 잡고자 고군분투한다. 자본으로 수직 상승하는 부의 마천루부터, 폐허를 갈망하는 구옥의 군집에 이르기까지, 도시는 땅과 씨름하고, 흙에서 멀어지며 휘황한 대도시의 풍경을 만들어 간다. 만일 이런 도시에 ‘끝’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땅과의 씨름이 멈추고, 흙과 멀어진 것들의 물질적인 회귀가 이루어진 때일 것이다. 무너지고 사그라든 고대 문명의 텅 빈 잔해는 사라진 도시의 낡은 끝자락이다. 그것은 인간 없는 세계의 지표이면서, 땅과 흙의 시간에 잠식되는 미약한 공간의 잔상이다. 페디먼트를 떠받치던 화려한 코린트식, 우아한 이오니아식, 단아한 도리아식 기둥은 균열과 붕괴를 거듭하며 장식은 무뎌지고 기단은 꺾여 바닥에 나뒹군다.
김주리가 Seoul-style 전시에서 제시하는 기둥 또한 고층 아파트의 평면도 모양으로, 위태로운 먼 미래에 무지한 채 맹렬히 솟아오른다. 안락한 거주지를 넘어 기념비와 같이 선망되는 서울식 기둥들은 대도시의 신전과 같이 도시의 풍경을 위태롭게 떠받치고 있다. 김주리는 이 도시의 끝없는 파괴와 축조의 반복 안에서 지난히 생성되는 어떤 풍경을 만들어왔다. 그는 과거 <휘경(揮景)> 시리즈를 통해 주거지와 역사적 건축물을 흙으로 구축하고, 천천히 물을 부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처연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살아가던 동네가 아무도 없는 버려진 폐허로 변하고, 그것이 이내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지고 휘발되는 과정은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도시의 습성이다. 도시인의 몸에 배어든 파괴의 풍경은 사라지는 것들에 무감각해지는 도시의 삶을 형성하고, 서울식의 대지가 체현해 온 불안정한 욕망을 낯익은 시간으로 만든다.
르페부르는 대도시의 리듬에 관해 논의하면서, 시간과 공간, 순환적인 것과 선형적인 것의 상호작용 속에 만들어지는 반복의 형태가 측정될 때, 도시의 리듬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이번 전시에서 김주리가 보여주는 리듬은 도시의 리듬과 더불어 그 시공의 물질적 잔해에서 발현되는 커다란 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조금씩 물에 침식되며 무너져내리는 주거지와 건축물은 점차 흙이 되며 땅으로 침식된다. 이 침식과 소멸의 순환 한가운데의 장면을 펼친 <Clay Tablet> 시리즈는 너무도 익숙해버린 대도시의 변모를 멈춰 세우고,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과 필멸이 지닌 덧없음의 정서를 일으킨다.
김주리의 이전 작업인 <휘경> 시리즈가 전시의 시작과 함께 물이 부어지고 전시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잠식되어 가며 부식과 마모 끝에 전시가 마무리될 즈음 폐허의 잔해 휘발되었던 것에 비해, 이번 전시에서 점토판 작업은 그 오랜 과정을 하나의 장면으로 응결시킨다. 고대의 어휘와 같은 ‘점토판’의 형태를 빌어, 대도시의 삶에서 빈번히 마주하게 되는 소멸의 수사를 건축의 형태와 자연의 질료 사이의 서사로 기록한다. 이를 통해 도시의 공간과 시간이 만들어가는 관계는 물리적 현상에 대한 단순한 목격이 아닌 신체로 감지되는 어떤 응시로 변화한다. 끊임없는 침식의 작용 속에 응고된 <Clay Tablet> 시리즈는 흙이 고체화되고, 그것이 다시 액화되며 순환하는 물질, 즉 도시가 담겨 있다. 조밀한 지층을 형성하며 스스로 유동하는 물질들은 인간화된 구조물로는 부러 빚어낼 수 없는 자연화의 행렬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는 대도시는 ‘현재’라는 시제를 유독 선호하며, 그 시제 안에서 얻어질 이익에 불을 밝힌다. 이러한 도시의 시제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포용하는 질료의 시제와 맞바꾼다면 그것은 멈춤 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어휘를 도시의 리듬으로 삼는 것이다. 김주리에게 질료가 중요한 이유도, 조각의 재료인 흙과 매체가, 조각가에게 자연의 시간이라는 거대한 순환의 리듬을 언급하는 서언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모습(某濕)> 시리즈를 통해 문명 이전의 덩어리, 혹은 인류의 서막이 거석문화로 기원했던 자연에 대한 경이를 보여준 바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순환을 인류 문명의 전진을 역으로 되돌려 도달하게 하는, 바슐라르의 말을 빌자면, “질료적 상상력의 무한한 양식인 풍부하고 농밀한 몽환적 질료가 그득한 이미지”로 제시하려는 김주리의 태도와 관련된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Column> 시리즈는 고대 문명의 신전 건축과 같이, 오늘의 도시가 지닌 폐허 예감에 접근한다. 태양과 별빛을 통해 쌓아간 거석과 신전의 신화는 현재에 이르러 마천루와 자본에 관한 맹신과 토템으로 변화한다. 김주리는 아파트 재건축을 위해 부서진 옛 주거지의 잔해들을 직접 수집하고, 이를 무수히 갈아내고 빚어내 만든 재료를 이용하여, 그곳에 대신 들어선 아파트 단지의 평면도 모양의 기둥을 세운다. 그것은 황폐화된 신전의 기둥 잔해처럼 주두(柱枓) 없이 위태롭게 서 있거나 바닥으로 쓰러져 있다. 시공이 역행하여 고대가 되어버린 도시의 기둥 사이를 걸으며, 우리는 문명들이 겪은 역사, 그 말미의 풍경에서 아무도 예외일 수 없음을 직감하게 된다.
또한 이것은 결국 순환할 수밖에 없는 문명의 리듬이면서, 자연의 응당한 리듬일 수밖에 없다. 그 리듬이 향하는 곳은 <peaks> 시리즈로 재촉하는 완전한 풍화 혹은 온전한 땅이다. 이것은 어느 도시의 잔해이자, 다시 생성되고 있는 자연의 힘이다. <peaks> 시리즈를 퇴화라고도, 파괴라고도 부르기 주저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분명 자연에서 비롯되어, 하여 인간에게 비롯되어, 다시 자연으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김주리의 작업에는 고전적인 낭만주의가 지닌 허무의 정서와 질료로부터 발현되는 생성의 희구가 교차한다. 그것은 고대를 품은 오늘이면서, 폭력적으로 허물어져 가는 폐허의 양산에 대한 반영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필시 도래하게 될 순환의 시간에 관한 사유가 빚어낸 풍경으로 회집된다. ‘폐허를 예감함’은 곧 자연을 예감함이며, 또한 도시를 예감함이 되는 거대한 순환이 그의 작업을 육중하게 지탱한다. 이는 단순히 대도시의 양태를 비판적 어조로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라는 문명에 관한 어떤 축도이므로, 우리가 전시장을 걷는 일은 무한한 생멸의 도시 안에 잠시 기거함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