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적헤적
구나연(미술비평)
책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책의 경험은 독서와 다르다. 독서는 순서에 따라 문자를 읽으며 마음의 양식 한 줌을 기대한다면, 책을 경험하는 일은 표지를 훑어보고, 책을 집어 들어, 종이를 만지고, 촉감을 느끼고, 헤적헤적 페이지를 뒤적거리고, 그 소리를 듣고, 어느 따분한 문장에서 획 덮어 책장에 두었다가 갑자기 생각나 꺼내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다. 지극히 명료한 사각의 사물인 책은 내용을 담기 위한 단순한 용기가 아니며, 그 자체의 논리와 미학을 지닌 공감각적 산물이다.
그중에서 미술책은 문득 떠난 여행지에서의 장기체류와 같이 모든 감각으로 오랜 시간 경험할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전시장에서 미술 작품을 접하는 일이 단기 체류의 강렬함을 지닌 것에 비해, 미술책에서의 장기체류는 펼칠 때마다 날씨가 다른 거리의 산책이다. 수많은 작가와 전시가 도록을 출간하고, 첨단의 매체 환경으로 디지털 콘텐츠는 일반화되었으나, 미술책의 수요는 여전히 특별한 것으로 다가온다. 궁극의 카탈로그 레조네를 향한 상업적 역할이 아닌, 한 작가나 전시의 기록물이라는 상투적인 역할을 넘어서, 미술이 책이 된다는 것 혹은 책이 미술이 된다는 것은 책의 경험에 대한 신뢰와 추론을 요청한다. 미술책은 물질 자체로서 전시장과는 다른 확고한 공간이며, 그 영토를 구축하는 독자적 형식이자, 누구나 자유로운 시간의 서사이다. 여기서 미술책의 힘이 시작된다.
스페이스 애프터의 기획전 <헤적프레스>는 미술의 책이 지닌 절대적이며 독립적인 힘을 추출하기 위함이다. 미술책은 작가, 작품, 전시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독자적인 디자인으로 구조화 한 인쇄물이다. 벤야민이 기술 복제를 이야기하며 소유에 대해 언급했듯이, 미술책은 작품에 대한 간접적 획득이지만, 직접적인 책으로의 체화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용과 작품의 작동이 판형의 공간과 지면의 시간으로 압축되면서, 미술의 현존은 이미지와 텍스트로 재매개화되고 독자의 손에 들린 사물의 감각으로 이행된다. '작품이 책이 되는' 그 섬세한 은유는 '책 만드는 사람들'의 확고한 철학으로 빚어질 때 현현하여 독자의 경험에도 영향을 미친다.
헤적프레스는 미술이 책이 되는 과정과 방식을 지난 십여 년간 꾸준히 실험하고 실현해 왔다. 박연주 디자이너와 정희승 작가가 의기투합하여 이끄는 이 작은 출판사는 크게 작품집과 Float 시리즈라는 두 개의 터빈으로 가동된다. 헤적프레스의 두 사람, 작품집과 Float 시리즈의 두 동력, 작가와 책이라는 두 본질, 그리고 이렇게 두 번 되뇌는 "헤적프레스", "헤적프레스"의 더블 트랙이 하나의 공간에 결집하며 <헤적프레스> 전시를 이룬다. 헤적프레스에서 출간된 작품집과 Float 시리즈를 직접 펼치고 만지면서, 이번 전시는 미술책이 지닌 특수한 매혹과 함께 미술을 책으로 접하는 일의 특별한 의미, 그 견고한 질서와 협주의 발견을 제안한다.
작품집
내가 미술책의 힘을 체험한 순간에 헤적프레스가 있었다. 그 중 첫 번째는 정희승의 작품집 『기억은 뒷면과 앞면을 가지고 있다』(2019)를 접했을 때이다. 나는 정희승의 작업에 매우 적극적인 독자이고, 또 마침 그 작품집의 모티브가 된 국군광주병원을 광주비엔날레 당시 다녀온 뒤였다. 그러나 그 책을 펼쳤을 때, 적극적인 독자나 광주비엔날레의 여정과 같은 잡다한 소음은 모두 휘발되고, 책의 육체를 지닌 또 다른 이미지의 세계가 나타났다. 이 특별한 감각이 주는 고양, 이미지의 말 없는 언어, 문자들이 지닌 감촉은 작품의 미학과 더불어 책의 물질, 배치, 구조, 외양이 견인하는 강력한 밀도에서 비롯하고 있었다.
두 번째 사건은 박형지의 Green Men(2018)에서 일어났다. 나는 박형지의 작업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독자의 입장이어서, 그의 동명 전시에서 모두 조금씩 다른 열네 점의 이미지를 접하고 이를 파고들던 중 이 책을 접했다. 얼핏 보면 유사해 보이지만 모두 다른 이미지로 구성된 Green Men은 한 권의 책이면서 동시에 열네 권의 책이 되는 공공연한 마술을 벌이고 있다. 똑같은 "Green Men" 같지만 각기 다른 순서로 묶여 열네 개의 표지 버전으로 되어 있기에, 독자는 자신의 책에 걸린 주문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그 술법에 걸려버리는, 이를테면 최고 난도의 마술에 걸리게 된다. 나조차 '아, 마술에 걸려 있었구나'라는 것을 수년이 흐른 후 알 정도로, 생동하는 유머를 지닌 이 책은 작품과 작품집이 유기적인 한 몸의 결집체가 된다.
이는 헤적프레스의 작품집이 각각의 프로젝트마다 상이한 작업 방식을 갖고, 작가의 현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책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접근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박연주는 이에 대해 "이 작가에게 이번에는 가벼운/무거운 같은 무게, 부드러운/견고한 같은 경도, 차가운/따듯한 같은 온도 등과 같은 판단이 시작되는 것은 디자이너로서의 철학과 관점이 반영되는 지점이다. 이 책을 작가의 어떤 맥락으로 포지셔닝 할 것인가 결정하는 일은 그저 멋있는 책이 아니라, 헤적프레스의 해석을 통해 작가에게 필요한 책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의 내적 기준을 통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 헤적프레스 책의 위치와 관련된다"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품집 옆에 자리한 <못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인다>(2024)는 이 같은 헤적프레스의 뉘앙스에 관한 암시이다. '못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줄여' 나무 자체의 이음으로 만든 단단한 고가구같이 시각적 사족 없이 정교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의 품격과 인쇄 입자 속에서 은빛의 이미지로 현시하여 유연한 책의 균형과 미학을 보여주는 사진이 직관적으로 결합될 때, 우리는 헤적프레스의 철학에 대한 조용한 발화를 듣는다.
이번 <헤적프레스>에서는 그간 출간된 작품집 중 작가가 전시를 거부한 한 권을 제외한 스물한 권의 작품집과 곧 출간 예정인 가제본 상태의 작품집 한 권을 포함하여 총 스물두 권이 전시된다. 각각의 작품집은 모두, 책을 필요로 하는 작가의 시점과 그 작업의 의미에 대한 적확한 경험이 될 수 있도록 각각의 고유한 무게와 질감, 서체와 배치, 색조와 음조 같은 섬세한 디자인의 끈으로 묶어낸 결과이다. 이것은 작품이 지니는 중력을 인쇄물이라는 매체의 중력으로 받아내는 일이며, 책의 매듭으로 형성된 작품의 특수한 객체화를 통해 관객과 대면하는 또 다른 관계의 발생을 맞이하게 된다.
앙드레 말로가 '상상의 뮤지엄'이라고 부른 것처럼, 작품집 안으로 들어선 관객은 전시장이 지닐 수 없는 넓은 공간과 긴 시간의 스펙트럼과 마주한다. 작품의 물리적 제약을 책의 형태에 위탁할 때 새롭고 무한한 확장이 가능한 것과 동시에, 독자의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행위가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책을 만든 사람들의 기준과 철학이 은밀하고 투명하게 반향을 일으킨다. 따라서 책은 언제나 두 개 이상의 정황 속에서 움직이며, 어느 하나의 결락으로도 도달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작품집을 작가의 작품에 대한 부가적인 위치로 상정하거나, 그저 작품의 일부로서 작가가 온전히 소유할 수 있다는 과잉을 범해서는 안 된다. 책은 모두의 것이기에,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 '이 책이 내 작품'이라는 오류는 결국 낡은 작가주의의 무뚝뚝한 위생 관념일 뿐이다. 책의 크기와 똑같은 하나의 텅 빈 좌대 앞에서 무한한 '상상의 뮤지엄'을 잃어버린 어느 책의 존재를 목도하게 되는 것도 그 까닭이다.
Float
<헤적프레스>의 개막과 함께 13권을 출간하는 Float시리즈는 올해로 십년이 되었다. 매 권 새롭게 갱신하는 반응들로 축적되며 묵직한 더미를 만들어 온 이 시리즈는 유동하기 위해 가볍되, 본원적 형식을 엄격히 지키며, 종결 없는 한 권의 책을 만들어가고 있다. 국전지를 한 장을 접었을 때 나오는 열 여섯 페이지의 지면을 작가에게 제공하고, 그것이 작가의 온전한 공간으로 소급되어 새로운 작업이 된다. 나는 이 시리즈를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무거운 책이라고 부르고 싶다. 'float'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게 될지 모르는 가벼운 인쇄물의 유동성과 실제 전시장과 똑같은 무게를 지닌 지면의 물리적 필연성이 결합하여 급진적인 미술책의 가능성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총 열세 권이 된 Float는 미술작가 뿐 아니라 사운드, 무용 등 다양한 장르에 개방되며, 이를 통해 시리즈 자체의 독특한 리듬과 시퀀스를 지닌다.
정희승은 Float 시리즈에 대해 "나도 작가이고, 작가로서 이 작업에 참여한다. 이를 매개로 하여 한 사람의 세계를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가의 어떤 생각(만일 그것이 생각이라면)을 열여섯 페이지에 온전히 구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혼자서 작업하며 무엇을 완성하는 것과 달리, 생각을 주고받는 것을 통해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일은 매우 다른 작업이며, 아티스트로서의 고독과 외로움이 Float 작업을 통해 많이 이완되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어떠한 선행 제도의 영향도 받지 않고, 고착된 시스템을 우회하면서, 인쇄용 국전지에서 출발한 이 경제적인 예술은 지면이라는 특별한 공간적 구조를 지닌 사물을 변주하고 해석하는 일이고, 작가와 헤적프레스가 주고 또 받는 조합이며, 책과 미술이 서로를 인용하는 역동적인 투영이다.
Float는 헤적프레스의 급진적인 실험의 지향점을 가리키고 있으며,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사유와 예술로서의 추동이 교차하는 영토이다. 이 책은 작가에게 하나의 다른 출발일 수 있고, 전혀 다른 작업의 형태일 수도 있다. 책이라는 전시장에 작가를 초대하고 신작을 의뢰하는 일은 보편적인 전시의 단계와 결부되는 대신, 책을 채운 작가의 작업을 현미경과 같이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들에 다가가고, 그들을 이해하고, 이것이 또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서사를 형성한다. 책은 독자의 손에 들려 나름의 순서와 나름의 정서로, 격이 없이 깊숙한 상호작용을 끌어낸다. 따라서 Float 시리즈는 책을 둘러싼 여러 행위를 작업의 과정으로 포용하고, 헤적프레스의 뉘앙스를 통해 구현된 작품으로서의 책 혹은 책으로서의 작품이 지속되는 시간이다. 급진적이고 전략적인 기획으로 천천히 오래오래 부유하는 Float의 돛에는 한 권 한 권의 ISBN과 공통의 ISBN 978-89-97973-03-3 모두가 새겨져 있다. 어디서 끝날지 모를 이 책은 그 자체가 역사가 되고 있으며,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계속하는 스타일"(박연주)과 "작게라도, 천천히 가더라도, 계속 가자"(정희승)는 두 기세의 순풍으로 긴 항해를 계속할 것이다.
헤적프레스에서 출간된 책들의 간기(刊記)는 한 권의 책에 응집된 여러 힘의 시각화이며, 작품집 전체에 내밀히 작용하는 디자인의 뉘앙스가 오롯이 함축되는 장소이다. 작품집의 맨 마지막에 있으면서 책 전체의 무게를 지지하는 간기로 구현된 설치 작업 <colophon>(2024)은 저마다의 책이 흡수한 아름다운 역량과 많은 이들의 노고를 보여준다. 이는 한 권의 책이 오직 헤적프레스만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많은 헤적프레스들이 중첩되어 비로소 세상에 나오는 책들에 대한 메타포이자, 거기 있는 많은 이름에 보내는 인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헤적프레스 책들의 <List>(2024)가 맞은편에 새겨진다. 미술책이라는 무기물이 생명을 지닌 사물로 되는 일은 각각의 책들에 새겨진 작가들의 사유와 진술, 그리고 그 본디 의미의 잔향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작용할 때이다. 헤적프레스의 출간 목록은 미술을 책으로 경험하기를 여전히, 맹렬히 갈망하는 어떤 요구의 산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미술을, 책을 통해 경험하고 간직하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미술이 갈망하는 결핍된 공간과 시간이 책이라는 사물 속에 유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며, 다른 무엇도 아닌 책만이 줄 수 있는 미술과 우리의 능동적인 접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헤적헤적 책 속을 걸을 때, 미술도 헤적헤적 나에게 걸어 온다.
헤적헤적1 1. 부사) 무엇을 찾으려고 잇따라 들추거나 파서 헤치는 모양. 2. 부사) 탐탁하지 아니한 태도로 무엇을 잇따라 께적거리며 헤치는 모양
헤적헤적2 활개를 벌려 거벼이 저으며 걷는 모양
헤적헤적하다1 1. 동사) 무엇을 찾으려고 잇따라 들추거나 파서 해치다. 2. 동사) 탐탁하지 아니한 태도로 무엇을 잇따라 깨적거리며 헤치다.
헤적헤적하다2 동사) 활개를 벌려 거벼이 저으며 걷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search?query=헤적헤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