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라(더 스트림 디렉터, 미술비평)
Sera Jung(THE STREAM director, art critic)더 스트림과 스페이스 애프터의 협력 기획 《장소의 시 時/詩》는 김재민이, 박선민, 엘리 허경란의 영상을 매개로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감각되는 시간의 시적 정서와 리듬을 발견한다. 그것은 레이온 공장의 흔적을 쫓는 몸짓의 시간이고 노르웨이 최북단에서 발견하는 신화의 시간이자 버섯이 움트고 소멸하는 서사의 시간이다. 세 작품이 보여주는 장소는 서로 다른 문을 가지고 있다. 그 문을 열고 마주하는 시간은 영상이라는 예술만이 생산하는 장면들의 연쇄로 인해 저마다의 리듬을 생성한다.
1.
김재민이의 <레이온 공장 달리기>(2023)는 레이온 공장의 흔적을 찾아 일본의 시가현, 한국의 남양주, 중국의 단동을 배경으로 달리기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영상은 달리는 순간들의 점유를 제 현장 삼고 조각난 시간을 이어 붙이듯 레이온 생산 기계의 궤적을 쫓아 달린다. 달리는 몸짓은 장면에 리듬을 부여한다. 기계가 이동하고 남겨진 장소는 공장이 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기도 하는데 장소가 바뀔 때마다 시퀀스의 리듬도 함께 변화한다. 작가는 이러한 장소들을 수행하듯 달리다가 이내 어떤 희열과 마주한다. 그것은 기계가 생산을 멈추고 다시 자리를 옮겨 노동의 시간으로 갱신되는 것과 달리 비-노동적인(운동) 순간의 유희와 마주하게 되는 찰나일 것이다.
2.
엘리 허경란의 <북극 정원>(2024)은 노르웨이의 최북단 지역에서 촬영되었다. 북위 78도 세계 가장 북쪽, 그 장소의 시간은 산도 광활한 대지도 구분되지 않는 설원의 풍경처럼 낯선 리듬을 갖는다. 작가는 ‘정원’이라는 장소의 원화 안에서 극지방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동물, 식물을 응시하는 관찰자이다. 북극에서 긴 겨울을 나야 하는 사람들은 풀과 이끼 같은 작은 미물에도 애정을 기울인다. 추운 외부 현실과는 대조되는 실내 푸른 풍경화는 매우 짧지만, 여름이 오기를 기다리는 희망을 상징한다. 작품에서의 ‘정원’은 눈으로 덮이기 전에는 생동하는 식물들의 근원이자 세계였다. 그것은 생명의 순환이 멈춘 듯하지만, 순록과 마주치거나 작은 식물의 잎을 발견할 때 다시 작동하는 자연과 인간이 맺는 유기적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국 그것은 다름 아닌 장소와 시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탄생하는 신화적 장소가 된다.
3.
박선민의 <버섯의 건축>(2019)은 제주도의 숲 생태를 관찰하며 건축과 인간의 관계를 버섯의 생성과 소멸로 은유한다. 버섯을 큰 스케일로 근접 촬영하여 생태의 내밀한 부분까지 드러내는 영상은 거대한 숲에 존재하는 미물로서의 버섯을 인간의 삶과 유비하고 버섯의 구조를 건축과 중첩하여 인간-버섯-건축을 순환하는 삶과 죽음으로 상상하게 한다. 또한 영상은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함께 낮은 시점으로 관찰된 버섯의 생태적 순간을 느리게 포착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시각과 촉각의 표면을 리드미컬하게 감각하게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상에 건축가들의 건축에 대한 보이스오버로 인해 카메라로 분해되는 감각적 탐닉이 주는 시적인 정서와 충돌하거나 미끄러지면서 묘한 리듬을 자아낸다.
레이온 공장 달리기
Rayon Plant Run, 2023
single channel video, 12 min 30 sec
964년, 일본의 모 레이온 공장 설비가 한국으로 넘어왔다. 동 설비는 1993년 중국으로 건너가 가동되다 2000년대 초에 자취를 감추었다. 3국 모두에서 설비의 흔적만 남아있고, 생산 설비는 찾기 쉽지 않은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서 계속 생산되는 레이온, 비스코스, 인견, 모달 등의 제품군은 이름을 달리해 오직 생산품만이 친환경 라벨을 달고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김재민이는 한 명의 도시 거주자, 그리고 상품의 소비자로 언급한 상품으로 ‘그린 패션' 을 착장한다. 그리고 공장의 흔적을 찾아가 뛰며 몸으로 공장 이동의 동선을 따라간다. 오래 달리기는 인간 생존의 원초적 행위였지만 이제는 도시 거주자의 레저 활동으로 향유됨을 가정한다. 동시에 도시의 탄생과 팽창이 공장의 이동을 초래함을 인지하며 달리는 행위로 도시의 승리를 기념한다.
버섯의 건축
Architecture of Mushroom, 2019
color, sound, single channel video, 15 min 18 sec
버섯의 건축>(2019)은 특정 범주의 자연 생태계를 관찰하고 과거와 미래 사이에 현존하는 고유 공간을 재발견하려는 인간의 삶의 태도에 투영하여 미시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제주도 곶자왈의 숲속 버섯을 휴먼 스케일보다 크게 촬영한 영상은 거대한 자연에 숨겨진 생태계의 가장 작은 영역에 주목하므로 추상화된 장소를 예민하게 포착하여 내면화한다. 버섯이 하나의 밀착된 감각의 장소로 뒤바뀌는 원테이크 형식의 영상은 건축가들의 나레이션과 함께 각자가 사유하는 시·공간과 맞물려 그들의 이야기가 곧 버섯의 이야기가 되어 시간의 획일성을 단절시킨다. 건축가들이 말하는 우리 삶에 밀착된 개별 장소는 사물 혹은 자연을 인식하는 일차적 경험의 원리가 수반된 장소성에 가깝다. 이렇듯, 흩어진 사물과 생태, 나아가, 인간 삶의 본질을 기억해내려는 시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연으로 넘겨지거나 공유되는 시공간에 귀기울이는 지속적인 관찰에서 출발한다.
북극 정원
ARCTIC GARDEN, 2024
HD video, colour, sound, 32min 50 sec
북위 78도 -27도 이하로 기온이 떨어지는 세계 최북단 정착지, 그곳에는 어떤 종류의 정원이 펼쳐질까? 바다와 땅 그리고 하늘이 폭설로 뒤덮여 몇 달 동안 해가 뜨지 않은 긴 겨울, 식물은 이러한 극한 환경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북극의 정원, 그것은 얻을 수 없는 꿈일까, 아니면 가치 있는 추구일까?
<북극 정원>은 관찰과 명상 그리고 상상을 통하여 “하나의 그늘이 다른 그늘에 녹아드는” 장소를 이동하며 “그들이 모두 거기에 있는”, 즉 공간과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유토피아적 정원을 탐색한다(Fridtjof Nansen, Farthest North, 1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