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본 소년
지브리의 소년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파즈도, 톰보도, 하쿠도, 소스케도 없다. 꿈을 좇다 비극을 맞이한 지로마저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하 <그어살>)에는 어두운 시대에 덩그러니 놓여 슬픔을 억누르고 상처에 신음하며 거짓된 얼굴을 하는 소년만이 보인다.
지금까지의 지브리 영화를 살펴보면 강인하고 지혜로운 소녀, 밝고 긍정적인 소년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랫동안 피했던 일, 내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쾌활하고 밝고 긍정적인 소년에 대한 영화를 몇 편 만들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나 자신이 정말 우울한 사람이었기에 소년이라는 건 좀 더 어둡고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자신이 지금까지 그려온 소년상이 실제 자신의 모습과 괴리가 있었음을 고백했다.
즉, <그어살>은 82세의 거장이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했음을 밝히는 영화다. 다시 말해, 관객이 지브리에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펼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 1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1. 가려진 하늘
모두가 잠든 밤, 요란한 사이렌이 사람들을 깨운다. 바람은 매캐한 냄새를 싣고 붉은빛이 하늘을 물들인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우리가 마주한 건 전쟁의 참상이다. 그것도 실제 역사적 사건인 태평양 전쟁의 한복판에 떨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왜 태평양 전쟁을 직접적으로 끌고 왔을까. 당연히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리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근대적 풍경과 전쟁의 폭력이 고스란히 그려진 바 있다. 오래전부터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전히 일본이 근대적 가치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개인이 억압당한다고 보았고 이를 작품 속에 녹여냈다. 그렇다면 <그어살>의 시대적 배경이 태평양 전쟁인 것도 이러한 믿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근대는 인간의 이성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문명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 있어 합리적이지 않은 가치들, 비과학적인 요소들은 방해물로 여겼다.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따라야 한다. 이는 곧 보편성으로 이어진다. 개인은 무시되고 모두가 동일한 가치 아래 단결하는 것. 문명이라는 톱니바퀴를 작동시키기 위해 개개인이 도구가 되는 것. 그리고 이에 반하는 것들은 제거 대상으로 삼는 것. 이렇듯 근대는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켰고 제국주의와 같은 위험한 사상을 촉발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증기 기관차의 매연, 거대한 군함들이 하늘을 뒤덮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이상향이란 푸른 하늘이다. 전쟁, 근대, 군국주의 일본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상향은 실현될 수 없다. 또한 하울이 어릴 적 마법사 설리먼과 국가에 의해 착취당할 뻔한 것도 개인을 국가의 부속품으로 개조시키려는 전체주의, 군국주의의 폭력을 은유한다.
<그어살>에서는 화재로 인한 불길과 연기가 밤하늘을 가린다. 마히토의 절규와 건물이 붕괴되면서 내는 굉음은 이후 탱크가 진격하는 소리로 전환된다. 마찬가지로 하늘은 거리를 가득 메운 일본군과 그들을 지켜보는 군중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다. 전쟁은 소중한 사람을 앗아가고 국민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군국주의 일본은 이러한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전쟁의 확산으로 뛰어든다. 국민은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2. 소년은 울고 있었다
이제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주인공 마히토를 알아보자. 마히토는 어린 소년이지만 깍듯하고 성숙해 보인다. 커다란 상실을 경험했지만 결코 남들 앞에서 티를 내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장한 모습일 수도 있고, 새어머니 나츠코의 말처럼 ‘훌륭하게’ 자란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히토의 이러한 성격은 국가의 정체성 주입에 따른 결과처럼 다가온다. 국가 권력에 복종하고, 전쟁 승리에 기여하는 것이야말로 군국주의 일본이 바라는 것이 아니던가. 마치 하울이 우는 법을 잊어버린 괴물이 된 것처럼 마히토도 타인에게 약점, 상처를 노출하지 않고 국가가 내건 가치에 충성하도록 교육받은 것이다. 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일본군 출정식을 향해 인사하는 장면에서 더욱 삭막하게 연출된다. 철저히 교육된 기계적인 인사와 공허한 소년의 눈. 군국주의의 시대상은 이처럼 참혹하기 그지없다.
마히토도 분명 슬프다.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상처다. 이런 슬픔이 씻겨 내려가기도 전에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결혼했고 새어머니는 동생을 임신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참아야 한다.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것이 가정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동을 억누르기만 할 수는 없다. 이는 마히토가 홀로 남겨졌을 때 폭발해버린다. 가령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꿈으로 나타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심지어 자해를 하며 상처를 내기에 이르는 상태로 악화된다. 이는 마히토가 여전히 관심이 고픈 아이면서 어머니의 부재와 곧 태어날 동생이 그를 고립시키고 있음을 나타낸다. 거기에 더해 전학 간 학교에서도 배척당하니 자신에게 상처를 내면서까지 슬픔과 분노를 표출한다. 마히토는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너지기 직전의 소년이다. 그렇기에 <그어살>의 세계에서는 지브리의 소년이 나오는 게 불가능하다.
3. 아버지라는 존재
이 소년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는 정녕 없는가. 겉보기에는 마히토의 아버지 쇼이치가 그를 지탱해 주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쇼이치는 분명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맥락을 살펴보면 다소 다르게 다가온다. 쇼이치는 마히토가 다친 것에 분노하면서도 오직 누가 상처를 냈는지 밝혀내고 복수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 와중에 학교에 거액을 기부했더니 교장이 깜짝 놀랐다며 요양 중인 마히토 앞에서 으스대기까지 한다. 이때 쇼이치의 모습은 화면 가득 채워지며 마히토를 내려다보는 구도다. 다소 위협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 장면은 마히토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게 만드는 장면이다. 심지어 이때 쇼이치는 마히토와 할머니와의 대화를 끊으며 화면 안으로 침입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쇼이치는 마히토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흉터가 남겠지만 머리카락이 자라면 안 보일 거라고 말한다. 상처를 서둘러 봉합하고 흉터를 가리려 하는 아버지는 마히토의 상처, 감정을 헤아려 보려고 하거나 공감 혹은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빨리 나아서 아픈 새어머니에게 문병을 가라는 말을 한다.
쇼이치는 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기보단 자신의 위상을 고려하는 언행을 이어간다. 또한 자신이 운영하는 군수 공장에 집착한다. 즉, 영화는 그가 전쟁 부역자라는 걸 명확히 한다. 앞서 전쟁은 마히토의 어머니를 잃게 만들고 하늘을 가려버렸다고 한 바 있다. 따라서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고 가부장적이며 자신의 위상을 중요시하는 쇼이치는 근대적 남성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긍정적으로만 그려질 수 없는 인물이다.
이러한 비판 의식은 쇼이치가 마히토와 나츠코, 키리코를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그는 일본도를 차고 탑으로 향한다. 만약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버지를 향해 무한한 존경을 보내고 근대 일본을 낭만화할 생각이었다면 아버지가 가족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마히토를 발견한 쇼이치는 몰려드는 앵무새 떼를 향해 일본도를 휘두르지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새똥을 뒤집어쓰고 마히토가 앵무새로 변해버렸다며 울부짖는다. 가부장적 아버지, 근대적 남성성은 그 무엇도 해결하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꼴을 당한다.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족을 안게 되는데, 이는 쇼이치가 시선을 공장과 전쟁, 부에서 온전히 가족에게로 돌렸음을 의미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근대적 남성성을 조롱하고 해체한다.
4. 반전된 꿈
마히토의 어두운 내면은 주로 꿈을 매개로 드러난다. 그의 꿈은 주로 어머니의 부재를 상기시킨다. 다음 장면을 살펴보자. 밤에 잠이 오지 않는 마히토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와 2층 계단에 앉는다. 잠시 후 현관에서부터 불길이 빠르게 치솟더니 “마히토, 구해줘. 마히토”라며 어머니의 음성이 들린다. 불길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 구해달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히토는 혼란스러워한다. 바로 다음 장면, 마히토가 눈을 뜨며 깨어난다. 당혹스럽다. 앞서 일어난 장면은 마히토의 꿈이었던 걸까.
다시 장면을 복기해 보자. 마히토는 불길이 자기 몸을 감싸는 걸 본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달라는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가 아는 현실은? 어머니는 화재로 사망했다. 마히토는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결혼했다. 새어머니는 동생을 임신했다. 마히토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아마도) 마히토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현실이 두렵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어머니가 필요하다...
사실은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오히려 어머니로부터 위로받고 싶다는 갈망이 이러한 환상과 환청, 꿈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다시 말해, 마히토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구원의 요청이 어머니가 마히토에게 보내는 구원의 요청으로 반전되어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왜곡은 마히토가 자신의 트라우마에 더욱 집착하게 만든다.
5. 상승과 하강, 의식과 무의식
영화에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반복된다. 그리고 우리는 일련의 사건들이 마히토의 무의식 혹은 꿈이 형상화된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무의식과 꿈의 언어는 현실의 언어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정에 힘을 싣는 장면으로는 대표적으로 왜가리와의 대면을 뽑을 수 있다. 마히토는 왜가리를 향해 목검을 휘두르며 정체를 밝힐 것을 요구한다. 이에 왜가리는 “당신의 모친께서는 살아 있습니다. 당신이 구해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이 펼쳐지자 마히토는 당황한다. 얼어붙은 마히토 주위로 잉어가 뛰어오르고 두꺼비들이 달려든다. 이때 나츠코가 나타나 화살로 왜가리를 쫓아내고 저택의 할머니들도 뒤를 따른다. 나츠코와 할머니들을 확인한 마히토는 쓰러진다.
다음 장면, 마히토의 신체가 물속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물이 빠져나가고 마히토는 방 안에서 깨어난다. 이어 자신을 간호하러 온 할머니에게 왜가리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의아해하며 꿈을 꾼 것 같다고 말한다. 왜가리와의 대면도 꿈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앞선 장면은 달리 보인다.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왜가리의 말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반전된 꿈의 연장선일 것이다. 중요한 건 나츠코와 할머니들이다. 나츠코와 할머니는 왜가리로부터 마히토를 구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왜가리가 어머니를 언급하며 마히토의 트라우마를 계속해서 건드리는 건 마치 마히토로 하여금 트라우마를 바라보라고, 트라우마로 향하라고 손짓을 하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나츠코와 할머니들의 등장은 무의식과 트라우마로 향하려는 마히토를 막아내는 방어 기제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하는 길은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마히토의 새로운 보호자인 새어머니와 할머니들이 개입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마히토의 신체는 꿈에서 현실로 깨어나는 것을 은유한다. 즉, 영화에 나타난 상승의 이미지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향하는 마히토를 나타낸다. 재밌는 건 반대의 상황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탑에서 왜가리의 안내를 받으며 이세계로 향할 때는 몸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마히토는 이세계로 ‘떨어진다’. 하강의 이미지다.
결국 영화가 그려내는 본격적인 여정은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이어진다는 걸 알려준다. <그어살>은 마히토가 자신의 무의식, 그리고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로 향하는 여정이다.
6. 그림자로 향하다
이러한 마히토의 모습이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동안 외면해 온 소년의 모습이자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밝고 긍정적인 소년을 그려온 미야자키 하야오가 사실은 무의식에 내재된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는 얼굴을 한 마히토가 상실과 상처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내면을 드러내기와 무의식으로의 여정은 융이 말한 것처럼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그림자를 마주하는 과정이다.
융은 페르소나와 그림자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페르소나는 외면적으로 보이길 원하는 자신의 모습, 사회적 가면이다. 이는 자신의 진짜 모습, 진정한 자아와 다르며 오히려 자신을 은폐시키려 한다. 그에 반해 그림자는 무의식에 들어 있는 자아의 어두운 측면을 의미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두려워하는 것들이 자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어살>을 통해 긍정적인 소년상이라는 페르소나를 이제야 벗고 복잡하게 얽힌 내면과 트라우마라는 그림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비로소 인정했다. 자신이 전쟁 중에도 군수 공장을 운영한 아버지 덕에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가족을 사랑했지만 전쟁 부역자였다는 것을, 남에게 밝히지 못한 트라우마가 자신을 괴롭혔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거짓된 가면을 썼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를 외면한 채 전쟁 반대를 외치고 순수한 세계를 그려왔다는 것을. 자신의 어두운 측면과 부끄러움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이를 낭만화하지 않은 것은 대단한 용기다. 더 나아가 당시 시대상과 주변 인물들이 가지는 상징을 통해 페르소나와 무의식을 마주하도록 설계한 건 분명한 성취다.
7. 트라우마를 인정하는 것
마히토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겨우 나츠코가 있는 곳을 알아낸다. 그곳은 돌로 이루어진 탑이며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니, 들어가선 안 되는 곳으로 취급된다. 나츠코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면 계단을 계속해서 내려가야 한다. 이때 돌은 사람이 들어오는 걸 거부한다. 특히 나츠코가 머무르고 있는 산실에서 돌의 방어는 가장 심해진다. 이제야 확실해진다. 마히토가 나츠코를 찾으러 가는 여정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여정이다.
트라우마는 무의식의 깊숙한 곳에 있다. 나츠코가 있는 산실로 계속 내려가는 건 그래서다. 산실에 가까워질수록 돌의 거부 반응이 커지는 것도 방어 기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히토는 산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지금껏 외면해왔던 자신의 두려움, 트라우마를 직접 확인하기로 결정한다. 마히토는 무엇이 두려운가. 첫 번째, 산실에 누워있는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정말로 그때 화재로 죽은 것이다. 두려움 두 번째, 만약 산실에 있는 사람이 나츠코라면 내가 그녀를 싫어한 사실을 들키는 것.
마히토는 산실에 누워있는 인물을 깨운다.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인물이 깨어난다. 트라우마가 마히토를 바라본다. 어머니, 나츠코처럼 보이는 인물은 마히토를 향해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치고 산실의 인형은 마히토에 들러붙으며 방해한다. 함께 나가자며 손을 내미는 마히토,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난 네가 싫어! 여기서 나가!”
마히토는 큰 충격을 받는다. 산실에 있는 인물이 어머니가 아닐 것이라는 첫 번째 두려움이 실현된다.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 상기시킨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싫다고 소리치는 나츠코의 말. 나츠코를 싫어한 사실을 나츠코에게 들킨 것만 같은 두 번째 두려움도 실현된다. 자신이 먼저 싫어했기에 나츠코도 싫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앞서 구해달라는 어머니의 음성이 사실은 마히토 자신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는 걸 떠올리면 나츠코의 말도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온다.
트라우마를 직면한 마히토는 순간적으로 끔찍한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꺼낸 한마디. “나츠코... 나츠코 엄마!” 이 한마디는 앞서 언급한 두 개의 두려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회심의 한 마디다. 산실에 있는 인물이 나츠코로 밝혀지면서 동시에 어머니는 죽었다는 게 밝혀진다. 여기서 나츠코를 향해 처음으로 ‘엄마’라고 부른 것은 어머니의 부재를 인정하겠다는 의미다. 이는 곧 두 번째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마히토가 나츠코를 싫어한 사실이 마히토를 향한 나츠코의 “싫어.”라는 말로 돌아온다면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을 향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은 게 된다. 이에 마히토도 마음을 열고 새어머니를 향해 “어머니”라고 소리칠 용기가 생긴 것이다.
이는 트라우마의 극복이 아니다. 트라우마의 인정이다. 그것을 삶의 한 부분으로, 과거의 상처로 받아들였다. 마히토는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했고, 나츠코를 어머니로 인정했다. 트라우마와 상처는 지워지지 않겠지만 이전처럼 괴로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침내 마히토는 트라우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히토의 트라우마 회복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더 나아간다. 바로 히미의 존재다.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히미는 이세계 내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뜻밖의 정체를 가졌는데, 바로 마히토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소녀의 모습을 한 어머니는 마히토를 구해주고 나츠코를 구하기 위한 여정에 동참한다.
여기서 우리는 히미가 마히토의 어머니이면서 불을 다루는 소녀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화재로 사망한 어머니가 불을 다루는 소녀로 나타난 건 마히토의 트라우마가 동화적 상상력으로 변형된 것이다. 불에 의해 목숨을 잃은 어머니는 불을 통해 목숨을 구해주는 존재가 된다. 어머니의 위로가 필요했던 소년은 히미가 준 잼과 빵을 먹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그리고 새어머니를 받아들이도록 도움을 받는다. 다시 말해, 화재와 어머니의 죽음은 불을 다루는 용감하고 착한 소녀 히미로 바뀌면서 트라우마를 치유한다.
마지막 히미의 선택도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의 후반부, 현실로 돌아가려는 마히토는 다른 시간대의 문으로 향하려는 히미를 말린다. 만약 히미가 현실로 복귀한다면 미래에 화재로 죽을 운명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히토는 “히미는 살아야 해.”라며 현실로 돌아가지 말 것을 부탁한다. 이에 히미는 “불은 무섭지 않아. 너를 낳는 건 멋진 일이잖아. 마히토, 너는 좋은 아이야.”라며 마히토를 안아준다.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마히토의 죄책감이, 어머니를 앗아간 화재의 공포가, 자신이 어머니에게 소중한 존재였을까에 대한 회의가 순수한 소녀의 모습을 한 히미의 진심 어린 말로 한꺼번에 해소된다. 이처럼 우리는 한 소년이 꿈,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이야기를 보았다. 소년은 끝내 트라우마를 인정했고 한 단계 성장했다.
8. 부조리 속 죽음과 탄생
여기까지 볼 때 우린 <그어살>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가장 개인적인 영화라는 걸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다시 이세계로 돌아가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마히토는 이세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처음 이세계로 떨어지고 난 후 펼쳐진 풍경은 고인돌이 있는 한 섬이다. 이 섬은 노골적으로 아놀드 뵈클린의 <죽음의 섬>(The Isle of the Dead)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젊은 모습을 한 키리코의 “이곳은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아”라는 말. 이후 <붉은 돼지> 속 비행기의 대열을 떠오르게 하는 배들의 환상과 물고기를 얻기 위해 기다리는 망자들, 먹히는 와라와라, 죽어가는 펠리컨 등 곳곳에 퍼져 있는 죽음의 이미지들을 목격한다.
앞서 이세계는 마히토의 무의식이 형상화된 공간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마히토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트라우마가 있었고 이세계 여정을 통해 어머니와 새어머니를 만나면서 서서히 회복한다. 이를 고려하면 이세계 속 죽음의 풍경과 여러 상징은 마히토의 트라우마, 무의식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트라우마는 어머니를 상실하게 만든 전쟁, 끔찍한 현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과 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마히토의 무의식에서는 죽음의 이미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죽음의 섬>은 정신적 고통과 심리적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 그림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즉, 이세계는 죽은 자가 더 많은 죽음의 세계에 가깝다.
하지만 그 반대도 존재한다. 와라와라가 그 예시다. 와라와라는 때가 되면 하늘로 올라가 태어난다. 와라와라는 인간으로 탄생하기 이전의 존재인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의 코다마를 닮았지만 오히려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의 영혼들을 더 닮았다. 흥미로운 건 <소울>의 영혼이 태어나기 위해 지구로 하강한다면, <그어살>의 와라와라는 태어나기 위해 지상으로 상승한다는 점이다.
펠리컨도 비슷한 맥락이다. 죽어가는 펠리컨에게 마히토는 와라와라를 먹으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거라며 일갈한다. 그러자 펠리컨은 자신의 일족은 와라와라를 먹기 위해 존재하며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끌려왔다고 한탄한다. 와라와라를 먹는 펠리컨들도 결국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탄생과 죽음은 순환한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이곳에 남겨져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의 절규도 메아리친다. 이곳은 부조리의 세계다. 서로 죽고 죽이며 무고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마히토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 즉 근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9. 탑과 이세계라는 근대
탑이 근대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장면은 이후에도 등장한다. 저택의 할머니가 설명해 준 바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이 있기 조금 전 하늘에서 커다란 바위가 떨어졌고 큰할아버지가 그것을 건물로 지어 지금의 탑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시작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커다란 바위는 우주에서 온 운석을 의미한다. 이러한 운석은 미지에서 온 새로운 것으로 새로운 문물, 사상, 계몽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따라서 탑과 탑의 세계는 근대화가 진행 중인 세계다.
물론 마히토가 살고 있는 근대(현실)와 큰할아버지의 근대(이세계)가 완전히 똑같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이세계에는 현실과 달리 매혹적이면서 판타지적인 풍경들이 있고, 큰할아버지의 말처럼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세계가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이세계에는 죽음과 부조리가 만연하다. 큰할아버지가 데려온 펠리컨은 인간이 되길 기다리는 와라와라를 잡아먹고 히미에 의해 불에 타 죽는 신세이며 그 탓에 이곳을 ‘저주받은 바다’라 부른다.
또 다른 존재인 앵무새는 세력을 확장하여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하나의 왕국까지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때 앵무새 대왕과 그를 따르는 군대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혹은 나치 독일을 떠오르게 한다. 근대는 어떻게 종말을 맞이했던가. 인간의 이성이 진보와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켜 근대의 막을 내리게 하지 않았는가. 이성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세계도 결국에는 앵무새 대왕의 탐욕, 악의로 인해 멸망하고 만다. 그렇게 탑은 무너지고 마히토의 현실에서도 전쟁이 끝난다. 근대의 종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이야기의 영역을 역사적 차원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자전적 이야기가 부조리한 세계의 격동하는 풍경과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을 조명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절묘한 연결과 확장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가다운 연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10. 하야오, 하야오를 만나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바랐지만 우리가 목격한 건 부조리한 세계였고, 새로운 근대화를 이룩하고자 했지만 현실의 근대를 불러올 뿐이었다. 몹시 똑똑한 인물이던 큰할아버지는 원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주위에는 누구도 없었고 홀로 후계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위태로운 나날을 보낼 뿐이었다. 과연 큰할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일까. 오히려 근대를 멸망으로 이끈 기성세대,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지 못한 실패한 인물, 세간의 찬사와 달리 존경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 미야자키 하야오에 더 가깝지 않을까.
아니, 미야자키 하야오는 마히토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큰할아버지까지 미야자키 하야오란 말인가. 앞에서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동안 말 못 한 부끄러움을 드러내고자 <그어살>을 만들었다고 한 바 있다. 그의 부끄러움은 실제 자기 모습, 생각과 괴리가 있는 인물과 작품을 만들어 온 것이다. 마히토라는 뒤틀린 소년은 이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은 이에 더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명이 더 나와야 한다. 어린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모순과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숨겨온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 말이다. 즉, <그어살>은 마히토라는 어린 미야자키 하야오의 무의식과 큰할아버지라는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무의식이 합쳐진 세계이며 어린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마히토는 큰할아버지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 이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만들어줄 것을 부탁한다. 마히토는 무엇이 다르기에 후계자가 될 자격을 갖춘 것일까. 단순히 같은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마히토는 탑에 쓰일 조각이 나뭇조각인지, 악의가 깃든 조각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는 마히토가 이세계 여정을 통해 한층 더 성장했음을 증명한다.
잠시 왜가리와의 에피소드를 돌이켜보자. 마히토는 왜가리에 대한 경계심으로 목검을 휘두르고 칼로 대나무 활과 화살을 만들어 공격한다. 결국 화살은 왜가리의 부리를 관통하며 구멍을 낸다. 이후 이세계에서 왜가리는 자신의 부리에 난 구멍을 막아야 다시 왜가리로 변신해 날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마히토는 칼로 나무를 깎아 부리에 난 구멍을 막아준다. 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구멍을 낸 것에서, 칼로 막대기를 깎아 구멍을 막아준 것으로 바뀌는 것. 다시 말해 악의에서 선의로 바뀌는 여정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칼은 쥔 사람이 악의를 가졌는지, 선의를 가졌는지에 따라 구멍을 낼 수도, 구멍을 메꿔줄 수도 있다. 이것을 깨달았기에 마히토는 후계자가 될 자격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이세계에 남아 탑을 쌓기를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난 흉터를 만지며 “이 흉터는 제가 만들었어요. 제 악의의 상징이죠.”라며 돌을 만지길 거부한다. 그것이 악의가 깃든 돌이 아닌 순수한 돌이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돌을 놓는 사람이다.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탑을 쌓는지가 탑의 재료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결국 마히토는 이세계에 남지 않고 현실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이상으로의 도피가 아닌 현실 직시가 훨씬 중요하며 트라우마의 인정도 결국 직시에 의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설령 현실이 큰할아버지의 말처럼 서로 죽고 죽이는 어리석은 세상이어도 마히토는 복귀하고자 한다. 대신 히미, 키리코, 왜가리 같은 친구를 만들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이 다짐이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순수한 개개인이 모여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 아니던가. 나는 이 일을 왜 시작했는가, 나는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 나는 어떻게 이 일을 일궈 왔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린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를 바라보며(돌이켜보며) 하나씩 묻고 답한다. 마히토의 결정에서 크나큰 감동이 밀려온 건 이러한 문답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창작 신념인 ‘세상을 바꾸겠다는 마음가짐’을 처음 다짐하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82세의 감독은 친구를 만들고 지금, 여기에서 나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그려나가기로 결정하던 때를 떠올린다.
11. 그대들은 어떤 탑을 쌓을 것인가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이세계에서 탈출한 마히토는 새어머니, 왜가리와 함께 원래 살던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탑은 무너진다. 몇 년 후, 동생이 태어나고 전쟁이 끝난다. 마히토는 도쿄로 돌아간다. 새삼 영화의 마지막까지 푸른 하늘이 온전히 나오지 않은 건 의미심장하다. 마히토가 살고 있는 어리석은 세계에서도, 이상적인 공간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위태로운 세계였던 이세계에서도 푸른 하늘은 구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엔딩 크레딧의 푸른 화면이 바로 푸른 하늘이라는걸. 일련의 여정을 통해 성장한 마히토가 친구를 만들고 함께 이상향을 그려가며 세상을 바꿀 거라는 각오가 바로 이 푸른 화면의 엔딩 크레딧에 담긴 것이다. 다시 말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영화의 끝에서 이 일을 처음 시작하기로 한 다짐을 드러냈다. 바로 지브리의 색깔이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토록 만들고자 했던 순수함의 색깔을.
따라서 <그어살>은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린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를 되돌아보는 여정이면서 악의가 선의로 바뀌고, 죽음(어머니)에서 탄생(동생)으로 끝나고, 전쟁의 검은 그림자가 푸른 엔딩 크레딧으로 마무리되는 여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쌓아 올린 탑과 살아온 궤적을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이걸 보고 있는 그대들은 어떤 탑을 쌓을 것인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 것인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묻는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일관되게 전한 ‘살아라’라는 메시지와 연결된다. ‘삶이 불안하고 괴로워도 살아라’, ‘그럼에도 살아라’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근본적인 메시지 말이다. 그는 살아가는 것에서 세상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렇기에 <그어살>은 단순히 교조적인 설파가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움과 복잡한 내면, 모순을 충만한 정서의 이미지들로 그려냄으로써 관객에게 다가가려 한 시도다. 누군가는 이러한 방식이 난해하다며 난색을 표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이미지들이 일으킨 격랑에 압도되고 말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린 시절을 투영한 마히토, 그리고 이제 모험을 시작하게 될 관객을 향한 응원과 긍정의 시선을 보낸다. 친구를 만들고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이상이 아닌 현실에서 자신의 할 일을 다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소년은 그렇게 성장했다. 여전히 흉터는 남아 있겠지만 그 흉터가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힘겹고 두려울지라도 그것을 감내하는 방법을 배웠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지금 자신에 대한 체념의 태도도 느껴진다. 비범했지만 결국 무너져 내린 세계에서 사라진 큰할아버지처럼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도 그렇게 사라질 것이라고 예감한 듯하다. 이세계에서의 기억을 잊고 평소처럼 살아가게 될 거라고 단언한 왜가리의 말처럼 사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를 잊어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 이 현실에서 그대들만의 탑을 쌓아가면 되니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리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체념 섞인 말에 마냥 긍정만 하진 못할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마히토는 도쿄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긴다. 이때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잠시 바라보다 주머니에 넣은 후 문을 열고 나간다. 마히토는 탑에서 가져온 돌을 여전히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미약하게나마 힘이 깃들어 있는 돌을 가지고 다니며 이세계에서의 모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에는 잊히지 않는 것도 있다. 이 영화를 비롯한 지브리의 영화들과 미야자키 하야오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흘러 약해지더라도 그 아름다움과 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살아가고자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금, 여기에서 간절히 묻는 질문을 지닌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