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상
<하이힐>, '퀴어'의 느와르가 아니라 '인간'의 느와르로서
: <하이힐>을 '내면 세계의 전쟁'으로 바라보며
1. <하이힐>의 방향성: ‘퀴어물’로써 재단되지 않으려는 전제
<하이힐>은 2014년 개봉된 장진 감독의 영화다. 중요시 되는 장르는 ‘퀴어’와 ‘액션’이며, 줄거리는 ‘이제 형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성전환 수술을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지욱의 이야기’라고 정리될 수 있겠다. 이때 장진 감독은 꾸준히 여러 매체의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를 정의했다. 그리고 그 정의는 동시에 이 영화를 쉽게 정의할 수 없도록 만들기도 했다. 우선 14년 5월 말, 롯데시네마에서 열렸었던 <하이힐> 언론시사회에서의 발언을 인용해 보겠다.
"보편적인 틀안에서 보는 것 외에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발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끄집어 내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거기에서부터 출발한 영화다. 그러나, 굳이 ‘성정체성이나 성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해야지.’라고 의도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만들면서 영화를 통해 그들이 우리랑 똑같이 살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이 문장을 보면 장진 감독의 요지가 이해될 것이다. 즉 그는 이 영화가 비단 ‘퀴어물’로써의 영화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퀴어’ 즉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주제와 장르를 정확히 명시함으로 인해, 더더욱 ‘퀴어’라는 요소를 고착화 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역설과 반증들은 숱하게 제기되어 왔다. 퀴어이든, 지욱이 해당되는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이든, 결국 그들을 포괄하는 개념은 ‘인간’이다. 그들은 뭘 사랑하고 누굴 사랑하고 어떤 형태이든 간에 인간이며, 퀴어들의 혹은 퀴어의 드라마는 인간의 드라마 안에 포함되고 있다는 거다. 줄거리를 보면 ‘성전환 수술’이라는 일이 엄청난 반전, 이목을 집중 시킬 특이사항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린 누구나 우리의 오랜 염원 혹은 이루고 싶은 꿈이 있고, 세상은 그 꿈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하 재력의 문제일 때도 있고, ‘나이’ 등을 따지는 정상성 규범의 문제일 때도 있다. 지욱의 고민과 꿈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액션 느와르 속에 퀴어인 주인공이 존재하는’ 형식인 것처럼 와닿게 된다. 그저 대부분의 느와르물이 따라가는, ‘안락한/평안한 삶을 얻고 싶어하는 주인공과 그걸 최선을 다해 방해하는 그가 속해있던 세상’이란 줄기를 타고 이야기가 진행될 따름으로.
“(지욱의 ‘선배님’인 바다, 교회에서 그를 만나며) 우리가 무슨 낯으로 여길 와. 만들었으면, 그대로 있어야지. 지들 맘대로 바꿔버리면 화내시잖아. … 조물주가 만든 바다에 흙을 부어 간척지로 만드는 거랑은, 틀린 거잖아.” - 이와 같은 작중의 대사는, ‘성전환’이라는 일이 ‘뭐 얼마나 남들과 다른 일인지’ 관객들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하여 본고는 장진 감독의 이와 같은 주제의식, ‘사람 사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영화라는 것에 대해 집중하여 <하이힐>이란 ‘퀴어물’을 해석 및 비평해 보고자 작성되게 되었다. 지욱에게 있어 그의 정체성과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실연, 트라우마, 애착 관계 등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걸 구태여 퀴어 비평의 방식을 차용해 서술하진 않아 보려 한다. 본고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임을 명확히 명시하고 넘어가야겠다.
2. <하이힐>을 퀴어 도식 밖에서 읽어내기: 등장인물들의 ‘또 다른 지욱’으로서의 가능성
<하이힐>에서 지욱은 매우 이중적인 인물이다. 그는 ‘강력계’ 형사이면서, 동시에 ‘마초’ 형사다. 인물들 중 그를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고자 하는 두 인물(곤과 진우)은 모두 그를 ‘남자 중의 남자’로 평한다. 그 이유는 그가 총알 한 번 쏘지 않고, 누구와도 같이 가지 않고 오직 혼자 사건 현장/용의자가 있는 현장에 출격해 그들을 ‘다 때려 잡는’ 형사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빼놓고 지욱을 논할 수는 없을 정도다. 극의 시작에서 어느 조직의 보스인 허불(이하 불)이 있는 클럽 룸에 들이닥칠 때도, 불은 그의 전설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어서, 그쪽에서 ‘육백만불 사나이’라 그런다드만. … 원래가 그렇대. 범인을 데리고 갈 때 수갑 한 번, 총 한 발 안 쏜다더만. … (룸에 들어온 지욱과 마주하고) 지금까지 윤 형 얘기가 반이었소. … 이번에도 혼자 오셨네.”
11:1로 총알을 딱 두 번 사용한 뒤, 불과 일당들을 검거한 다음날 마포서 반장님의 대사도 마찬가지다.
“야 이 또라이 새끼야. 열한 놈하고 붙었으면은, 어디가 좀 찢어지든가! 어디가 부러지든가! … 네가 독립군이야? 혼자 가서 조사하고, 혼자 가서 뒤집어 놓고. 그리고 왜 119에 전화해, 이 새끼야! 네 목소리 모를 줄 알았지! 네 목소리 119 대원들도, 다 알어! 팀워크란 게 좆도 없어, 이 새끼는!”
불의 이복동생인 곤이 지욱의 전설에 대해 잘 모르는 박사범에게 해주는 말도 마찬가지다.
“비가 많이 왔어. 우산을 안 쓰면, 온몸이 흠뻑 젖을 만큼. … 발차기 좋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위로 다니는 주먹은 보이지도 않아. 경찰 뱃지, 수갑, 총, 뭐 그딴 건 어따가 팔아먹었는지 한 번 꺼내지를 않고. … 비가 무지 많이 오는 날인데, 옷이 안 젖드만.”
극중 첫 장면인 불과 지욱의 대면에서처럼, 지욱의 ‘남성성’을 극찬하는 대사들이 불의 말 그대로 ‘얘기들의 절반’이 될 수준이다. 사실 지욱처럼 행동할 경우 형사로서 모범을 보인다고 하긴 어렵다. 이후, 검거된 성가해자를 심문할 때 그의 헬멧을 비닐에 싸 머리를 가격해 버린다거나, ‘자백 따윈 필요 없다, 난 가능한 한 너에게 가장 많은 고통을 돌려주고 싶을 뿐이다’라며 그의 뼈를 하나씩 부러트릴 거라고 예고한다거나 하는 장면은 ‘이래도 돼…?’라는 물음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한다. 지욱은 왜 이러는 것일까. 그리고 곤과 진우(진우는 그의 후배 형사다)는 이런 ‘비합리적’이고 ‘불법적인’ 형사를 왜 존경하는 것일까. 이 모습이 ‘어떤 기준에서’ 모범적이고 우상화되게 보이나. 이에 대한 답은 이후, ‘선배님’인 바다(이용녀 분)와의 만남에서 해소된다.
(지욱) “처음엔 못 참겠더라고요, 정말. 자꾸 내가 이상하게 변하는데… 미치겠더라고요. 토할 것 같고.”
(바다) “그래서, 그게 싫어서. 더 ‘남자’로 갔지? 부수고, 때리고, 욕하고. 그 어느 새끼들보다 더 거칠어지려고. 그래서 해병대도 가고… 그래도 하도하도 안 되니, 네 안에 있는 그 년. 죽여버리고 싶었지?”
지욱의 ‘말도 안 되는’ 마초성은 여성성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욕을 해도 제 안의 여성성이 사라지지 않자 폭력도 써보고, 누굴 패도 그녀가 사라지지 않자 해병대도 들어가 보고, 강력계 형사에도 지원해 보고, 그리하여 극중 세계관의 대다수가 그를 ‘남자 중의 남자’로 인정하고 극찬하는데도 지욱 자신만은 그 말을 인정할 수가 없다. 최고의 남자가 되었는데도 그에게 그는 남자가 아니다. 즉 지욱의 위와 같은 기행, 법적으로도 규범적으로도 말도 안 되는 행위들에 대한 주변인물들의 찬양은 사회가 규정하는 ‘남성성’을 기이할 만큼 강조하여 아이러니를 느끼게 만들고 있는 의도적 조성이다. ‘남자가 남자다워야지’라는 말도 안 되는 사회의 기준을 밑바탕 삼아, ‘어디까지 남자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멋진 남자‘인가?’라고 되물음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장치(과장된 개념)는 지욱의 이중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어 강조하기도 한다. 또한 그 이중성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다. 애초에 <하이힐> 속 주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그들의 다층적인 면, 이중적인 얼굴이다. 잠깐 <하이힐>의 작품 바깥으로 나가보자. <하이힐>은 처음부터 등장인물의 특성과 배우들의 연결에 기이함을 느끼도록 연출된 작품이다. ‘여성성’이 과도할 정도의 ‘남성성’ 속에 존재하는 주인공 지욱 역은 남성성이란 것을 떠올렸을 때 떠오르는 모든 요소들을 다 총집합시킨 듯한 차승원 배우에게 넘어갔고(심지어 장진 감독은 ‘해피투게더’ 방송에서 지욱의 1순위 희망 캐스팅부터가 차승원 배우였다고 언급했었다. 즉 이는 결론적으로 발탁된 캐스팅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된 캐스팅이다.) 메인 ‘빌런’인 곤의 역할엔 현재 순박하고 유머러스한 이미지가 강한 오정세 배우가 발탁됐다(일전 언급한 ‘해피투게더’ 방송에서도, 오정세 배우가 악역이라고 이야기 하니 모든 패널들이 의아해 하며 질문을 퍼붓기도 한다). 두 배우가 인터뷰를 하면 ‘왜 이런 캐스팅이?’ 식의 질문이 가장 많이 들어왔고, 배우들 또한 심한 아이러니를 느꼈다고 자주 언급했다.
“(마초적인 분위기 차승원의 액션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영화는 여성적인 섬세함도 표현해야 하는데, 차승원을 택했다는 게 의외였다. 하지만 장진 감독의 선택은 탁월했다.) … 감독님이 ‘내가 본 당신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다…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때였죠. 황정민씨가 ‘승원 씨는 내게 없는 걸 갖고 있어요. 약간의 여성성?’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 장진 감독도 ‘이건 자기밖에 못 해’라고 하니까…”
“힘들었던 캐릭터라면 영화 ‘하이힐’의 ‘허곤’이겠네요.”, “(사실 '하이힐'에서 오정세가 맡은 허곤 역은 악역 중의 악역이면서도 그의 배우인생에서 따라다니는 '코믹한 이미지'가 이중적으로 들어있는 인물이다.)”
이때, 이들로부터 파생된 아이러니(‘이래도 되는 거야?’, ‘저런 사람이 이래도 되는 거야?’)는 <하이힐>이라는 극중 세계를 ‘실재하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어떤 상징체계를 강조하기 위한 비유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마포서’처럼 그들이 존재하고 행동하는 모든 지역명 등의 요소들이 이 세계를 진짜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지만, 사실 이곳이 판타지적인 공간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면. 적어도 이 세계의 기반이 지금의 현실 세계는 아니라면. 이곳은 무엇일까. 본고에서는 <하이힐> 속의 세계를 지욱의 심상세계, 즉 <하이힐> 속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또 다른 지욱’으로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3-1. <하이힐>이 왜 지욱의 내면의 인격화로 읽히는가
다시금 위에서 밝힌 내용부터 정리해 보자. 장진 감독은 제작·언론 인터뷰에서 “굳이 성정체성 자체를 주장하려고 시작한 건 아니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산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여러 번 말한다. 즉, 장르 외피를 빌려 보편적 인간의 내면을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이 관점은 ‘한 사람의 내면을 다양한 인물로 분할’해 보여주는 읽기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캐스팅 철학도 상징적이다. 감독은 “외형적으로 여성성이 느껴지는 남자”가 아니라 남성미가 두드러지는 배우를 택해, 강한 외피와 억눌린 내면의 대비를 극대화하려 했다. 이는 ‘한 인물 내부의 갈등’을 장르적으로 확장해 보여주려는 장치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내면의 여러 목소리, ‘천사와 악마’ 같은 다면적/이중성의 면모를 시각적으로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하이힐>이 내면의 여러 자아에 대한 인격화/의인화일 수 있단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가능성을 주제로 등장인물들을 분석해 보자면, 지욱이 중심에 ‘나’로서 존재하고 그 외 곤과 진우가 그의 ‘또 다른 나’로서 기능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 오로지 완벽한 ‘타인’이 있을 수 있다면 필히 그건 장미(이솜 분)일 것이다. 본고는 이 관계도를 기준 삼아, 지욱에게 중심을 두기보단 지욱을 둘러싼 허곤과 진우의 양쪽 대립점을 중요시하여 왜 이 극이 ‘이렇게’ 읽힐 수 있는지 정리해 나가고자 한다.
3-2. 허곤: ‘초자아’ 개념처럼 지욱에게 내재된 외부의 시선이자, 자기파괴의 충동인 ‘타나토스’
앞서 해병대의 선배님이기도, MTF 트랜스젠더로서의 선배님이기도 한 바다와의 대화를 인용한 바에서 보면 지욱 또한 그 내면에 ‘사회적 기준’, ‘정상성’에 대한 규범이 자리잡혀 있단 사실을 알 수 있다. 포스터에서도 사용되는 가장 큰 작중의 캐치프레이즈도 “결국 내 안의 ‘그녀’가 죽었다.”인 것, 이 대사는 작중 바다를 통해 “네 안의 그 년, 죽여버리고 싶었지?”라며 지욱의 여지껏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해주듯 다시 등장한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난 여성인데 점차 남성처럼 변모하는 것도, 내가 남성인데 그 속엔 ‘여성’이 죽지 않고 점점 커져가는 것도, 모든 관점에서 그 상황이 당혹스럽고 괴롭다. 왜냐하면 ‘그러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사회에서 ‘남성으로 태어난 여성’을 어떻게 보는지, 여기는지, 그 정답을 알고 있고 내면화 했기에 생겨날 수 있는 고통이다. 본디 소수자가 더 소수자를 혐오하는 법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고통 받고 자신을 검열하고, 그와 반대가 되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는 것도 소수자의 수많은 특권 중 하나다.
그리고 곤은 정확히 이 부분, ‘사회 대부분의 시선’과 일치하는 존재다. 그는 (상징성으로 과장된) 그의 남성성을 그 누구보다 우상화하고 선망한다. 곤은 조폭이며(검거될 대상) 지욱은 형사(검거할 존재)로 두 사람은 원수지간이어야 합당한 관계임에도, 그의 말 하나하나에 감명 받고 따라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그가 형사를 은퇴하면 자신의 조직으로 건너와달라는 제안까지 할 정도로. 그는 지욱을 말 그대로 존경하고, 선망한다.
“(지욱에게 불법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던 곤은, 그 핑계로 그의 집에 무단침입해 그의 약점을 찾기 위해 집을 뒤진다. 그러다 부하들에게 ‘약쟁이’, ‘여자를 끼고 쉽게 논다’는 지욱에 관한 찌라시를 듣곤 ‘기분이 나빠져’ 다 어지럽힌 지욱의 집을 처음 때보다 완벽하고 깨끗하게 치우도록 명령한다. 이후 그는 우산을 들곤 처음 봤던 지욱의 싸움을 따라해본다.)”
“느낌으로 아시겠지만, 제가 윤 형사님을… 참 좋아하는 거 아시죠. 브로마이드라도 있으면 제 방에 촥 걸어놨을 겁니다. 팬이니까요.“
이때 곤은 분명히 ‘조폭으로의 이직’과 ‘불법적 일(대가는 돈)’을 부탁하러 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응당 그 부탁을 수락시키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옳다. 그 일들이 목적이고 지욱은 그에 가장 걸맞는 수단이기에. 하지만 결말부, 곤의 제안을 성전환 수술 비용 탓에 허락했단 사실과 지욱의 정체성에 대해서 깨달았을 때 곤의 분노는 조금 이상하다. 그의 분노의 포인트는 단순히 ‘남자 중의 남자인 줄 알았던 놈이 여자였다(즉 남자이기를 포기했다)’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나 그 양반 좋아하거든. 멋있잖아. 근데 왜 내 돈을 받지? 이상하게 덜 멋있어 보이네….”
즉, 곤이 우상화 시키는 것은 지욱의 남성성만이 아니다. 지욱의 ‘멋있음’이다. 누가 보아도 느와르물의 주인공 같은 그 태도. 작중 최고의 폭력성과 힘을 가졌음에도 ‘선’이 존재하는 선역, 주인공으로서의 멋짐. 자신이 불법침입을 하든, 얼마나 많은 돈을 제시하든, 타인들에 의해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 성정. 그의 ‘캐릭터성’까지도 곤은 우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본디 인간 중 완성된 인간은 없다. 누구나 비도덕적일 때가 있고, 타인을 수단으로 여길 때도 있으며, 물질적인 것에 굴복 혹은 타협할 때도 있다. 하지만 곤은 그걸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곤은 지욱을 ‘완성된, 완전성의 인간’으로 보고 있으며 멋으로 표현되는 그 ‘완전성’ 안에 ‘남성성’도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욱의 진정한 성정을 알아보는 존재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오히려 폭력이다. 정해진 틀, ‘원래의 너’ ‘이랬었던 너’에서 그가 변화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폭력. 그를 실존주의 하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완성된 캐릭터처럼 바라보는 시선으로서의 폭력. 이것이 곤의 또 다른 상징성이다.
“왜 오셨어요. 큰 맘 먹고 가셨으면 가는 거지. 그깟 년 때문에 오셨어요? 진짜로? …알다가도 모르겠네.”
(지욱) “그 애, 살리고 싶은데. 내가 어떡하면 될….”
(곤) “(곤이 고함을 지른다) 내가 윤 형한테 바라는 게 뭐가 있겠어. 다 버리고 계집이 되어버린 년한테 내가, 내가 뭘, 씨…. …그냥 가지고 논 게 아니라, 진짜 사랑을 했나 보네.”
결말부, 장미(그는 지욱의 첫사랑 소년의 여동생)를 납치한 곤이 그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포기한 뒤 달려와 망설임 없이 무릎부터 꿇는 걸 봤을 때, 그의 심상은 또 매우 미묘하다. 지욱의 성정, 그 캐릭터성은 그가 여성이든 아니든 그대로라는 걸 확인받았기 때문이다. 불법적 돈을 받은 그에게 인격적으로 실망했고, 그 외의 모든 찌라시들(여자를 끼고 쉽게 논다거나)도 진짜라고 믿고자 악을 썼다. ‘남자’가 아닌 지욱, 불완전한 지욱은 지욱이 아니므로. 하지만 지욱은 그대로 윤지욱이다. 느와르물의 주인공 같은 윤지욱. 곤은 장미를 구하러 온 지욱에게서 그 도피하고 싶었던 현실을 마주한 것이다. ‘남성성’이, 남자 중의 남자라는 사실이 그를 완성시킨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남자가 아닌’ 지욱은 ‘용납할 수 없는’, ‘망가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욱과 마주하니 그렇지가 않다. 지욱의 ‘팬’인 곤은, 그의 모든 행동을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했던 곤은 그걸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곤은 지욱과 대립하지만 동시에 ‘지욱을 묘하게 동경/집착’하는 존재에 오정세 본인도 인터뷰에서 이 인물의 이중성(악역이면서 코믹 이미지의 잔재, 동경과 적대의 엇갈림)을 강조했을 정도다. 이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완전성을 배신한 대상(지욱)을 무너뜨리면서도 닮고자 하는 양가 감정의 표식이다. 곤은 지욱의 정체성에 대한 외부 사회의 폭력(조롱·추격·응징)의 얼굴이자, ‘내 안의 여성을 지워버리고 싶은 자기 혐오/파괴 욕구’를 투사한 그림자처럼 작동한다. 오정세가 “말투·표정 하나까지 낯선 리듬을 고집했다”고 회상한 것도, 곤이 ‘<하이힐>의 세계에 존재하는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불안정하고 과장된, ‘무의식’의 톤을 띠도록 설계되었음을 시사한다.
“내가 윤 형한테 바라는 게 뭐가 있겠어. 다 버리고 계집이 되어버린 년한테 내가, 내가 뭘, 씨….”
“(거울 속 자기자신을 바라보다, 순간 거울을 깨트리는 지욱. 이후 깨진 유리로 제 목을 사선으로 긋고선 읊조린다.) 씨발 년….”
앞서 인용된 것처럼, 지욱의 정체성을 깨달은 후 ‘년’이란 비속어와 함께 그를 모욕하고 조롱하며 잔혹성을 내보이는 곤의 모습은 ‘허곤’이란 캐릭터로서의 배신감이 표현된 것이기도 하지만, 지욱이 늘 자기 자신에게 해왔고 뱉어왔던 말들과 겹쳐지고 있다.
즉 곤은 ‘남성이 아닌’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지욱은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의 ‘정상성’에 대한 집착의 시선과, 지욱이 ‘진짜’ 지욱으로서 존재할 때 그걸 파괴하고자 하는 그 극단적 형태에서 지욱 또한 내면화된 정상성 기준을 통해, ‘정상이 아닌’ 자신을 파괴하고자 하는 자기파괴적/징벌적 성향을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3-3. 진우: 다수의 이성에서 출발해, ‘그럼에도’ 존재하고 있는 지욱을 수용하는 자아
“형님 혈액 체취 한다는 거, 제가 증 까고 막았습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나 술 안 먹었어.”
“형님 팔뚝에. …주사 멍이요. …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그러니까… (눈물이 고인다) 형님이 알아서, 그만 하십쇼.”
진우는 지욱의 심복이다, 그를 형처럼 따르고 존경하는, 곤과의 양대산맥을 구성하는 존재. 그는 팔뚝에 주사로 인한 멍이 들어(이는 호르몬 주사 때문에 생긴 것이다) 혹 피를 뽑다 의심받을까 지욱을 감쌌다. 진우도 꽤 미묘한 반응을 보이는 편인데, 그것이 바로 눈물이다. 자신이 존경하던 선배가 불의를 저질렀다거나, 마약을 하는 등의 문제행동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면, 그를 엄청나게 추격하고 집착해 진실을 알아내거나 배신감 등에 분노하는 것이 대다수의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진우는 눈물을 터트린다. 지금 당장은 묻어줄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알아서 ‘문제될’ 행동은 하지 말아달라. 경고 같은 애원을 하며 운다. 이 지점이 진우라는 존재가 곤과는 달리 그를 인정할 수 있었던 근거로 보인다. 그는 지욱이란 ‘캐릭터’가 아니라 ‘인간’을 존경한다. 곤의 경우 우상화, 집착이란 표현이 어울리겠지만 진우야말로 그가 지욱에게 품는 감정은 ‘존경심’이다.
“회사 일 신경 쓰지 마십쇼. 어차피 떠나신 거. (일단 데리고 들어가서 무조건 죽여. 그래야 걔들 잡을 수 있어.) 쉽습니까, 그게? 사무실에 형님 같은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 못합니다. 이젠, 이 세상에 없네. 형님 같은 사람은.”
진우가 지욱의 정체성과 퇴직 이유를 안 후, 바다의 바에 찾아와 지욱을 만났을 때 나눈 대화다. 이 대화를 보면 진우 또한 곤처럼, 자신이 믿었고 존경했던 존재를 잃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고 그게 분노로 표출되고 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진우는 그의 폭력성이 아니라 폭력을 ‘저질러서라도’ 범인을 잡고 싶어 했던 성정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가 그의 폭력성을 이해하는 이유는 그것이 형사로서의 필사적 발악으로 느껴져서다. 곤의 경우, 그의 액션과 힘 즉 ‘남성성’ 그 자체에 대해 감탄하고 존경심을 드러냈지만, 진우는 이 장면에서 그의 폭력의 중심이 ‘걔들을 잡기 위한’ 바에 있단 사실을 인정하고 전제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것이 정의감의 수단임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지욱) “(지욱이 곤에게 입금 받은 내역을 증거로 쓰라며, 자신의 핸드폰을 진우의 손에 쥐여주고) 미안하다, 진우야. 이런 꼴 보여서. …근데, 나 돈에 손 안 댔다.”
(진우) “야, 윤지욱 이 씨발…! (지나가려는 지욱의 멱살을 잡아채며) 그게 그렇게 못 참을 정도야? 지금까지 해낸 걸 다 팽개치고 갈 정도야!”
진우가 분노하는 것은 ‘우릴 버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 일에 대한 충격은 둘째 치고, 자신이 따라온 정의의 우상.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늘 범인을 잡아내고야 말았던, 필사적인 형사의 우상. 그것이 배신 당한 게 슬픈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해낸 걸 다 버리고 갔다는 게, 지금까지 그에게 ‘최고의 형사’라는 이름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게. 지욱이 곤에게 불법적인 돈을 받았고, 그 이유가 수술 때문이었단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었던 진우다. 하지만 어차피 그런 사람이라면,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면, 말해봤자 뭐하나 하며 나름 처음엔 실망한 듯 차분하게 대화를 하려 한다. 하지만 지욱이 ‘원래의’ 즉 형사로서의 모습, 정의를 이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유지하려던 실망감과 정도가 깨지고 분노가 터져 나온다. (“그래야 걔들 잡을 수 있어.” > “쉽습니까 그게?”, “근데, 나 돈에 손 안 댔다.” > “윤지욱 이 씨발…!”)
그대로면서. 원래대로면서. 그러면서 왜? - 즉 진우의 배신감과 분노는 ‘형사로서’의 지욱을 존경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만들어지고, 표출된다.
그런 그이기에 그는 이후 지욱을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다. 그런 그이기에, 그는 결국 지욱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곤은 ‘이딴 건 윤지욱이 아니다’라는 모토 아래 ‘다 버리고 계집이 된 년에게 무슨 말을 하겠냐’며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멸시했지만, 진우는 차마 끝까지 그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에게 자신이 존경했던 대상, 그의 성정이 여전함을 발견하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젠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가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곤에게 그것은 분노와 혼란의 근거가 됐지만, 진우에겐 반대로 작용된다.
더불어 고경표 배우의 진우에 대한 인터뷰마다 강조되는 포인트들을 보면, 그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이힐’에서 고경표는 차승원처럼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거나, 오정세처럼 극 중간 중간에 웃음 포인트를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존재는 빛나고 관객들로 하여금 내가 진우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질문도 던진다. 항상 차승원 곁을 지키고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고 아끼기 때문이다.)”라는 기사의 본문처럼, 우선 진우는 ‘대다수의 시선’(소수자성의 당사자는 아니며, 그렇기에 그 문제에 서툴 수 있음)에서 출발하여 지욱을 알아가는 존재로서 관객이 자기 자신들의 시선을 대응시키는 존재자, ‘내가 진우의 위치였다면’이라는 물음표를 던지는 윤리적 거울 역할의 존재자가 된다. 또한 모든 인터뷰와 표현마다 “존경·의리·지지”라는 키워드가 강조되어, 진우가 지욱의 존재를 ‘결국’ 수용하는 자아로 읽힐 근거를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그는 혼자 술을 마시러 가면서 지욱의 지인인 주연에게 들었던 말들을 떠올린다. 지욱이 얼마나 오랫동안 힘들어 했는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지욱이 지욱이란 것을 납득한 이상, 그에게 ‘성전환’이란 충격은 지욱의 가치를 훼손하는 배신감의 대상이 아니라, 그가 ‘그 모습’을 버릴 정도로 힘들었을 이유로 전환된다. 얼마나 힘들었길래 그랬을까. 얼마나 괴로웠길래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걸 버리기까지 했을까. 그리고 그 사고 끝에, 결국 진우는 지욱에게 술을 마시며 전화를 건다.
(진우) “형님. 진우예요. …아까, 다 하지 못한 말이 있어서. …그냥 아까, 형님 보는데… 잠시 잊었어요. 형님이 남자라는 거, 예쁘셨어요. 너무… 예쁘셨다고요…. 씨발, 좋겠다! 똑같은 인생, 형님은 두 번 사네? 그러고 보니까 육백만불 사나이가 아니라, 소머즈였잖아!”
(지욱) “…고맙다, 진우야.”
(진우) “(결국 터트렸던 웃음이 눈물이 된다. 술에 취한 진우는 엉엉 울기 시작한다.)”
진우는 말한다. ‘남자인 걸 잊었었다’고. 그러니 앞서 말했듯, 진우의 분노는 그가 ‘남자가 아니라서’ 시작된 게 아니다. 그렇기에 그를 보내줄 수 있다. 자신의 우상이 사라진단 사실은 어쩔 수 없이 괴롭고 슬프지만(진우는 송별회 술자리에서도 지욱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데, 그때의 눈물과 이 씬에서의 눈물이 겹쳐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수용한다. 그것 또한 그가 따랐던 형님이니까. 그것 또한 윤지욱이고, 그는 바뀐 게 없기 때문에. 더불어 그는 (슬픈 유머코드이지만) ‘육백만불 사나이’라는 지욱의 캐릭터를 ‘소머즈’로 재전유 시켜주기까지 한다. 이젠 육백만불 사나이가 아니라 소머즈로, 한 번 뿐인 인생을 한 번 더 살기로 한 그를 ‘부러움’으로 응원한다. 오히려 한 번 더 새로운 인생을 각오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기 때문에, 그렇기에, 진우는 지욱도 막막하고 두려울 그 일을 되려 격려한다. 이 또한 고경표 배우의 인터뷰에서 정확히 언급되는 심정이다.
“평소 존경하던 이가 존경심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했을 때 분노하거나 그 모습마저도 존경하고 인정해주는 이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해주는 인물이라면 분노하는 인물은 허곤(오정세 분)이다. … 어차피 내가 사랑해야 되는 사람이면 인정하는 게 맞다. 때문에 연기함에 있어 실망보다는 그를 향한 연민과 상대를 생각하는 점,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담았다.”
결론적으로 진우는 처음엔 ‘다수의 생각’—규범적 이성, 통념적 도덕—의 위치에 서 있지만, 결국 무엇이 옳은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 깨닫는다. 지욱의 이상한 낌새(주사 멍, 급작스러운 퇴사)에 소수자성으로써의 징후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불법적/도덕적인 문제를 의심한다거나, 점차 지욱의 관계들과 정황들을 되짚어 그에 대한 정보나 괴로워 했을 당시들의 심정을 ‘이해해 가는’ 점진적 과정들은 진우가 충분히 관객들의 거울로서도 존재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더불어 그는 결국 지욱을 수긍/연대하는 축으로 자신의 위치를 선택한다. 어쩌면 진우가 도달하는 태도(묵묵한 지지)는 관객이 마침내 선택해야 할 태도와 겹친다고도 볼 수 있다. 편견이 되어버릴 유별난 배려, 편견과 모욕과 ‘틀린’ 그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 등이 아니라, 그냥 그저 존재해 주는 것. 그도 그냥 그저 존재하고 있단 걸 알아주는 것. 즉, 진우는 ‘관객-양심’의 의인화이자, 지욱 내부의 “자기 수용/자기 연대”로 성장이 ‘가능했을’ 일면이다. 처음엔 ‘중도’처럼 보였으나, 결론적으론 ‘이상’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그에게 필요했을 ‘상상친구’와 같은, 바람직한 친구이자 동료이자 지지자.
하지만 이상은 닿기 어렵기 마련이다. 진우가 중용의 인물이었더라면, 어쩌면 그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기 파괴’의 본능, 세상의 정상성 규범의 모욕 끝에 불가능성로 사라진다. 진우는 술을 먹고 장미에게 부축되어 나오다, 곤의 일파에 의해 살해 당한다.
3-4. 도도: ‘가능태’의 존재로서 결말의 비극에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
<하이힐>의 결말은 비극의 끝을 달린다. 느와르의 문법엔 아주 적합할지도 모른다. 장미의 생존을 부정하는 곤에게 분노한 지욱은 결국 그를 죽이고, 그곳에 있던 모든 조직원까지 죽인 뒤 만신창이가 되어 건물 밖으로 나온다. 그리곤 ‘새 삶’을 위해 준비했던 가방 속, 여권과 여러 옷가지 등을 바라보며 택시에 타 어디론가 향한다. 이후 그는 원래의 그와는 완벽히 반대다. 모든 몸싸움에도 멋들어져 보이던 헤어와 옷매무새는 그만두고 아무 꾸밈 없는 상태에, 수염도 기르고 있으며, 장미와 교회도 다니고 있다. 직접적인 화면으로는 잘 보여주지 않던 운전도 하고, 담배도 피운다. 이는 호르몬 주사를 놔주던 불법 병원의 의사가 했던 “역기 들지 마! 쌈박질, 욕지거리, 술도 처먹지 말고, 담배도, 밥도 조금만 처먹고. 불알 달린 것들이 하는 짓들은 다 피해, 그래야 약이 받지!”라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기준’에 완벽히 반하는 모습이다. 또한 교회라는 요소 자체도, 의사의 소개로 교회에서 만남을 가졌던 바다가 했던 “아니, 우리 중에 교회 댕기는 년들이 몇 년이나 될 것 같애? … 무슨 낯으로 여길 와?”라는 말과 배반된다. 즉, 그는 이제 ‘여성’이 되길 포기한 채, 남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지욱이 새 삶을 포기한 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장미가 위험했고 진우가 죽었으며 곤에, 곤의 조직원들에, 박사범까지. 그 한 건물에 있던 사람들은 곤을 배신하고 조직의 정점에 서기로 한 한 부하와, 장미와 지욱을 빼면 모두가 죽었다. 하지만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다. 뉴스 하나 나오지 않고, 그 누구도 그 죽음의 이유에 뭘 묻지 않는다. 지욱에겐 전쟁이 일어난 것과 같았지만, 세상은 그 전쟁을 모른다. 이런 점이, 그의 모든 전쟁이 꼭 그의 내면적 전쟁으로도 성립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더 납득 가능하게 만든다.
이때, 결말에서 등장하는 등장인물은 다름 아닌 도도다. 도도는 조연이라기보다도 특별출연에 가까운, 등장의 횟수를 떠나 그 등장의 의미가 꼭 ‘작품 바깥’에 위치하는 것 같은 신비로운 존재다. 그의 등장 위치와 멀리서 지욱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를 ‘환상성’의 존재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그가 왜 굳이 결말에 비춰졌을까.
도도는 지욱의 선배님인 바다의 지인이며, 바다의 바에서 공연을 한다. 그는 지욱을 항상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지욱이 바다와 연결되기도 전, 불법 병원에서 호르몬 주사를 맞고 있을 때에도 멀리서 그를 지켜 보고 있었고, 그가 바다의 바에 나타나자 ‘이런 것은 해봤냐’며 지욱의 속을 관객들에게 털어놓도록 만들기도 하고, 지욱이 진짜로 비행기를 타서 떠났을지 불안해하고 걱정하며 그의 소식을 찾고, 이후 결말에서 교회에 장미와 함께 서 있는 지욱을 또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 즉 도도는 지욱이 ‘자신다울 수 있거나, 자신을 포기하는 선택의 경계선’에서 항상 등장한다. 그는 지욱이 ‘자기 자신답게 되려는 순간’들에 반복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곤과 진우는 ‘지욱 내부의 목소리들’이고, 장미는 온전히 ‘외부의 타자’라면, 도도는 그 둘 사이의 무엇일까.
개인적 해석으론, 그는 ‘되려는 나(가능성/가능태의 자아)’로서, 지욱이 ‘될 수도 있었던’ 자신이 아닐지 한다.
“(바다에게 와 묻는 도도) 그이. …탔겠지, 비행기? …이상해, 자꾸.”
도도가 지욱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계속 걱정하고 불안해 하던 것도, 지욱을 계속 찾으러 다닌 게 아니라면 어떻게 만난 건지 신기한 교회 앞에서의 마지막 만남도... 교회 바깥, 웃고 떠들며 뭉쳐 지나가는 '정상성'의 가족들 외에 오직 혼자, 그것도 다른 가족들과-부부들과 달리 어디론가 돌아가거나 나아가지 않고 가만히 멈춰 서서 누군가를 응시하는 도도. 그리고 그에게 묵례를 하는 지욱까지. 마지막 교회의 만남은 시공간의 교차점이다. 가능했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떠나보내고 불가능해진 '가능성'의 지욱과 결국 스스로를 포기한 지욱의 마지막 인사, 그 마지막 교차 지점.
이에 <하이힐>의 결말에 또 다른 가능성을 기대해 보고자 한다. 바다가 말했듯 ‘우리들’은 다닐 자격도 없고, 지욱 또한 자기 징벌적 의미로 다니는 것이 아닐지 추측되는 ‘교회’라는 공간. 왜 그들은 하필 이곳에서 만났을까. 왜 이곳이 굳이 ‘가능성의 나’와 교차하는 지점이었을까.
어쩌면, 신은 그들을 버리거나 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려는 지욱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가 가능했을 미래를 보여준 걸지도 모른다. 지욱은 도도를 만난 후 장미를 데려다 주러 차를 운전할 때, 기어봉을 잡은 손에서 새끼 손가락만을 띄운다. 결국 그의 내면의 여성은 죽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씨앗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체념한 채 살아가려던 지욱에게 ‘신’이 마지막으로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의 내면의 씨앗이 죽지 않았음을 자각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지욱은 <하이힐>의 처음처럼, 언젠가는 다시 ‘아무리 모른 척하고 살아보려 했는데도 못하겠다’, ‘내 꿈을 따라가야겠다’며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꿈꿀지도 모른다. 신은 그들을 벌하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삶엔, 여전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본디 ‘나’라는 것은, 그리고 꿈이라는 것은, 나의 첫사랑과 가장 친한 동료와 나의 지지자를 잃는다는 말도 안 되는 고통을 겪고서도 무너지거나 타협될 수 없는 것이므로.
4-1. 결론: <하이힐>을 내면 세계의 전쟁으로 보기
결론적으로 본고는 <하이힐>을 기존, 혹은 대다수가 바라볼 수 있는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보단, ‘<하이힐> 속 등장인물들이 지욱의 또 다른 자아들을 대변하거나 상징하는 현현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전제하여 새로운 해석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지욱은 이 이야기의 ‘나’ 즉 당사자이며, 곤은 세계로부터 내면화된 정상성에의 강박과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자기파괴의 자아이고, 진우는 ‘상상친구’ 혹은 ‘관객들의 거울’과 같은 존재로서 대다수의 시선/이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결국 ‘어쨌든 존재하고 있는’ 지욱의 여성성을 수용하게 되는 면모로서의 자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지욱에게 사랑에 빠진 것으로 쉽게 이해되고 있는 도도를 ‘지욱의 가능성’, 지욱이 ‘될 수도 있었던’ ‘나’로 제시 및 이해하면서 암울한 결말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보고자 했다.
4-2. 추가적으로 논의해 보고 싶은 것, 발전시키고 싶은 비평의 관점
사실 <하이힐>은 화면의 색채(장미가 등장할 때는 분홍빛 조명, 남성성이 강조될 때는 어둡고 검은 분위기를 조성. 그러나 도도가 등장할 때는 아주 새파란 조명이 사용되기도.)에서 표현되는 게 매우 많은 작품이다. 연출과 영상미의 개념에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나 방향이 많이 제시되었는데, 그것까지 논하지는 못했음이 아쉽다.
더불어 작중 중간, 지욱이 차 사고를 내어 병원에 실려가고 - 진우가 그의 이상한 점(주사 멍)을 발견하게 되기 전, 그 원인을 제공한 성가해자 범인이 있다. 그가 진욱에게 하는 말과 지욱의 반응도 매우 의미 깊은데, 그 장면을 정확하게 담아 다루지 못해 아쉽다. 또 매우 의미 깊은, 이 극의 중심이라고 생각되는 다른 장면이 바다와 교회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이다. 이 장면 또한 아예 이 장면을 기준으로 맥락을 이어갈 수도 있을 정도로 의미가 깊어 아쉬움이 크다.
더불어 가능하다면 완전히 ‘퀴어 비평’의 면모에서 <하이힐>을 이해 및 해석해 보고 싶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당사자인 지욱보다 허곤과 진우에게 중심을 두고자 했는데, 차후엔 ‘지욱’에게 집중하여 그만의 세계와 장면들 간의 의미도 설명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한 번 더 <하이힐>을 비평하고 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된다면, 다루지 못한 요소의 이야기들까지 깊이 있게 다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