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려상
친절한 만수씨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
0. 텍스트 분석을 안 할 수가 없다.
올해 9월 말에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를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보면 실관람객 평점은 7.25점으로, 그의 명성에 비해 다소 박한 편이다. 관람평을 살펴보면 “그 정도의 영화인가?”라는 반응이 주류를 이룬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실망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게 들린다. 그러나 영화를 공부하는 처지에서 나는 다른 의견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자극적인 서사 전개 방식이나 감정의 파고가 아니라 해석의 방향에 있다. 관객의 반응이 엇갈린 이유 또한 해석의 간극에서 비롯했다는 생각이다. 평범한 대한민국 가장이던 만수(이병헌)가 살인을 저지르는 지경까지 간 이유가 과연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을까?
이 물음표는 단순한 개인의 몰락담이 아니다. 그것은 ‘중심이 무너진 사회’에서 자신을 마지막 기둥으로 세우려는 인간의 필사적 몸부림을 담아 질문한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 각자의 내면에 놓인 ‘어쩔 수 없음’의 구조를 비춘다. 결국 이 작품은 한 가장의 몰락이 아니라 문명 속 인간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필연’을 해부하는 이야기다. 관객으로 하여금 처절한 가장의 재기를 넘어 인간의 사회적 위치와 문명 구조를 생각하게끔 유도한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표를 던지는 행위 말이다.
서두의 문제 제기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그러하듯 관객에게 해석의 주체로 참여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적용한다. 그의 카메라는 늘 인물의 ‘행동’보다는 그 행동이 발생한 구조적 배경에 더 큰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이 영화의 진짜 무대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맥락이다. ‘어쩔 수 없다’라는 문장이 얼마나 자주 우리 입에서, 그리고 제도적 언어 속에서 반복돼 왔는지를 떠올려보라! 박찬욱은 바로 그 언어의 익숙함을 뒤집는다. 그는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가장 낡은 자기합리화의 언어임과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자기방어의 언어로 해체해 버린다.
1. 어쩔 수 없는 노동자
제지회사에서 25년째 재직 중이던 만수는 어느 날 해고를 통보받고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다. 그의 손끝이 만들어내던 종이는 더 이상 인간의 손이 있어야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토끼 같은 아내와 두 자녀, 귀여운 반려견 두 마리까지 무려 다섯 식구가 딸려 있는데도 말이다. 이들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지던 날이 바로 사건의 시작점이다. 가족들을 위해 3개월 안에 재취업을 하겠다고 선언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 시간이 1년이 지나도록 찾아가는 회사마다 자동화를 이유로 들어 더 이상 사람을 쓰지 않는다. 직접 나무 몽둥이를 들고 종이를 두드리며 품질 확인을 하던 시대는 끝났다. 만수는 이제 사람뿐 아니라 지치지 않는 기계와도 경쟁해야 하는’시대의 희생자‘로 내던져졌다.
이 대목에서 감독은 ‘노동의 종말’이라는 개념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만수의 손은 단순히 한 개인의 손이 아니라 산업화 시대 이후 인간 노동의 상징이다. 그는 생산성을 측정 당하는 인간이며 효율성의 논리 안에서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축소된다. 이 설정은 한국 사회의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반영한다. 1980-90년대의 산업 근로자가 2020년대에 이르러 ‘AI의 손’에 자리를 내어주는 역사의 아이러니 말이다. 만수의 몰락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산업 구조의 진화가 초래한 문명적 비극이다.
영화는 이 구조적 불가항력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만수가 돌보는 온실과 나무, 식물, 기둥이 프레임을 지배한다. 박찬욱 감독이 반복적으로 매치한 이 이미지들은 ‘트리 모델’의 대표로 읽힌다. 하나의 기둥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나무의 구조, 즉 트리 모델은 “누구나 기둥이 되고 싶어 한다.”를 표방하는 만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신을 가족의 중심으로 여기고 가장이라는 위계의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이 트리 모델의 대안 모델인 리좀 모델은 중심이 없는 구조로, 보통 나무의 뿌리로 비유가 많이 된다. 이 영화에선 중심성이 없는 네트워크 구조로 현대사회의 노동 시스템과 AI 문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트리 모델과 리좀 모델의 대비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떠오르게 한다. 트리는 중심에서 가지가 뻗어나가지만, 리좀은 어디서나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낸다. 만수의 세계는 트리 모델의 세계이며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은 이미 리좀의 세계다. 이 불일치가 곧 영화의 긴장으로 이어진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만수는 트리 모델의 의인화, 즉 중심주의의 상징이다. 그런 만수가 관리하고 있는 온실과 집은 그에게 ‘유토피아’이다. 그곳은 외부의 변화를 차단한 채 오직 자신만이 통제할 수 있는 질서를 유지하는 마지막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만수는 상영시간 내내 집과 온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집을 팔라는 아내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온실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만수 자신만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온실과 집은 생명의 보존을 위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갇힌 공간이다. 즉, 만수의 세계는 생존의 은유이자 자기 감금의 구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곧 중심주의가 얼마나 자기 모순적인 이념인지를 상징한다. 자신을 중심이라 믿는 순간 이미 외부와의 연결은 단절된다.
만수가 페이퍼 컴퍼니를 만드는 장면은 영화의 아이러니와 사회적 풍자를 동시에 보여주는 핵심 지점이다. 그는 제지 회사에서 경쟁할 수 있는 사람들을 파악하기 위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회사를 세운다. 이 회사는 현실 속 경쟁과 사회적 서열을 재현하는 거울로 기능한다. 즉, 만수는 실제 노동 시장에서 배제되는 자신의 위치를 반영하면서도 그 안에서 스스로를 중심으로 세우기 위한 통제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이 과정 자체가 이미 구조적 모순 속에 갇혀 있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는 극대화된다.
이 장면은 단순히 코믹한 설정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체계적 구조와 맞닿으며 발휘할 힘의 한계와 심리적 착시를 드러낸다. 만수는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 하지만 그 권위는 실재하지 않는 회사라는 허상 위에서만 존재한다. 이 아이러니는 그의 몰락과 함께 영화 전체의 주제를 강화하며 인간이 만들어낸 구조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기 선택지를 제한하는지 보여준다.
아라(염혜란)가 남편인 범모(이상민)에게 외친 대사는 영화의 전반적인 주제를 관통한다. “해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대처한 네 태도가 문제야!”라는 지적이 바로 인간 심리의 구조와 수렴한다. 만수는 해고라는 구조적 사건 앞에서 스스로의 선택지를 좁히고 본인을 ‘어쩔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며 그 안에 갇힌다. 그가 만든 페이퍼 컴퍼니는 단순히 외부 세계를 조종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스스로 제한한 선택지 속에서 질서를 세우려는 인간 심리의 은유이자 ‘중심을 지키려는 욕망’의 표상이다.
결국 영화는 페이퍼 컴퍼니와 아라의 지적을 통해 인간이 체계적 구조 속에서 스스로 가능성을 제한하고 자기합리화의 굴레에 갇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고와 경쟁, 권위, 선택의 제한. 이 모든 요소가 뒤엉킨 지점에서 인간은 발악하지만, 그 발악조차 체계와 심리적 구속의 일부가 된다. 이 통합적 시선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보이지 않는 제약과 심리적 구속’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2. 어쩔 수 없는 대물림
만수의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해 심한 PTSD를 앓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운영하던 축사의 돼지들이 감염병으로 인해 집단 폐사를 하며 가세가 기운다. 일련의 사건들로 가장으로써의 위치와 삶의 의미를 잃은 그는 창고에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대가 바뀌어 만수도 같은 위치에 놓인다.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가장의 권위를 상실하고 중심을 되찾기 위해 그는 살인을 선택한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생존을 위한 절도를 저지른다.
세 남자의 궤적은 단순히 가장의 역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이 서사는 중심이 붕괴한 세계에서 중심을 되찾으려는 세대들의 집요한 매달림이다. 세대는 달라져도 각자는 여전히 자신이 중심이라 믿는다. 이 집요한 중심의 욕망이 결국 파멸을 낳는다. 폭력은 파괴뿐 아니라 ‘유지의 몸부림’이라는 것. 만수의 살인은 중심을 지키려는 최후의 발악이며 모순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세대를 가로지르는 이 반복 구조는 단순한 대물림이 아니라 문명 구조의 대물림이다. 박찬욱 감독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이 비극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즉, 중심주의는 인간 내면의 심리라기보다는 제도의 습관이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중심 경쟁’은 결국 동일한 욕망의 이행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이 믿은 질서는 한결같이 수직적이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인간의 죄보다 ‘체계의 죄’를 고발한다.
만수의 가족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시스템의 ‘축소판’이다. 그는 회사를 잃었지만, 가족 안에서는 여전히 ‘가장’이라는 이름의 지위를 유지하려 한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단지 다시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정을 지탱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가정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다. 가장의 역할이 경제적 기능으로만 환원된 세계에서 사랑은 구조조정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된다.
만수가 세 명의 경쟁자를 죽이는 과정은 곧 그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레드페퍼라는 가짜 회사를 만들어 사람을 유인하며 “가족을 모집합니다”라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아이러니가 아니다. 기업이 ‘가족 같은 회사’라는 언어로 노동자를 착취하듯 만수 또한 가족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타인의 삶을 해체한다. ‘가족’은 보호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통제의 언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족은 결국 회사를 닮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기능한다.
미리(손예진)는 그런 구조 속에서 복잡한 위치를 점한다. 미리는 만수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더 이상 ‘부부의 정’이 아니라 ‘조직의 연민’처럼 작동한다. 미리가 만수를 감싸듯 돕지만 그를 완전히 옹호하지는 않는데 그녀의 침묵은 냉정한 배신이 아니라 함께 무너져가는 구조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다. 미리는 기다렸었다. 만수가 먼저 일련의 사건을 저지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기를. 하지만 만수는 끝내 미리에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미리는 안다. 만수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가 지독한 체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걸. 그 체념은 바로 ‘어쩔 수 없음’의 다른 이름이다.
만수의 딸인 리원은 그 체념이 대물림된 세대의 상징이다. 아이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닌 인물로, 대화 대신 남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반향어만을 사용한다. 언어는 있으나 의사소통은 부재한 상태. 이 설정은 영화적 장치 이상으로 정교한 의미를 가져 ‘세대 간 단절’의 물리적 은유로 작용한다. 만수가 ‘들으려 하지 않는 아버지’라면 리원이는 ‘말하지 않는 딸’이다. 말하는 사람 없고 듣는 사람이 없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가족은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
장애가 있지만 눈부신 재능을 인정받고 있는 리원의 첼로는 부모 앞에서는 언제나 미완의 음으로 멈춘다. 만수에게 첼로는 ‘돈이 많이 드는 악기’로 환원된 사치품이자 ‘짐’이지만 리원에게 그것은 자신이 유일하게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통로다. 결말에 이르고 아버지와 오빠가 부재한 집 안, 처음으로 리원의 온전한 첼로 연주가 울려 퍼진다. 반향어로만 말을 뱉던 아이가 자신의 음으로 세상을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동시에 화면은 공장의 풍경으로 교차하고 만수가 귀마개를 낀 채 공장 소음 속에서 일하는 모습을 비춘다. 그리하여 딸의 연주는 만수의 귀에 영영 닿지 못했다.
이 교차편집은 단순한 대비가 아니라 ‘세대 간 소통의 단절’을 시각적 형태로 완성하는 마지막 코드다. 리원의 첼로 연주가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만수의 세계는 더 깊은 소음으로 잠긴다.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귀를 막았고 그 결과로 딸의 연주를 들을 기회를 잃었다. 이 장면은 상실과 결핍의 대물림이 완성되는 순간이자 동시에 그 대물림이 깨어지는 첫 균열이기도 하다.
결국 ‘대물림’이란 피의 계승이 아니라 무력감의 상속이다. 만수가 아버지로서 실패한 순간 그 실패는 리원의 세대에게 ‘결핍’으로 전해진다. 이미 무너진 가족이건만 그 무너진 구조를 서로의 몸으로 지탱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가족’이야말로 한국적 시스템의 가장 원초적 형태임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만수는 왜 시조(차승원)를 토막 내지 않았을까? 단어만 놓고 보면 잔인하기 짝이 없지만… 이미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른 만수에게 ‘소시민일 적 연민과 도덕심이 남아있어서’라 기엔 설득력이 약하다. 토막은 내지 못했지만, 만수는 시조의 시체를 네모반듯하게 철사로 꽁꽁 묶어 나무 밑에 묻는다. 이는 은닉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의식으로까지 확대 해석이 가능한 장면이다.
네모는 정형화와 틀, 곧 질서를 상징한다. ‘토막 낸다’라는 행위는 그 질서를, 중심성을 해제하는 행위이다. 시조는 또 다른 중심이었기에 만수는 그 중심을 부수지 못한다. 질서를 파괴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중심주의를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수의 살인 행위는 중심을 지키기 위한 폭력이자 모순이며 동시에 중심을 지키려는 시도이자 그 중심에 자신을 가두는 굴레였다. 그가 행하는 폭력이 얼마나 실없는 짓인가는 결말에 다다르면 더 잘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핵심 은유로 작용하기도 한다. 만수가 시체를 ‘정돈’하는 행위는 파괴를 거부하는 문명의 본능이다. 인간은 질서를 세우기 위해 폭력을 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폭력조차도 ‘질서 있게’ 수행하려 한다. 박찬욱 감독은 이 아이러니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만수는 무질서를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이 곧 그를 괴물로 만든다. ‘정리된 폭력’이야말로 현대 사회가 가장 잘 숨겨온 폭력의 형태임을 감독은 냉정하게 직시한다.
온실에서 아들이 만수를 올려다보는 장면은 상징성의 정점을 이룬다. CGI로 처리된 이 장면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재해석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부정(父情)의 서사가 아니라 권위의 재정립이다. 아버지의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서 절도로 제힘을 과시하려던 아들의 앞에 아버지가 살인을 들이민다. 만수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은 단순 공포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이름의 질서’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을 알리는 장면이다.
CGI의 비현실적인 질감은 현실의 권위를 비틀어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은 현실보다 더 인공적인 장면을 통해 오히려 권위의 ‘재가동’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역설한다. 아버지는 다시 신격화되지만, 그 신성은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처럼 반들거린다. 관객은 그 인위적인 재현 속에서 묘한 불쾌함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감독의 의도다. 권위의 회귀는 결코 구원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3. 어쩔 수 없는 대체
박찬욱 감독이 ‘제지회사’를 무대로 삼은 이유는 명확하다. 종이는 오랜 세월 인간 문명의 토대이자 사고와 기록의 매개였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이후 종이는 꾸준히 사라질 것이라 언급되는 재료가 됐다. 전자책과 태블릿이 종이를 대체하듯 인간 또한 AI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종이는 인간이 자연을 베어 만들어낸 문명의 산물이며 동시에 인간 중심주의의 상징이다.
만수는 25년 동안 종이를 만들던 노동자이지만 기계에 밀려난다. 문명을 지탱하던 손이 문명으로부터 버려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제지회사를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인간이 만든 질서가 인간을 대체하고 해체하는 과정을 구현한다. 결국 ‘제지회사’라는 공간은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인간 중심 문명의 붕괴’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무대다. 만수는 인간 중심을 지키려 살인을 저질렀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을 베고 올라간 자리에 리좀 시스템의 관리자로 존재하게 된다. 그는 중심을 지키려다 중심이 없는 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박찬욱 감독은 이를 통해 ‘문명을 세운 인간이 문명에 의해 소거되는 역설’을 그린다.
그래서 제지공장은 하나의 거대한 메타포라 볼 수 있다. 종이가 나무에서 태어나듯 문명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종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죽이듯 문명은 인간을 소모한다. 이 순환의 비극은 ‘만수’라는 개인 안에 응축돼 나타난다. 그는 종이를 만드는 손이자 문명에 의해 재단되는 종이 그 자체다. 종이 위에 기록되던 인간의 언어는 이제 AI의 데이터로 대체된다. 그 순간 인간은 더 이상 기록의 주체가 아니라 기록의 대상이 된다.
에필로그 부분에서 들리는 제지공장의 기계음은 영화의 리듬을 주도한다. 그것은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서사의 심장박동이다. 만수의 숨소리와 기계의 소음이 점점 일치해 갈 때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무너진다. 그 순간 만수는 이미 리좀 일부가 되어 있다. 박찬욱 감독은 공장의 소리를 통해 문명의 심장을 시청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영화 속 ‘기계의 리듬’은 곧 현대 사회의 시간 감각이며 그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자는 도태된다.
4. 눈에 띄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영화를 보다 보면 빨강과 파랑-또는 초록; 초록색을 푸른색이라고 하기도 한다.-이 꾸준히 등장해 관객의 뇌리에 흔적을 남긴다. 색채 역시 영화가 시사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미장센 중 하나이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빨강과 파랑은 상반되는 톤을 가질 뿐 아니라 권력의 구도,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억압의 이동을 시각화한다. 빨간색은 통제하는 자, 파란색은 통제당하는 자를 상징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미리가 경찰서에서 옷을 갈아입는 장면과 만수가 자신의 손바닥에 적어 놓은 빨간 글씨가 그러하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싹뚝 가를 수 있겠는가. 빨강과 파랑이 끊임없이 전복되며 결국엔 보라색도 나타나는 것처럼 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을 색채로 표현했다.
가수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흘러나오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빨간 옷과 파란 옷, 더 나아가서는 초록색까지 서로 뒤엉켜 끊임없이 색이 전복되고 있는 걸 보여준다. 음악과 색채의 결합은 단순한 시각적 장치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선택 그리고 사회적 구조가 얽히며 흐트러지는 모습을 상징한다. 인간의 행동과 욕망은 예측 불가능하게 뒤엉키고 끊임없이 전복되는 권력과 질서 속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동시에 구조에 갇혀 있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즉, 음악은 색채와 맞물려 영화가 시사하는 인간의 심리적·사회적 ‘불확정성’을 강화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박찬욱 감독의 색채와 음악 연출에는 이항 대립의 파괴를 통한 선과 악, 중심과 주변,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없이 오직 “어쩔 수가 없는” 세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색채 연출은 단지 미학적 장식이 아니라 철학적 언어다. 보라색이 만들어지는 순간은 빨간색과 파란색이 서로를 침범할 때다. 그 경계의 혼탁함이야말로 현실의 질감을 바로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 억압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 모순된 존재 방식을 구체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 보라색이다. ‘어쩔 수 없음’은 결국 색의 중첩이자 윤리의 중첩이며 음악과 결합해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사회 구조의 얽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5. 어쩔 수 없는 마무리
〈어쩔 수가 없다〉는 단순히 한 인간의 몰락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과 문명, 선택과 구조,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얽히며 만들어내는 복잡한 체계를 해부하는 비평적 관찰의 산물이다. 그 안에서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단순한 체념이나 변명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구조 속에 위치시키는 방식과 선택의 한계를 드러내는 언어적 장치로 작동한다. 영화는 인간이 중심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결국 자신을 가두는 구조적 모순임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작품 초반, 만수의 살인은 개인적 고립과 비극의 영향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조와 환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선택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사회적·산업적 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심리적 반응임을 알 수 있다. 만수의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위는 인간이 중심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시스템, 구조가 인간의 욕망을 한계 안에 가두는 충돌에서 비롯된다. 그는 자신의 기둥 역할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지만, 그 폭력조차 체계 안에서 구조화되고 정리된다. 네모반듯하게 시체를 묻고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며 집과 온실을 통제하는 장면들은 모두 인간이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려는 본능적 행위가 얼마나 구조 속에 얽매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은유적 장치다.
여기에 더해 박찬욱 감독은 가족과 색채, 음악, 시공간적 구성 등을 통해 인간 내면과 사회 구조의 얽힘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빨강과 파랑의 반복과 전복, <고추잠자리> 등 음악의 결합은 단순한 미적 장치가 아니라 중심과 주변, 권력과 자유, 억압과 해방의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함을 드러낸다. 만수의 아버지와 만수 본인, 아들과 딸 리원이, 아내 미리까지, 각자의 시선과 행동은 중심을 지키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주변이 이를 감지하고 흔드는 미묘한 힘의 균형을 상징한다. 특히 리원이가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존재와 의지를 드러내는 힘을 보여준다. 장애 아동이라는 설정과 제한된 공간 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중심에 놓이지 못한 이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질서와 관계를 감지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상징한다.
이 내러티브는 현대 문명과 기술 발전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신의 위치를 잃고 시스템 일부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제지회사와 기계, AI와 노동의 대체, 종이와 기록의 상징적 의미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이 어떻게 인간을 소모하고 인간의 존재를 구조 속 부품으로 흡수하는지를 형상화한다. 만수는 중심을 지키려 발악하지만 결국 구조와 시스템에 의해 흡수되고 그 속에서 인간 중심주의의 모순과 필연적 한계가 드러난다.
결국 영화가 남기는 여운은 단순한 도덕적 심판이나 개인적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는 정말로 어쩔 수 없었는가?”라는 물음표를 던진다. 인간은 중심이 되고 싶지만 구조와 규칙 속에서 스스로의 선택을 제한당하며 살아간다. ‘어쩔 수 없음’은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시스템과 구조가 인간에게 부여한 필연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를 비극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사와 시각적 장치를 통해 인간과 문명, 선택과 필연, 구조와 자유가 뒤엉킨 현실을 섬세히 탐구하도록 만든다.
〈어쩔 수가 없다〉는 체념을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 구조를 해부한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인간이 자신을 정당화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 안에는 무력감과 자기 합리화, 그리고 권력에 대한 복종이 뒤섞여 녹아있다. 박찬욱 감독은 그 언어를 뒤집으며 우리에게 말한다. 만수의 ‘어쩔 수 없음’은 개인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문명이 오래도록 앓고 있는 ‘병’이라는 걸. 우리가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종종 “이미 누군가 정한 질서에 순응하겠다”라는 고백에 가까운 말로 들리기도 한다는 걸. 그 질서가 자본이든 기술이든 사회적 관습이든 무엇이라 부르든 본질적으로 인간을 한계 안에 가두는 장치라는 점은 같다.
흥미로운 점은 이토록 묵직한 서사를 박찬욱 감독이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대놓고 노린 웃음 포인트가 제대로 저격당해서 영화관 안 사람들이 모두 깔깔 웃었으니, 그의 의도는 가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폭력과 음악, 무질서와 유희가 뒤섞이며 세계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된다. 그 장면은 일종의 해방처럼 보이지만 실은 비극의 또 다른 언어이다. 박찬욱은 관객이 웃는 그 찰나에 가장 깊은 절망을 밀어 넣는다. 웃음은 통증의 다른 얼굴이고 유머는 그가 세계를 해부하는 가장 정교한 메스가 돼 관객에게 치밀하게 계산된 웃음을 선사한다.
박찬욱 감독은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오래된 관념을 해제하고 그 자리에 ‘연결된 인간’이라는 새로운 존재 방식을 제안한다. 인간이 만든 질서가 인간을 갈아 넣으며 돌아간다는 불편한 진실을 고백하며 만수의 살인은 개인의 죄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악습이라고 외친다. 만수의 ‘어쩔 수 없음’은 우리 모두의 ‘어쩔 수 없음’이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그러나 박찬욱 감독은 그 뒤에 불편한 물음표를 붙인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우리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