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상
뉴진스와 트리플에스, 소녀들의 세계로 빠져들다
1. 서론
2020년대는 기대와 함께 시작됐지만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대봉쇄를 겪으며 세계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그 사이 K-POP은 한 단계 더 성장했다. 2019년 있지를 시작으로 4세대 걸그룹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2020년 에스파와 스테이씨가 챌린지 열풍에 탑승해 젊은 층의 유행을 단숨에 이끌었다. 그리고 2022년 7월, 세상의 모든 소음을 단번에 침묵시킨 5명의 소녀, 뉴진스가 나타났다. K-POP은 뉴진스의 데뷔를 기준으로 또 한 번 전환의 시기를 맞았다. 있지가 문을 열고 에스파와 스테이씨가 길을 닦아 뉴진스가 그 전환을 완성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유행 따라 뉴진스의 기조를 이어가거나 반기를 들며 2022년이 저물어갈 무렵, 10월 말 정반대의 색깔을 품은 걸그룹 트리플에스가 등장했다. 뉴진스가 순수한 이미지를 가져갔다면, 트리플에스는 서울 소녀들의 사회를 내걸고 도시적, 감각적인 이미지를 담아 K-POP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파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4명으로 시작해 10명으로 데뷔, 추후 2024년 24명으로 모이기까지 약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 글은 뉴진스와 트리플에스가 내세우는 이미지들을 비교하며 두 그룹이 어떤 궤를 공유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과거의 향수를 부르는 뉴진스와 현재의 사소함까지 붙잡은 트리플에스는 겉으로 볼 때 물과 기름, 빛과 어둠처럼 이분법적인 사고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요소가 있는데, 불안이다. 그들이 불안을 어떻게 표현하고 해소하기까지의 과정 또한 알아보고자 한다.
2. 뉴진스-우리 인생의 이상향, 순수의 세계
2022년 7월 22일, <Attention> 뮤직비디오 공개로 세상에 뉴진스라는 이름을 알렸다. 음악방송을 돌며 대중들에게 선사한 뉴진스의 풋풋함과 싱그러움은 일종의 신드롬이었다. 뉴진스가 데뷔하기 전 K-POP은 풍성한 음악과 강렬하고 화려한 화장이 주를 이뤘다. 아이브의 <Love Dive>와 (여자)아이들의 <TOMBOY>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두 곡은 2022년 멜론 연간 차트 1위와 2위를 달성하고 여러 시상식을 휩쓸었다. 그런데 뉴진스는 다르다. 검정 긴 생머리에 화장기가 드러나지 않는 풋풋한 얼굴, 흔히 어른들이 말하는 그 나이대 소녀들만이 가진 매력을 과감하게 드러내 <Attention>을 필두로 뉴진스는 매섭게 활동을 이어갔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받은 음악방송 1위와 시상식 트로피들은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쌓았다. 데뷔 1~2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1) 향수의 미학
뉴진스의 핵심은 노스텔지어, 즉 향수의 정서다. 데뷔곡 <Attention>부터 <Ditto>, <Bubble Gum>까지 이 감정선은 일관된다. 특히 <Ditto>는 VHS 질감, 캠코더 화면, 단정한 교복 등 1990년대의 물성을 정교하게 재현하며,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감각적 회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Ditto>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레트로한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시선의 주체를 ‘뉴진스’가 아닌 ‘반희수’라는 인물에게 넘겼다는 점에 있다. 캠코더가 기록한 영상 속 뉴진스는 직접 응시의 대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을 매개로 간접 응시 되는 존재다. 이중 카메라 구조는 전형적인 아이돌 전시를 유예하고, 관계의 거리와 시간의 간극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사라져가는 시간 속에서 뉴진스의 불안은 과장된 절규가 아니라, 비어 있는 프레임으로 전달된다.
<Ditto>는 두 가지 버전, Side A와 Side B로 구성되어 하나의 기억을 서로 다른 시점에서 재배열한다. 따뜻하고 은은한 장면이 A에서 ‘함께 있음’의 환상으로 남았다면, B에서는 그것이 ‘부재의 기록’이었음을 드러낸다. 동일한 장면이 반복되지만 맥락이 달라지며, 관객은 어느 쪽이 진실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기억이란 불완전한 필름이라는 인식을 시각화한 장치다. 눈 덮인 교정, 체육관, 빈 복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라진 관계를 증언하는 공간으로 남는다. 그 안에서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회상과 망각, 재구성의 진동 속에 머문다.
이 구조는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의식의 흐름 기법과 닮아 있다. 프루스트가 마들렌의 향기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복원하려 했으나 결국 상실의 자각에 이르렀듯, <Ditto> 속 영상 또한 되살아난 듯 보이지만 이미 사라진 관계의 잔향에 가깝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단속적 의식의 파편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그려내고자 했듯, 뉴진스의 카메라는 기억의 조각을 엮어 함께였던 우리의 잔상을 만든다. 결국 <Ditto>는 K-POP이 도달한 가장 섬세한 모더니즘적 서사이자, 과거와 현재, 존재와 부재가 교차하는 감정의 풍경이다. 이처럼 시선의 배치를 바꾼 <Ditto>의 형식 실험은 지난 10년간 진행된 탈성적화의 궤적과 정확히 맞물린다.
2) 탈성적화의 계보
뉴진스의 등장은 단절이 아닌 흐름의 연장선이었다. 지난 10년간 걸그룹은 상업적 성 코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점차 낮추고, 시선의 권력을 조정해 왔다. 트와이스는 귀여움과 러블리를 앞세워 파스텔톤의 스타일링과 표정과 단순한 제스처 중심의 퍼포먼스로 몸의 과시보다 관계의 놀이성을 강조했다. 있지는 <달라달라>와 <WANNABE>를 통해 자기 주체적인 화법을 전면에 내세웠고, 스트리트 패션과 과격한 안무를 통해 나만이 가진 개성을 잃지 말라는 선언을 시각화했다. 스테이씨는 <ASAP>과 <색안경>으로 틴프레시 장르를 선보이며 하이틴 무드와 일상의 감각을 결합해 현실적인 10대의 자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흐름의 끝에서 뉴진스가 등장했다. 뉴진스는 앞선 세 그룹이 축적해온 탈성적화의 흐름을 가장 과감하고 완성도 높게 밀어붙였다. 최소화된 화장과 루즈한 실루엣, 교복과 데님 같은 일상복, 그리고 교정과 체육관, 골목길, 시골집 같은 현실적 공간 속에서 그들은 보여지는 몸보다 말하고 기억하는 주체로 자신을 재배치했다.
뉴진스의 미학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이들이 한 일은 성적 코드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강도를 낮추고 위치를 바꾸는 일이었다. 이들의 영상에서는 카메라의 응시가 직접적인 욕망의 대상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신 반희수의 캠코더라는 매개를 통해 관객은 뉴진스를 간접적으로 바라보고, 이때 시선의 중심은 전시가 아닌 관계와 기억으로 이동한다. 교복과 소녀라는 기표 역시 문화적으로 양가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탈성적화의 장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대상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뉴진스의 성취는 이러한 양가성을 자각한 채, 보여짐의 강도를 낮추면서 관계와 시간, 그리고 불안의 감각을 미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데 있다.
트와이스에서 스테이씨로 이어지는 변화의 흐름을 정리해본다면, 다섯 가지 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스타일링의 변화다. 트와이스가 파스텔톤과 귀여운 이미지를 중심으로 했다면, 있지는 스트리트 감성과 기능적 실루엣으로 전환했고, 스테이씨는 하이틴 스타일을 생활복처럼 착용했다. 뉴진스는 이 지점을 한층 더 밀어붙여 루즈한 실루엣과 화장기 없는 얼굴로 신체의 노출보다 그 나이대 소녀와 결을 이루는 자연스러움을 선택했다. 둘째, 카메라의 시선이다. 기존 걸그룹이 정면 응시를 통해 팬과 직접 교감했다면, 뉴진스는 반희수의 캠코더를 전면에 세워 관객의 시선을 간접화했다. 셋째, 안무의 문법이다. 트와이스의 제스처 중심 안무나 있지의 파워풀한 동작, 스테이씨의 킬링 포인트를 지나 뉴진스에 이르러서는 군무의 균질성과 시선의 분산, 흐름 등이 강조된다. 넷째, 가사와 화자의 태도다. 이전 세대의 걸그룹이 타인에게 어필하거나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이었다면, 뉴진스의 <Attention>과 <Hype Boy>는 자신이 느끼는 호기심과 선택을 먼저 말한다. 마지막으로, 공간의 변화다. 트와이스와 있지, 스테이씨가 무대와 세트를 혼용한 반면, 뉴진스는 겨울의 빛과 VHS 질감이 감도는 현실적 장소에서 시간을 기억처럼 느끼게 했다.
이 모든 요소는 하나의 결론으로 모인다. 뉴진스는 상업적 성 코드를 과감하게 지우고, 시선의 배치를 전환 시켜 보여주는 몸에서 말하고 기억하는 주체로 이동했다. 이는 곧 탈성적화의 미학이 단순한 청순함의 전략이 아니라, 시선의 구조를 바꾸는 미학적 선택임을 뜻한다. 뉴진스의 전시는 부정되지 않는다. 다만 그 강도가 낮아지고, 그 자리를 여백이 대신한다. 그리고 그 여백은 <Ditto>의 비어 있는 프레임과 만나 불안이라는 감정을 잔향처럼 남긴다. 트와이스가 놀이로, 있지가 선언으로, 스테이씨가 일상으로 닦아놓은 길 끝에서 뉴진스는 시선과 시간의 구조 자체를 바꾸며 탈성적화의 미학을 생활의 질감으로 완성했다.
3) 뉴진스와 민희진
뉴진스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소속사 어도어(ADOR)의 대표였던 민희진은 뉴진스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그는 단순한 기획자가 아니라, 뉴진스의 미학적 기반을 설계한 사실상의 창조자다. 뉴진스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명확하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 일상 속의 순수. 그러나 이 이상향은 동시에 민희진 자신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민희진은 SM엔터테인먼트 시절부터 ‘아이돌 비주얼 아트’의 개념을 구축해 온 인물이다. 그녀가 비주얼 디렉터로 참여한 f(x)의 《Pink Tape》(2013)은 실험적 감수성과 아트 필름적인 미학으로 대중음악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 앨범은 2018년 멜론·한겨레·태림스코어가 선정한 《한국 대중음반 명반 100》에서 걸그룹 앨범 중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그 이후 《Pink Tape》는 단순한 음반이 아닌 하나의 신화, 나아가 뉴진스의 미학적 원형으로 회자되었다. 뉴진스의 자연스러움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Pink Tape》가 일상적 피사체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했다면, 뉴진스는 그 세계를 현실로 끌어왔다. 말하자면 민희진은 소녀의 시절을 시각 예술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바로 그 치밀한 번역의 완벽함이 역설적으로 한계를 낳는다. 다음 문단에서 다루겠지만, 뉴진스의 세계는 완벽하게 기획된 자연스러움 속에서 일정한 경직됨을 동반한다. 그들은 자연스러움이라는 가장 어려운 인공물 위에서 존재한다.
앞서 뉴진스를 평할 때 자주 언급된 단어로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카메라가 아닌 함께 춤을 추는 멤버들에게 돌아가고, 혹은 카메라 뒤의 팬들에게 던져진다. 우리는 뉴진스의 무대를 몰래 관찰하는 사람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매우 치밀하게 구성된 자연스러움이다. 뉴진스의 무심함은 계산된 각도와 조명, 표정, 그리고 움직임의 타이밍 속에서 완성된다. 자연스러움이 가장 인공적인 형식으로 구축된 셈이다.
이 치밀함은 완벽한 질서의 미학을 보여주는 동시에 일정한 경직됨을 동반한다. 완벽하게 설계된 순수는 흐트러질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수하지 않는 소녀, 동일한 조도와 톤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로 남는다. 그것은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워야 하는 규율이며, 기획된 완벽함이 만들어낸 긴장이다.
이 긴장의 중심에는 프로듀서 민희진이 있다. 뉴진스는 다섯 명의 멤버보다 한 사람의 이름으로 더 자주 호명된다. 뉴진스의 세계는 ‘민희진이 만든 뉴진스’라는 문장으로 귀결된다. 뉴진스의 미학은 멤버 개개인의 서사보다 기획자의 미학을 소비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SM 시절부터 민희진의 작업을 추종하는 이른바 고인물들이 존재했듯, 뉴진스를 향한 집착은 멤버가 아닌 민희진의 미학적 설계에 대한 탐닉으로 이어진다.
윤광은은 뉴진스 팬덤이 단일한 아이돌에 대한 애착을 넘어 “기획 요소의 총체로서 뉴진스를 소비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K-POP은 이미 ‘텍스트화된 산업’으로 진입했다. 팬들은 노래와 무대뿐 아니라 뮤직비디오, 비주얼 디렉션, 브랜드 협업, 프로듀서의 미학까지 하나의 데이터베이스로 인식하며 탐구한다. 다시 말해, 뉴진스의 팬들은 멤버를 사랑하는 팬을 넘어, 뉴진스라는 기획의 체계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서사적 K-POP로 진화했다.
이 과정에서 뉴진스의 성공은 개인의 예술적 성취라기보다 K-POP의 산업화가 완성된 징후로 읽힌다. 실존하는 인물이 캐릭터처럼 소비되고, 그 캐릭터를 만든 프로듀서의 미학이 브랜드가 되는 현상 속에서, 뉴진스는 기획자 중심의 아이돌 구조를 결정적으로 드러냈다. 순수성의 가치를 포착해 이를 상품화한 결과, ‘꾸밈없는 것이 가장 힙한 것’이라는 역설적 유행이 탄생했다. 뉴진스는 이 유행의 정점에 서 있으며, 동시에 그 유행의 가장 정교한 피조물로 존재한다.
3. 트리플에스-얕은 우울감과 후련한 일탈
트리플에스는 이제껏 보여준 걸그룹과 전혀 다른 결을 보여준다. 그들의 가사처럼 ‘빛나는 미완의 거친 반향’이다. 이제까지 아이돌의 시작은 소속사에서 연습생을 받아 키워내 데뷔조를 정하고, 치밀한 준비 끝에 대중 앞에 완벽한 모습으로 선보인다. 그러나 트리플에스의 시작은 아무것도 없다. 멤버를 S로 칭하고 뒤에 숫자를 붙여 들어오는 순서대로 배열한다. 그 시작을 알린 S는 윤서연이다. 그는 여타 아이돌들과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의 장래 희망에는 아이돌이 없었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 대입 재수를 준비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가 트리플에스 합류한다고 해서 바로 무대에 오르는 것도 아니다. 트리플에스의 유튜브 콘텐츠 ‘Signal’을 통해 그의 연습 과정을 과감하게 보여준다. 소비하는 시청자들은 소녀들의 성장을 지켜보게 된다. M-net의 프로듀스 시리즈가 전 국민에게 프로듀서 자격을 부여하듯이 트리플에스도 팬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열어줬다. 뉴진스가 무대 위에 현란하게 있던 소품과 진한 화장을 치웠다면, 트리플에스는 배일에 싸인 연습 과정을 과감히 드러내 보여준다. 뉴진스가 삭제라면, 트리플에스는 공개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추후 언급할 트리플에스의 데뷔 앨범명인 《ASSEMBLE》처럼 트리플에스의 멤버들은 하나씩 모이기 시작한다. 저마다 가지각색의 사연을 가진 24명의 소녀들이 모이기까지 약 2년의 세월이 걸렸다. ‘방과후 설렘’, ‘걸스플래닛’, ‘유니버스 티켓’ 등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각 대형 소속사의 데뷔조까지 미치지 못했던 연습생들과 명문대 학생, 특공무술 유단자, 엘리트 무용인, 전직 걸그룹 출신까지 다양하다. 각각의 박자대로 놀던 소녀들은 하나로 모여 정박자가 된다. 이것이 하나이자 스물넷, 모든 가능성의 아이돌 트리플에스다.
또한 그들을 일컫는 ‘라라라’ 세계관, 이 반복의 문법은 단순한 후렴구가 아니다. 각기 다른 곡이지만, 그 속에는 서로의 노래를 호출하며 하나로 연결된다. 노래가 끝나도 여운처럼 맴도는 이 음절은 트리플에스의 세계가 완결이 아닌 순환으로 존재함을 상징한다. 각자의 노래가 흩어지지 않고, 다시 다음 노래의 서두로 이어지는 것이다. ‘라라라’는 곧 소녀들의 신호이자, 그들이 같은 우주 안에서 숨 쉬고 있음을 알리는 암호다.
1) 1세대 A&R 프로듀서 정병기, 그가 꿈꾸던 우주
트리플에스의 프로듀서 정병기는 1세대 A&R 프로듀서로, 원더걸스와 2PM, 인피니트 등 여러 그룹의 기획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자기 색을 드러낸 시점은 이달의 소녀 기획부터였다. 매달 한 명씩 멤버를 공개하며 각각의 세계와 서사를 부여한 뒤, 그것들이 하나의 달(月)로 완성되어 루나버스를 이루는 이 실험은 K-POP 역사에서 보기 드문 서사적 기획이었다. 그러나 소속사 분쟁 등으로 정병기가 제작에서 빠지게 되며, 그 세계는 완전한 형태로 이륙하지 못했다. 정병기는 그 미완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조립을 시작했다. 달을 넘은 우주였다.
그가 말하는 우주는 천체의 질서가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이 서로 얽히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혼돈에 가깝다. 트리플에스는 이 우주를 현실 세계 위에 구현한다. 멤버들은 하나의 완성체가 아니라 각각의 모듈(module)로 존재한다. 이들은 단일한 세계관 안에 속하지 않는다.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개별 존재로서 유닛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해체되어 다른 조합으로 재결합한다. 완성보다 조립을, 정답보다 변화를 추구한다.
트리플에스는 Cosmo 앱을 통해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팬들은 Gravity라는 투표 제도를 이용해 멤버들을 유닛에 직접 배치하고 활동을 결정한다. 이는 단순한 참여형 이벤트가 아니라, 기획과 소비가 공존하는 예술적 구조다. 투표는 꼬모(COMO)를 소지해야 참여할 수 있으며, 이 꼬모는 오브젝트(Object)라는 NFT 블록체인 디지털 포토카드를 구매하면 얻을 수 있다. 정병기는 저서 『기획의 감각』에서 이러한 시스템을 “팬들에게 선택의 자유는 주되, 실패할 자유는 주지 않는 방식”이라 정의하며, 건강한 관계의 구축을 목표로 했다고 밝혔다.
뉴진스의 세계가 완벽하게 설계된 시나리오라면, 트리플에스의 세계는 실시간으로 쓰이는 열린 코드다. 정병기의 우주는 무대 뒤편의 연습실을 드러내고, 그 과정을 하나의 콘텐츠로 전시한다. 완벽한 순수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행착오와 미숙함, 피로와 성장의 서사를 노출한다. 그리하여 트리플에스의 세계는 완벽하게 다듬어진 한 장의 필름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의 데이터들이 모여 생성하는 움직이는 아카이브가 된다. 정병기는 이를 통해 아이돌을 완성된 신화에서 진행형의 서사로 바꾸었다. 그것이 그가 꿈꾸던 우주의 형태였다.
2) 트리플에스의 정점, Girls Never Die
2024년 5월 8일, S24 지연까지 합류하며 트리플에스는 마침내 24명의 정원을 채웠고 완전체 앨범 《ASSEMBLE24》를 발매했다. 그전까지도 유닛 구조인 ‘Dimension’을 통해 꾸준히 활동하며 팬덤을 확장해 왔다. 첫 공개인 <Generation>은 <Girls Never Die>까지 이어지는 서울 소녀 세계관의 시초로 화제를 모았고, 이어진 <Girls Capitalism>은 소녀와 자본의 독특한 결합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트리플에스의 진정한 완전체 선언은 《ASSEMBLE》에서부터였다. 이는 S10 서다현까지 10명의 멤버가 참여한 앨범으로 이 노래의 타이틀 곡을 데모만 듣고 판단해 Gravity 투표로 뽑아 <Rising>이 탄생했다. 이는 <Girls Never Die>와 올해 활동한 <깨어>도 마찬가지로 팬들의 선택으로 정해졌다.
<Girls Never Die>는 제목부터 강렬하다. 제목만 봐선 죽음을 주제로 한 비극적 서사를 떠올리게 하지만, 정작 곡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쓰러져도 괜찮으니 다시 일어나자는 메시지는 생존의 선언이자, 서로를 부축하며 걷는 소녀들의 연대가 만들어내는 감정으로 확장된다. 지금의 절망을 뒤로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비상은 이 곡이 품은 생의 언어다.
뮤직비디오는 이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뮤비 처음부터 인파에 따라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치이다가 다시 해보자는 말에 아련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윤서연의 시선은 단번에 집중력을 높여준다. 이어서 떡이 진 머리로 게임에 열중하거나, 욕조에 물을 채워 스스로 얼굴을 물에 담그거나, 지하철역을 하염없이 헤매기도 하고 빈 건물에 텐트를 치고 모여 생활하기도 한다. 멤버들의 얼굴은 균일하지 않고, 엇갈린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모든 요소는 기획된 완벽함보다 살아 있는 리듬을 우선시하는 트리플에스의 미학을 상징한다.
뮤직비디오는 극에 치닫다가 S1 윤서연과 S24 지연이 각각 한 쪽씩 날개를 달고 건물 난간 위에서 불안한 놀이를 하다가 결심한 듯 손을 잡고 떨어진다. 새가 날기 위해선 어릴 적부터 수없이 떨어진다고 한다. 추락은 곧 비상의 시작이다. 이 두 소녀의 추락은 부활의 제스처이자, 조립의 재개다. 지상의 잔해 위에서 세계를 다시 조립해 그들의 불멸은 생물학적 생존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도 다시 결합하려는 의지다.
<Girls Never Die>는 트리플에스의 세계관을 하나로 묶는 동시에, 그들이 지금까지 실험해 온 모든 미학적 장치—참여형 기획, 유닛 조립, 불완전한 조화—를 하나의 화면 속에 응축한 작품이다. 이 노래는 단순한 아이돌 노래가 아니라, 소녀들의 정체성과 생존의 윤리에 관한 서사다. 뉴진스가 완벽하게 설계된 프레임 속에서 이상을 구현했다면, 트리플에스는 균열 속에서 불안과 성장을 동시에 기록했다. 그들의 세계는 완성으로 닫히지 않고, 매 순간 새롭게 조립되는 서사로 열려 있다.
3) 빛나는 미완의 우주
트리플에스의 세계관은 방대한 가능성을 품지만, 동시에 한계도 공존한다. 무엇보다도 참여와 조립이라는 이상은 곧 소비와 거래의 언어로 연결된다. 팬들이 오브젝트를 구매해 투표권을 얻는 구조는 선택이라는 명목 아래 자본의 흐름에 종속된다. 현실 정치에서의 투표권은 1인당 1표가 기본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가진 꼬모에 따라 투표수가 달라진다.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느냐에 따라 Gravity에서의 영향력이 달라진다. 팬들의 참여는 곧 거래의 형식으로 전환되고, 창작과 소비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정병기가 꿈꾼 우주가 팬과 아이돌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지향했다면, 현실의 코스모스는 자본이 허락한 질서 안에서만 유효하다.
또한 트리플에스의 세계는 24명의 존재가 공존하기엔 지나치게 복잡하고 거대하다. 완벽한 조립을 표방하지만, 그 조립은 끝없이 이어지는 조립의 반복일 뿐이다. 유닛은 일회성에 그치며 중첩되는 곡들을 소화해야 하는 멤버들의 부담감은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이 무한한 연결의 구조 속에서 누군가는 드러나고, 누군가는 잊힌다. 실제로 인기 멤버에 속하는 S5 김유연은 공개부터 지금까지 90% 이상의 활동에 참여했다. 반면에 후반부에 공개된 멤버들은 유닛에 참여하지 못하고 대부분 완전체 활동이 전부였다. 특히 작년 3/4분기에 진행된 유닛인 ‘Visionary Vision’과 일본 유닛 ‘핫찌!’에 S1 윤서연과 메인보컬인 S10 서다현이 참여하지 못한 점은 의외였다.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인기에 따른 서열화 양상으로 번질 위험과 특정 멤버의 혹사와 방치가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이 세계가 점차 데이터로서의 인간을 전시한다는 점이다. 트리플에스는 미숙함과 성장의 과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진정성을 획득하지만, 그 진정성마저도 기획의 일부가 된다. 카메라가 포착한 시행착오와 좌절은 감정의 리얼리티로 소비되고, 성장 서사는 새로운 상품의 서막이 된다. 트리플에스의 피로는 단지 과로의 피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정해 보이려는 시도의 피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완전한 코스모스는 여전히 유의미하다. 완벽히 닫힌 세계가 아닌, 끝없이 조립되는 세계로서 트리플에스는 K-POP이 어디까지 실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가 진정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자본의 구조 속에서 소녀들의 개별 서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병기가 구축한 우주의 질서는 별들의 거리로부터가 아니라, 그 거리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4. 두 그룹이 불안을 표현하는 방식-이미지의 뉴진스, 세계관의 트리플에스
정병기는 저서에서 자신이 만들어야 할 아이돌의 경쟁자는 이미 활동 중인 다른 아이돌이 아닌 지금 젊은 세대가 겪는 삶의 고단함과 팍팍한 현실이 가장 큰 경쟁자라고 말했다. 그 피로의 도피처를 만드는 게 기획의 핵심이라며 동시대 젊은 세대의 욕망과 고민을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한다.
뉴진스와 트리플에스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불안을 이야기한다. 뉴진스의 불안이 내면의 정적 세계에서 출발한다면, 트리플에스의 불안은 외부 세계의 균열에서 비롯된다. 전자는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후자는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자신을 다시 조립한다.
<Ditto>와 <OMG>는 뉴진스가 불안을 시각화한 대표적인 텍스트다. <Ditto>에서의 불안은 결핍의 감정이다. 이미 사라진 존재를 그리워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태. 캠코더의 흔들린 화질과 흰 눈 덮인 교정, 비어 있는 체육관은 모두 부재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슬픈 눈을 가진 사슴처럼 텅 빈 공간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캠코더 속의 소녀는 흥겹게 춤을 추지만 캠코더 바깥으로 꺼낼 수 없다. 뉴진스는 거기 그대로 멈춰 있지만 이를 지켜보는 대중들은 점점 커간다. 이런 서글픈 추억을 되새기며 나는 왜 저곳에 없는지 씁쓸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이때의 불안은 외침이 아니라, 정지된 상태로 전달된다. 뉴진스는 감정을 과시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지의 정적과 여백으로 불안을 시각화한다. <OMG>에서는 그 불안이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정신병동을 연상시키는 공간 연출 속에서 멤버들은 자신이 프로그램인지 인간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진정 본인들이 인간인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우스꽝스러운 그림이 빗발치고 <Attention>에서 거품 목욕하던 민지가 이제 그만하자고 다그친다. 마구잡이로 뒤엉키는 기억이다. 그러나 자신이 힘들 때나 울 것 같을 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은 너라고 부르는 팬들이라고 명시해 팬과 가수의 관계를 내적으로 결합한다. 결국 이 모든 흔들림을 잡아주는 건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 밖에 없다는 일종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로써 뉴진스에게 불안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미세한 떨림이다.
트리플에스의 불안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발생한다. 이들의 불안은 세계의 균열, 즉 시스템의 불완전함 속에서 드러난다. <Generation>의 소녀들은 경직된 분위기의 학교의 학생이다. 자기들끼리 틱톡을 찍으며 놀던 중 교사가 등장하자 모두 얼어붙은 듯 고개 숙여 교사가 지날 때까지 멈춰 서 있다. 불안한 듯 손톱을 뜯으며 고민하다가 뭔갈 결심한 듯 해맑게 학교를 빠져나와 자유분방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지하철역, 아파트 담벼락, 한강다리 등을 가로지르며 그들의 틱톡 촬영은 계속 이어진다. 엘리베이터에 어른들이 들이닥쳐도 고개를 내밀어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흔들어 본다. 이어지는 <Rising>도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간다. 새벽의 도시를 떠도는 불완전한 소녀들이 모여 하나의 군무를 만들고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Girls Never Die>에서 그 희망을 확인한다. 불안을 생의 언어로 변환한다. 음악이 시작하면서 쏟아지는 환호 소리는 멤버뿐 아니라 지금 이 삶을 살아가는 당신들에게 보내는 찬사다. 누군가의 어린 시절은 화려했겠지만, 또 누군가는 암울한 과거였을 것이다. 트리플에스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어두운 시절을 이 노래로 위로해준다. 세계가 부서져도 그 속에서 다시 조립하겠다는 의지, 트리플에스의 불안은 세계를 재배치하려는 시도이며, 우주의 일부로 자신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뉴진스가 불안을 기억의 결핍과 존재의 불확실성으로 표현한다면, 트리플에스는 그것을 세계의 불완전함과 관계의 재조립으로 표현한다. 뉴진스의 카메라는 침묵 속에서 흔들리고, 트리플에스의 카메라는 소음 속에서 흔들린다. 전자는 사라진 과거의 자리에서, 후자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혼란 속에서 불안을 감각한다. 그러나 두 그룹 모두 불안을 단순히 부정적인 정서로 남겨두지 않는다. 불안은 그들에게 새로운 감정의 문법이자,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뉴진스가 비어 있는 프레임으로 세계를 응시했다면, 트리플에스는 불완전한 세계를 직접 조립하며 응답한다. 한쪽은 ‘이미지의 시선’으로, 다른 한쪽은 ‘세계의 서사’로 불안을 말한다. 결국 두 그룹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불안을 통해 2020년대 K-POP이 도달한 감정의 깊이를 증명한다.
5. 결론
뉴진스와 트리플에스는 2020년대 K-POP의 감정 구조를 대표하는 두 축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미학적 방향에서 출발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불안이라는 동일한 정서를 중심으로 교차한다. 뉴진스의 불안은 내면의 정적 세계에서 비롯된 감정으로, 상실과 기억이 파편화되어 존재의 결핍을 이미지의 여백으로 드러난다. 반면 트리플에스의 불안은 외부 세계의 불완전함에서 발생하며, 세계의 균열을 다시 조립해 연결하는 서사로 나타난다. 전자가 정지된 이미지의 불안을 표현한다면, 후자는 움직이는 서사의 불안을 수행한다. 이러한 차이는 곧 K-POP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의 시대적 변화를 의미한다. 감정을 회피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오히려 감정 자체를 서사의 구성 원리로 삼는 2020년대 걸그룹의 새로운 감정 문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두 그룹이 보여주는 불안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동시대 청춘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의 반영이다. 불안은 부정적 정서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이며, 스스로를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뉴진스가 상실을 통해 내면의 시간을 사유했다면, 트리플에스는 조립과 변화를 통해 외부의 시간을 구축했다. 두 그룹은 서로 다른 결을 지녔지만, 불안을 통해 2020년대 K-POP이 감정의 깊이와 사유의 폭을 동시에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뉴진스와 트리플에스의 등장은 K-POP의 감정 체계가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완벽함이나 환상으로 대표되는 아이돌의 신화가 아니라, 불안과 결핍을 내포한 현실의 감정이 새로운 서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 두 그룹의 서사는 단지 음악 산업의 한 흐름을 넘어, 동시대의 불안한 젊음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