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의롭게 하는 그릇'이라고 하여 옳을 '의(義)'에 그릇 '기(器)'를 써서 '의기(儀器)'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표현된 천문의기는 크게 천체위치측정기, 시간측정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고 시간측정기는 다시 해시계, 물시계, 별시계로 구분된다.
천체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기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 불리는 혼천의(渾天儀)
혼천의의 구조를 간소화하여 만든 간의(簡儀)
간의가 크고 무거워 이동하여 관측하기에 무리가 따랐기에 이점을 보완 하여 제작한 소간의(小簡儀)
이밖에도 기기를 받침대 위에 놓고 적도 좌표계를 사용하여 기기의 방위와 관측지점의 북극고도를 맞추어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적도의(赤道儀)가 있다.
▲그림1. 혼천의 (한국천문연구원 제공)1
(1) 혼천의(渾天儀)
혼천의는 혼의 또는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고도 불리는 천체측정기이다.
중국에서 기원전 2세기경 처음 제작되어 청대까지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후기~통일신라시대에 전래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역시 기록은 없다.
혼천의 제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에 나타난다.
조선 최초의 혼천의는 세종 14년(1432년) 천문기기 제작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세종 15년 정초, 박연, 김진 등이 소규모 모형 혼천의를 제작하였다.
이후 이천, 정인지, 김빈 등이 참여하여 관측용 혼천의를 제작하였다.
(2) 간의(簡儀)
세종대왕은 세종 14년(1432)~19년(1437)까지 자주적 역법 편찬을 위해 역법 연구와 천체 관측을 시행하였다.
국립 천문대인 간의대(簡儀臺)를 세우고 천문의기와 계시의기를 제작하였다.
세종 14년(1432), 목간의를 시험 제작하여 한양의 북극고도(위도)를 측정한 뒤 청동으로 제작하여 간의대 위에 설치하였다.
간의(簡儀)는 원나라 곽수경(1276년)이 처음 만든 적도의(赤道儀)식 천문의기로, 행성과 별의 적경·적위를 정밀 측정할 수 있었다.
간의는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천문관측기기였다.
▲그림2. 간의 (한국천문연구원 제공)1
▲그림3. 소간의 (한국천문연구원 제공)1
▲그림4. 적도의 (한국천문연구원 제공)1
(3) 소간의(小簡儀)
소간의는 간의를 축소해 이동이 편리하도록 만든 천문 관측기기이다.
천체의 위치 관측과 시간 측정에 사용되었다.
세종 16년(1434), 이천·정초·정인지가 제작하여 경복궁 천추전과 서운관에 설치하였다.
소간의는 사유환, 적도환, 백각환, 규형, 기둥과 밑받침으로 구성되었다.
적도좌표계와 지평좌표계로 변환해 사용할 수 있는 다목적 기기로, 행성과 별의 위치·고도·방위를 측정할 수 있었다.
(4) 적도의(赤道儀)
적도의(赤道儀)는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기기이다.
조선 후기 관상감에서 사용되었다.
받침대 위에 올려 방위와 북극 고도를 맞추어 간편하게 적도좌표계로 활용할 수 있었다.
구조가 단순하며, 오래전부터 적도좌표계를 사용해 온 역사를 보여준다.
시간측정기는 앙부일구, 현주일구 등의 해시계와 자격루, 옥루 등의 물시계가 대표적이고 별시계인 일성정시의와 혼평의, 기계시계인 혼천시계로 분류할 수 있다.
(1) 해시계
① 신라시대 해시계
경주박물관 해시계 파편
1930년 경주 성곽에서 발굴, 화강석 원반형
반경 약 33.4cm, 두께 약 16.8cm
자(子)시 ~ 묘(卯)시 구간이 남아 있음
원을 24등분하여 24시(時)와 8괘(卦)를 새김
시표를 세워 적도에 평행하게 설치, 북극을 향하도록 제작
제작시기: 6~7세기 추정, 중국 한·원대 이전 해시계와 유사
▲그림5. 신라시대 해시계 파편(국립경주박물관 소장)2
② 고려시대 해시계
고려시대 해시계는 문헌과 유물이 전해지지 않음.
신라 해시계에서 바로 조선 초기 해시계로 이어지기는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
개성 만월대 서쪽의 고려 첨성대 현존 → 주변에 천문의기가 있었을 가능성 큼
천체 관측에서 중요한 남북 정렬을 위해 해시계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
조선 초기 해시계와 유사한 형태였을 가능성 있음.
③ 조선시대 해시계
공식적인 기록은 《세종실록》에서 처음 등장
세종시대 제작한 시계로는 앙부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규표가 있음.
그러나 현존하지 않음. → 복원 연구 필요
임진왜란 이후 모두 소실되어 17~18세기에 다시 제작
세종시대 앙부일구 복구, 휴대용 소형 앙부일구 다수 제작
현재 남아 있는 앙부일구는 모두 17~18세기 이후 제작
인조시대: 시헌역법 기반 신평지평일구 제작
앙부일구의 오목한 시반면을 평면으로 전개한 구조
서양식 평면해시계 전통과 한국 전통 해시계 결합
정조 9년(1785): 서양 천문학 영향을 받은 간평일구, 혼개 일구 제작
19세기 후반: 강윤·강건 등이 서양 천문학 기반 평면해시계 제작
▲그림6. 앙부일구(한국천문연구원 제공)1
▲ 그림7. 신평지평일구(한국천문연구원 제공)1
▲ 그림8. 규표 (막대해시계)(한국천문연구원 제공)1
(2) 물시계
① 신라시대 물시계
명칭: 누각(漏刻), 경루(更漏), 누호(漏壺) 등으로 불림
형식: 중국 한대 이후 대표적 부누(浮漏) 형식으로 추정
제도:
신라 718년, 누각전 설치 → 누각박사 제도 시작
백제는 약 2세기 앞서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
신라 경덕왕 8년(749) → 천문박사 1명, 누각박사 6명 배치
천문학자의 관측을 통해 정밀한 시간 측정 수행
신라는 대체로 당 제도를 모방하여 유사한 규모의 제도 운영
② 조선시대 물시계 _ 자격루
세종 16년(1434) 장영실·김빈 제작, 자동 물시계
설치 장소: 경복궁 남쪽 보루각, 1434년 7월 1일부터 공식 사용 → 조선의 표준 시계
역사와 변화
단종 3년(1455): 자동 시보 장치 사용 중지
예종 1년(1469): 다시 가동
연산군 11년(1505): 창덕궁으로 이전
성종 대: 시보 장치의 오차 발생
중종 29년(1534): 보루각 자격루 개조, 새 자격루 제작 시작
중종 31년(1536): 새 자격루 완성 → 인정(人定), 파루(罷漏)까지 자격 가능
이후 운명
구 자격루: 임진왜란 때 소실
새 자격루: 창덕궁 보루각에 설치, 여러 차례 수리 후 사용
효종 4년(1653) 시헌력 시행 이후: 자격(자동 시보) 기능 중단, 물시계 부분만 사용
현재: 중종 때 만든 물시계의 누기(漏器) 부분만 덕수궁에 보존
▲그림9. 자격루3
(3) 일성정시의
세종 시대(조선 초기): 1일을 12시·100각, 밤을 5경으로 구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조선 독창적 발명, 세계적 과학기술 대표
특징
국가 표준 교정용 시계
한양의 북극 고도를 정확히 측정
한양 위도에 맞춰 정극환 조정 → 자격루를 교정하는 주야겸용 시계로 기능
정밀한 천문시계
지구 자전축 방향(정북)에 설치, 적도좌표계와 일치
태양·천체의 일주운동 변화량 측정
낮과 밤 모두 시간 측정 가능한 주야겸용 측시기
▲그림10. 일성정시의(한국천문연구원 제공)1
(1) 정방안
방위를 바로 잡아서 동서남북을 표시하는 지정표를 말한다.
그림11. 정방안 복원품4 ▶
원나라 때의 정방안을 실제 크기로 복원한 것, 조선 세종 때의 정방안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
< 참고 자료 >
한국천문연구원 천문우주지식정보 https://astro.kasi.re.kr/learning/pageView/5384
국사편찬위원회. (n.d.). 4. 시계의 종류와 시간 측정.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15_0040_0040
위키백과. (2025.10.05). 자격루. https://ko.wikipedia.org/wiki/자격루
국사편찬위원회. (n.d.). 시간 측정의 시작.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15_004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