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이런 제자가 있습니다. 건명원(建明苑)에서 만나 함께 토론하고 함께 배웠고 또 함께 꿈을 공유합니다. ‘함께’라는 말을 여러 번 붙이는 이유는 그가 내게 문자를 보낼 때나 책을 선물할 때 항상 붙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대위까지 복무하고 전역하여 건명원에 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군인이셨습니다.
처음 볼 때 눈빛이 형형하고, 생기가 넘쳤는데,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의 생기는 항상 자기를 벗어나려 몸부림칩니다. 그래서 사유는 매우 공적이고 정의롭습니다. 건명원에 들어오자마자, 우리는 깊은 얘기를 나눴고, 그는 바로 일본의 ‘요시다 쇼인’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단기 사명을 가졌습니다. 일단 마음을 먹자, 그는 활을 떠난 화살 같았습니다. 바로 학원에 등록하여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아직 일본어도 모르는 상태에서 뛰쳐나와 곧장 요시다 쇼인의 고향인 하기(萩)시를 찾아 가기도 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죽은 요시다 쇼인의 산 숨결을 느꼈음이 분명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책을 급히 내지 말도록 권유했습니다. 급하게 하다가 구멍들이 생길까봐 그랬습니다. 하지만, 제가 틀렸고 그가 옳았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우리에게 ‘원수의 심장’같은 존재입니다. 막부 말기에다가 제국주의 팽창이 가속되는 급변의 시대에 멍하게 서있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바로 세우고 시대를 구하려는 의지로 자신의 피를 스스로 끓였습니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조그만 학교를 세워 겨우 2년 동안에 92명의 제자를 배출하는데, 그 가운데 반은 격변기에 죽고, 반은 살아남아 메이지유신을 이끕니다. 규모도 작고 운영 기간도 짧았지만, 일본 역사상 가장 성공한 학교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우리는 당시 약 400여개의 향교와 서원에서 수없이 많은 인재들이 학문을 닦았지만, 2년도 안 되는 시기에 배출된 92명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시대에 맞는 분명한 목적을 향하지 않은 교육은 이렇게 허망합니다. 여기서 두 명의 총리(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모토)와, 4명의 장관(마에하라 잇세이, 야마다 아키요시, 노무라 야스시, 사니가와 야지로)이 배출됩니다. 현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도 요시다 쇼인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정한론(征韓論)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점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지만, 일본은 그를 여전히 교육과 학문의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도 요시다 쇼인 등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신사입니다. 아무튼 일본은 여전히 ‘요시다 쇼인’을 살고 있습니다.
일제로부터 36년간을 식민지로 보낸 민족이 식민화의 사상을 세운 장본인을 ‘공부’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는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반성이 있다면, 공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증오하고 분노는 하지만, 반성은 없었습니다. 그 증거가 그간 ‘요시다 쇼인’에 관한 책 한 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성’과 그 반성이 내 준 ‘실천’을 하려는 의지가 없는 민족은 다시 치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김세진의 책(『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이 36년간 치욕을 경험한 민족이 ‘원수의 심장’에 관하여 쓴 첫 번째 책입니다. 늦었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반성’하고 ‘실천’하는 일을 시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만이 죽는 길이 아니라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시다 쇼인은 역사에 대해서 분석, 비판, 평가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29살에 죽었습니다. 59년을 산 나는 떨쳐지지 않은 열등감 속에서 요시다 쇼인을 읽습니다.
(사진 1장은 김세진 군의 책 표지이고, 다른 한 장은 2016년 12월31일 촛불집회 현장에서 우연히 만나 기념으로 찍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