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탁월한 사유의 시선> 개정판을 냈다. 서문을 따로 붙이고, 문투를 바꾸고, 내용을 조금 보강했다. 가독성과 내용을 더 튼튼하게 하려고 애썼다.

2.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많은 분들이 읽고 공감해줬다. 감사하고 또 힘이 났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우리나라의 모두가 읽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었다. 꿈도 야무졌다. 과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겸손의 미덕과는 좀 거리가 있지만, 나는 그만큼 내가 사는 공동체가 한 단계 상승하여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며 자유롭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런 내 소망의 절실함과 조급함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친구가 전화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물었다. 혼자 조용히 내면을 지키면서 지적인 완성과 인격적 성숙을 도모하는 것이 철학의 주된 모습이 아닌가. 도가(道家) 철학자이면서 공동체로서의 나라를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앎이 늘어갈수록 내 자유가 공동체 자유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개인적인 삶의 의미가 우주의 넓이로 확장되는 것이 허풍이 아니라 바로 완성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이 근본에서는 깊이 연결되어 있음도 알게 되었다. 추상하는 능력으로 힘을 발휘하며 사는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일을 동양의 선현들은 천인합일(天人合一) 등의 어법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기보다는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한다. 시대의 병은 뜻있는 개인으로서의 내가 발견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점에서 공적(公的)이다. 게다가 새롭고 위대한 것들은 다 시대의 병을 고치려고 덤빈 사람들의 손에서 나왔다. 이렇게 해서 세상은 진화한다. 이것은 또 나의 진화이기도 하다. 내가 시장 좌판에 진열된 생선이 아니라 요동치는 물길을 헤치는 물고기로 살아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표현된다. 나는 눈뜨고 이렇게 펄떡거릴 뿐이다.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하며 고치려고 덤빈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강했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약했다. 약하면서 강한 척 하거나, 약한 부분을 애써 외면하다가는 한번이라도 제대로 살다가기 힘들다.

3.

실용주의가 국정 목표이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 국정 목표를 위해 학술토론을 벌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당시 권력 근처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실용주의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 후에 창조 경제나 문화 융성이라는 국정 목표도 있었지만, 실용주의 때나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촛불 혁명 이후의 지금도 특별히 다르지 않다. 이론이나 학술보다는 ‘진영’의 정치 공학이 우선이다. 이렇게 되면 정련된 정책이 집행되지 못할 뿐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진영만 바꾸는 일이 반복되고, 결국 더 높게 오르는 역사의 진보는 더디다. 지금 우리에게 학술과 문화는 아직 국가 운용과 별 상관없이 존재한다. 삶과 지식이 분리되어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식을 기능적인 이해의 대상으로만 삼지 내 삶에 충격을 주는 송곳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약하다. 높은 수준의 지식을 송곳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하겠다.

4. 개정판 서문 마지막에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온 민족인데, 우리가 어떻게 발전시킨 나라인데, 여기까지만 살다갈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쓴 이유다. 모두와 따뜻하게 어깨를 기대며 함께 나아가고 싶다. 탁월한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