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무계

최진석

『장자』라는 책을 읽으면 중국인들의 과장과 허풍의 극을 만날 수 있다. 첫 장을 열자마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등장하는데,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렇게 큰 물고기는 현실 세계에 없다. 크기에 그치지 않는다. 가공할만한 존재로 변화까지 한다. 이 물고기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튀어 올라 ‘붕(鵬)’이라는 새로 바뀐다. 잠깐 동안에 어류가 조류로 바뀌는 진화의 황당한 비약이 일어난다. 붕의 등 넓이가 몇 천리를 넘고,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구름처럼 하늘을 가려버린다. 황당무계하다. 어류와 조류의 경계가 사라지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한계가 무너져 속절없이 무궁한 곳으로 넘어가 버린다. 의식도 그에 따라 현실 밖의 세계로 아득해질 뿐이다.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우주의 한 가운데에 ‘혼돈(混沌)’이라는 신이 살고 있었다. 남해에 사는 ‘숙(儵)’과 북해에 사는 ‘홀(忽)’이라는 두 신이 어느 날 ‘혼돈’을 방문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두 신은 ‘혼돈’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그들은 ‘혼돈’의 몸에 구멍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람들은 일곱 개의 구멍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혼돈’은 구멍이 없으니 엄청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숙’과 ‘홀’은 날마다 하나씩 ‘혼돈’의 몸에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주기로 했다. 정성을 들여 구멍을 내다보니 어느덧 이레째가 되었다. ‘혼돈’에게도 일곱 구멍이 생겼다. ‘혼돈’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레째가 되는 바로 그날, 죽고 말았다. 중국 사람들은 세상에 있을 수도 없는 이런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놓고는 2천년 이상이나 읽고 감동하며 산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 제우스는 익시온이 자신의 아내 헤라를 탐한다는 것을 알고 구름으로 헤라의 형상을 만들어 익시온에게 보냈다. 익시온은 이 구름을 헤라로 여기고 품었는데, 여기서 켄타우로스가 태어났다. 켄타우로스의 허리 아래는 인간이 아니라 말이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말인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존재라니! 제우스는 익시온을 괘씸하게 여겨 불타는 수레바퀴에 묶어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익시온은 그대로 타르타로스라 불리는 저승으로 떨어져 불타는 수레바퀴에 묶인 채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는 또 등에 날개가 달려있어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신령스런 말인 페가수스도 등장한다. 영웅 페르세우스가 괴물 메두사의 목을 잘랐을 때, 그 목에서 흘러나온 피에서 태어났다. 페가수스는 천둥과 번개를 운반한다.

이런 신화나 우화들은 사실이 아니다. 모두 거짓이고, 실재로는 없다. 세상사를 잘 모르는 아이들이나 즐기는 것이지, 이치를 깨달은 어른들은 시큰둥하고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따라서 어디론가 날아가지만, 어른들은 땅 위에 발을 딛고서 이런 헛된 이야기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여기서 미래는 애들에게 있을까, 어른들에게 있을까? 어른들은 미래를 잃었고, 애들은 언제나 미래를 향한다. 미래는 아직 열리지 않은 곳,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다. 있는 것에 눈을 밀착시키는 한,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은 없다. 생의 발자국은 숙명적으로 아직 열리지 않은 곳으로 부단히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 도래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와서 펼쳐 여는 것이 삶이다. 문명은 원래 그런 것이다.

세계의 흐름이라는 것은 ‘이미 있는 것’과 ‘아직 없는 것’ 사이의 대립 투쟁이다. ‘아직 없는 것’이 ‘이미 있는 것’을 약화시키거나 무화시키면서 세상에 ‘있는 것’으로 실현되는 일을 총체적으로 문화(文化)라고 한다. 어떤 것이 이 세상에 나타나 변화를 야기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진보고, 진화고, 발전이고, 변화다. 당연히 변화의 주도권은 시선이 ‘아직 없는 것’에 가 있는 사람의 몫이다. 창의적 도전은 ‘아직 없는 것’을 향해 걸으며,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일이지 않은가. 신화나 우화는 ‘없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당연히 변화의 주도권은 마음속에 신화나 우화를 품고 있는 측이 갖는다. 이것이 삶의 비밀이자 비결이다.

현대 세계의 주도권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후예들이 가지고 있다. 신화가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신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스케일의 문제다. 여기서 스케일은 어느 것이 더 비사실적이고 더 황당한가의 문제다. 문명의 주도권이 약한 곳에는 신화가 약하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자. 문명은 신화다. 신화의 사실화 과정일 뿐이다. 인간은 신화를 실현시키는 존재다. 환상의 구체화가 삶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의 양적이고 질적인 규모는 바로 우리가 가진 신화의 규모다.

10대 후반의 어느 즈음에 체게바라 평전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체게바라가 누군지 자세히 알지도 못했다. 그 평전을 살 때는 욕심이 다른 데에 있었다. 그 책을 사면 따라오는 대형 사진이다. 선명한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의 게바라 모습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 사진에서도 내 눈은 붉은 색 바탕에 자리 잡은 검정 베레모의 게바라보다도 위쪽 흰색의 한 줄 문장에 박혔다. 체게바라가 한 말일 것이다.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 체게바라는 20세기의 많은 ‘반항아들’ 사이에서 단연 빛나는 유일한 ‘혁명가’다. 아르헨티나의 의과대학 학생으로 살다가 쿠바 반정부 혁명군에 들어가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카스트로 다음의 권력을 가졌다. 쿠바의 국립은행 총재와 재무 장관까지 역임하면서 쿠바의 핵심층으로서 혁명의 과실을 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다시 표표히 길을 나서 볼리비아 혁명을 지원하다 죽음을 맞는다.(혁명의 과실을 탐하느라 정신없는 자칭 혁명가들은 잠깐이나마 반성하고 넘어가자.) 우리는 보통 체게바라를 사회주의 혁명가, 의사, 저술가, 게릴라 지도자로 알고, 또 그런 경력들이 이뤄지는 과정에 나타났던 여러 영웅담으로 기억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그가 꾸었던 꿈의 결과물일 뿐이다. 체게바라는 꿈을 꾼 사람이었고, 신화 속에 살던 ‘황당무계’한 사람이었다. 의과대학 학생이 혁명 대오의 일원이 된 일은 점 하나 분명하게 찍히지 않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무모한 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예측 불가능성에 덮여 있고, 명료한 계산과 견적은 나올 수도 없다. 메두사의 피에서 페가수스가 태어나는 일만큼이나 황당할 뿐이다. 아무도 몰래 ―사실은 본인도 몰랐을 수 있다― 체게바라는 꿈의 세계에서 내려왔다. 기능에 갇힌 사람은 체게바라가 남긴 행적만 보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오는 그의 무모한 여정을 보지는 않는다. 꿈은 아직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자 확신이다. 비밀스럽지만, 매우 분명한 것이 있다. 현실적 성취의 크기는 전적으로 황당함의 크기, 꿈의 규모, 신화적 스케일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근래에 내가 본 최고의 한국 영화는 단연 〈수상한 그녀〉(감독: 황동혁)다. 할머니가 영정 사진을 한 장 찍다가 아가씨로 되돌아가서 일어난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물고기가 하늘을 향해 튀어 올라 새로 바뀌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있었던 일을 다루는 다른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시선이 현재 혹은 과거에 있었던 것에 고정되는 한, 이데올로기적 재평가 작업을 넘어서기 어렵다. 신화적 도전이 있을 때만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승화가 일어난다. 최근 나온 영화 <The shape of water〉는 어떤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여자가 온 몸이 비늘로 덮인 괴생명체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인간 세상의 많은 주제들을 다루면서, 그 높이와 넓이를 상상 이상으로 확장한다. 신화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미 있는 사실을 이 세상에 아직 없는 공간으로 끌고 올라갈 수 있을 때, 이미 있던 것들은 죽음의 관을 열고 일어나 비로소 생명을 회복하여 확장된 의미로 분칠하고 전혀 새롭게 재현된다. 새로운 분칠로 우리 삶의 영역을 넓혀준다. 시적 팽창이 일어난다.

한마디로 삶의 진정성은 상상의 현실화로 드러난다. 삶이 상승하고 확장하는 느낌 없이 답답하고 피폐되어 간다면, 이는 분명히 자신에게 할당된 황당한 영역의 상실 때문이다. 꿈을 꾸지 않고, 계획만 세우기 때문이다. 계획에 따라 프로젝트를 행하는 형태로 삶을 꾸리다가는 자기 발가락 하나 세울 땅 한 조각도 늘릴 수 없다. 평생 소작농으로 살다 간다. 돈키호테가 죽어가면서 왜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웠으며,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잡으려 했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스페인의 기괴한 촌놈이 취중에 나불대는 객기가 아니다. 삶의 비밀을 봐버린 ‘놈’이 계산 속 밝은 자잘한 ‘분’들에게 죽음으로 알려주는 성공 비결이다. 과학자가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몰두하는 일, 지식을 생산하는 모험에 나서는 일, 질문하려고 덤비는 일,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치는 일, 정답을 외면하고 애써 문제에 참여하려는 일, 길 끝에서 돌아서지 않고 새 길을 열려고 팔뚝을 걷는 일, 모두 다 신화적 삶이다. 신화를 가진 자가 마지막에 크게 웃는다.

『철학과 현실』117권, 2018년 여름호

<철학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