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스무 살 청년을 만났습니다. 학교는 단 하루도 다니지 않았답니다. 홈스쿨링을 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홈스쿨링이 아니라 언스쿨링을 했다고 합니다. 언스쿨링에 대해서 그 청년의 보모님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가 쓴 <학교는 단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제52쪽에 실려 있습니다.
“언스쿨링은 배움의 주체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아이들 자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각자 다양한 잠재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이들 자신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부모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부모들은 끊임없이이 호기심을 불어넣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아이가 스스로 터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기만 하면 됩니다. ... 그렇기 때문에 언스쿨링에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진학이 최종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진학’보다는 평생 무엇을, 왜,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인생의 소명을 찾아나가는 ‘진로’가 더욱 중요한 것이지요. 부모는 아이가 본인의 진로를 탐색하는 과정을 조용히 옆에서 돕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진학이 필요하다면 차후에 대학을 선택해서 공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학은 필수 조건이 아니라 선택 사항일 뿐입니다.”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 오늘 그와 나눈 대화는 매우 그리고 충분히 지적이었으며, 시스템을 거부한 채 스스로 배우면서 다져진 힘이 느껴졌습니다.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정치학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적은 사회를 조금이나마 문명의 방향에 맞게 발전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공적이고 윤리적인 태도가 잘 갖춰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내년에 합격하면 건명원에서 1년간 공부하고, 군대를 다녀올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의 희망 가운데 하나가 이러했습니다. “사유의 섬세함”을 갖추고 싶다. 학교를 하루도 다니지 않은 20살 청년으로부터 “사유의 섬세함”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교육과 성숙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만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