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없음의 쓸모

광주에 가면 무등산 밑의 어느 호텔에 묵곤 한다. 오래된 호텔이라 시설이 조금 낡기는 했어도, 무등산이라는 의미가 내게는 크다. 요즘은 철도가 잘 발달되어서 지방에 가더라도 굳이 묵고 오지 않아도 되는데, 어쩔 때는 괜히 집에 돌아가지 않고 혼자서 적막한 호사를 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무등산에서는... 무등(無等)은 이런저런 봉우리들이 서로 다투며 키 재기를 하는 데 쓰는 기준[等]따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도록 태어났다. 그래서 견줄 것, 즉 ‘등’(等)이 없는 산이라는 의미로 ‘무등’(無等)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비할 데 없는 산이기 때문이다. 이름대로 하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하는 유일하고도 고유한 산이다. 다른 산들이 정해진 판 안에 있는 여러 봉우리들 사이에서 일등하려고 아웅다웅 할 때, 무등산은 무심히 판 자체를 다르게 펼쳐 일류로 태어났다. 불교에서는 온전한 깨달음을 산스크리트어로 아누따라삼약삼보디(anuttara-samyak-sambodhi)라고 하는데,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적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읽는다. 번역을 하면 ‘무등정각’(無等正覺)이다. 온전한 깨달음에다 왜 ‘무등’(無等)이라는 글자를 올려놓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왜 무등산의 그 호텔을 찾는지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온전함이나 유일함 혹은 고유함 등의 비교적 오만한 존재감이 살아있다.

5월 중순의 어느 날 밤, 나는 일을 마친 후 약간 노곤한 몸뚱이를 끌고 그 호텔로 찾아들었다. 깊이 잤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고 무등의 기운을 우선 빨아들였더니, 무등정각의 끝자락이라도 잡은 양 몸과 마음이 팽창하며 얇은 햇살을 타고 날아오르려 했다. 그 기분 그대로 통통 튀며 산자락을 잠깐 더듬다가 늦은 아침 식사로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식곤증이 점심에만 오는 것은 아니다. 아침 식사 후의 식곤증도 노곤하게 늘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책을 펼쳤다가 몇 글자 읽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자족적이고 고급스런 아침인가.

이 고급스런 자족감은 얼마가지 못했다. 호텔 마당에서 간헐적으로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에 나는 허둥대며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창밖으로 보니 점잖은 모습으로 내게 산책길을 가르쳐 주셨던 그 분이 자동차들을 인도하면서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계셨다. 우선 매우 너그럽고 여유로워 보이시던 분이 사람을 다급하게 재촉하는 호루라기를 불고 계셔서 더욱 생경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피해가 가지 않게 서둘러 담당 부서에 전화를 해서 휴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호루라기를 불지 말아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호텔 측에서 온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오늘 결혼식이 있는데, 손님들이 몰려오므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차가 심하게 몰려오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몰려온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써야지 무턱대로 호루라기를 부는 일은 ‘호텔’이 본래 가지고 있어야 할 격에는 맞지 않아 보였다.

‘기능’에 갇히면 ‘본질’을 잃는다. 눈앞의 쓸모만 따지다가는 진짜 가치 있는 것을 놓친다고 말해도 되겠다. 물론 본질만 지키고 ‘기능’을 무시해서도 존립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호텔에는 호텔이 제공하는 본질적 가치들이 있는데, 쾌적함, 안락함, 편리함, 친절 등등이다. 이런 본질적 가치들을 지키는 데에 봉사하는 활동들을 기능이라고 한다. 교통정리나 인사나 손님에 대한 주의력 등등이다. 기능은 직접적으로 보이거나 만져지지만, 본질은 잘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왕왕 눈에 보이는 기능에만 몰두하고, 보이지 않는 본질은 소홀하게 대할 수도 있다. 호텔이 호텔로 잘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예식업도 하고 식당도 운영 한다. 그런데 예식업에 따른 교통을 정리하기 위해서 호텔 본연의 쾌적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교통정리는 잘 되지만 호텔로서의 명성은 계속 깎이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교통정리를 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면서 읽혀지는 세계가 있다.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를 감각 세계 혹은 현상 세계라고 한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은 세계를 거칠게 본질 세계나 본체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데, 여기에 이론이나 지식도 있다. 감각 세계는 직접적이고 경험적이어서 매우 분명하지만, 이론의 세계는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느껴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선의 높이로 하자면, 보이는 세계는 낮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높다. 숫자를 아는 사람의 시선은 높고, 숫자를 모르는 사람의 시선은 낮다. 더하기 빼기만 할 줄 아는 사람보다 3차방정식을 풀 줄 아는 사람의 시선이 더 높다. 체계를 갖춘 지식과 이론으로 무장한 사람의 시선은 들쭉날쭉한 감각적 자극으로 세계와 접촉하는 사람의 그것보다 높다. 시선이 높으면 통제력이 더 크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감각 세계에서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일을 ‘예능’(藝能)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추상의 영역에 존재하는 시선으로 즐거움을 만드는 일을 ‘예술’(藝術)이라 한다. 보이고 만져지는 구체적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제조하는 능력을 ‘기능’(技能)이라 하고, 보이지 않는 높이의 시선에서 행사되는 제조의 능력을 ‘기술’(技術)이라고 한다. 예술적인 높이에서 발휘하는 통제력이 예능의 높이에서 발휘하는 그것보다 더 크다. 기술이 발휘하는 힘이 기능의 그것보다 더 쎈 것도 같은 이치다.

분명한 쓸모나 유용성은 감각의 세계에서 하는 말이다.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효과를 내는 작용을 쓸모(用)라고 한다. 그래서 쓸모는 항상 ‘그릇’(器)과 관련된다. ‘그릇’을 배태하고 있으면서 아무 그릇도 아닌 상태, 즉 어떤 테두리도 아직 닿기 이전의 상태는 ‘통나무’ 즉 ‘박’(樸)이다. ‘박’은 아직 ‘쓸모’로 흩어지기 이전의 원본의 상태다. 그래서 노자는 도(道)를 바로 박(樸)에 비유하여 말한다. “박(樸)이 흩어져서 그릇(器)이 된다.”(樸散則爲器 『도덕경』 제28장) 노자에게서 도(道)나 박(樸)은 감각적으로 테두리 지어진 쓸모의 영역을 넘어선 것으로 읽힌다. 이렇게 본다면, 진정으로 큰 쓸모는 감각 세계에서 사용되는 테두리 지어진 작은 쓸모들을 훨씬 벗어난 것이어야 하리라.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큰 통제력을 발휘하는 쓸모는 감각 세계의 쓸모를 벗어나 있어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시선의 높이에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각 세계의 높이에서 보면 오히려 쓸모없게 보일 것이다.

장석(匠石)이라는 유명한 목공이 길을 가다가 사당에 심어진 큰 상수리나무를 지나쳤다. 크기는 수천마리의 소를 덮을 정도고, 굵기는 백 아름이 넘고, 높이는 산을 굽어 내려다볼 정도고, 여든 자 쯤 되는 높이에서야 가지가 나왔다. 그 가지로도 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인데, 그런 가지가 수십 개나 되었다. 이 나무를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 있다. 하지만 정작 나무를 다루는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제자가 이상해서 장석에게 물었다. “제가 선생님을 따라다닌 후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본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치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그러자 장석이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나무라고 단언해버린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널을 짜면 바로 썩어 버리며, 물건을 만들면 금방 망가지고 문을 만들면 진이 흘러 못쓰고, 기둥을 만들면 좀이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그날 밤 상수리나무가 장석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너는 나를 무엇에다 비교하려 하느냐. 너는 나를 쓸모 있는 나무에다 비교하려는 거냐. 배나 귤이나 유자 따위는 맛있는 열매가 달려 그것을 먹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언제나 가지가 찢기고 부러진다. 열매를 맺는 능력 때문에 그렇게 된다. 그래서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죽게 된다. 세상의 사물이란 것이 다 이러하다.”

위의 이야기는 『장자』의 「인간세」편에 나온다. 여기서 흔히 말하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보통은 이 ‘무용지용’을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어딘가에는 쓸모가 있다는 의미로 새긴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런 좁은 의미에 제한되지 않는다. 감각 경험 세계의 제한된 쓸모를 초월한 가장 높은 차원에서의 쓸모를 말하고 있다. 상수리나무는 감각 경험 세계의 시선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래서 무용(無用)이다. 그런데 장자는 이 무용의 쓸모가 최고라고 말한다. 무용(無用)의 쓸모(用)로 완성된 모습이 바로 천명을 누리는 것이다. 장자의 사상에서 ‘천명’을 누리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길게 보존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두 세계를 하나의 무대로 해서 산다. 하나는 자연 세계고 다른 하나는 문명 세계, 즉 인간이 만든 세계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과 문명(인간)에 대해서 모두 알면 지적으로 완벽해진다. 지적으로 완벽해지면 어떤 효과가 있나. 「대종사」편 첫 대목에 나오는 장자의 주장에 의하면 천수를 누리고 요절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장자에게서 천수를 누리고 천명을 다하는 일은 단순히 목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완벽해지는 어떤 단계다. 득도의 경지인 것이다. 이 경지에서는 세상사 구체적인 경우에는 쓸모없어 보이지만, 자잘한 모든 쓸모를 제압해버리는 가장 큰 쓸모가 나오는 단계다.

제품 혁신에만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제품의 혁신만이 쓸모 있는 행위로 보이고, 비즈니스 모델 혁신은 아직 쓸모없어 보인다. 하지만 제품 혁신에만 몰두하는 사람보다 비즈니스 모델 혁신에 성공한 사람이 더 큰 돈을 번다. 구체적인 경험 세계 속의 삶에만 집중해 있는 사람에게는 인문학이니 철학이니 헌신이니 봉사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은 아직 구체적인 쓸모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적 시선이나 인문적 시선이 작동하는 기업이나 사회가 진짜 높고 쎈 단계다. ‘착함’이나 ‘관조’나 ‘정관’이나 ‘고독’이나 ‘연민’ 등이 현실적으로 큰 유용성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려면 천수를 누리는 정도의 지적 완벽함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것들은 쓸모없어 보일 뿐이다. 이윤에만 급급한 기업인은 윤리적인 경영이 더 큰 이익을 낸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면 이윤은 아주 쓸모 있어 보이고, 윤리는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이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는 윤리가 진짜 큰 쓸모를 낸다. 더 큰 이윤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전술과 전략의 차이 같기도 하다. 전술적인 높이에 시선이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전략적 시도는 쓸모없어 보일 것이다. 무등정각의 깨달음을 어찌 제한된 ‘쓸모’의 테두리에 가둘 수 있겠는가. 구체적으로는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바로 그 깨달음이 세계와 영혼을 통제하는 가장 큰 힘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무용지용’이다. 그 호텔도 호루라기의 기능을 버리고, 쓸모없어 보이는 휴식이나 친절이나 향유 등에 집중하면 오히려 더 많은 손님들이 찾아들 것이다.

<철학과 현실> 2017 여름호, 통권 1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