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포재기 벽발산(碧鉢山)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천개산(天開山)에 이르러 한 가닥이 서쪽을 향하니 목욕산(沐浴山)이라 한다. 산 아래에 원동촌(院洞村)이 있고 김(金), 박(朴), 황(黃) 각 성씨가 함께 거주한다. 마을 뒷산 기슭 아래 들판 언덕 아래에 명당을 열고, 언덕을 등지고 서쪽을 향하여 삼간 집을 지어 그 문미(門楣)에 편액하기를 "만포재"라 하였으니, 이는 나의 10대조 복일공(福一公)의 호를 취한 것이다.
옛 황씨(黃氏)는 고려 충숙왕(忠肅王) 시절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이자 시호가 공희(恭僖)이며 휘(諱)가 석기(石奇)이신 분을 시조로 모신다. 이조(李朝) 문종(文宗) 때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내신 휘 준(濬)은 파조(派祖)가 되시며, 선조(宣祖)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훈련원(訓鍊院) 첨정(僉正)을 지내신 휘 경헌(景憲) 공은 11대조이시다.
공의 셋째 아들인 복일공(福一)으로부터 여러 세대에 걸쳐 고성군(固城郡) 동해면(東海面) 장좌리(莊佐里) 중촌(中村)에 정착하여 살았다. 5대조 재(載) 공에 이르러 가문에 갑작스러운 우환을 겪게 되어, 환난을 피하고자 통영군(統營郡) 용남면(龍南面) 지도리(紙島里) 동촌(中村)으로 옮겨 가셨다. 수년이 지난 후 공께서 세상을 떠나시니, 배위(配位) 밀양 박씨(密陽 朴氏)께서 머리카락을 잘라 서신을 써서 제106대 통제사(統制使) 김윤공(金潤公)에게 간청하였다. 공의 보살핌 덕택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아들 정성공(鼎性公)을 데리고 마침내 본 재실(齋室) 뒤편의 옛 터에 정착하였다.
그 후 연석공(淵錫公)의 주선으로 지도(紙島)의 선산에서 대치산(大峙山) 적호등(赤虎嶝) 묘좌(卯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의구(義九公)의 후손 천석공(千錫公) 공이 연석공(淵錫公)과 이웃하여 살며 정이 두텁고 뜻이 서로 통한 까닭에, 서로 의논하여 족보를 합치기로 하였다. 지난 갑인년(甲寅年) 가을에 여러 종친이 의논하여 옛 터 아래에 재당(齋堂)을 세울 계획을 세우니, 대지는 순조공(順祚公)이 기증하고, 마을의 모든 대(代)는 관조공(官祚公)이 책임을 맡았으며, 또 문중 사람들이 돈을 거두어 건립하였다.
卽?는 戒也며 誠也니 致誠於斯齋?永其長又矣하다
무릇 재실(齋)이란 경계(戒)함이며 정성(誠)을 다하는 것이니, 이 재실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제사를 받들어 그 유풍이 영원히 길게 이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