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머무르는 바람
국어국문학전공
20191069 이상훈
너와 나
노을이 묻은 너의 첫 얼굴을 기억한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초록빛 물결, 멀리서 들려오는 새의 속삭임, 사라지지 않을 초여름의 잔향. 영원을 믿지 않는 나를 헷갈리게 만드는, 영원을 닮은 그 작은 시간들을 기억한다.
해 질 녘의 공원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약간 기울어진 나무 아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좋아하는 장소였다. 공원의 외곽 높은 언덕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았고, 혼자 그렇게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으면 별로 있지도 않은 걱정거리마저 나무 곁을 스쳐가는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점점 진해질 무렵, 나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내가 앉은 나무의 뒤편에 누군가가 보였다. 해를 받아 노란색 빛에 둘러싸여서 신비로운 따뜻함이 느껴졌다. 내 또래처럼 보이는 그 형상은 나무에 기대어 앉은 채 두 손으로 초록색 풀잎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오기 전부터 저기에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형상은 마치 이 공간의 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고요하고 자연스러웠다.
“가는 거야?”
그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기에 나는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건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분명 그 아이의 것이었다.
“어? 응.”
천천히, 이 공간의 흐름과 어울리는 속도로 그 아이가 나를 돌아봤다.
따뜻하다. 그 아이의 첫인상에는 그 표현이 어울렸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은 햇빛에 물들어 반짝였고, 얼굴에는 노을을 담고 있었다. 눈빛은 그 와중에도 묻히지 않고 또렷했다. 저 얼굴에는 그늘이 생기지 않겠구나, 나는 생각했다.
“해가 지고 있구나.”
그 아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더 궁금해졌다. 너는 어디서 왔고 여기서 뭘 하는 건지, 너의 이름은 무엇인지.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내 마음과 달랐다.
“그럼.. 다음에 또 봐.”
“그러길 바래.”
그렇게 난 나무와 그 아이를 뒤로하고 공원을 걸어 나왔다.
궁금한 게 많았는데 하나도 물어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언덕을 내려오면서 내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해버린 이유를 생각해 봤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과 완전히 다른 말은 아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아이를 또 만나고 싶었다.
아까 전 대화가 다시 그려졌다. 다음에 또 보자는 나의 인사와 그 아이의 답변, ‘그러길 바래’. 그 짧은 한마디가 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저 멀리 나무를 돌아보자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공원을 자주 찾았기 때문에 그날 이후로도 매일, 아니면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공원에 갔다. 익숙한 풍경에 포근함을 느끼며 공원의 언덕을 올라 약간 기울어진 나무를 찾았다. 그 나무는 처음 본 순간부터 특별했다. 언덕 위 홀로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누군가 조용한 밤에 숲에서 옮겨둔 것처럼 어딘가 동떨어져 있었다. 자라다가 숲 쪽으로 약간 휜 줄기는 떠나온 고향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그 나무가 외로워 보여서 안아주었던 날도 있었다.
나무에 기대앉아 책을 읽다 보니 시간은 순간처럼 지나갔다. 구름이 스쳐간 하늘은 따뜻하게 물들고 있었다. 노을을 보니 저번에 만났던 그 아이의 미소와 여름 풀잎을 만지던 손길이 떠올랐다. 생각은 이내 그림이 되었고, 그날의 어색한 끝맺음을 다시금 곱씹게 만들었다. 내가 또 보자고 했으니 다시 만나게 될까? 그 아이는 분명 ‘그러길 바래.’ 라고 답했다.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초여름의 해가 반쯤 모습을 감추었다. 오늘도 그 아이는 오지 않았고, 나는 약간의 이유 모를 상실감을 느끼며 천천히 일어났다.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시선이 나무의 뒤편에 머물렀다. 그곳엔 그 아이가 있었다. 처음 만나고 정확히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 아이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나무에 기대 앉아 풀잎을 만지면서.
“안녕.”
내 목소리에 그 아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쓰다듬던 여름풀을 조심스레 손으로 감싸 쥔 채, 마치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듯이 부드럽게. 우리의 시선은 나무를 사이에 두고 맞닿았다.
“오랜만이야.”
“그러게. 열흘 만이야.”
“열흘이나 됐어? 시간이 참 빠르네.”
나는 오히려 시간이 느리게 갔다는 생각을 하며 나무에 기대어 앉은 그 아이의 옆에 앉았다. 풀려있는 신발 끈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를 좋아해?”
그 아이가 물었다. 맑고 연한 목소리와 잎이 흔들리는 작은 소리가 함께 울렸다.
“응, 이 나무를 좋아하거든. 높은 언덕 위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게 마음에 들어서.”
“나도 이 나무가 마음에 들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은 불편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 아이는 마치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것처럼, 바람과 나무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이대로 계속 있어도 좋을 것 같았지만 궁금한 게 많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넌.. 어디서 왔어?”
그 아이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대답했다.
“아무 데서나.”
“응?”
“알려줘도 모를 거야. 그냥 바람을 따라왔어.”
의미심장한 대답에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고 더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대답을 하는 그 아이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지만, 눈빛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또렷하고 투명했다. 그런 눈빛으로는 거짓을 담을 수 없었다.
“그렇구나. 그럼 나이는 몇 살이야?”
“너는 몇 살이야?”
나부터 물었는데, 하며 유치하게 나잇값을 하려다가 꾹 참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 앞에서는 어린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열다섯.”
“우리 앞으로도 반말해도 되겠다. 나도 열다섯이야.”
그 아이가 만지던 잎을 잠시 옆에 내려놓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또 한 번의 반가움을 느끼며 그 손을 맞잡았다. 몇 초 동안의 짧은 악수에서 나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느꼈다. 이 손을 언젠가, 오래전에 한 번 잡아본 것 같은 기시감. 그리고 이 순간이 결코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을.
나는 그 뒤로도 계속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답변은 대부분 수수께끼 같았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좋았다. 그 아이도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여름의 풀잎과 노을을 좋아하는지, 새의 노래와 바람을 좋아하는지를 물어봤고, 나는 좋아한다고 말했다. 꿈이 뭐냐고 묻는 질문에는 소설가라고 답했다. 그 아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름은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 아이가 말했다. 무릎을 가지런히 모아 안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아.”
여기서는 그저 ‘너’와 ‘나’면 충분했다. 이름 없는 순간 속에서 서로의 이름은 큰 의미가 없었다.
기울어진 나무 사이로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풀잎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까지 우리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는 나에게 바람의 방향을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느 쪽에서 다가오는지, 얼마나 부드럽게 스치는지. 그 바람이 곧 비를 데려올지 아니면 맑은 하늘을 남길지. 너를 따라 손을 뻗어 바람의 흐름을 느낄 때마다, 나는 마치 세상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너에게 신발 끈이 풀리지 않게 묶는 법을 알려주었다. 끈을 하나씩 교차시키고, 고리 모양을 만들어 두 번 매듭을 짓는 걸 너가 따라 할 수 있게 천천히 보여주었다. 너는 내 손을 따라 조심스럽게 끈을 당겼다. 매듭이 풀리지 않는 걸 확인한 너는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세계를 배워갔다. 나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공원을 찾았고, 너는 때때로 있었다. 기울어진 나무 옆에 너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내 기분이 결정되었다. 어제 왜 오지 않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너의 이유였기 때문이다.
“노을은 언제나 조금씩 변해.”
너가 중얼거리듯 말하며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너의 손끝을 따라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만나는 날이면 너는 이렇게 지는 태양을 보며 노을에 대해 조금씩 알려주곤 했다. 색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저 너머에는 어떤 시간이 담겨있는지. 나는 그 순간을 하루 중 제일 좋아했다.
“이제 곧 푸른빛이 잠깐 남을 거야. 해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남기는 흔적 같은 거지.”
너가 말한 그 푸른빛을 보고 있자 시간의 흐름 속에 녹아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노을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어둠 속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하늘에서 잠깐 시선을 떼고 너를 바라보았다. 이런 순간에 너의 눈빛은 어딘가 서글퍼진다. 그 속에는 마치 이 노을처럼 사라질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런 너의 눈을 보다가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두워졌지만, 방금 봤던 너의 눈 속에 담긴 노을의 잔상이 겹쳐보였다.
“꿈이 왜 소설가야?”
기울어진 나무 옆의 어느 날이었다. 꿈에 대해 처음 알려준 이후로 가끔 너는 내 꿈에 대해 묻곤 했다.
“음.. 책 읽는 걸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너무 단순한가?”
“꿈을 꾸기엔 그걸로 충분해.”
너는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걸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잖아. 나도 항상 이 풀잎을 만지고 있는걸.”
그 말을 듣자 얼마 전 담임 선생님의 진지한 충고가 생각났다. 멀리 있는 꿈 말고, 가까운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일로 가기 위해서는 현실과 타협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배가 무거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크기가 너무 커서 무거운 꿈을 가벼운 꿈으로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내일로 향하는 대가라면 나는 내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오늘 속에 머무르고 싶었다.
“다음 여름이 올 때까지 내가 쓴 소설을 보여줄게.”
“정말?”
너의 목소리는 기대에 차있었다. 그리고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마치 내가 해내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응."
바람에 떨리는 푸른 잎사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너는 꿈이 뭐야?”
지난 두 달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게 놀라웠다. 너는 그 질문을 받고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너는 신중하고 생각을 많이 했다. 잎사귀 하나를 손에 쥐더라도 함부로 꺾지 않고, 가만히 손끝으로 잎의 외곽선을 따라 쓰다듬곤 했다. 바람이 불어오면 눈을 살며시 감고, 그 흐름에 집중하듯 가만히 있었다. 마치 모든 움직임에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잠깐의 침묵 뒤에 너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눈빛은 더없이 투명했다.
“바람.”
바람이라니, 잘 어울리는 꿈이다. 너에게는 남들이 들으면 분명 다시 물어봤을 대답들이 많았다. 아무 데서나 왔고, 노을에 담긴 시간을 알고, 꿈이 바람인 사람. 나는 너의 그런 면이 기울어진 나무만큼 좋았다.
“가까운 꿈이네.”
너가 웃었다.
바람이라는 너의 꿈을 곱씹어 본다. 허황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너라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지 않아도 아주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너의 배는 모든 걸 실어도 침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언제든 넓은 바다로 갈 수 있었다.
2. 노을빛
요즘 하루는 더 짧게 느껴졌다. 학교를 나오면 하늘은 이미 푸르지 않았고, 공원으로 가는 나의 발걸음은 전보다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여름에 너를 처음 만난 후로 그 나무의 곁에 앉지 않았던 날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봤다. 떨어진 가을 낙엽을 서로의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시린 손으로 너에게 눈사람을 만드는 법을 알려준 겨울이 지나 노을을 닮은 봄이 올 때까지, 너는 내 하루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올해 봄이 되면서 그 부분의 크기는 작아지기 시작했다. 전보다 늘어난 수업량 때문에 공원에 가는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했으며, 학원 수업이 있는 날에는 기울어진 나무 곁에 있을 너와 노을을 책에 그리며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학원에 가는 날은 일주일 중 이틀이었지만 그것도 너무 많았다.
“미안해.”
너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선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나의 오른손을 살며시 잡아준다. 덕분에 내 손은 차분해진다.
“그럴 필요 없어.”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그럼 다음엔 비행기를 타고 오라며 너가 웃는다. 너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다. 지는 노을을 바라볼 때 잠시 생기나 싶지만 햇빛에 가려지다가 이내 해가 지면 그 작은 어둠마저도 미소 속으로 동화된다. 내가 닮고 싶은 너의 수많은 장점 중 하나였다.
“다행히 오늘은 있었네. 온 지 얼마나 됐어?”
“별로 안됐어. 30분쯤?”
다시 미안한 마음이 든다. 너가 공원에 있는 날이면 하늘이 파란색일 때부터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가 더 미안해할까 봐 하는 거짓말임을 알기 때문이다. 너는 거짓말을 잘 못해서 티가 났다.
“곧 초여름이라 이제 해가 좀 느려질 거야. 서두르지 않아도 돼.”
너의 말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러웠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그나저나 그 소설은 얼마나 썼어?”
나는 순간 멈칫했다. 문득 작년에 했던 너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분명 다음 여름이 되기 전에 소설을 보여주겠다고 했었는데, 달라진 환경과 시간 속에서 소설을 위한 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요즈음엔 아예 잊어버린 적도 있었다.
“음, 거의 다 써가.”
부끄러운 거짓말이 나온다. 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정말? 기대돼.”
너의 눈이 빛난다. 언제나 나를 붕 뜨게 만드는 그 눈빛이 오늘만큼은 깊게 아린다.
여름 햇빛이 한껏 더 무거워진 것을 느끼며 언덕을 올랐다. 얼마 전 고교 진학에 도움이 될 동아리에 들어간 후로 시간은 더 빠듯해졌다. 그나마 일주일에 두 번만 하는 게 다행이었다. 꼭 활동의 반이나 빠져야 할 이유가 있냐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이 언덕길이 그 이유였다. 기울어진 나무와 그 옆에 있는 너는 중요한 이유였다. 오르막길이지만 학교에 있을 때보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아.”
기울어진 나무 옆이 비어있었다. 혹여나 작년의 여름날처럼 나무 뒤에 있는 건 아닐까, 하며 가까이 가봤지만 너는 보이지 않았다. 어제도, 그제도 없었기에 오늘은 있을 줄 알았는데.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망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너를 향한 실망은 아니었다. 너의 존재에 대해 실망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탓할 수 있는 건 오직 너의 부재뿐이었다.
나무에게는 약간 미안했지만, 너가 없는 이 언덕에 홀로 앉아있기는 생각보다 지루했다. 오늘 내 가방에는 읽을 책도 교과서뿐이었다. 앉은 채로 옆에 있는 여름 풀잎을 쓰다듬었다. 내가 기억하는 너의 첫 모습과 똑 닮은 짓을 해본다. 여기 없는 날 너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잎사귀 두 개를 손에 하나씩 쥐고 조심스레 서로를 향해 구부려 본다. 잎의 처음과 끝이 맞닿았다. 언젠가 할 말이었다.
언덕 아래로 한걸음 한걸음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해가 다 지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그 풍경 속에 혼자 남아있기 싫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위로는 전보다 더 어둑해진 하늘이 걸려 있었다.
“오랜만이야.”
다리를 모아 안고 햇빛을 받고 있는 너를 부르자, 너는 천천히 감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안녕. 오늘은 날이 좀 시원하네.”
“그러게. 아직 8월인데 신기하다.”
일주일 만에 보는 거라 너무 반가웠지만 그런 마음을 꾹 숨긴 채 너의 옆에 앉았다. 한참을 멀리 돌아다니다가 결국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자리로 되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너에게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해가 다 지기 전까지 아주 천천히 하나씩 나누고 싶었다.
“이 시간에 이렇게 같이 있는 건 오랜만이네.”
너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너의 말대로 이렇게 파란 하늘 아래에 같이 앉아 있었던 게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한참은 된 것 같았다.
“그러게. 옛날 생각난다.”
“1년 전 말하는 거지?”
“응. 너가 신발 끈도 제대로 못 묶을 때였지.”
너가 살짝 부끄럽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치. 누군가가 바람도 읽지 못할 때였어.”
이렇게 너와 웃고 있으니 최근 늘어난 걱정들이 하나둘씩 흐릿해졌다. 마치 너의 웃음이 바람이 되어 내 마음에 얹힌 먼지를 털어내는 느낌이었다. 항상 그랬다. 너의 미소가 내 안에 스며들 때면, 내 안의 불안은 천천히 자리를 잃어가고 기울어진 나무와 노을, 눈앞의 순간만이 선명히 남았다. 가까운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 주변의 풀잎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설 있잖아, 이제 거의 다 썼어.”
너에게 거짓말을 한 그날 이후로 이번 여름이 가기 전까지 꼭 완성하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써둔 분량도 적었던지라 촉박한 시간 내에서 완성하기 위해 학원과 동아리를 몇 번 빠져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너에게 자랑스러울 만한 글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말?”
너가 놀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기대감에 찬 눈빛이었다.
“응. 다음 주쯤이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믿고 있었어, 너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1년 동안 마주했지만 여전히 나를 붕 뜨게 만드는, 노을을 닮은 미소였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졌다. 슬픔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찰나의 미소 속 그 감정을 알아챘지만, 금방 사라지고 다시 맑은 미소만이 남았다.
“기대된다.”
너는 잠시 아무 말 없이 풀잎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선 쥐고 있던 풀잎을 내 손바닥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 알 수 없는 애틋함이 묻어났다. 우리는 잠시 동안,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풀잎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의 눈동자 속에 담긴 내가 보였다. 내 눈동자 속의 너는 너에게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졌다. 너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잠시 입술을 떼었다가, 도로 붙이고 가만히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푸르렀던 하늘이 어느새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신기해. 언제 봐도 아름다워.”
“그러게.”
오늘은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이렇게 있고 싶었다. 노을이 점점 붉게 번지며 우리 사이를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다가올 가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하며 해를 배웅했다. 너는 가을 풀을 엮어 팔찌를 만들어 주겠다며 내 손목 둘레를 재고는,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렇게 노을 속에서, 너는 내게 마지막 미소를 남겼다.
3. 내가 걷는 여름
이른 아침의 찬 공기가 뺨을 스치며 거리에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두터운 코트를 여미고 천천히 걸었다. 거리 곳곳에 덜 치워진 눈과 얼어붙은 작은 빙판들이 보였다. 온통 하얀 풍경에 흐린 하늘까지 더해져, 마치 하얀 세상 속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았다.
도서관 앞에 다다르자 갈색 벽돌로 지어진 익숙한 건물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세 달 전부터 일하게 된 나의 새로운 직장이었다. 사실, 전에 있던 곳도 첫 직장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내가 자란 중학교의 도서관에서 활발한 아이들을 보고 책을 관리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왜 가시는 거예요? 적응도 빨리하셨고 아이들도 선생님을 많이 좋아하잖아요.”
점심시간마다 책을 보러 오는 수학선생님이 떠난다는 내 말을 듣고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며 웃어 보였다.
“싫어서 가는 건 아니에요. 저도 여기가 좋거든요.”
“그런데 왜..”
“그냥 이제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어디로든요.”
아이들이 가져오는 활기와 소란도, 혼자 있을 때 느껴지는 조용함과 아늑함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 공간에 있으면 묘한 외로움이 항상 따라다녔다. 머물러 있으면 그 외로움이 더 커질 것 같았기에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 아예 없는, 새로운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쉬면서 어디로 갈지 찾아보다가 여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바다를 끼고 있는 작은 도시. 그리고 그 바다가 보이는 작은 도서관. 조용하고 낮은 곳에 있고 싶었던 나에게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잔잔한 고요가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스치던 차가운 겨울바람이 문 뒤로 사라지고, 실내에는 따스한 온기가 맴돌았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다가오는 미아 씨가 보였다. 그녀는 이 도시에 하나뿐인 대학교에 다니면서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아침 공부를 하는 건지 출근 시간 전인데도 미리 도서관에 오는 경우가 흔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녀는 어제보다 10분 더 일찍 왔다고 자랑하며 내게 커피를 내밀었다.
“차갑게 얼어붙으셨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마시면서 따뜻해지세요.”
“아, 고마워요.”
나는 커피를 받아들고 살짝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온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얼었던 손끝이 풀리는 듯했다. 그녀도 옆에서 아직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가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니 문득 중학생 때의 내가 생각났다. 그녀처럼 작은 일에도 설렘과 행복을 느끼던 때였다.
나는 커피를 든 채로 책장 사이를 걸었다.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책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 매일 업무의 시작이었다. 손끝으로 책들을 차례차례 훑으며 책장을 채워나갔다. 그러다 오래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 내가 소설가란 꿈을 꾸게 했던 책 ‘노르웨이의 숲’ 이었다. 조심스레 책을 꺼내들고 먼지를 털어낸 뒤 책장을 펼쳐보았다. 오래된 기억을 꺼내 읽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 페이지를 더 넘기려다가, 책을 덮고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모래를 밟는 소리가 크지 않은 파도 소리와 함께 울렸다. 일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나와 이 해변을 따라 걷는 게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 도시는 유명하지도 않았고 큰 도시에서 상당히 멀었기 때문에, 바다를 찾는 사람들이 얼마 없어서 조용했다. 바다와 이어진 투명한 하늘은 오후의 주황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너가 좋아하던 노을이었다. 또 너가 그려졌다. 흔한 일이다.
공원 외곽의 높은 언덕에 기울어진 나무가 보인다. 노을이 그 주변을 연한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나무의 곁에는 너가 있다. 다리를 모아 안고 한 손으로는 여름 풀을 꼬아간다. 그 옆에는 내가 앉아서 잎을 만지는 부드러운 너의 손가락을 보고 있다. 열여섯의 우리 얼굴엔 같은 노을이 담겨 있다. 12년 전, 너를 마지막으로 봤던 유난히 시원한 8월의 여름날이다.
나는 그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떠올리지 않으면 조금씩 사라져갈까 봐, 일부러 그려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기억이었다. 그럼에도 언젠가 그 기억이 닳기 시작하는 그 순간을 나는 걱정했다. 우리가 봤던 노을이 얼마나 짙게 붉었었는지, 너의 신발은 무슨 색이었는지. 그런 작은 것들이 시간 사이로 빠져나가는 게 두려웠다. 이미 너와 나눴던 대화의 몇 마디는 그날의 노을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너의 집과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어디로, 왜 사라진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런 분류에 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우리가 나눈 것은 순간과 노을, 바람들 뿐이었다. 너가 사라진 후, 나는 기울어진 나무를 떠났다. 얼마 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꿈을 떠났다. 도서관 사서라는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혼자 살기에 충분한 집도 가지게 되었지만,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너가 있던 언덕 위였다.
간단히 저녁을 해먹고 침대에 기대앉아 하루키의 신작을 읽었다. 공허하고 별다른 취미를 가지지 않은 주인공의 모습에 내가 겹쳐 보였다. 한가지 다른 점은 주인공에게는 여자친구가 많다는 것이다.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대학교 친구들과 중학교에 근무할 때 어울렸던 동료 교사들로부터 소개받고 싶은 생각이 없냐고 연락이 오긴 했지만, 그럴 마음이 없다고 몇 번 거절한 후에는 더 이상 물어오지 않았다.
어젯밤에 잠이 안 와 잠을 못 잔 탓인지 슬슬 피곤함이 몰려와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금방 몸을 감쌌다.
꿈을 꾸었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이 보였다. 오래전의 가을이었다.
“소설은 보이지 않는 감정과 이름 없는 순간들을 이야기로 만들어서 영원히 남기는 거야.”
내가 말하자 너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바라본다.
“예를 들어 이 기울어진 나무나.. 우리가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 순간도 소설이 될 수 있어.”
“마치 여름 노을을 병에 담아놓는 느낌이네.”
내가 비슷한 느낌이라 하자 너는 작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럼 그 노을은 사라지지 않겠다.”
“응. 두고두고 보고 싶을 때 꺼내 볼 수 있는 거지.”
영원한 노을이라, 생각만 해도 좋다며 너가 팔을 뒤로 뻗으며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너는 볼을 간지럽히는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 뒤로 넘긴다. 여기서 너가 눈을 뜨면 너를 보고 있는 내 모습이 들킬 텐데, 몽글몽글한 작은 걱정이 생기다가 이내 사라진다. 서툴고 어리숙한 내 모습을 너에게는 들켜도 된다.
“너는 영원한 게 있다고 믿어?”
나뭇잎을 조심스럽게 흔드는 바람이 몇 번 더 지나가고 너가 말을 건넨다. 따뜻한 눈빛을 마주 본다.
“음.. 나는 없다고 생각했어. 계절처럼 다 변할 거라고.”
너는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 영원한 건 있다고 생각해. 설령 영원이 아닐지라도 영원을 꼭 빼닮은 건 있는 것 같아.”
지금 우리가 그 한가운데 있어, 그 말을 삼키고 너를 본다. 영원히 투명한 너의 미소가 나를 웃게 한다.
“너는?”
너가 나를 바라본다.
“나도 그래.”
우리는 슬픈 오답을 말한다.
신발에 붙은 모래를 털어내고 집에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있는 택배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벼운 택배였고, 발신인은 엄마였다. 옆에 붙은 메모지에는 이삿짐 정리하다 나와서 보낸다는 짧은 글이 써져있었다.
상자 안에는 오래된 낡은 노트 한 권이 있었다. 순간, 가슴속에서 뭔가 저릿하게 울렸다. 손바닥에 닿는 그 노트의 감촉이 너무나 익숙했다. 나는 천천히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여름에 머무르는 바람.’
책 속에는 내가 만들어 낸 세계가 있었다. 이름 없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였다. 책의 끝부분 몇십 페이지는 공백이었다. 어린 내가 너에게 보여주려 썼던, 미완성의 소설이었다. 노트를 덮고 가만히 손끝을 바라봤다. 12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는 이 소설과 여름날의 바람처럼 지나간 너를 그리는 내가 서서히 겹쳐졌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나는 도서관 구석에서 책장에 새로운 분류 표를 붙이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직후라 그런지 조금 나른해진 몸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 다음에 또 올게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책을 꽉 쥔 손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지금 들린 목소리는 분명히 그 목소리였다. 가는 거냐는 첫인사부터 또 보자는 마지막 인사까지, 항상 나에게 더없이 투명하고 맑게 울리던 목소리.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너의 목소리.
나는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그쪽을 향해 재빨리 걸어갔다. 문 쪽으로 나가려는 사람의 뒷모습과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분명 너였다. 나는 급하게 달려가면서 간신히 문이 닫히기 전 그 얼굴을 보았다. 문 사이로 보인 얼굴은 잠깐이었지만 너라는 걸 확신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내 문이 철컥 닫히며 너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어디 가냐는 미아 씨의 말을 뒤로 한 채, 나는 황급히 너를 따라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거리는 평소처럼 조용했고, 어디를 둘러봐도 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깊이 쓸려 나가는 듯한 허무함이 밀려왔다. 내가 본건 정말 너가 맞았을까, 나는 또 너를 잃은 걸까.
끝나도 이어지는 순간이 있다. 계절이 다시 순환하는 바람을 타고 돌아오는 것처럼. 불확실한 마지막은 희미한 가능성으로 남아 나의 한구석을 흔들어 놓는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마음에 평생의 파동을 일으키는 그 메아리는 언덕에서 시작되어 가장 낮은 곳까지 울린다.
해가 저물어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아까 전의 허망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다는 얕은 파도와 함께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사라진 너지만, 어쩌면 사실 신기루였고 앞으로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너지만, 나는 여전히 그릴 것이다. 내가 다시 쓰고 있는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채우고, 드디어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겠다며 여름 풀 위에 앉은 너에게 건넨 뒤, 조바심을 숨긴 채 글을 읽어 나가는 너의 눈을 바라보는 날을 그릴 것이다. 너를 만난 뒤 내가 걷는 여름은 온통 노을빛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득한 그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리운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오랜만이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까 전 잠깐 봤던 희미한 얼굴과 달리 또렷하게 보이는 그 얼굴은, 내가 언제나 생각하던 마지막 여름날의 얼굴 그대로였다. 변함없이 따뜻하고 투명한 눈빛을 마주 보자 기울어진 나무 아래 너와 나눴던 순간들이 다시 나를 감쌌다.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 속에 어린 날의 내가 보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너에게 다가갔다. 아주 오랜 기다림을 담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제쳐지고 한마디만이 흘러나왔다.
“보고 싶었어.”
너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