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에게서 드러나는 니체철학적 해석의 가능성
국어국문학전공
20221022 김지서
1. <라푼젤>(Tangled)의 주제의식에 대하여
원래도 디즈니의 공주 시리즈 애니메이션들은 기존 설화에서 조금 벗어나 희망차고 교훈적인, 보다 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그래도 기존 설화에 있는 위치와 캐릭터들, 예를 들면 공주와 왕자라거나 계모와 왕이라거나, 백설공주의 ‘독사과’ 같은 키포인트적인 요소들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디즈니의 오리지널 창작이라거나, 역사를 기반에 두고 재구성한 창작물들은 있었지만, 기존 설화가 존재함에도 그를 크게 벗어나 재창작한 작품은 크게 없었다. 그러다 그러한 기조가 등장하게 된 작품이 바로 공주 시리즈의 마지막 2D 애니메이션이었던 2009년작 <공주와 개구리>(The Princess and the Frog), 그리고 그 다음 작품인 <라푼젤>(Tangled)이었다. 원작 <라푼젤>에서는 기존 공주와 마녀, 그리고 그를 구하려던 왕자, 또 ‘상추’가 상징적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당시 기준에서는 드물게 ‘왕자’가 아닌 남자 주인공이 등장했으며 ‘상추’ 또한 디즈니의 개인적 설정인 ‘마법의 꽃’으로 변경되었다. 끝없이 긴 머리의 이유도 단지 오랫동안 탑에 갇혀 살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마녀가 굳이 이 아이를 데리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 라푼젤의 가치로 사용된다. 이때, 기존 설화의 스토리를 적극적으로 변형하면서 디즈니가 작품에 부가적으로 부여해야 했던 요소는 작품의 ‘정체성’, 즉 ‘주제’다. 원작의 큰 틀은 유지할지언정 자세한 설정들과 개연성, 캐릭터들의 지위와 위치 또 성격과 트라우마 또한 변했기 때문에, 디즈니는 ‘그래서’ 이러한 이들의 모험이 어떤 주제를 전달하는가를 명시해야 했다.
<라푼젤>은 ‘꿈’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는다. 이때, 원어 제목인 'Tangled'의 경우 ‘헝클어진’, ‘뒤얽힌’ 등의 뜻을 갖고 있다. 머리가 헝클어졌을 때 해당 단어를 사용하기에 라푼젤의 캐릭터성에 대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뒤얽힌’ 등의 뜻은 다양한 꿈과 다양한 인생이 만나 뒤얽혀 이루어진 이야기라는 뜻을 지니기도 한다. 실제로 ‘라푼젤’은 탑에 갇혀 있다 세계에 나와 꿈을 잃었거나 포기했던 등장인물들에게 ‘아무리 허무맹랑해 보이고 불가능할 것 같은 꿈이어도 포기하지 말라’는 의지를 설파한다. 이때, 그 어떤 접점도 없어보이던 사람들이 ‘꿈’이라는 요소 하나로 인해 하나가 되고 서로를 응원한다. 실제로 극 중 넘버인 ‘꿈이 있어’(I've Got a Dream)에서는 험악해 보이던 폭력배들의 꿈이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그들과 상반된 꿈들이 제시된다. 한 손을 잃어 갈고리를 찬 남자는 피아노 연주자가 되고 싶어 하고, 얼굴이 포악하고 못생긴 남자는 자신의 내면을 이해해 주는 진정한 사랑을 꿈꾸며, 엄청나게 거대해 거인 같은 남자는 자신의 손톱보다도 작은 유니콘 미니어처들을 다 모으는 것이 꿈이다. 그리고 ‘라푼젤’의 꿈은 매우 허무맹랑하다. 공주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뜨는 등을 보는 것이 꿈이다. 또 남자 주인공인 ‘플린 라이더’의 꿈은 매우 세속적이다. 이렇듯 ‘바람직하지 못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각자의 소원과 꿈을 나누며 처음 서로를 이용하고자 했던 두 무리는 하나로 화합된다. 그들은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한다. 결국 이는 적어도 이 세계관 안에서 ‘꿈’의 힘은 이런 것이라고 제작사가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다. 즉, 이는 모든 이들이 가진 그 어떤 허무맹랑한 소원이라도 응원하며 그것이 삶의 의지가 될 수 있음을 긍정하는 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이 작품이 비단 ‘모든 이들의 꿈에 대한 긍정과 응원’이라는 메시지에만 국한되는 것 같진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난 ‘라푼젤’과 ‘플린 라이더’, 곧 ‘유진 피츠허버트’의 구성에서 니체 철학의 세계관과 ‘디오니소스적 인간상’ 곧 ‘넘침의 몸’의 개념을 느꼈으므로, 그에 대한 판단을 서술해 보고자 한다.
또한, 이 극의 주인공을 라푼젤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주인공은 한 명이 더 있다. 내용상의 주인공은 라푼젤이지만 진주인공과 서술자의 역할을 겸하는 존재로 플린 라이더도 존재한다. 본디 <백설공주>, <신데렐라>(물론 <신데렐라2>, <신데렐라3>에서는 그 위치가 달라졌으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이야기에서 사실상 왕자는 단지 ‘왕자’라는 위치를 위해 존재한다. 발전과 변화, 인격적 성숙과 사랑의 쟁취를 이뤄내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그 주체는 늘 여주인공, 공주에게만 국한되었다. 하지만 이 극에서 플린 라이더의 존재는 라푼젤과 비등한 주인공이자 서사적 인격체다. 때문에 어떠한 이론에 입각해서 이 극을 서술하려면, 플린 라이더의 시선에서 보이는 라푼젤과 그 존재의 의미 또한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우선 플린 라이더의 관점에서 ‘라푼젤’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한다.
2. 유진의 궁핍, 라푼젤의 충만
플린 라이더는 사형수가 될 정도로 유명하고 벌린 일이 많은 도적인데, 이 플린 라이더는 사실 ‘진짜’가 아니다. 이 도둑, <라푼젤>의 또 다른 주인공인 사내의 이름은, 유진 피츠허버트다.
유진 피츠허버트, 이하 유진은,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자라고 가족도 이어지는 친구도 없이 커왔다. 그런 그이가 꿈 꾼 것은 단 하나였다. 부, 그리고 ‘플린 라이더.’ 유진이란 이름은 극 내내 유진 스스로의 표현으로 촌스럽고, 그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으며, 불쌍하고 가난하던 고아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유진과의 대척점엔 ‘플린 라이더’가 있다. 플린 라이더의 시초는, 그가 어릴 적 아이들에게 자주 읽어주던 동화에서 나오던 부유한 귀족의 모험담 속 주인공으로, 그가 동경하는 완벽한 이상향이자 유진이라는 자기 자신과의 완벽한 대립이다. 이 존재는 위트 있고, 매사에 여유 넘치며, 모든 이들이(심지어 왕궁까지.) 알고 있는 이름이자, 이제 곧 일전에 훔쳤던 공주의 티아라를 팔아 최고의 부를 얻게 될 남자다.
유진은 그 무엇 하나 내보일 것 없던 자기 자신을 숨기고, 플린 라이더라는 이상향의 존재를 세상에 내보인다. 하지만 결국 플린 라이더가 가진 도둑으로서의 평판은 어디까지나, 그 모든 것이 ‘가짜’이고 ‘허상’에 불과하며, 유진 자기 자신에겐 그 어떤 만족도 행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유진은 이 ‘플린 라이더’조차 사실상 완벽한 본인이라 여기지 못하고, 그저 도구로서만 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플린 라이더’라는 정체성을 진정한 자신이라고 여기지 못했다는 것은 라푼젤과의 대화에서 “가짜 평판이지만, 그게 내게는 전부랍니다.”라고 언급했던 대사로부터도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플린 라이더는 건강한 이상향, 곧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목적도, 존경하는 존재에 대한 표상도 되지 못한다.
결국 부유함과 플린 라이더라는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부정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때, 유진 피츠허버트라는 존재는 니체의 ‘궁핍의 몸’이라는 개념과 어울리는 존재다. 니체의 철학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세계관이라면 ‘신이 죽은 세계’다. 즉 우리는 신에게 우리의 삶의 소명, 목적 따위를 부여받을 수 없고, ‘영원한’ 삶의 지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우린 내세를 경험하고 신에게 은혜나 죄를 받을 수 있는 개념의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이 세계는 정확하고 영원한 도덕적 법률이 없는 ‘카오스’의 세계, 수없는 ‘몸’들의 세계가 된다. 이 몸들 중에 ‘궁핍한 몸’이란 것은 여전히 신적인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곧 자신이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믿고, 그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목적론적 체계 하의 사람인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몸, 자신의 실존을 부정한다. 자신을 궁핍한 존재로 둠으로써 그들에겐 ‘완전함’이라는 목표가 생기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럼 이제 이러한 ‘궁핍’의 개념에 입각해 유진 피츠허버트를 해석해보자. 그이는 자신 스스로 여기기에 너무나 모자란 삶을 살았다. 가족의 결여와 해결되지 않는 가난, 그리고 그로 인한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대표되는 결핍이다. 그는 어딜 가든 그를 좋지 않게 바라보는 이들만을 만나왔다. ‘유진’이던 시절엔 가난한 고아라고, ‘플린’이던 시절엔 나라가 혐오하는 도둑이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유진은 자신이 상상하는 완전성, 곧 거나한 부와 홀로 즐기며 살 수 있는 <보금자리>와 그 보금자리를 얻어낼 수 있을만한 <인격>을 염원하게 된다. 그는 그를 위하여 무슨 일이든 무릅쓰는데, 이 절박함을 극중에선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범법적 행위를 무릅쓴다는 지점에서 잘 표현해주었다. 유진 피츠허버트란 존재는, 이 사내라는 존재의 ‘본질적’인 의미는, 플린 라이더라는 가면 뒤에 숨어 부정당함으로 인하여 그가 꾸는 ‘꿈’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부와 풍족한 삶이 절대적으로 그 누구의 삼에서든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가치이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자신은 틀리지 않으며, 이 꿈은 절대적이라는 것을,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부정하며 확인한다.
하지만 라푼젤은 플린 라이더와는 다른 의미로 유진과 대립되는 존재다. 라푼젤의 특징은 보라색을 상징으로 가지며, ‘햇살’을 표상하고, 그림으로 하여금 창조를 대변하면서, 그가 가는 곳엔 그 어떤 험악함과 현실의 벽에 고통 받는 이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금방 축제와 노래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유진은 극중에서 계속 축제, 춤, 노래 등의 여흥을 한사코 거절한다. 하지만 라푼젤로 인하여 노래하고, 자신의 진정한 꿈을 인정하고, 축제에 가고, 종래엔 ‘춤을 추게’ 된다. 라푼젤의 특징을 통해 추측할 수 있듯, 이이가 대표하는 군상은 ‘충만의 몸’이자 디오니소스와의 유사함이라고 생각한다.
궁핍하지 않고 건강한 몸은 이 삶에 필연적이고 영구적인 목적, 진리와 같은 ‘완전성’을 목표로 두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그러므로 지향할 완전성도 없다. 그들은 수없는 몸과 수없는 의지가 뒤섞인 카오스의 세계에서 ‘넘침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 목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유진은 ‘플린 라이더’다운 삶을 위해 훔칠 만한 물건이 있나 살피는 목적으로 축제와 마을에 들르겠지만, 라푼젤과 같은 경우 그 축제의 분위기와 그로부터 파생될 경험들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삶 속의 변화와 경험, 그 모든 것. 즉 자신의 삶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곧 이러한 몸은 목적 없이 끝없는 넘침을 경험하는 주체로서의 삶 그 자체를 긍정한다. 이 존재는 유진과는 너무나도 다르며, 심지어 계속해서 변화한다.
유진은 도둑으로서 너무나 넓은 세계를 누비면서도 그것이 자기 자신으로서의 여행이 아니라 ‘정처 없는 방황’이었으나, 라푼젤은 너무 좁은 방에서 세상으로 나와 전부 새롭고도 두려운 상태에서 모험을 하면서도 이 모험이 그에겐 ‘축복’이자 거나한 즐거움이다. 심지어 유진은 고델이 라푼젤에게 가스라이팅을 가하던 것처럼 현실의 두려운 일면들만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지만, 오히려 라푼젤은 꿈을 잊고 있던 범죄자들에겐 꿈을 일깨우고, 공주를 잃어 슬펐던 왕국엔 축제를 시작시키고, 종래엔 궁핍의 몸이었던 유진마저 변화시킨다.
<라푼젤>에서 제시하는 현실 세상은 말 그대로 “단편이자 수수께끼이며 무시무시한 우연들”이란 표현에 걸맞다. 라푼젤이 두려워하도록 배운 세상과, 유진이 아는 현실, 그리고 유진은 이상이라고만 생각했으나 라푼젤에겐 실제 현실로 이루어지는 동화와 같은 해피엔딩들, 그리고 마법과 현실(유진은 마법은 고사하고 모든 미신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수준의 존재다)의 대립. ‘현실’에 대한 수많은 시점과 변화와 응집점들은 니체가 ‘신이 없는 세상’에서 내세우는 혼돈의 카오스를 암시하듯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주인공인 유진과 라푼젤은 각각 궁핍과 충만을 표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개념에서 ‘궁핍’과 완전히 대립되는 개념은 ‘충만’이 아닌 ‘넘침’이다. 그렇다면, 왜 라푼젤은 ‘넘침의 몸’이 될 수 없을까?
왜 라푼젤이 ‘넘침’의 몸이 아니라 ‘충만’의 몸으로 표현되었는가. 그 이유는 라푼젤 또한 자신의 꿈으로부터 두려움이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즉, 라푼젤은 충만일 수는 있으나 넘침일 수는 없고, 디오니소스의 유사일 수는 있으나 완벽히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상일 수는 없다.
라푼젤은 사실 유진과 비교가 된다면 절대적으로 이상적인 인간상이나, 유진 대 라푼젤의 양상이 아니라 유진과 라푼젤의 양상으로 스토리를 지켜본다면, 이 또한 무척이나 결여된 인간상임을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모두가 의아했을 것이다. 유일한 인간관계인 어머니에겐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을 받고, 탑 속에 갇혀서 지내며, 사회라곤 경험해본 적 없는 어린 여자 아이를 어떻게 ‘충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마녀인 ‘고델’이 그를 훔쳐온 이유는 라푼젤의 모친이 ‘누구든 얼마든지 젊어지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꽃을 달여 마시고 라푼젤을 낳았기 때문이다. 고델은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통해 ‘마법의 꽃’을 자신만 이용하기 위해 라푼젤을 탑 안에 가두었고, 그 이유에 ‘네가 가진 힘은 너무 대단해서, 세상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걱정’을 내세운다. 또 고델은 늘 라푼젤에게 넌 아무것도 모르고 미숙한 아이라며, 라푼젤의 의견을 묵살한다. 그리고 라푼젤이 밖에 대한 관심을 가질 때마다 엄하게 혼을 냄과 동시에 라푼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티를 보이며,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는 아이에게 ‘넌 정말 착한 아이야’라는 칭찬을 내어준다.
고델의 자신의 젊음을 위한 가스라이팅은 라푼젤이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저지한다. 그리고 라푼젤이 항상 ‘착한 딸’, 변함없이 그 어떤 성장도 없이 항상 탑 안에 머무르고 멈춰 있도록 만든다. 고델은 라푼젤을 단지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는 점에서 고젤이 라푼젤에게 부여하는 가치가 라푼젤의 ‘꿈’이라는 가치와 대립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이러한 가스라이팅에 라푼젤의 정신이 자기 자신으로서만 실존하는 것은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춤’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러한 라푼젤의 결여에 대하여 언급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결여를 이해하면 도리어 역설적으로 라푼젤이 얼마만큼 충만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더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푼젤은 그림으로 하여금 창조를 의미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라푼젤의 창작과 창조는 불완전한 면이 존재한다. 라푼젤은 탑 안에서의 늘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해 그림과 더불어 요리나 촛대 만들기 등 다양한 일을 시작하였는데, 라푼젤의 탑 속 일상을 보여주는 ‘내 삶은 언제 시작될까’(When Will My Life Begin?) 중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 만한 혹은 거슬리지 않을 만한 취미들은 다 성공하고, 라푼젤의 꿈을 실현시켜주어 라푼젤이 자신의 삶을 계속 의욕하게 만드는 취미인 그림만이 유일하게 실패한다. 그 이유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공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즉 라푼젤의 창조는 완벽한 창조가 아니라, 제약 받는 요소가 너무나 절대적인 창조이자 창작. 그가 창조를 즐거워해도 공간이 그를 제약하면 계속해서 시도할 수 없고, 그가 하고파도 이 공간에 있는 이상 그는 더 이상 창조해낼 수 없다. 그리하여 라푼젤이 갇힌 탑과 고델의 제약은 그가 진정한 넘침의 몸이 되는 것과, 어린아이(창조의 실행자)가 되는 것과, ‘춤추기’를 막는 일종의 족쇄가 된다. 즉 이는 유진에게 있는 트라우마와 유사 선상에 있는 것이다.
라푼젤은 탑에 갇혀 변화를 원해도 경험할 수가 없었다. 유진이 세계의 한복판에서 수없는 변화를 겪어가면서도 영구적인 목적만을 원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상황이다. 그는 제한적인 세계에 갇혀 살면서 그의 유일한 희망, 그의 주체적인 삶을 위한 첫 번째 목표이자 ‘꿈’이 ‘등불을 보러가는 것’이었다. 우린 어릴적 파워레인저나 프리큐어 혹은 호그와트 학생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현실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고 자신만의 인생을 진행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즉 그 꿈의 결말을 보았기 떄문에 또 다른 꿈을 쉽게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라푼젤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꿈의 결말이나 실현, 해소를 경험해볼 수 없었고, 환경으로 인해 반강제적인 ‘영원한’ 꿈을 품게 된 것이다. 그 어떤 변화도 없는 환경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꿈을 발견해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그 꿈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목표라고 믿었다기보다는, 다른 꿈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라푼젤이 꿈을 마주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하자 느꼈던 두려움, 즉 ‘이 꿈을 실현시켜버리면 어떡하지? 난 이제 어떤 꿈을 믿고 나아가야 하지?’가 파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킹덤 댄스'
라푼젤의 결여와 유진의 결여가 함께 해소되는 것은 이 지점이다. 'Kingdom Dance'란 라푼젤과 유진이 드디어 라푼젤의 꿈을 이루러, 즉 잃어버린 공주의 생일날 하늘에 떠오르는 등을 보기 위해 코로나 왕국에 들렀을 때 나오는 음악의 이름이다. 해당 장면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라푼젤의 머리가 땋아짐과, 라푼젤과 유진의 일상과, 라푼젤의 ‘춤’에 있는데, 이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로 라푼젤의 머리의 땋아짐이다. 라푼젤은 마을을 들어서자마자 여태껏 탑과, 깡패들이 가득하던 주점과, 경비병들을 피해 다니며 마주한 산과 광산 곳곳에선 방해는커녕 오히려 도움이 되던 길고 긴 머리카락이 바로 방해물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실감한다. 마차가 다니고, 사람이 수많은 거리에서 라푼젤의 머리가 밟히거나 거슬리지 않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 라푼젤은 머리를 관리하고 지켜낼 생각만 해본지라,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제 머리를 모아 끌어안고만 있다. 하지만 여기서, 유진이 라푼젤의 머리를 지켜보다 마을 한구석에서 서로의 머리를 땋고 있는 자매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라푼젤의 머리를 부탁한다.
라푼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에 ‘손을 대보게’ 되고, 이로 인하여 자유롭게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시 ‘춤’도 출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춤’이란 넘침을 그것 그대로 즐길 수 있는 몸의 움직임을 말하며, 삶의 무한한 가능성에 도취되는 것과 유사하다. 라푼젤의 머리카락, 그의 존재 이유이던 마법의 힘은 사실 그가 그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춤을 막는 족쇄와 같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이 장면에서 발견된다. 그리하여 이는 절대적인 믿음 하나에만 의존하고 스스로를 억제하면 그만이던 외딴 세상에서, 카오스적인 세상에 나선 결핍 또한 넘침의 몸의 혼란을 표방하고 있으며, 동시에 라푼젤이 여태껏 절대적으로 지켜온 또 다른(첫째는 ‘꿈’이므로) 가치 곧 스스로의 존재 의미인 ‘마법’과 ‘머리카락’을 자신과 분리하여 여기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플린 라이더가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던 유진, 마법의 매개체이자 보호자가 아니라면 존재할 의의가 없던 라푼젤. 스스로의 주체성과 주도성이 결여되어있던 두 인물은 서로의 결여에 공감하고 ‘당신은 당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해주게 된다. 그리고 그 상호적인 연대는 두 번째 포인트인 서로의 일상 속 포인트로 이어진다.
두 번째 포인트는 라푼젤과 유진의 일상이다. 이들은 축제를 시작‘시키기’ 이전까지 여러 행위들을 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너무나 방임되어있던 유진도, 세상의 한 구석에 너무나 갇혀있던 라푼젤에게도 처음인 일이며, 동시에 ‘너무나도 일상적인’ 일들이다. 세계적인 대도와 마법을 가진 소녀. 이 말도 안 되고 특별한 것 같은 존재들이, 실상 꿈꾸던 것은 ‘혼자만의 보금자리와 살아갈만한 부’, 그리고 ‘하늘을 나는 등을 보는 것’ 등의 너무나도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다. 그들은 컵케이크를 사먹고, 사과를 쇼핑하고, 하늘을 구경하면서 그들이 나아갈 수 있는 ‘훨씬 높은 곳’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세 번째의 포인트. 바로 라푼젤의 ‘넘침’을 알려주는, ‘춤’의 구간이다.
라푼젤은 관객 없던 악단의 앞에서 혼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유진까지 함께하도록 이끌며 결국 마을 전체에 축제가 벌어지듯 분위기가 변화하게 된다. 라푼젤의 이 춤을, 즉 ‘킹덤댄스‘를 니체가 말하는 ‘춤’에 의해 해석해보자.
충만의 몸이던 라푼젤은 비로소 그림에만 제한되던 창작자와 창작물의 분리 ‘그 이상’으로 본인이 창작자이자 창작물인 춤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그림을 그릴 공간도 없던 탑을 벗어나, ‘세계’의 중심에서 비로소 말이다. 라푼젤은 이 장면을 기점으로 충만에서 넘침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이는 곧 ‘규정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과 흥에 ‘도취되어’, 이유를 찾지 않고, 추고 싶기 때문에 춤을 춘다. 그리고 이 도취야말로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상에 대한 단편적인 표상이라고 볼 수 있다.
라푼젤은 춤을 추는 내내 누군가와 만나기도 하고, 종래엔 혼자이며, 눈을 감은 채 자신의 흥과 이 분위기에 도취하지만, 유진은 춤판에 함께하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라푼젤만을 지켜본다. 그가 라푼젤을 바라보는 시선은 로맨스적인 의미의 사랑이자, 유진이란 ‘불쌍한 고아’로만 여겨지던 존재가 처음으로 존경하고 닮고 싶은 긍정적인 이상향을 목격했을 때 인류애적인 감정으로써 느끼는 사랑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지점은 라푼젤에게 유진이 언급해주는 ‘깨달음’의 복선이자 근거가 되기도 한다.
4. '아이 씨 더 라이트'
라푼젤은 등불을 보게 되는 순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두려워요. 이 꿈이 내가 상상하던 것과 다르면 어떡하죠?”
“같을 거예요.”
“만약에 다르면요.”
”그렇대도 나쁠 것 없어요. 새 꿈을 찾으면 되니까요.”
라푼젤이 ‘자신의 두려움’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신의 고통을 내면화 하고, 그것을 토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라푼젤이 넘침의 몸으로 ‘변화’하였음을 암시한다. 라푼젤이 자신의 마법을 털어놓고, 유진이 플린이 아니라 유진으로 불리게 되는 변화의 순간 또한, 서로의 결여를 고백함으로써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장면 또한, 이들이 여태껏 가져왔던 절대성 즉 또 다른 의미의 ‘꿈’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고백하며 이들이 넘침과 결여의 인간상에서부터 변화하였음을 알린다.
디오니소스적인 세계관에 완벽히 이입되는 존재가 되려면 고통과 합일 되어야함이 제일 중요한데, 절대성의 의미로 설명되는 꿈을 가진 자들에겐 이 고통이란 심리적 요인이 ‘내가 꿈꾸는 것이 이뤄진 순간’ 내지는 ‘내가 꾸던 꿈이 헛된 것임을 깨달은 순간’이 되는 것이다. 꿈이 이뤄졌을 때 꿈이 사라지는 공포, 내가 꿈에 다다르지 못할 바에 대한 공포, 그리고 꿈이 날 만족시키지 못할 것에 대한 공포. 하지만 이 불안과 공포를 세상에 언급하는 순간 ‘꿈’이라는 인생의 유일무이한 목적점과 의미를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리므로 유진과 라푼젤 그 누구도 그 공포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드디어 라푼젤은 이 공포를 직접 언급한다.
그리하여 라푼젤은 마지막으로 예시된 절대적 꿈에 관한 공포를 세상에 언급함으로서 절대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며, ‘신이 없는 카오스의 세상’을 경험한 자로서 발돋움한다.
다만 라푼젤보다 더 결여에 가깝던 유진이 라푼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이야기해주는 것은 꽤나 신선하다. 이것의 이유는, 일전의 [킹덤댄스]에서 유진의 시선과 해당 [I see the light(빛이 드디어 보여)]의 가사에서 알아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라푼젤은 스스로에 대한 회고를 한다. 세상을 구경만하고 뛰어들지 못하던 시절을, 눈앞에 펼쳐진 꿈꾸던 광경을 보면서. 하지만 그러던 그는 불현 듯 무엇인가 깨달은 것처럼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곳엔 처음부터 라푼젤만을 바라보던 유진이 라푼젤에게 등불 두 가지를 건네준다. 그리고 그 또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고통을 내면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앞에 있는 ‘빛’, 즉 라푼젤을 만나고, 블러 처리가 된 듯 흐릿하여 단 하나의 길밖에 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세상 속 흐림이 걷히고, 그리하여 진실은 언제나 삶 속에 숨어있었으나 자신은 그 진실을 절대적인 꿈에 눈멀어 보지 못하였던 것이란 걸 고백한다.
유진은 모든 넘버에서 라푼젤만을 바라봐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유진이 라푼젤에게 ‘새 꿈’의 가능성을 언급해줄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 노래의 제목인 <I see the light(빛이 드디어 보여)>에서 ‘빛’은, 라푼젤의 꿈 속 등불이자 유진의 삶 속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힘이며, 곧, ‘진정한 꿈’ 내지는 ‘새로운 꿈’을 의미한다.
제목을 따른다면, 이들이 바라보는 것 그러니까 그들의 꿈은 ‘빛’이어야 하는데, 이들은 서로의 파트 마지막과 노래 마지막 모두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즉, 바라보는 서로가 서로에겐 ‘빛’: 새로운 꿈의 의미라는 것이 된다.
유진은 이미 자신의 꿈, 플린 라이더로서의 삶으로 이뤄내는 부와 홀로의 삶, 상처받을 일도 변화할 일도 없는 삶이 헛된 것이라는 걸 라푼젤을 통하여 깨달았고, 동시에 자신은 이미 새로운 ‘라푼젤’이라는 사람을 꿈꾸고 있단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노래의 진행에서 라푼젤에게 장담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5. 죽음, 그리고 ‘다시 살아봄’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고델은 라푼젤을 다시 탑 안에 가두고 그를 찾아온 유진의 배를 찔러 죽기 직전까지 내몬다. 자신이 공주임을 떠올렸던 라푼젤은 고델에게, ‘지금 날 끌고 간다면 당신을 벗어나고자 죽을 때까지 노력할 것이지만, 이 자를 살리게만 해주면 순순히 따라가겠다‘라고 이야기 한다. 라푼젤은, 그의 자유와 넘치는 몸으로서의 창조적인 권한을 스스로 포기하리라 선언한 것이다. 유진은 이 과정에서, “하지만, (날 살리고 당신이 따라가게 되면) 당신은 죽게 돼요.”라고 말한다. 자신은 생명이 걸린 문제이고, 라푼젤은 생존은 분명히 보존되나 자유의 제약에 대한 변화만 생기는 문제임에도 유진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유진은 라푼젤에게 있어 새로운 세상과 자유와,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곧이어 유진은 라푼젤의 머리칼을 잘라버린다. 이는 고델에게 있어 라푼젤의 필요 가치를 없애기 위함이며, 유진이 꿈꾸는 것은 ‘마법의 매개체’가 아니라 ‘라푼젤 그 자체’임을 알려주고, 라푼젤 자신 또한 앞으론 자신의 존재보다 마법을 우선시하여 보호를 위해 제약받는 삶이 아니라 라푼젤이라는 하나의 몸이자 주체로서 살아갈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고델은 절망하다 탑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비로소, 라푼젤을 ‘보호’하는 ‘절대적’이던 가치 세 가지는 전부 사라졌다. 고델, 마법, 그리고 절대적이던 가치의 꿈. 원래 궁핍의 몸으로서 생각하던 바대로는, 부모도, 힘도, 꿈도 없어졌기 때문에 라푼젤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하기에도 마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라푼젤은 비관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여느 문학과 사랑처럼, 그의 옆에서 함께 마지막을 맞이하도록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푼젤은 유진을 끌어안고, 마지막으로 마법의 힘을 내보일 때 필요하던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원래 벌어졌어야 하는 고통(유진의 경우엔 라푼젤이 치료해준 상처였고, 고델의 경우엔 노화였다)을 되돌리는, 기적적이고 어찌 보면 이기적인 염원이 들어가 있다. 이 노래는 고델만이 이용하던 때의 의미와, 라푼젤이 처음으로 스스로의 의지로 사용한: 유진의 상처를 치료해준 때의 의미와, 지금 부르는 의미가 각각 다르다.
먼저 고델이 사용할 때는 언급했던 대로 ‘고통과 합일하길 부정하는’ 존재로서의 사용이다. 그는 운명적으로 찾아오는 노화의 수순을 부정하고, 자신의 ‘고통’, 사실상 ‘변화’를 부정했다.
그 다음으로 라푼젤이 처음 자신의 의지로 사용했을 때, 유진의 상처를 치료해줬을 때의 의미는 ‘고통을 이겨내려는 자’의 수순이다. 유진은 동굴을 탈출하다가 왼손 손바닥을 대각선으로 베였었는데, 라푼젤의 머리를 자른 손도 마찬가지로 왼손이며 이전 상처의 대각선 모양과 라푼젤의 머리를 자르고 놓친 거울 파편의 모양이 동일한 것을 보면 꽤나 의미심장하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의미다. 이것은 여태까지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데, ‘고델’의 절대성도, ‘마법의 힘’도 가지지 않은 오로지 라푼젤로서의 염원이고 세계관의 설정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푼젤의 눈물이 유진의 뺨에 닿자 유진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이것은 불가능함의 실현이자, 라푼젤이 스스로 해낸 ‘창조’의 힘으로서의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라푼젤의 ‘마법’은 머리카락에만 있었으나, 라푼젤의 진짜 마법, 즉 라푼젤의 창조의 힘은 라푼젤이라는 주체적 개인의 몸 안에 이미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유진의 세상 속 진실처럼.
동시에 유진 또한 ‘죽음’을 겪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내용적인 의미론 플린 라이더는 죽고 유진 피츠허버트는 태어남을, 니체 철학의 해석으로써는 죽음이라는 최종적인 인간의 고통을 경험하고 내면화하였음을 의미한다. 또, 이 모든 의미를 가진 행동으로서 새로운 꿈의 ‘불가능해보이던 자유’를 지켜내었음 또한 일종의 창조에 대한 표상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유진과 라푼젤은 서로를 꿈으로 품고, 유진이란 본질과 라푼젤이란 본질을 되찾고, 계속해서 춤을 추고 카오스적인 세상에 호기를 품으며 살아가고자 가약한다. 즉 이 이야기는 어찌 보면 결여의 몸과 충만의 몸이, 서로에게 있던 절대성을 포기하고 새로운 ‘꿈’을 찾아가며, 결론적으론 넘침의 몸과 창조에 도달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나는 죽음으로 하여금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창조의 삶을 보며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속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렸던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것이 인생이라면, 좋다. 다시 한 번 더!”라고 외칠 수 있을 만한 삶을 살라고 이야기 한다. 인생 속에 남아있는 자기 자신의 고정 관념, 삶에 대한 두려움, 망설임 등 자신의 삶을 붙잡는 족쇄를 이겨내고 새로운 삶으로의 창조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라푼젤과 유진의 삶, 곧 영원할 것 같았던 ‘꿈’의 속박을 이겨내고 새로운 ‘꿈, 변화무쌍하고 영원할 수 없을 삶에 대한 찬미를 깨달았던 그들의 삶이 비단 예술로서의 이해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깨달음도 줄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 모두도 삶에 찾아오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맞이할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