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 (@hyoyul__0)
"하아.... 하.."
작고 음침한 방 안에서 라더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그는 절망하듯 무릎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털썩 꿇고는 허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없으면 어떡하지?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라더는 어딘가 무거운 것이 자신의 몸을 꾹 짓누르고 있어 괜히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잠뜰이.....?"
이런 라더에게 야속하게도 그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잠뜰이 작은 창 너머로 보였다. 그녀는 뭐가 그리 급한 건지 부드러운 고동빛 머리칼을 마구 흩날리며 누군가를 급히 찾는 듯해 보였다. 잠뜰이가 왜 여기에 있지? 그녀라면 안전한 시골에 있을 줄 알았는데.... 라더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잠뜰은 여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라더는 그렇게 생각했다.
"..찾았다...!"
그때였다. 낡고 조금은 부서진 나무 문이 잠뜰에 의해서 환하게 열린 건. 잠뜰은 이곳과는 확실히 어울리지 않았지만, 문이 열린 잠깐만큼은 그리웠던 오랜 벗을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만나 반가웠다.
"잠뜰아...!!"
라더는 마치 천사를 본 것처럼 행동했다. 경이롭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잠뜰을 바라보던 그는 멍을 때리던 것도 잠시 그녀에게로 급히 달려갔다. 아, 잠뜰아. 여긴 무슨 일이야. 내 유일한 친구야. 라더의 입에서는 순서 없는 말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와 빈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멀뚱히 서 있던 잠뜰은 이내 활짝 웃으며 자신의 오른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우리 홍차 마시자!"
.......홍차? 라더는 응석을 부리던 것도 잠시, 그녀의 손에 들린 바구니 속 찻잔과 주전자를 보고 몸이 딱딱히 굳어버렸다. 아버지께서, 분명히, 독을 탄 홍차를 마시고 돌아가셨다고 덕개가 그랬는데..
그는 머릿속에서 덕개가 며칠 전에 잠뜰을 조심하라며 경고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잠뜰이 요새 수상하다며 제발 조심 좀 하라고 라더의 어깨를 부여잡고 소리 지르던 덕개의 모습이 더듬더듬 기억 나는 듯했다.
".......우리 아버지, 네 짓이야?"
그는 제법 힘이 빠진 듯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잠뜰에게 물었다. '뭐라고 답해줄까. 원하는 대로 답해줄게. 그편이 너에게 훨씬 나을 테니깐.' 잠뜰은 그에게 다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에 라더는 무척이나 화가 났지만 이제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잠뜰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피가 통하지도 않게 꽉 쥔 주먹이 마구 덜덜 떨리며 진동했지만, 그녀에게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그래. 차 마시자."
그녀는 라더의 입이 떨어지자마자 원했던 대답이 나와 만족한 듯 싱긋 웃으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더가 자신을 따라 자리에 앉자 그녀의 손은 거침없이 찻잔과 주전자를 꺼내 세팅했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게 끓인지 얼마 안 된 듯해 보였다. 달콤한 홍차 향 속에 어딘가 속 모를 구역질 나는 냄새가 섞여서 나는 듯 한 건, 라더의 착각인 걸까. 그는 한참이나 자신의 채워진 찻잔을 바라보다 잠뜰에게 말했다.
"나는 이 왕국을 지켜야 해."
"나도 알아. 네가 이 나라의 왕자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쭉 응원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내 운명이었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내 운명. 나는 왕이 돼서 왕국을 지켜야만 해."
"......"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너를 보니까 운명이 뒤틀린 듯한 기분이 들어. 내가 이 왕국을 지켜내기 위해 여태껏 했던 행동, 왕을 없애고 대통령을 도입하기를 바라는 수많은 내 백성들..."
"...그래, 다 봤지.."
그런데... 잠뜰이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리고.. 온몸에서 나는 타는 듯한 화약 냄새는 또 뭐고? 코트 자락에 묻어있는 피는? 라더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대답을 들어버린다면, 이 모든 걸 전부 포기하고 싶을 것 같아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순간 차라리 내가 왕자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운명을 거스르는 생각까지 할 뻔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아래로 내려 바닥을 멍하니 응시했다.
"....나에게 궁금한 게 많을 것 같은데."
"맞아.. 그치만 네 입으로 듣고 싶지 않아. 너는 내 유일한 친구잖아."
"........이 홍차에 독을 탔어."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라더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으로 듣는 충격적인 사실에 몸이 돌처럼 굳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태까지 그녀를 믿었던 신뢰 또한 와장창 깨진 것 같았다. 홍차... 홍차라... 그들에게 홍차란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매일을 함께 모험하러 다니던 잠뜰과 라더는 힘껏 노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라더의 별장에 들어가면 덕개가 늘 따뜻한 홍차를 끓여줬었다. 그때도.... 이렇게 모락모락 김이 났었다.
".....우리 아버지도, 이렇게 돌아가셨어?"
갈라진 듯한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을 조용히 울려 퍼졌다. 잠뜰은 그에 "응"이라고 대답하며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라더를 응시했다. 왜 너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거야..? 라더는 그녀가 낯설었다. 나를 친구로 생각한 적 없었던 건가? 수많은 생각들이 우주를 만들어 그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녀의 눈빛은 어째서인지 공허한 것이 라더의 영혼까지 쏙 빨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알아. 내가 낯설게 느껴진다는 걸... 하지만 난 너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은 적 없어."
그녀는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한 뒤 자신의 찻잔에도 마저 홍차를 따랐다. 홍차의 향긋한 향이 또다시 둘의 콧속을 괴롭혔다. 아니, 머릿속까지 괴롭혔다.
".......마시자."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분명히 그녀의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찻잔을 손에 든 잠뜰은 라더가 함께 찻잔을 들어주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너. 너도.. 마시려고? 그치만 왜....?"
"...우린 늘 함께 마셨잖아."
그녀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찻잔 속에 든 홍차를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서글픈 듯한 눈을 한 잠뜰은 아무런 말 없이 라더를 바라보다 말했다.
"나도,.. 너 없이 이제 이 세상을 버텨낼 수 없어. 모두가 죽었거든. 라더야, 이 세상은 이미 바뀌고 있어..."
그녀의 뺨 위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픈 내색 하나 없던 잠뜰은 아직도 두렵고 무서워 그저 벌벌 떠는 라더와 눈을 맞췄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그것은... 라더가 볼 수 있는 제 친구의 마지막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