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형 (@tntn951_px)
구멤 언급 주의. (관련 호칭으로 언급 및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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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5단계.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스위스 출신 미국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그가 1969년에 쓴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에서 선보인 모델로, 사람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인지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섯 단계로 구분 지어 놓은 것. 라더는 이게 생각보다 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이론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제시된 다섯 단계를 건너뛸 수 있는지, 단계를 되돌아갈 수 있는지, 단계 간의 경계가 명확한지 등의 여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해당 이론을 가볍게 본다면 어느 곳이든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망친 시험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라던가, 급식에 맛있는 반찬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방법 등으로 말이다. 이런 가벼움을 인지한 이유일까. 라더는 자신이 무언가를 천천히 받아들이는 중이라고 판단했다.
첫 번째 단계, 부정.
라더는 부정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뺑소니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라더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또한, 하월마을의 이장으로서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아버지는 책임감이 있었다. 라더는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같은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허상이었다. 아버지의 뺑소니 사건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범죄가 이어졌다. 얽히고설킨 것들은 최종적으로 달맞이 신을 향해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하월재단 이사장, 하월중학교 미술 선생님, 하월마을 이장, 그 외 대다수의 어른까지.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모두가 공범이었다. 얼마만큼 연루되었냐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다르겠지만, 어쨌든간 그들은 전부 검찰에 송치되었다. 그들이 사라지며 하루아침에 부모가 사라진 미성년자 역시 많았다. 그중에는 다행스럽게도 조부모의 도움을 받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없는 미성년자가 있었다. 라더도 그랬다.
다들 급격하게 변한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른보다 청소년이, 청소년보다 아이들이 더 그랬다. 당장 이대로 먹고 살 수 있는지도 걱정이었다. 이사장이 잡혀감에 따라 하월재단 역시 사라지는 건 예견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하월마을의 자본을 책임져준 재단이었다. 그런 재단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그렇다고 당장 하월마을이 망하진 않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마을을 도와줄 것이고, 언젠가는 홀로서기가 가능해지겠지. 문제는 외부의 평판이었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며 교류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외부와의 관계는 더없이 중요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하월마을을 바라보자. 하월마을에서 뺑소니 사건이 일어난 것도 모자라 납치, 협박, 증거인멸 등 입에 담기도 힘든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소수가 그런 것이 아닌 다수의 사람이 참여한 사건. 하월마을이 범죄자들의 소굴이라는 오명을 받는 건 당연한 절차였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미성년자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해당 문구를 앞세워 자립이 힘든 미성년자들을 후원해주겠다는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하월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은 어른들의 잘못일 뿐, 미성년자들은 무관하다. 이게 그들이 내놓은 주장이었다. 범죄자의 자식이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언론에서 물어뜯기 좋은 소재 아닌가. 범죄자의 마을에서 자란 아이들, 이대로 둬도 괜찮은가. 이러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미성년자들을 지키고자 반대편에 섰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힘든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싶었다. 처음 의견을 낸 익명의 누군가를 중심으로 많은 후원자가 모였다. 그렇게 홀로서기가 힘든 아이들 순으로 후원자를 배정받기 시작했다. 라더에게도 후원자가 붙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였다. 상대는 자신의 개인정보를 불지 않았다. 라더는 그런 후원자의 개인정보가 궁금하지 않았다. 애초에 후원자가 생겼다는 것에 마음을 쓸 새가 없었다. 라더는 부정했기에. 자신의 앞에 닥친 모든 것을 부정했기에. 후원자마저 부정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다면 편지에 적어서 이 주소로 보내줘. 네 부탁이라면 가능한 선에서 다 들어줄게.
- 네 후원자가
다만 우습게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후원자는 편지로 자신의 존재를 주장했다. 실물을 눈앞에 두고 아무런 의미 없다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라더는 단 몇 줄밖에 되지 않는 편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내용이 아닌 글씨 자체를 하나하나 곱씹었다. 후원자의 글씨체는 모난 곳 없이 동글동글했다. 글자의 가로세로 길이가 일정했고, 기울어진 곳 없이 반듯했다. 마치 예쁜 글씨체의 정석을 보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라더는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확히는 시옷과 지읒에서였다. 두 자음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후원자의 글씨체를 따라 시옷도 지읒도 동글동글했다. 그저 오른쪽으로 기울어졌을 뿐이었다. 반듯하게 쓴 글씨 사이로 두 개의 자음만이 기울어져 있었다. 작정하고 곡해하면 시옷이 알파벳 T로 보일 정도였다. 뭐가 문제야? 라더가 물었다. 그러게. 라더가 답했다. 기울어진 시옷과 지읒. 무의식의 라더는 알고 있지만, 지금의 라더는 알지 못했다.
두 번째 단계, 분노.
라더는 분노했다. 어째서 나여야 하지? 자신은 지금까지 아주 평범하게 살아왔다.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았고, 그런 마음을 먹은 적도 없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믿은 것이라고는 달맞이 신뿐이었다. 이렇듯,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 라더의 삶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 순간에 잠뜰은 라더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들 때 믿어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이제 뭘 믿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었다. 당시의 라더는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받아들이며 그냥 넘기고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잠뜰의 말을 되새길 여유가 생겨났다.
라더는 말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들 때 믿어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야. 다시 말했다. 계속해서 입에 담았다. 문장을 말하면 말할수록 맞지 않는 옷을 입는 느낌이 들었다. 이내 라더는 잠뜰의 조언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발언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결국 기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라더는 자기 삶이 부정당했다는 걸 느꼈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그간 진실이라 믿어왔던 달맞이 신도 허상이었다. 거짓으로 점철된, 그릇된 허상을 믿은. 그런 자신을 믿을 수 있을까. 라더는 분노했다. 믿지 못하는 자신에, 허구였던 달맞이 신에,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범인에, 진실을 파헤친 형제 없는 무언가에. 라더는 자신이 왜 이러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라더는 결국 분노의 대상을 찾지 못했다.
안녕. 잘 지내고 있어? 생각해보니까 네가 나한테 편지를 보낸 적이 없더라. 아, 부담 주려는 건 아니야. 그냥 그런 거 있잖아. 마음속에 담아뒀던 말을 누군가에게 하는 것만으로도 심적으로 편안해지는 거.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보내달라고 했는데, 꼭 물질적인 게 아니어도 괜찮아. 어떤 말이든 내가 다 들어줄게.
ps. 나한테 말하기가 그렇다면 네 친구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 네 후원자가
자신의 후원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 라더의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편지가 미세하게 떨렸다. 손바닥의 굴곡에 따라 편지가 구겨졌다. 라더는 편지를 양쪽으로 잡아 찢으려고 했다. 찌직. 윗부분에 아주 작은 금이 생겼다. 그 모습에 라더는 깜짝 놀라며 급히 손에서 힘을 뺐다. 다행히도 살짝 구겨진 자국과 조금 찢어진 자국을 제외하면, 편지의 상태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라더는 자신이 왜 멈췄는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마음만 먹으면 이딴 편지 따위 찢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라더는 차마 편지를 찢지 못했다. 뭐가 문제야? 라더가 물었다. 아직, 모르겠어. 라더가 답했다. 라더는 편지의 내용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음과 모음의 조화 속에서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시옷과 지읒만이 눈에 들어왔다.
세 번째 단계, 협상.
라더는 협상했다. 형체 없는 무언가에 가치를 바쳤다. 변하는 건 없었다. 라더에게 쓸모 있는 가치는 없었기에, 교섭하고 할 것도 없었다. 그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믿음의 원동력을 잃은 라더는 공부에 몰두했다. 당장 돈 벌 궁리는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후원자가 여유롭게 먹고 살 정도로 후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넘치는 시간 속에서 라더가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그런데도 지루할 터인 공부를 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문제엔 답이 존재했다. 분야는 관계없었다. 그 무엇이든 정답이 존재했다. 거짓은 없었으며 진실만을 가르쳤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책은 종류에 따라 다양한 사실을 늘어놓았다. 라더는 그러한 정보를 하나둘 알아갈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잠뜰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한 라더는 결국 자신을 믿지 못했다. 달맞이 신도, 타인도, 그 무엇도 믿지 못했다. 누구에게 주어도 보답받지 못할 믿음이었다. 그래서 라더는 정보라는 무형에 믿음을 맡기고자 했다. 판단의 유보는 가치를 창조했다. 라더는 모르던 것을 알아갔다. 부족한 지식을 채워나갔고, 단 한 번도 관심 주지 않던 장르를 접했다. 언젠가 무형에 바칠 가치를 찾아내길 바라며 학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라더는 시사에 손을 댔다. 후원자들이 나타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굳이 다른 마을의 소식을 찾아보지 않았다. 공부하기도 바쁜 마당에 다른 마을을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나. 이제서야 시사에 손을 댄 것도, 웬만한 건 다 알아내어 더는 학습할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더는 가장 오래된 과거부터 시작해 전체적인 흐름을 짚어가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다. 탐정이라는 이름을 단 잠뜰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잠뜰은 탐정이었다. 자신과 동갑도 아니었다. 그런 잠뜰이 하월마을에 온 이유는 잠입수사 때문이었다. 잠뜰은 하월마을의 비밀을 밝히고자 1년간 중학생 행세를 했을 뿐이었다. 그제서야 의문점 하나가 풀렸다. 라더는 잠뜰이 왜 급하게 하월마을을 떠난 건지 깨달았다. 범인을 잡았기에. 하월마을의 사건을 해결했기에. 더는 하월마을에 있을 이유가 사라진 것이었다. 라더는 신문 기사 제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잠뜰 탐정, 하월재단의 진실을 밝혀낸 공로로 표창장 수상. 누군가에게 표창장을 받는 잠뜰의 뒷모습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 너였구나. 라더는 잠뜰의 얼굴에 손을 댔다. 따스한 온도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미끄러운 종이의 질감만이 손을 스쳐 지나갔다. 라더는 잠뜰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머릿속에 협상이라는 이름의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너를 죽이자. 라더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내가 이런 사항에 처한 것은 모두 너 때문이었다. 너만 없었으면 다 되었을 일이었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라더의 입꼬리가 위쪽으로 가볍게 휘었다. 모든 것은 너 때문이다.
안녕. 요즘은 뭐 하고 지내? 나는 일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더라니까. 너는 이제 곧 방학이려나. 내년엔 학년이 아니라 학교가 바뀌겠네. 어느 학교에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시기겠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네가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을 거야.
- 네 후원자가
라더는 편지를 읽다 말고 책상에 내려놓았다. 되지도 않는 조언이 얼추 맞았다는 것에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후원자는 그런 의도로 편지를 쓴 것이 아닐 텐데도 말이다. 사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라더는 후원자의 말을 따르고 싶지 말았다. 어째서? 라더가 물었다. 글쎄다. 라더가 답했다. 답장한 적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편지를 보내오는 후원자에 기분이 나빠진 것일까. 아니면 제대로 된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양 말하는 게 아니꼬운 걸까. 이건 흡사 잠뜰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라더는 후원자의 편지를 뒤집었다. 이 편지는 보지 않은 셈 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시옷과 지읒이 기억에 남았다.
네 번째 단계, 우울.
라더는 우울했다. 잠뜰을 없앨 계획을 세우던 와중이었다. 갑작스레 변한 자신의 감정을, 마음으론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고 말았다. 라더는 공부하면서 많은 분야를 섭렵했다. 그중에서 복수라는 카테고리 또한 포함되는 일이었다. 복수를 주제로 한 책은 넘쳐났다.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도 했고, 문학적이나 철학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책 속에서 누군가는 화려한 복수를 거행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원수를 죽이며 목표를 이루었다. 이는 본인에게 있어 최고의 결말이었다. 다른 누군가는 복수하길 포기했다. 원수의 사정을 알았다던가, 복수는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다던가 라는 등의 이유였다. 참으로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복수에 실패했다. 완벽한 계획을 세웠지만, 상대방에 의해 범행이 까발려지고 말았다. 그는 경찰에 잡혀가며 씁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라더는 고민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잠뜰의 잘못이었을까. 잠뜰은 탐정이다. 탐정이란 개인이나 기업의 의뢰를 받아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걸 직업으로 삼는 사람. 잠뜰은 분명 누군가에게 하월마을을 조사하라는 의뢰를 받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가장 수상한 장소가 하월중학교였을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잠뜰이 나이를 속여가면서까지 잠입할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잠뜰은 하월중학교에서 정보를 모았다. 흩어진 정보는 선으로 이어졌고, 곧이어 흘러간 시간이 되었다. 그 끝에 다다라 정점에 선 이는 하월 재단의 이사장이었고, 자신의 아버지는 사건의 시초였다. 잠뜰은 그저 자기 일을 했을 뿐이었다. 과거에 묻히고만, 현재까지 진행되던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범인이라는 이름을 단 어른들과 탐정이라는 이름을 단 잠뜰. 두 무리를 비교했을 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누구인가. 잠뜰은, 정녕 나의 원수인가. 라더는 헛웃음을 지었다.
달맞이 신은 없었다. 허상이었다. 달맞이에 의미는 없었다. 다만 라더는 달맞이라는 이름을 가진 꽃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라더는 달맞이꽃을 한아름 구입했다. 작고 동그란 노란색 꽃이었다. 달맞이꽃을 보니 네 생각이 났다. 라더는 꽃잎을 하나둘 뜯었다. 꽃잎이 바닥에 흩날렸다.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달맞이꽃 몇 송이를 그대로 방치했다. 힘없이 시들어가더니 축 늘어졌다.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달맞이꽃을 말려서 꽃차를 우렸다. 한 모금 마셨다. 달맞이꽃차는 피부랑 혈관에 좋다고 그랬던가. 남자보다 여자한테 더 좋다고 한 것도 같은데. 다시금 네 생각이 났다. 우울감에 짓눌린 탓인지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라더는 잠시 모든 것을 놓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뒤죽박죽 섞여가는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안녕. 너는 방학을 맞이했으려나.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자유겠네. 나는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 가끔은 휴가 생각이 간절하더라. 아, 맞다. 혹시 어느 학교에 갈지 고민은 해봤어? 잘 모르겠다면 내가 좋은 학교를 추천해줄게. 하월마을 근처가 아니라서 네 집으로부터 좀 멀겠지만 말이야.
ps. 답장은 언제든지 환영이야. 필요한 게 있다면 부담 가지지 말고 편지 보내줘.
- 네 후원자가.
그런데도 라더는 오늘 도착한 후원자의 편지를 열어보았다. 후원자는 비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늦어도 주에 한 번은 꼭 편지를 부쳤다.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밥은 먹었냐. 나는 오늘 이런 걸 먹었다. 너도 맛있는 거 먹었으면 좋겠다. 그런 하찮은 이야기뿐이었다. 후원자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받은 날, 라더는 종이 상자 하나를 마련했다. 그곳에 이제까지 받은 편지를 전부 모아두었다. 사실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의 편지도 그렇고, 이전에 보낸 것도 그렇고, 전부 쓰레기에 불과했다. 라더는 상자 안에 편지를 넣었다. 얇은 종이 여러 장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상자째로 쓰레기통에 버릴까 고민한 적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직은 아니라며 정리하길 여러 번이었다. 무엇이 아니야? 라더가 물었다. 그러게. 라더가 답했다. 라더는 알고 있지만, 알지 못했다. 기울어진 시옷과 지읒 사이. 이번엔 달맞이꽃이 생각났다.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이라던데. 라더는 눈을 깜빡였다. 문득 떠오른 정보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기다림이란 단어가 익숙했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다섯 번째 단계, 수용.
라더는 수용했다. 뒤섞이던 감정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후배의 발언 덕분이었다. 라더는 낚시터에 앉아 멍때리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는 그날 도착한 후원자의 편지가 들려있었다. 편지 탓에 요동치던 감정을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걸어가던 후배가 라더를 발견했다. 후배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치며 라더 곁으로 다가왔다. 곧장 라더의 옆자리를 차지한 후배는 다리를 흔들거리며 흘러가는 바람을 맞이했다. 그에 따라 라더가 들고 있던 편지도 바람에 흩날렸다.
"어라, 그거 뭐예요? 편지? 혹시 누나가 보낸 거예요?"
"아니. 후원자가…."
후배의 질문에 중얼거리듯 답하던 라더는 잠시 멈칫했다. 누나. 후배가 말하는 누나는 잠뜰이 분명했다. 라더가 기억하기에, 후배가 누나라고 부른 이는 잠뜰 밖에 없었으니. 라더는 차분히 기억을 되짚었다. 너는 잠뜰이 탐정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잠뜰이 떠나던 날, 가장 먼저 앞장서서 기다리고 있던 게 너였다. 잠뜰이 자의로 말했든, 타의로 말했든. 너는 정말 잠뜰이 탐정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라더는 고개를 돌려 후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 알고 있었구나."
"네, 넵? 뭐가요?"
후배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들키면 안 될 게 까발려진 것처럼 과한 반응을 내보였다. 후배는 은근슬쩍 라더의 시선을 피했다. 어설프게 휘파람을 불며 모른 척한 건 덤이었다. 뻔한 반응에 라더는 이어서 말했다.
"바깥 소식을 찾아보면 바로 나오는 게 잠뜰 얼굴이야. 그걸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어?"
"으… 그건 그렇네요."
속였다는 사실에 마음이 찔린 것인지 후배는 여전히 라더의 시선을 피했다. 후배는 눈을 꼭 감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싶었다. 이내 슬쩍 눈을 뜨더니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일부로 말 안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누나가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된다고 했거든요."
"잠뜰이 네게 직접 정체를 밝혔어?"
"아뇨, 제가 갇혀있었을 때 탐정이라는 소리를 들어버린 바람에…. 알려줬다기보단 저한테 들킨거죠."
"그렇구나."
라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고 있던 편지를 접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미안.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 먼저 돌아가볼게."
"그래요? 그럼 잘 가요!"
후배의 배웅을 받으며 라더는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후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종국에는 세차게 뛰어나갔다. 라더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후원자의 편지가 든 상자를 꺼내 들었다. 서랍에 박아둔 성냥도 꺼내 들었다. 아직도 아니야? 라더가 물었다. 이젠 맞아. 라더가 답했다. 라더는 화장실로 걸어갔다. 건조한 화장실 바닥에 상자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곧바로 성냥 하나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수십 장의 편지 속, 기울어진 시옷과 지읒이 눈에 띄었다. 가만히 바라보다 그대로 성냥을 떨어트렸다. 불붙은 편지는 활활 타올랐다. 따스한 온도가 느껴졌다.
네가 먼저 말해주길 원했다. 너는 탐정이었다.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서 하월마을에 왔다. 나는 너와 같이 보낸 시간을 안다. 네가 나에게 대했던 그 모든 것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너는 편견을 가지지 않았다. 내가 살인자의 아들이란 진실을 알았어도 나를 응원했다. 내게 조언해주었다. 그런 너였기에. 너를 믿었기에. 네가 먼저 내게 진실을 말해주길 원했다. 나는 그랬던 것이다.
언젠가 네가 말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우리는 수많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과거를 회상할 수 있었고, 미래를 바라볼 수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너는 말하지 않는 걸 택했다. 나를 위해서였는지, 너를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어떤 이유든 간에 너는 결국 그렇게 결정했으니. 모든 것을 태운 불은 재를 남기며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많았던 편지가 전부 재로 변했다. 어딘가가 부서진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라더는 재로 변한 편지를 치웠다. 한 곳에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넣었다. 라더는 손을 탁탁 털었다. 곧이어 책상에 앉았다. 평범한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라더는 처음으로, 후원자에게 보낼 편지를 적었다.
*
"강연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강연이야. 이제 그런 요청 좀 그만 받으면 안 되나? 안 그래, 수현…. 아, 맞다. 집 지키라고 했지."
잠뜰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머리칼을 정리했다. 가뜩이나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바쁜 사람 불러내고 말이야. 잠뜰은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원장님의 요청인 데다가 자신이 졸업한 탐정학교의 강연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힘들어도 어쩌겠어. 나를 따라 자라나는 후배들을 위한 일이라면야, 발 벗고 나서서 좋은 정보 나눠줘야지. 잠뜰은 강연하기 위해 탐정학교에 도착했다. 간만에 일찍 일어난 터라 느긋하게 준비했는데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아무리 초청 강사라지만, 외부인이 학교 안을 멋대로 돌아다니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잠뜰은 휴게실에 가려고 했다. 탐정학교의 특성상, 외부인이 많다 보니 그들을 위한 휴게 공간을 마련되어있었다. 거기 위치가 어디였더라. 잠뜰은 기억을 되짚어가며 휴게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익숙한 하늘빛 머리카락의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라더?"
중얼거림이 도화선이 되었다. 앞서 걸어가던 소년은 잠뜰의 말에 그대로 멈춰섰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잠뜰은 깜짝 놀라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눈앞의 소년은 라더가 맞았다. 라더는 무표정으로 잠뜰의 위아래를 훑었다. 설마 그사이에 자신을 잊어버린 건가 고민할 새는 없었다. 라더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오랜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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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뜰은 라더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문을 열어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라더는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끈을 양손으로 꾹 잡고, 그 앞에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외부인의 공간이니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이에 잠뜰은 자신이 보증하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라더는 그런 잠뜰을 가만히 바라보다 휴게실로 들어섰다. 밖과 이어진 창문 아래로 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보였다. 그 앞에는 낮은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휴게실 중앙에는 앉아서 작업하기 편해 보이는 긴 책상과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잠뜰은 정수기 옆에 있는 서랍장을 열었다. 외부인들을 위한 커피믹스나 녹차 티백 따위가 정돈되어 있었다. 정수기 위, 찬장에는 민무늬 찻잔과 티스푼이 있었다. 관리하기 쉬운 종이컵을 가져다 둘 수 있었을 텐데도 허투루 대접하지 않겠다는 게 티가 났다.
"커피… 는 좀 그렇고, 녹차 마실래?"
밤샘 작업할 때마다 커피를 찾아서 그런가. 자신도 모르게 커피를 언급할 뻔했다. 아직 미성년자인 라더에게 커피를 주는 건 좀 그렇지. 잠뜰은 녹차 티백을 꺼내 들며 말했다. 그러자 라더가 잠뜰의 앞을 가로막았다.
"앉아있어. 내가 타 줄게. 마침 좋은 차를 가지고 있거든."
"그래? 좋은 차라니, 기대되네."
라더는 자신의 가방끈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라더의 말에 잠뜰은 녹차 티백을 정리하곤 의자에 앉았다. 라더는 찬장에서 찻잔 두 개와 티스푼 하나를 꺼냈다. 찻잔에 뜨거운 물을 전부 채운 다음, 가방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살짝 짙은 노란빛의 꽃잎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라더는 뚜껑을 열고 티스푼으로 꽃잎을 퍼냈다. 찻잔에 꽃잎을 떨어트리자 색이 우러나며 향기가 퍼졌다. 곧장 차를 두어 번 저어 꽃이 더 빨리 우러나게 했다. 끝으로 사용했던 티스푼과 유리병을 정리했다. 잠뜰은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라더는 찻잔 두 개를 조심히 들고 와서 하나는 잠뜰의 앞에, 다른 하나는 맞은편에 내려놓았다.
"이거 꽃차야? 향기 좋다. 무슨 꽃이야?"
잠뜰은 감탄을 내뱉으며 차 손잡이를 집어 들었다. 라더는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담담하게 답했다.
"달맞이꽃."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멈칫한 건, 아마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고, 숨겨진 뜻도 없는 꽃일 텐데도. 잠뜰은 찻잔을 책상에 내려두지 않았다. 차를 마시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라더를 바라보았다. 라더 역시 잠뜰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라더는 양손을 뻗어 찻잔을 조심스레 감쌌다. 뜨거운 열기가 손으로 옮겨갔다. 라더는 그 온도를 느꼈다.
"달맞이꽃차가 피부 미용에도 좋고, 혈관 건강에도 좋데. 남자보단 여자한테 더 좋다던데?"
"아… 그렇구나."
잠뜰의 말을 끝으로,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잠뜰은 찻잔을 든 상태로 가만히 멈춰 섰다. 라더 역시 찻잔을 감싸 쥔 채, 온도를 느끼기만 했다. 조용히 시간만 흘러갔다. 뜨겁던 꽃차가 서서히 식어가 미지근해질 때쯤. 그제서야 잠뜰이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계산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자신 탓에 침묵이 너무 오래 이어지는 것 같아,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다. 이걸로 어색한 분위기가 가라앉았으면 했다. 라더는 찻잔에서 서서히 손을 뗐다. 고개를 들어 잠뜰을 마주했다.
"사실 모르겠어."
라더가 차분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모르겠어요. 잠뜰 탐정, 당신을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지금은 모르겠어."
라더의 입에서 나온 경어에 잠뜰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라더는 그런 잠뜰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더 이상 후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가 자취할 집을 구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시옷과 지읒. 그 필체는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었는데."
라더는 잠뜰의 글씨체를 본 적이 있었다. 글자의 가로세로 길이가 일정하고, 기울어진 곳 없이 반듯한. 모난 곳 없이 동글동글한. 글자를 잘 쓰는 사람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전형적인 글씨체였다. 다만 라더는 잠뜰의 글자에서 특이한 부분을 발견했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져서, 작정하고 곡해하면 알파벳 T로 보일 법한 시옷. 그 위에 선이 하나 더 그어진 지읒. 특이하지만 기억할만한 사항은 아닌지라, 무의식에만 남겨두고 있던 사실이었다. 라더는 모든 걸 수용한 순간, 후원자의 편지에서 느껴지던 기시감을 깨달았다. 잠뜰은 생각했다. 뭐라도 답해야 한다. 하지만 잠뜰이 말하는 것보다 라더가 말하는 게 더 빨랐다.
"사실 네가 먼저 말해주길 원했어. 다른 이에게서 듣는 것보다, 내가 먼저 알아내는 것보다. 당신이 먼저 알려줬으면 했어. 그런데 당신은 그러지 않았지. 그게 네 선택이었겠지."
라더는 잠시 숨을 골랐다. 잠뜰은 라더의 말이 끊어진 그 순간을 치고 들어오지 못했다.
"널 죽이고 싶었어. 만약 아버지가 뺑소니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이사장을 속이지 않았더라면. 이사장이 아버지를 용서했더라면. 미술 선생이 이사장을 돕지 않았더라면. 마을 사람들이 침묵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네가 하월마을에 오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만약을 타고 가니 그 끝은 너였어. 그래서였나. 너 때문에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는 모르겠어. 너는 탐정이야. 진실을 밝혀내는 게 목표지. 넌 그저 네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걸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죽이겠어.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라더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잠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잠뜰은 라더가 자신에게 실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혹시 모를 일 때문에 숨긴 것이긴 했지만, 결국 자신이 탐정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으니. 라더가 처음으로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엔 단 한 줄만이 쓰여있었다.
하월마을 근처가 아닌 다른 학교에 진학하고 싶은데, 혹시 자취방을 구할 수 있을까요.
특정 지역을 표시해둔 지도와 함께였다. 후원자에게 처음으로 보낸 부탁이었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곧장 자취방을 구해주었다. 잠뜰은 라더에게 어느 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건지 묻지 않았다. 밝히고 싶었다면 편지에 작성했겠지. 그런 생각으로 넘기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 이곳에서 라더를 만날 줄 몰랐다. 라더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도 몰랐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라더는 생각을 정리할 새도 주지 않았다.
"잠뜰아, 내가 네 차에 독을 탔어."
라더가 잠뜰을 마주하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비가 내린다는 소식을 전하듯이, 너무나도 가볍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렇지만 라더의 말투는 가볍지 않았다. 너무나도 차분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 같았다. 이는 라더의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라더는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웃지도 않았다. 그저 무에 불과한 감정만을 내보였다. 라더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잠뜰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내 천천히 손에 들린 차로 시선을 옮겼다. 차가 달달 떨리고 있었다.
"아니다. 그냥 잠뜰 탐정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라더가 고개를 까딱였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라더는 잠뜰을 내리깔며 바라보았다. 잠뜰은 손에 쥔 차를 놓칠 뻔했다. 이건 업보였다. 라더에게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지 않은 업보. 자기 생각만을 내세워서는 안 됐었다. 후원자가 아닌 잠뜰로서 라더에게 연락을 보냈어야 했다. 할 말이 있으면 먼저 연락을 줄 것이란 안일한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한 사실을, 라더를 만나고 나서야 깨닫고 말았다.
"라, 라더야."
잠뜰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제라도 내 입으로 직접 이야기하자. 잠뜰은 다짐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잠뜰을 죽이겠다는 복수심으로 불탔던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의 라더는 잠뜰에 대한 감정이 없었다. 이제와서 그 일로 감정을 불태워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다 지나간 일이며 너와는 관계가 없는 것을. 라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뻗어 잠뜰의 손에 들린 홍차를 빼앗았다. 잠뜰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차를 들이켰다. 잠뜰의 몫이었을 차가 라더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단번에 마신 라더는 고개를 숙이곤 잔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무심하게 잔을 뒤집었다. 잠뜰을 잠시 흘긋거리고는 탈탈 털었다. 차에 젖어 하나로 뭉친 달맞이꽃 몇 송이가 책상에 툭 떨어졌다. 차는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제가 잠뜰 탐정님 차에 어찌 독을 타겠습니까?"
라더는 허리를 살짝 숙여 식탁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는 잠뜰 앞으로 빈 잔을 내려놓았다. 잠뜰은 라더의 행동에 따라 저도 모르게 잔을 바라보았다. 잔 안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자신의 차에 독을 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잠뜰은 차를 마시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마시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했다느니 라더를 믿지 못했다느니 하는 것은 변명이었다. 어찌 됐든 자신은 지나간 잘못만을 되새기며 차를 마시지 않았다. 이제부턴 그 무엇을 말해도 늦어버린 후였다. 잠뜰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라더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잠뜰은 라더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 그 자체였다. 라더는 잠뜰을 향해 입꼬리만을 올려 웃어 보였다.
"장난이야."
그래, 그냥 장난이었어. 돌이킬 수 없는 사소한 장난. 라더의 눈은 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