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선 (@ricecakerice_)
네 홍차에,
독을 탔어.
ㅡ그 한마디가 똑, 하고 떨어지자 메우는 정적. 밝은 가식의 기척은 사그라들고 없었다. 잠뜰은, 공룡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다시 그 독을 탔다는 홍차에 눈을 붙였다. 단순한 다과회였다. 꼬인 의도가 있었지만. 단둘이 보자길래, 선전포고라도 하려는갑다- 하고 있었다. 그런 사이였으니까. 붉으스름하고도 주황빛이 감도는 액체에 자신의 얼굴은 어느샌가 사라졌다 생겼다 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평범한 홍차였다. 원래는 그랬어야만 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하였다. 누가 보아도 평범한 우리였다. 원래는.
어째서, 화내지 않는 거야?
잠뜰은 충격적인 선언, 그러니까, 그 말에도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그리고, 그녀는 고민했다. 고민이라기엔 회상에 가깝기는 했으나, 이건 그녀의 표현을 빌린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홍차에 독을 풀기 시작했는지. 어째선지 독을 품은 홍차마냥- 속이 곪아버린 붉은 빛을 띄고 일렁이는지.
ㅡ잠뜰과 공룡은, 서로 굉장히 친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으니 적어도 그들의 세월에 관한 서술어들은 아무것도 과언이 아니라 장담한다. 서로가 함께할 때 가장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들은 꼭 맞춘 직소 퍼즐에서 튀어나온 두 조각처럼 서로가 있어야만 완성되었다. 와하하- 거리며 궁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말괄량이들. 그들의 집사이자 관리인들은 매일을 그녀와 그를 잡으러 사방으로 흩어져 이리저리 동분서주하곤 했다. 그 값비싸다는 대리석 위를 초원 위마냥 달리고 뛰어넘고 넘어졌다. 평범한 아이를 꿈꾸었다. 적어도 그 둘은 평범을 사랑하였고 애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안타깝고도 고귀하고 금지옥엽만의 특권이었다. 황자와 황녀라는 관계는 그러하였다. 직계 가족으로 본래라면 상속 일순위이나 그 당시의 시대상으로 여자 황제는 인식이 좋지 못했기에 약간은 밀려난 듯한 위태로운 잠뜰과, 이제 막 떠오르는 듯한 황제의 사촌, 그 자식. 그 아이가 상속 이순위의 공룡. 이것이 그들의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이었다. 가엾은 어린 열살배기 아이들은 집안의 얽히고 설킨, 차갑게 식어버린 냉전 사이에서, 차차 서로를 미워하게 되어버렸다. 그야, 너무 많이 떠나갔다. 서로 때문에, 너무 많은 가문의 사람들이 피와 살과 뼈로 흩어져 사그라들었다. 너무 많이 울부짖었다. 불타오르는 별채 안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목이 쉬도록 그리 서글피 울부짖으며 마주보지 않고도 원망해온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아이들은 소중한 가문의 사람들이 피를 뿜고 불타오르고 치명상을 입고도 살려 꿈틀거리다 숨을 멎는 꼴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그래버렸다.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엔 아무래도 잔혹한 이야기이자 서사.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만, 이제는 그것이 강점이자 약점이 되어버렸다. 가장 좋아하는 것, 사랑하고 애모해왔던 것을 부수고, 파괴하고, 그렇게 절망을 안기기도, 되려 안기도 하며 집안 싸움의 손바닥 위에서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춤춰주었다. 마치 실로 이어 조종하는 목각인형처럼. 물론 그런 줄도 모르고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헐뜯고 싸워주었다. 남은 것은 차게 식은 상처와 가득한 흉 뿐이었다. 돌아갈 길은 없었다. 아마 서로의 잘못은 아니었을 거라는 지레짐작 뿐. 더이상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마 퍼즐은 평생동안 맞춰지지 못하겠지.
잠뜰은 빤히 홍차와 눈을 맞춘다. 싸해지며 어두히 물든 공기가 온실을 가득 메운다. 눈치없는 주변의 가시덩쿨로 타고 오른 빠알간 장미들은 아침 이슬에 맞춰 반짝거리며 장단을 맞춘다. 가득 늘어선 색색깔의 장미들, 꽃들, 그리고 화려한 자연의 인공적인 전경이었으나, 잠뜰은 이 자그마한 온실에서 은방울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소박하고, 솔직하고, 순수해서. 둘의 어린 시절을 닮았다고는, 그 꽃이 그대로 남아 담아낸 동심을 이슬에 담아 흘렸다는 것을 애써 모른 채 했지만. 주변의 다과들도 공룡의 발언 때문에인지 더이상은 달콤치 않다고 여겨진다. 장미를 우려냈다고 열댓살의 잠뜰이 믿어온 홍차에선 이제 비릿한 피비린내가 맡아오는 듯 하다. 피를 우려낸 듯한 오묘한 빛깔의 차. 홍차의 잔잔함 너머 불길이 일렁인다. 찻잔이 묘하게 그을린 것 같다. 문득히 역겨워져서, 그리고 떠올라져서 시선을 뗀다.
잠뜰과 공룡은, 열하나 쯤에 같은 마법약 제조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둘은 그 수업을 상당히 즐겼다. 그 수업에서 수업 차원으로 해왔던 일종의 놀이가 있는데, 바로 서로에게 효과를 알 수 없는 마법약을 제조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는 언제나 그런 장난을 쳤다. 준다고 뺀질거리고선 뺏어서 마셔버리는 것. 효과를 알지도 못하는데도 서로에게 주기 싫다며 마셔버리곤 했다. 그 덕에 공룡은 입에서 화염 마법을 사용했고, 잠뜰은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 그런 사단이 있고도 둘은 웃어넘기며 또 다른 레시피를 탐구하러 뒷산으로 뛰어가기 바빴고, 동시에 홍차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지 않던 차의 종류이기도 하다.
잠뜰은 읽어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그의 쪽에 있는 찻잔에 손을 뻗어 걷어낸다.
그의 표정에 읽힌 당혹감이 우습다.
방금까지만 해도 능글거리던 열일곱의 정공룡은 없고
내가 아는 열 하나의 정공룡이었다.
아직도.
홍차 향이 향긋하게 주변을 찔러 퍼진다.
머리맡의 뽀얀 은방울꽃이 선홍색으로 물든다.
너는 아직도 바보구나?
사실 나는 말야,
아직도 열 한살에 머물러있어
머리가 몸을 따라가지 못해서
아무래도 우스운 꼴이지?
나, 있잖아
사실 너를 원망하고 싶지가 않았어
사실 너랑 다시 놀고싶었어
나는 아직 열 하나라서,
아직도- 아직도...
봐, 널 미워한 적 없단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