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일 (@Tidal_wavve)
원목 테이블 위로 새까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엎드린 각별의 눈꺼풀이 무거웠다. 탁한 금빛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꺼풀이 내려왔을 때쯤 누군가 다가왔다. 메트로놈이라도 둔 것 마냥 정확한 발소리와 앞에 앉아 한숨을 푹 쉬는 게 보나마나 수현이었다. 씻고 온 건지 목에 수건을 건 수현은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한곳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어수선하던 테이블이 수현의 손을 거치자 깔끔해졌다. 가볍게 호흡을 뱉은 수현이 각별을 불렀다.
“형.”
“왜.”
각별은 고개를 파묻은 채 대답했다. 수현의 표정은 어딘가 언짢은 듯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수현은 각별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밀어놓고서 하얀색 찻잔을 올렸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놓이는 소리를 들은 각별이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에 놓인 잔속에서 주홍빛 찻물이 가볍게 찰랑였다. 잔에 담긴 찻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각별이 수현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내가 언제 차 마시는 거 본 적 있냐?”
뭐 싫음 말던가. 도로 찻잔을 향해 뻗어오는 수현의 손을 쳐낸 각별이 잔을 들었다. 찻물로부터 피어오른 김은 새하얀 김이 허공에서 부서졌다. 향긋한 홍차 향을 맡은 각별이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대로 한 모금 마시는 순간.
“형. 내가 만약… 그 홍차에 독을 탔다면 믿을래?”
뜨거운 홍차에 입천장을 데인 각별이 인상을 찌푸리며 찻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뭐래. 딴 놈들도 아니고 황수현 네가 그럴 리가 없잖냐.”
성의라고는 한 스푼도 담겨있지 않은 대답에 수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은 사람이 너무 무감각해.”
“다짜고짜 뭔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그날 말이야. 그 잔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주는 대로 덥석 받아 마셔?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쩔 뻔했어?”
“뭐, 그럼 독을 마신 사람이 되는 거지. 별 거 있겠어?”
“봐, 형은 그게 문제라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각별을 보며 수현은 머릿속에 그날의 기억을 재생시켰다. 그날은 두 사람이 속한 용병단이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복귀하던 날이었다. 보통 때보다 두 배는 되는 듯한 수익에 유난히 들뜬 각별이 수현을 불러 세워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해왔다. 뒤에서 양팔을 뻗어 수현의 어깨에 손을 올린 각별이 단골 가게가 있다며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대답은 듣지도 않을 거 뭐하러 물어본대? 조용히 참을 인을 새기며 마음 속 불만을 잠재운 수현은 각별이 미는 대로 발을 움직였다. 멀리서 본 두 사람은 꼭 기차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각별과 아는 사이인 듯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첫 만남에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유머러스한 남자 덕분에 수현은 편안한 분위기에 맞춰 점점 나른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앞에서 수저를 떨어뜨리고 물 잔을 엎는 각별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니익! 우리 이제 돈도 꽤 많이 모았는데 너도 같이 가자고오~! 내가 너 부단장 시켜준다니까~?’
‘알겠으니까 좀 진정해봐. 술도 안 마신 사람이 상태가 왜 이래?’
기분이라도 내겠다며 포도맛 주스를 거하게 들이키는 각별을 보던 수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사람 주스에 취한 게 아니라 분위기에 취했네.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돈으로 용병단을 꾸리겠다며 수현을 설득하는 각별의 뒤로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이게 누구야~ 은패 용병 각별 아닌가? 대단하신 분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리라곤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야~!!!’
생각 외로 발이 넓은 각별 탓에 수현은 저 사람도 아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미세하게 인상을 찡그린 각별의 얼굴을 보고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혹시나 싸움이 날 것을 우려한 수현이 적당히 웃으며 저 사람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남자가 각별의 앞으로 무언가 불쑥 들이밀었다. 수현이 곁눈질로 본 그것은 포도주였다. 아, 저 형 이 상태에서 술 들어가면 안 되는데…. 알아서 하겠지 싶었던 수현은 이어지는 각별의 행동에 경악하고 말았다. 각별은 웃는 얼굴로 잔을 받아들고서 그대로 마시기 시작했다. 수현은 각별의 목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수상하게 웃는 남자를 미심쩍은 눈으로 주시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각별이 내려놓은 잔속에 반 이상의 술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자가 자리로 돌아가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엎어진 각별을 부축했던 기억을 끝으로 과거 회상을 마치는 수현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현실로 돌아온 수현은 놀란 눈으로 각별을 바라보았다. 각별은 처음과 같은 자세로 테이블에 엎어져있었다. 수현이 재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테이블 위를 살폈다. 다행히 찻잔에 머리카락이 빠져있지는 않았다. 저 형이 또 왜 저럴까 생각하며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수현을 붙잡은 건 웅얼거리는 각별의 목소리였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되묻자 각별이 고개를 들어 수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니가 말한 그날 말이야. 나 그 술 안 마셨다고.”
그럼 왜 테이블에 엎어진 건데? 그날 내가 부축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내가 그날만 생각하면…. 수현이 눈을 감고 또 한 번 참을 인을 새기는 동안 각별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받은 그 잔에 입만 갖다 댔어. 입술만 적셨을 뿐 삼킨 적은 없어. 그날 내가 마신 건 포도맛 주스밖에 없다고. 나도 남이 주는 거 함부로 넙죽 받아먹는 사람은 아니야. 내가 좀 덜렁대는 면은 있어도 그 정도 생각도 안 하고 사는 바보는 아니라고.”
말을 마친 각별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다 멈칫하더니 뒤돌아 수현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황수현이 더 바보 같은데. 내가 독 탄 홍차 주면 그대로 받아먹을 것 같음.”
혼자 남겨진 수현은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말 그대로 판단 오류였다. 어쩌면 각별의 말대로 ‘내가 바보였던 게 아닐까’ 생각하는 수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