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예술작업은 인식론을 넘어서는, 존재 방식이 문제가 되는 존재론적 사건이며 존재 방식의 정치학이다. 이질감, 예측 불가능성과의 싸움과 기대, 내 몸을 만지면서 동시에 내가 만짐과 만져짐을 느끼는,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가 되는 감각 현상, 자신의 안과 밖을 뒤집어서 어느덧 대상을 자기 인식의 일부로 끌어들이며 넘나드는 위상적 재구성을 오간다. 이것은 인식론적 효과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사용, 즉 직접적인 신체의 변화와 감응, 삶을 변화시키고 확장하게 하는 힘으로서 신체와 결부된 운동감각을 촉발한다. 생성과 변화를 근원적 실재로 보는 베르그손의 역동적 형이상학은, 평소 우리가 지각 작용을 순수한 정적인 사유작용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에, 지각이 본래 외부 세계와 관계 맺는 신체적 “운동성”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내 작업 에서 연대기(chronology ; 직선)적 순서란 의미가 없다. 새로운 작업과 옛 작업이라는 구분이 무색하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치 물이 땅에 스며들다가 언젠가는 다시 솟구치듯, 하나의 작업으로의 완결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잠기고 다시 번진다. 이런 “시대착오적 ana-chronical” 흐름들은 한 방향의 시간을 살지 못하고 배회하거나 반복, 분산, 순환한다. 머리와 꼬리가 따로 없는 이러한 생리가 내 작업에서 구작과 신작이라는 개념의 구분을 의미 없게 만들고, 제작의 연대기적 순서와는 무관하게 겉돌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내 작업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드는 상황과의 조우를 통해 모든 철학적 결정론(아키즘)들의 미학적 통제를 헤집고, 틈을 내고, 작업 자신의 안과 밖을 헐고 가로지르는 아나키스트적 힘은 이미 그 자체가 표현 불/가능한 비확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흔히 "작품(作品, works)"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는 이미 유기적 완성체라는 비평적 명제가 함축된 의미를 알게/모르게 표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유기적 완성체를 동경하는 "작품"이라는 개념에는 벌써 결정론적 세계관에 입각된 (형이상학적) 예술론이라는 일종의 통제론(아키즘, archism)에 억압당해 있는 것이거나 그런 미적 확정론에 암암리 승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가성(自家性 auto-affection)의 자폐적 존재로서 "작품"의 개념에 대한 대안적 활성론의 형성계기는 작가 중심이 아닌, 작업의 생성적 작동 구조에서 탄생한다. 내 작업을 통해서 나타나는 개념들 또는, 내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내 작업 세계를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발굴된 개념들을 다시 사용하여 내 작업을 더욱 삐걱거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결국 삶의 감각을 변화시키고 확장하게 하는 힘으로서, 개념의 바깥을 지각(각성)시키고자 함이다.
나는 내 작업이 일종의 불화를 촉발-촉진하기를 바란다. 이 불화는 작업의 내적 불화에서부터 작업이 끼치는 외적인 불화까지 포괄하여 작업과 관객 사이는 물론 작업과 작가와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화를 말한다. 이 때 불화는 사람들 사이가 나빠지는 감정적 대립이나 적대시하는 반목의 유형이 아니라, 동일화되지 않는 이질감의 경험이면서 힘의 밀림과 당김으로, 준비되지 못한 감성의 마찰을 견뎌야 하는 그런 저항과 불편함 일 수 있다.
우리의 사유와 지각이 달라지고 새롭게 배치되는 타자적 지점을 향해 고정된 정체성의 인식에 교란을 주어 우리가 "누구인지"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꿈꾸는 체험을 관객에 의해/더불어 창출하고자 한다.
또한, 내 작업에는 사회 비판적 관심(반영)이나 정치적 내용이나 현실이 담길 수 있는 내부가 없다. 바깥 뿐 인 내 작업은 그 자체의 작동 모습과 외부로 작용하는 어떤 감응이나 마찰을 유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작업이 시대와 세상에 대한 꿈이고 반응일 것이고, 그것이 내 작업의 정치적 모습이거나 존재 이유 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내가 이러한 작업을 한다는 삶 자체가 이미 정치적 선택 행위인 것이며 반/사회적 활동이며 내 삶의 흥미를 잉태하는 사후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마치, 그레고리 베이트슨(문화 인류학)이 말했듯; 모든 생명체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바로 그 생명체의 생존 “이유”라는 것, 처럼.
그렇다면, 나에게서 항상 순환하는 시간의 시대착오적 “반복“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 반복이란 대체 어떤 것/의미 인가?
흔히, 모든 반복에는 차이가 나게 마련이고, 따라서 모든 반복은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흔히 말하다.
말하자면 나는 반복을 통해서 작업을 하고 작업을 통해서 반복한다. 그렇게 내 작업은 반복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 반복은 무엇을, 무슨 차이를 생성하는가?
이미 기원전 500년경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는 흐르는 냇물에 다리를 담그고 말하길, 내 다리는 한 번도 같은 물에 담겨있었던 적이 없다, 라고 함으로써 만물은 돌고 돈다고 보았다. 엄밀히 말해, 하늘 아래 무엇이 되었건 정말 하나같이 똑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니어도,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같다”라는 말로 개념화 되고 남는 엄밀한 “자연” 현상이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내가 말하는 반복 속의 “차이”(다름)란 이런 미세한 자연적 측면을 확대/생산하려는 입장이 아니다. 내가 만나는 반복 속의 “차이”란, 베이트슨의 말처럼, 생명과 같은 “자기 이유”가 되겠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기 존재 이유. 곧 자기 반복의 이유. 자기 이유를 만드는 반복행위. 목적이 없는 반복, 도리어 이유만을 생산하는 목적 없는 끝없는 반복.
내 작업에서 시대착오적 반복이란 “그때그때(언제나 지금)” (자기 이유를 생성하는) 그 모습 자체가 이유가 되는 스스로의 차이 짖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 각자 매 순간 자기 생성의 이유가 스스로의 차이로 드러나게 되는, 또한 스스로의 차이가 자기 생성의 이유가 되는 상호적 수행에 내 맡긴다.
내 작업을 가로지르는 개념들의 창출
다음 3가지 개념들의 발견은, 결국 내 작업의 형식적 특성들이 되는 것이기도 하면서, 가만 보면, 내 작업을 구축하고 이런 작업들을 유지하는 유머러스한 감응들을 뒤늦게 산출하는 내재적 사후원인이 아닐 수 없다.
< shadowless / artless / mindless> ;
두께가 없는 "표면" 뿐인 "creeping pieces"들. 벽은 물론 바닥에의 설치까지도 두께나 높이가 거의 없거나 무시되는 그런 설치물들, 미술품들이 지니는 견고성이나 유일성 따위의 고정된 가치 개념들을 이미 여과해버린, 그리고 그런 것들이 지닐 수 없는 일회적 신체성, 마치 귀신처럼 조각적 실체가 없는, 즉 고정적일 수 없는 작업의 (예술적) 작동은 미적 오브제 자체가 발산하거나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때그때” 창의적 접속들과 그 감응들이 빚어내는 "마당"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는 "temporality"라는 "인연 시스템"이 차이(조건)지우는 것만을 누리거나 그렇게 열어 놓을 수밖에 없다는 처지.
능동적 나레이티브나 의지가 배제된, "익명적 개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예술의지. 나의 주체를 굴절하고 변용하면서 얼마든지 다른 것이 되어가는 감각들을 촉발한다. 개념들의 저편, 또는 비개념적 발상/발동들. 사회적 잇슈와 통념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이질적 사고 형태들의 잠재력을 실험하기. 자기 주체적 시각을 거스르는 타자적 감각들과의 조우를 꿈꾸는 꿍꿍이. 나의 작업은 흔히, 그 의도나 개념의 통제를 벗어나 내 의식으로 지배되지 않는 어떤 새로운 의도-계기를 잉태하는 것으로 뒤집어져서 나타나곤 한다. 작업의 근거를 배반하는 작업의 됨됨이들.
내 작업의 또 다른 키워드들
이현령/비현령
동충/하초
여기/저기 아무데나. 마치 —처럼, meta---, ana---, para---, para-art, para-site, para-logy,
level-scape/level-mind, level-game/level-logy, de-veloping/en-veloping,
작가 : 홍명섭 202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