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새 (@das_sae__)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을 뜬 나는 촛불의 빛 하나에 의지한 채 주위를 살폈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화학약품 냄새가 익숙하게 코를 파고들었다. 텁텁한 공기가 몸속으로 들어오자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나는 작게 콜록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라더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가서 가스가 없다는 걸 확인했는데 어째서 다시 돌아온 거야?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지끈거리기 시작할 때쯤 옆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자꾸 무모한 일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상은 위험하다고 누누이 말했는데도 말이죠. 익숙한 지저회 어른의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자 꼿꼿한 자세로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과 마주쳤다. 꿰뚫어 보는 듯한 주황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지저회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지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이는 물론 지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꺼리는 듯했다. 지하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왜 그렇게까지 지상에 가는 것을 막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심하게 제지하는 어른들을 보며 호기심만 잔뜩 품게 되었을 뿐이었다.
어른들 말로는 가스가 퍼진지 꽤 오래되었다고 했다. 지상으로 올라가 행방불명 되었다는 이들은 어쩌면, 사실 지상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죽든 살든 지상에 한 번쯤은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답답한 지하 생활을 견뎌냈다. 그리고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가서 두 눈으로 멀쩡한 것을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다시 지하에, 그것도 익숙한 침대에서 눈을 뜬 걸까. 정말로 모든 게 꿈이었던 걸까.
수현은 깊은 고뇌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비웃듯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나요? 지하 1층 문앞에서 하마터면 가스에 중독되어 괴물이 될 뻔했다는 것을요. 도무지 믿기 힘든 말이었다.
저는, 저는 분명히 나갔어요. 그리고 라더와 함께 봤어요. 지상의 공기가 깨끗한 것을. 평화로운 마을을... 나는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멈추었다. 수현의 뒤로 나타난 또 다른 지저회의 어른, 그리고 그 옆에 멀쩡하게 서 있는 라더. 그래, 라더라면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을 거야. 반가운 마음에 다가섰지만 라더는 어째서인지 뒤로 물러났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고 말았다. 어라, 이게 아닌데. 라더는 분명...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까먹어 버린 채 입만 벙긋대는 나에게 수현이 말했다. 보다시피 라더 군은 잠뜰 양이 발견해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답니다.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은 수현이 라더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상으로 올라가려고 했던 일이 없던 일이 되진 않겠죠.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다시 표정을 굳힌 수현은 차갑고 고요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저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수현은 며칠 전 그날도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유는 어린 아이들이 꿈꾸는 치기 어린 환상일 뿐입니다. 헛된 꿈을 안고 떠나는 이들에게는 엄중한 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날도 지하의 어린이들을 한데 모아놓고 수현은 지상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수현의 말을 들으며 어린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대부분 수긍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수현은 아이들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끌어올려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하필 그때 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심드렁한 얼굴로 들은 체 만 체하며 신경은 딴 데 팔려있던 나를 발견한 수현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 듣고 있습니까?
선명한 목소리가 회상 속을 헤엄치던 나를 현실로 이끌었다. 수현은 아까보다 한층 누그러진, 그러나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흘러가듯 말했다. 당신은 현실에 집중할 필요가 있겠군요. 수현은 그만 휴식을 취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나는 침대에 늘어진 채 정말 꿈일지도 모르는 지상의 평화로움을 다시 떠올렸다. 그게 정말로 꿈이었다면, 이번엔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떠들썩하던 지하에 고요함이 찾아오고 촛불이 조용히 일렁일 때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하 마을을 벗어나 두꺼운 철문을 통과해 수로로 향하자 서늘한 한기가 나를 덮쳐왔다. 비릿한 물내음과 화학약품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끈을 한 번 더 동여맨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마침내 도달한 지하 1층. 눈을 가리고 있던 끈을 풀어내자 지하 깊숙한 곳에 비해 밝은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하 2층, 3층과 달리 조금이지만 따뜻한 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은 나에게 흑백으로만 보이던 세상이 다채로워질 거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또 나가게?
그때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 서 있는 형체를 자세히 보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모를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어둠 속 목소리의 근원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긴장을 풀라는 말과 함께 라더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라더가 움직이는 대로 그의 얼굴에 드리운 빛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며 일렁였다. 꿈에서 봤던 것과 다른 라더의 모습에 이질감이 느껴져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물웅덩이를 가로지르며 찰박거리는 소리가 지하 1층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여기 있는 게 나을 텐데 왜 굳이 나가려는 거야? 지금까지 여기서 잘만 살아왔잖아. 빛이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내 미래는 내가 선택해. 설령 지상에 유독가스가 있다고 해도 난 이 지하를 벗어날 거야. 난 이미 결정을 내렸고 너는 날 막을 수 없어. 내 말에 라더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민하듯 이마를 짚었다. 난 모르겠다. 분명히 말렸어. 라더는 망설임 없이 지하 쪽으로 멀어졌다. 나는 라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수로 천장 개방 장치를 내렸다.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타고 나는 마침내 지상에 닿을 수 있었다.
열심히 물을 가로질러 흙을 밟고 서자 어떤 모양일지 너무나도 궁금했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상은 내가 꿈꿔왔던 것과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잿빛 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황폐해진 땅을 눈에 담은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지저회 어른들이 말하길 지상의 유독가스는 눈을 통해 감염된다고 했다. 어라, 이게 아닌데…
현실인지 허상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수현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를 서늘한 기운을 품고 다니며 늘 차분한 모습만 보여주던 사람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아연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차올랐고 작게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폐부를 꽉꽉 채우는 텁텁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차가운 자갈 바닥 위에서 눈을 감았다. 단지 자유를... 바랐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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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X월 X일
지상에는 여전히 유독가스가 퍼져있습니다. 지저회의 어른으로서 그런 위험천만한 곳에 가려는 아이들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렸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은 특별관리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하루종일 아이들만을 지켜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엔 방치했지만 돌아오는 아이들이 없었고 변이 괴물들까지 나타났습니다.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교육해보기도 했지만 강한 제지가 오히려 반발심을 자극했습니다. 결국… 한 아이를 잃게 되었습니다.
눈앞에서 누군가를 잃게 되는 것은 저에게도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그 기억은 어딘가에 맺힌 채 나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밤마다 불쑥 튀어나와 쉽게 잠들 수 없도록 괴로움을 끌어내곤 합니다.
이제는 정말로 막아야만 합니다.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이 벌어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