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미 (https://www.postype.com/profile/@952hti)
*욕 주의
*공식 아닙니다
・ ・ ・
자, 줄을 서세요.
이번 역은 '반전 스테이션'입니다.
음? '타임 스테이션' 과 비슷한 것 같다고요?
하하,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애초에 이 스테이션조차 거울의 힘을 빌린 거랍니다.
물론, 거울은 본디 반전을 비추니 이 스테이션은 시간에 간섭하지 않아요.
단지 세계관의 반전을 비출 뿐이죠.
'반전 스테이션'은 세계관을 반전시킵니다.
어떤 세계관을 어떻게 반전시킬지도 모두 설정할 수 있어요.
워 워, 진정하시고. 놀라긴 일러요.
그리고 그것을 보는 것뿐 아니라 주인공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간섭할 수도 있답니다.
자, 모두 자신이 누구인지는 이름 빼고 전부 잊으셨지만 마음껏 즐기길 바라요.
…역시 아무도 먼저 나서지 않으시네요. 탈취한 칸이라 그런가…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아 줘서 섭섭하달까.
흠…진짜 아무도 없으세요? 진짜로?
어! 거기 맨 뒤에 검은 정장 입으신 분! 어, 그리고 노란 롱코트 입으신 분! 처음으로 손 드셨네요. 같이 체험하는 거세요? 맞다고요? 알겠습니다. 먼저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아, '밤을 보는 눈' 세계관이요? 영혼은 태어난 세계관을 알아본다더니…아, 아니... 크으~! 명작이죠!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어떤 반전을 원하시나요? 흠…선악 반전이요? 선역 악역 반전 말씀하시는 거죠? 누가 악역 아니랄까 봐… 네? 아, 아니에요! 하하…그냥 옛 기억이 떠올라서요.
일부 개연성을 위해 완벽한 반전은 되지 않아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두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공룡…각별이요? 네 알겠습니다!
안전 문제요? 에이, 걱정 마세요! 이 스테이션 운영하면서 안전 문제로 신고가 들어온 적은 없으니까! 그럼,
"저, 반전 세계의 마스터. 덕개가 안전히 거울 속으로 모시겠습니다."
・ ・ ・
"아빠아빠!!!! 나 왔어요!!"
"어 그래 우리 동희 왔어~!!!"
언제 봐도 귀여운 아들이다, 하고 공룡은 동희를 안았다. 허리께까지 오는 조그마한 아들이 순진무구한 맑은 눈으로 공룡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 굉장히 아팠지만, 자랑스러운 동생 각별이 집도한 수술 덕에 무사히 완쾌했다.
아직도 헤슥한 얼굴을 띄고 있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그래도 완쾌해서 다행이다.
저 멀리 노란 일상복을 입은 장발의 남자가 걸어왔다.
긴 검정색 포니테일에 두꺼운 눈썹. 공룡과 한 배에서 나왔다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닮지 않은 형제, 각별이었다.
"여어-"
"뭐냐 너?"
"아니 뭐, 오늘은 동희 유치원 졸업식이니까. 연차쓰고 왔지. 수술은 급하게 처리하고 왔어. 소독약 냄새 때문에 머리 아프니까 동희 좀 빌릴게?"
"뭔 소리야, 동희는 내 아들인데."
"에이, 좀 빌려 씁시다?"
"삼촌, 아빠 그만…"
유치한 대화에서 가장 어른스러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동희였다.
"근데 졸업식만 보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왜 왔어?"
"역시 형이야. 당연히…"
잠깐 공룡이 방심한 사이, 각별이 동희를 번쩍 안아들고 차로 뛰어갔다.
"ㅈ, 잠깐! 너 뭐 하는 거야!"
"당연히 동희 납치하는 거지!"
"설마…! 우리 천재만재귀염뽀짝말랑콩떡이 동희를 데려다가 소개팅을 시키려는 것인가…!"
"후후, 정답이다 연금술사!"
"동희야! 빨리 탈출해!!!"
"…아빠!"
동희가 각별의 품에서 공룡에게 손을 흔들었다.
"삼촌이 아까 전화로 소고기 사준댔어요, 빨리 와요!"
"뭐…? 너 내 동생 맞아?"
"착각 ㄴㄴ. 동희 사주는데 같이 사 주는 거지. 10초 안에 안 오면 그냥 간다."
"아니 감히 이 하늘같고 땅과같은 형한테 동희를 가지고 협박을-"
"10."
"ㅈ, 잠깐만!!!"
공룡은 머리에 걸쳐져 있는 모자를 눌러쓰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뛰어갔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가족의 표본이었다.
・ ・ ・
"삼촌, 감사합니다."
"고맙다 동생아."
"뭘. 앞으로도 자주 사 줄게. 동희, 거의 1년 동안 투병하고 재활치료 하느라 고생해서 병원 밥도 거의 안 먹었는데. 그러니까 앞으로 아프면 안 돼."
"걱정 마. 우리 동희는, 어? 손끝에 물도 못 묻히게 할 거고, 다른 애들만큼, 아니 다른 애들보다 더 대우해주면서 살 거거든!
""그래그래. 형은 좋은 아빠니까."
각별의 입에서 나온 '좋은 아빠'라는 단어가 공룡의 마음에 기분 좋게 퍼졌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켠에서는 아까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이 얹힌 듯 불편함이 피어났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아마 동희의 쾌차를 어느 하나도 돕지 못했다는 자책감이리라.
"각별아."
"? 왜?"
"고마워 진짜."
"갑자기 오글거리게 왜 그래?"
각별이 소름 돋는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니 그냥 진심으로."
"그치, 형은 나한테 항상 고마워해야 하지. 그걸 돈으로 환산하면 벌써 일, 십, 백, 천, 만…"
"으, 돈각별."
손을 꼽아가며 1699억 2423만 1010원이라는 계산을 마친 각별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동희 장난감이나 사러 갈까?"
"또?! 너 오늘 지출 너무 센 거 아니야?!"
"맞아요, 삼촌. 소고기도 비싼데 장난감까지는 괜찮아요. 소고기만으로도 너무 감사해요."
"형, 나 의사야."
"맞다, 그랬지."
공룡은 이내 일말의 죄책감도 남기지 않고 장난감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우왓!! 동희야, 이거 어때 이거!!"
"유명 유튜버 황수현이 강력 추천하는 공주놀이 세트…? 이게 왜요…?"
"삼촌 올 때마다 꾸며줄 수 있잖아!!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헛소리. 아빠 건 집어치우고 이건 어때?"
"각별이와 함께하는 컴퓨터 모형 조립 세트, C언어 마스터 사과의 학습만화가 들어있어요…??"
"엄청나지? 게다가 별각사리 관절인형도 들어있대!"
"흐음…"
동희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고민했다. 동희에게 추천할 또다른 장난감을 찾아 고개를 돌리던 공룡은 뭔가를 발견했다.그건 작은 비비탄 총이었다. 모델은 리볼버인가?그저 장난감 비비탄 총일 뿐이지만 옆면에 새겨진 신비로운 무늬가 공룡을 이끌었다.공룡이 멍한 표정으로 포장재를 뜯으려는 찰나,
"형!"
"끄와악!!"
각별이 부르는 소리가 공룡을 몽롱한 기분에서 빠져나오게 만들었다. 공룡은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뜯겨나간 포장재 끝부분을 쳐다보았다. 이런, 어른이 장난감에 현혹되다니, 안 되겠는걸.
"각별아."
"ㅇ?"
"나 이거 사줘."
"드디어 미치셨어요 휴먼?"
"사줄때까지 소리지를거야."
"형이 애야? 서른 살 나이 거꾸로 먹었어? 됐어, 돌려놓고 와."
"그럴 줄 알았어."
공룡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각별이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 내 건 내가 살게."
"?"
각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공룡을 쳐다보다가 다시 동희에게 줄 장난감을 고르러 떠났다.공룡은 손 안에 남겨진 비비탄 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계산했다.
문득 기분이 허탈해졌다. 하, 내가 뭔 짓을 한 거지.이 조그만 비비탄 총 하나에 무려 10000원을 썼다.어린아이 때도 가지고 놀지 않던 비비탄 총을.
영수증도 필요 없다고 해 버려서 환불할 수도 없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는 와중에 각별이 가득 찬 장바구니 두 개를 든 채로 나왔다.
"야 돈자랑이냐? 저걸 어떻게 다 들고 가!"
"걱정 마. 반은 내 거야. 재밌어 보이는 게 많더라고."
"애는 넌데?"
"내돈내산이잖아."
잠시 끊긴 대화. 반박할 수가 없다. 공룡은 총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넣고 아들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동희는?"
"저기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먹고 있어."
"알레르기는?"
"자기가 먼저 체크하던데? 새우, 대두, 오이-"
쾅!!!!
큰 소리와 함께 매장에 불이 나갔다.각별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 '우연히도' 전부 배터리가 거의 없었나 보다.플래시는 하나 둘 꺼져가더니 결국 전부 꺼져버렸다.
"괜찮겠지…괜찮을 거야."
"그래, 형. 곧 정전이 끝날 거야."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되뇌어도 어둠보다 새까만 불안이 뇌리 깊숙한 곳부터 공룡을 덮치고 있었다.그때 공룡의 뇌리에 스쳐지나가는 이름,
정동희. 동희를 놓고 왔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희.
지금쯤 아빠을 찾고 있을 텐데…지금 어린아이, 그중에서도 아빠를 부르는 남자아이의 목소리 중에서는 동희의 목소리가 없었다.
혹시 어떻게 되지는 않았을까? 공룡은 재빨리 뛰쳐나갔다. 아까 50미터쯤 떨어져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있었으니까…공룡은 아껴두었던 배터리로 재빨리 플래시를 켜서 주위를 휘휘 비춰보았다. 깜박거리는 빛이 오른쪽의 아이스크림 가게를…정확히 말하면, 셔터가 내려간 아이스크림 가게를 비추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방이 트여 있던 가게의 통로가 전부 막혔다.
플래시가 픽 꺼지고, 공룡은 잇새로 새어나오는 욕설을 억지로 삼켜냈다. 우선 책망보다는 동희의 안전이 중요했다. 공룡은 아무 사람이나 붙들고 물었다.
"저기요!! 저 안에 사람 있어요?"
"네? 아...아이스크림 가게요?"
"네. 저기, 셔터가 내려간 것 같은데..."
"제가 저기 비상구에서 나왔어요. 안에 아무 사람도 없어요."
아, 다행이다. 최소한 가게 안에는 없다는 뜻이겠지.
안심하던 찰나 불안이 공룡의 뇌리를 다시금 스쳐갔다.
동희가 왜 아직도 날 찾지 않지?
공룡은 고개를 돌리던 사람의 팔을 다시 한 번 낚아챘다.
"그...혹시 남자아이 어디 있어요? 일곱 살인데, 키는 제 허리만하고, 회색 스웨터를 입었는데-"
"남자아이는 없었는데요?"
뇌리에 욕지거리가 있는 대로 떠올랐다. 동희의 폐소공포증이 떠올랐다. 갑자기 좁고 어두운 곳에 갇힌 것 때문에 패닉이 와서 따라나가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왜 잊고 있었지?
공룡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정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비상구! 비상구는 어딨어요?!"
"비상구는 저기 가게 옆에-"
공룡은 순식간에 인파 사이를 비집고 비상구로 뛰쳐나갔다.
금방 동희만 빼내오면 된다. 동희만-
철컥.
차갑고도 매서운 소리가 문손잡이에서 흘러나왔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뭐야...!"
철컥철컥.
다급해진 마음에 문고리를 계속 돌려 봐도 차가운 회색 철문은 건재했다.
"젠장...!"
공룡은 문을 걷어차 봤지만 다리만 아려올 뿐이었다. 공룡은 아까 전에 사람이 나왔다던 비상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마치 그러면 어둠이 걷힐 듯, 밤을 가르는 눈빛으로.
그러자 희미하게, 문고리와 셔터를 뒤덮고 있는 검은 덩어리가 보였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텅 빈 구덩이가 대신 자리잡고 있었고, 턱이 떨어져 하회탈을 연상시켰다. 누런 이가 제 자리를 찾다가 공룡을 향해 기분 나쁘게 웃어 보였다. 그 기괴한 웃음소리가 공룡의 마음을 저 멀리 허공으로 떨어트렸다.
"내 아들...동희를 어떻게 한 거야...!"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것이 정전을 일으켰다는 것을, 사람들의 핸드폰 배터리를 닳게 했다는 것을, 아이스크림 가게의 셔터를 내렸다는 것을, 동희를 가게에 얽매고 있다는 것을, 공룡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동희를 구해내기 위해선 저것을 없애야 했다.
공룡은 그것을 문손잡이에서 떼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공룡을 농락하듯 긴 팔을 뻗어 공룡에게 휘둘렀다.
그 새까맣고 비쩍 마른 팔이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뭔가가 떠올랐다.
-"동희야, 동희야...! 눈 좀 떠봐..."
"형, 이건...미안해."
"...그때 네가 동희를 떼어놓지만 않았어도...!"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나가."
"미안해, 형. 진짜로-"
"나가!! 꺼져!!! 보기 싫어!!!!"-
각별, 그리고 공룡.
동희의 스웨터 끝의 하얗고 작은 손, 그리고 얼굴 위에 덮인, 소름 끼치도록 창백한 순백색의 천.
모든 것이 악마의 농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장면이 너무 선명하고 명확했기에,
확장된 눈의 안쪽에서 새어 나온 두려움이 공룡의 뺨을 타고 절망이 되어 한 줄기 흘러내렸다.
한 줄기는 곧 무수히 많은 절망을 이끌어내 공룡을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것이 웃음을 터뜨리며 공룡의 절망을 먹어치워 몸집을 불려 댔다.
"...젠장."
폭식을 하며 공룡까지 잡아먹으려 들던 그것이 갑자기 음식물이 목에 걸린 듯 이상한 소리를 냈다.
곧이어 무언가를 토해 낸 그것이 잔뜩 성난 듯 끼륵거렸다.
밝은 노란색을 띄고 있는 그것은 스스로 진동하며 이물질을 털어 내더니 공룡의 허리춤에 스며들었다.
그 작은 희망은 절망을 딛고 일어난 공룡의 허리춤, 그 속에 장전되어 있는 총의 탄창이 되었다.
"세상엔 너보다 더 심한 놈들이 많아."
끼르르르륵!!!
성난 그것이 비쩍 곯은 몸을 부풀리며 공룡을 위협했지만, 공룡은 밝은 녹빛으로 빛나는 눈을 꼼짝하지 않았다.
"납치에, 감금. 한국에서만 하루에 두 번도 넘게 일어날걸."
끼에에에엑!!!!
지옥의 괴성을 터뜨리며 공룡의 앞길에 독을 내뿜었지만 그것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그게 좋은 일, 정당한 일은 아니라는 건 상식이잖아."
끼르륵...끼륵...
"상식 좀 지키면서 살자."
타앙-!
새까만 어둠을 녹빛의 총소리가 갈라버렸다.
대중이 웅성댔지만 공룡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의 본체로 보이는 문고리를 향해 빛을 쏘아댔다.
한 발, 한 발 맞출 때마다 괴생명체는 줄어들었고 마지막 총알을 썼을 때는 새까만 재가 되어 공기중에 바스라졌다.
그리고 공룡은 문고리를 잡았다.
"...형...?"
오른쪽으로 손목을 꺾었다.
"형, 이게 무슨 일-"
밀었다.
찰칵.
부드러운 끼익 소리와 함께 그토록 굳건하던 철문이 열렸다.
어느샌가부터 입술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 순간 천장에 조명등이 깜박거리다 켜졌고, 모두가 복장이 전부 망가져버린 한 삼십 대 남자에게 주목했다.
"각별아."
"..."
"문, 열렸다."
그는 울고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피부로 눈물이 쉼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한껏 지친 표정으로 아직 어두운 아이스크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영원할 듯한 침묵이 3분 정도 지난 후,
남자가 어린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나왔다.
그것이 해광시 최고의 퇴마사, 공룡의 시작이었다.
・ ・ ・
"흠, 그러니까 어디가 문제라고요?"
"하수구요. 깔끔하게 청소를 했는데도 썩은 내가 올라오고, 가끔씩 낄낄대는 웃음소리도 들려와요."
"그러면 스케줄 조정을 해 봅시다. 우선 평일에는 아침 8시부터 2시 반까지 가능해요. 주말에는...오후 다섯 시쯤부터 가능한데, 좀 많이 늦을 수도 있어요."
"다음 주 수요일 가능할까요, 그럼?"
"네. 의뢰비는 혹시 어떻게..."
"한...선금은 10만 원이면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수요일에 뵈어요."
딸랑-
공룡은 문득 물끄러미 사무소를 둘러보았다.
그날에 동희를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데리고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받은 모범시민상과 그 이후 나라에서도 인정한 퇴마 기술로 인해 받은 상장과 표창장들.
모던한 디자인의 블랙 앤 화이트 톤 가구들.
창밖 너머로 보이는, 공룡 퇴마사무소라 적힌 간판.
이 모든 것이 그날 이후로 공룡이 쌓아올린 것이다.
그날 이후로 세상에 귀신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이 퇴마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공룡은 정식으로 퇴마 사무소를 차리게 되었다.
퇴마 일이 제법 잘 벌려서 직장을 그만두고 퇴마를 본업으로 하고 있다. 물론 그때만큼 그것들이 잘 보이진 않지만 말이다.
마트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동희는...
"아빠!"
"어 그래 우리 동희~ 오늘 있던 받아쓰기 시험은 어땠어?"
"백 점! 백 점 맞아왔다요~!"
"진짜?! 하긴 매번 백점이긴 한데...우리 동희, 천재 아니야?!"
매우매우 건강하게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 주었다.
그때 일은 기억에 없는 모양이라 오히려 다행이라 해야 할지.
공룡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동희를 꼭 안았다.
"오늘은 그럼 뭐 하고 놀까?"
"아빠, 스케줄 있잖아요."
"스케줄? 갈아치우면 되지~!"
"아빠, 장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건 고객과의 신뢰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요? 빨리 일해, 일!"
"그치만 아빠는 동희가 더 소중한걸~"
"나도 알죠! 그래도 아빠가 일을 끝내고 노는 게 내 마음에 더 편하잖아요! 아빠, 난 2층에서 책 읽고 있을게요!"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간 동희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매정하기도 하지."
"매정하다니. 똑 부러지는 거잖아."
"왜 왔냐?"
"근무 끝나서."
각별과는...여전하다.
여전히 각별은 바빴지만 그럼에도 일주일에 세 번은 찾아온다.
"야, 왔으면 업무 도와줘. 파일 정리만 하면 돼는데."
"내가 퇴마사도 아니고, 의뢰 파일을 어떻게 정리해?"
"딱 봐도 아닌 거, 애매한 거. 이 정도는 나눌 수 있지?"
"그럼 쉽지. 자, 정리 끝."
"?"
"내 생각엔 딱 봐도 다 아니거든?"
"아니, 딱 봐도 아닌 거랑 아닌 게 있거든?"
각별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결국 서류를 잡았다.
팔락, 팔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 각별이 입을 열었다.
"형. 진짜 퇴마 일…괜찮아?"
"응? 당연하지~! 벌이도 좋고, 쉬는 시간도 보장되지. 직장 중에 최고야. 왜?"
"…아냐."
"설마…야, 네가 아무리 이과라 해도 형 직업을 사기라고 믿는 건 아니지? 형이 구라를 깔 것 같냐?"
"완전."
"신뢰도 뭐냐?"
공룡이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역시나, 너도 날 믿지 않는구나.
각별이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난 그것들을 믿지 않아.
형을 믿는 거지."
공룡은 생각지도 못한 답에 놀라 각별을 쳐다보았다. 시선 끝에 닿은 노란 눈은 공룡을 회피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눈가 위에 샛노란 별이 반짝 빛났다. 저게 각별이 맞나?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공룡은 연민의 감정을 담아 진심으로 각별을 걱정했다.
"야…부적이라도 그려 줄까?"
각별은 질색하며 내뱉었다.
"믿어 줘도 지랄이야."
"음, 내 동생 맞구나. 그나저나 너 애 앞에서 욕을-"
각별의 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시끄러운 알람이 제 주인의 주머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어, 다시 가봐야겠다."
"그래그래~잘 가~ 아, 맞다. 동희 곧 학원 시간인데, 네가 가는 길에 버스 오는 데까지 데려다 줄래?"
"그러지 뭐. 동희, 삼촌이랑 같이 갈래?"
"네! 다녀오겠습니다, 아빠!"
짤랑짤랑.
새하얀 수술 가운이 휘날리며 그의 살에 밴 소독약 냄새를 퍼트렸다. 그를 따르는 따스한 햇살의 향이 공룡의 감정을 자극했다. 다 컸구나, 아직 두 자리수 나이도 되지 않았는데. 이러다간 십 년만 기다려도 독립하겠다고 하겠는걸.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은 의자에 앉자 문 앞에서 머뭇대는 실루엣이 하나 보였다.
들어와라, 들어와라.
실루엣이 문고리를 잡고,
짤랑짤랑.
맑은 풍경소리가 울려퍼진다.
"저…여기 공룡 퇴마사무소…맞나요?"
오늘도, 새로운 의뢰인을 맞아들인다.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 ・ ・
"후…"
작은 한숨이 마스크 너머로 새어나왔다.
병실 여기저기에 꿈틀대는 검은 덩어리들과 제법 형체를 잡고 있는, 사람과도 닮은 무언가들. 그리고 보기도 싫은 거대한, 한없이 거대한… 압도적인 존재들.
그들이 환자들의 목을 조르고, 몸을 휘감는다.
각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두통을 가라앉혔다.
그들이 조르는 강도는 줄어들 기세 없이 점점 세지고,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그것이 언젠가 들었던 것처럼 웃어댔다.
키득, 키득키득.
키득키득키득키득.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난 이 사람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단 말이야…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으니 손끝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어, 사탕이다.
그 순간 그 작은 설탕 덩어리가 마치 구원자처럼 느껴졌고-
마치 당연한 서순인 듯, 각별은 미친 듯이 포장을 뜯고, 그것을 입에 털어넣었다.
제발, 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보이지라도 말아 줘.
눈을 뜨기가 무서웠다.
그것들이 각별에게 엉겨붙을까 두려웠다.
웃음소리가 멀어져 가고, 눈을 떴을 땐 이미 그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그것이 가장 세게 목을 졸랐던 환자가 발작을 일으켰다.
"심정지입니다!"
"CPR! CPR!"
"환자 상태가 심각합니다! 수술 들어가야-각별님?"
들것에 실려나가는 환자와 함께 달려나가던 남자 간호사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각별의 어깨를 두드렸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렸다.
각별은 울고 있었다.
동시에 웃고 있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안도와 환자를 구할 수 있었다는 죄책감이 한 마음에 충돌했다.
마치 동희를 선택한 그날처럼.
・ ・ ・
왠지 모르게 의뢰 수가 줄었다.
물론, 퇴마를 시작한 초반보다는 월등히 많은 의뢰였지만 의뢰가 많이 들어오는 요 근래에 비하면 확 줄어들었다.
"흐음...왜 줄었지?"
공룡은 곰곰히 고민했다.
퇴마 일은 돈이 잘 되지만 아무래도 신뢰의 영향을 받는 직업이다 보니, 공룡은 혹시 유언비어라도 퍼졌나 싶어 밖으로 나갔다.
이상하게도 시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동희가 다니는 해광초등학교 앞을 지날 무렵, 유난히 귀에 들어오는 대화가 공룡을 유혹했다.
"그 소식 들었어? 우리 시에 최고의 퇴마사가 들어왔대!"
"진짜? 잠깐, 최고는 공룡 퇴마사님이잖아!"
"아니, 진짜 신동이라니까? 우리만큼 어리다는데? 아홉 살이었던가?"
"아홉 살?!! 우리 정도 어린애가 어른도 없이 건물 하나에 혼자 살고 있단 말이야? 대단하다~! 그래도 공룡 퇴마사님이 짱이거든~!"
아홉 살의 신동 퇴마사라고? 새로운 퇴마사의 등장인가? 게다가 혼자 살아?
공룡은 어쩐지 마음이 쓰여 발걸음을 돌렸다. 목소리에 걸맞게 어린 남자아이 두 명이 수다를 떨며 하교하고 있었다. 동희 정도 나이대일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꼬마야."
"뭐에요? 앗, 선생님들이 모르는 아저씨 따라가지 말랬는데!"
"아, 그게, 아저씨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만!"
두 남자아이 중 밀빛 머리를 가진 아이가 공룡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ㄱ,ㄱ, 공룡 퇴마사님 아니세요?!!"
"어? 어떻게...알아봤니?"
"완전 팬이에요! 저도 퇴마사님처럼 퇴마사가 되고 싶어요! 저, 예전에 그 마트에 있었던 아이 중 한 명이거든요! 와, 그날을 계기로 계속 활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뵙게 되다니! 아, 혹시 사인 한 번만 가능할까요?"
"그, 그래. 혹시 이름이 뭘까?"
순식간에 말을 쏟아내던 아이는 눈에 선망과 존경을 담고 공룡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와, 나 인기 대단하네.
그동안 일만 죽어라 하고 세간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래도 평판이 꽤 좋은가 보다. 이렇게 어린아이도 팬이라고 하는 걸 보면.
"제 이름은 덕개에요! 얘는 수담이고요!"
"그래, 덕..개야. 혹시 몇 살이야?"
"아홉 살이에요! 어, 그런데...혹시 아까 대화 들으셨어요?"
공룡은 덕개의 주접으로 잠시 잊고 있던 방금 대화를 상기시켰다.
아무래도 그 아홉 살 퇴마사에 대해 알려면 맞다고 해야겠지...만 덕개는 왠지 모르게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옆의 수담도 긴장한 티를 내며 살짝 뒷걸음질쳤다. 대놓고 경쟁 퇴마사 얘기를 한 것 때문에 기분이 상했으리라 생각하는 걸까. 요즘엔 쓸데없이 조숙한 아이들이 많았다. 아홉 살에 독립을 한 아이가 있질 않나, 눈치를 보질 않나...
아이는 자고로 순수하고 활발하게 노는 게 가장 잘 어울리는데.
공룡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선 동희에게 그러는 것처럼 덕개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덕개가 감격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공룡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덕개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말 안 하길 잘한 건가. 뭐, 다른 데서 알아봐도 되니까.
"뭐 재밌는 얘기 하고 있었어?"
"아니에요! 그냥...그 소식 들으셨어요? 해광시에 새로운 퇴마사가 왔다는 소식."
"응, 들었어."
"아니 글쎄, 아홉 살 여자애래요! 부모님이랑 어른들이랑 떨어져서 혼자 산대요. 어, 그럼 밥은 어떻게 해 먹지? 아무튼 학교도 안 나온대요. 네가지가 없고 의뢰비가 좀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일처리는 확실하게 한다는데요?"
학교를 안 나간다고?
아홉 살에?
공룡은 여러모로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많았지만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언론이었다.
왜 아홉 살 여자애가 집에 어른도 없이 혼자 살면서 학교도 안 가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의문점을 안 가지는 거지?
아무래도 직접 봐야겠어.
...손님도 많이 빠졌는데, 경쟁 상대 확인도 할 겸.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전백승이라잖아? 라고 생각하던 공룡은 그 어린아이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뭐, 미안하게 됐네. 이 공룡의 밥줄을 건드리다니. 그래도 밥줄이 끊기면 고아원이든 어디든 들어가겠지. 중학생도 아니고 초등학교 저학년이 혼자 살다니, 안 될 일이야. 그럼그럼.
서른 살 넘은 남자가 아홉 살 상대로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밥줄은 밥줄이었다.
가서 밥도 해주고 반찬도 가져다주고 해야지.
"아무튼 고마워, 덕개야. 난 이만 가 볼게. 나중에 놀러 와. 아! 맞다, 내 명함 줄게."
"네에?! 진짜요? ㅅ,수담아, 내가 이거 받아도 되는 걸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나도 엄청 떨린다고!"
"ㅂ, ㅂㅂ받아도 돼요?"
"?당연하지 내가 주는 거잖아."
"우아!!! 감사합니다!!!!!!"
성격이 되게 밝네. 나중에 동희라도 소개시켜줄까? 아, 아니지. 동희랑 같은 학교니까 이미 알고 있으려나.
"수담아, 나 공룡 퇴마사님한테 사인 받았다! 이거 꿈 아니지?"
"..."
"수담아?"
"아니, 그냥 좀 졸려서..."
"너 또 발로란트 하다 잤지? 으유, 못 말린다니까!"
"아닌데..."
공룡은 둘의 대화를 뒤로하고 모르는 정보는 인터넷으로 찾아본 후 나온 주소로 걸어갔다.
호오, 검을 사용해 퇴마한다...베이거나 다치지는 않으려나? 아, 날이 무디려나?
이런저런 잡념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 지도 위에 떠 있는 자신의 좌표가 '잠뜰 퇴마사무소'의 좌표에 겹쳐졌다.
"..."
외롭진 않을까.
가끔씩, 아주 가끔씩.
동희도 손님도 없는 차가운 저녁.
공룡도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지금은 손님이 없는 것 같으니...들어가 볼까.
공룡은 카페에서 라떼와 초콜릿 케이크를 사고 2층의 퇴마사무소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걸음이 무거웠다.
한 걸음, 한 걸음.
귀신에 씌이기라도 한 걸까. 계단이 끝없이 높게 느껴졌다.
숨이 차오르고 더는 못 버티겠어 주저앉는데,
이 무슨 일인가, 고개를 드니 건물에는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였다.
"어라?"
이상하다. 분명 들어갔었는데. 망상을 너무 많이 한 건가?
공룡은 또 한 번 계단을 오르고서야 깨달았다.
뭔가에 씌였다고.
공룡은 이번에는 계단을 오르지 않고 맨 밑에 칸에서 정신을 집중했다.
분명, 기분 나쁜 기운이...느껴져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일반인이 된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서운 법이다.
보이는 바퀴벌레보다는 잡으려고 전기파리채를 들고 왔는데 사라진 바퀴벌레처럼.
그 법칙은 이번에도 잊지 않고 찾아왔다.
공포스럽다.
늘 보이던 것이 사라지고, 그 현상만 겪고 있으니 공포스럽다.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이봐요, 아저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의뢰하러 오셨나?"
어떤 맑은 목소리가 공룡의 정신을 붙들었다.
"뭐야. 아저씨, 뭔 잡귀를 붙이고 오면 어떡해요. 이것 때문에 의뢰하러 오신 건 아닌 것 같네요. 그럼 통화를 하셨을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요."
눈앞에 새빨간 한복을 입은 갈색 머리의 꼬마가 보였다.
허리를 넘어가는 긴 머리에 강인함이 담긴 눈빛. 그리고...
사가지 없는 말투. 음, 그 퇴마사가 확실하네. 이름은 잠뜰일까. 잠뜰 퇴마사무소니까 잠뜰이 맞겠지.
그 사이 꼬마, 아니 잠뜰은 은빛의 낡은 검을 꺼내들었다. 뭐야, 자기 몸만 하잖아. 저걸 어떻게 휘두른다는 거야.
잠뜰이 정신을 집중하자 검이 푸르게 빛났다. 마치 해광의 밤바다가 빛나는 것만 같은 광채였다.
그리고 그 검을...
공룡에게 겨누었다.
아니, 잠시만, 물론 내가 씌이거나 한 귀신을 썰려는 거겠지만, 그래도 이거 날이 꽤 날카로운데요? 혹시라도 썰리면 양복 값 내주나? 아니, 양복은 둘째치고 목이라도 잘리면?
검이 서서히 옆으로 움직이더니, 잠뜰이 춤을 추듯 검을 놀렸다. 때론 목을 썰려는 듯 가깝게, 때로는 저 멀리로. 좁은 계단참에서 벽에도, 계단에도, 공룡에게도, 본인에게도 칼날을 닿지 않게 하는 것이 가히 예술적이었다. 오, 화려한데.
검을 검집에 넣는 것으로 퇴마를 마무리한 잠뜰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손을 내밀었다. 뭐, 뭔데.
"...안 줘요?"
"뭘..?"
"와, 내 생애 이렇게 어이 없었던 적은 처음인데. 아니 아저씨! 퇴마를 받았으면 돈을 줘야 할 거 아니에요! 네? 꼬깃꼬깃한 천 원, 오천 원 말고 은행에서 갓 뽑은 빳빳한 만 원으로 주면 더 좋고요!"
이 무슨 병 주고 약 주고인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약 먹어보라고 하고 약이 잘 듣는지 확인하고 싶다며 뼈를 부러뜨리는 꼴이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사가지없네. 돈을 밝히고. 하긴, 꼬마가 이 정도 사무소 운영하는데 돈을 밝히는 게 당연...은 무슨! 뭔 애가 돈을 이렇게 밝혀? 보통 그 나이에는 돈보다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사탕이나 장난감을 더 좋아하지 않나?
공룡은 실소를 흘렸다.
"아, 나 오늘 돈 안 들고 나왔는데."
"뻥치지 마요! 지금 주머니가 지갑으로 불룩한데!"
돈 냄새는 또 기가 막히게 맡네. 하필 오늘 ATM에서 잔돈을 만 원으로 전부 바꿔온 날이었다.
공룡이 지갑을 꺼내자 잠뜰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지며 목소리까지 친절해졌다. 어린애가 자본주의를 이용하다니, 이 나라의 동심은 전부 뒤졌어.
"가격은 6만 원입니다*^^*~"
ㅇ, 육만 원? 생각보다 비싸지만 뭐,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공룡은 한껏 가벼워진 지갑에 손을 떨며 주머니에 다시 지갑을 집어넣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허리춤에 찼던 총이 툭 떨어졌다.
"어, 총 떨어졌-"
"잠깐만요."
키가 작은 잠뜰이 몸을 날래게 움직여 총을 집어들었다. 휘휘 총을 둘러본 잠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공룡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당신?! 퇴마사야?"
"어, 맞는데?"
"허, 참, 진짜, 아니...하!"
여러 가지 감탄사를 다양하게도 내뱉던 잠뜰은 아까보다도 날카로운 말투로 공룡을 대했다.
"당신, 퇴마사면서 그런 잡귀 하나 못 떨쳐낸 거야? 어이없네! 눈이 얼마나 어두운 거야?"
"나는 서른둘한테 반말하는 아홉 살이 더 어이없는데? 도덕을 얼마나 못 배운 거야?"
"그건 도덕상의 문제고, 이건 다르지! 와, 완전 사기꾼 아냐?"
"사기꾸운?!"
"그래, 사기꾼! 본인한테 붙은 하찮은 잡귀도 못 해치우면서 남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건데? 와, 이사온 지 이틀만에 사람이 전부 나한테 몰린 이유가 있었네!"
"응 아니야. 나 오늘도 스케줄 꽉 찼어."
"몇 명 왔는데?"
"열다섯 명 왔다!"
"훗, 겨우 열다섯으로 되겠어? 나는 열여섯 명 왔어!"
"나 빼면 똑같잖아!"
"그래도 한 명 더 온 건 사실이죠?"
"아, 그리고 나 퇴마받으러 온 거 아니야."
"그럼 뭐 하러 왔는데? 용건만 말하세요. 안 그래도 퇴마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바쁘니까."
"야, 너 밥은 먹고 다니냐?"
"밑에서 커피랑 케이크 먹는데?"
"야! 그러니까 키가 안 크지 이 꼬맹아!"
"꼬맹이?! 나 꼬맹이 아니거든?"
"됐고, 지금은 커피랑 케이크 줄 테니까 번호 찍어봐."
"에? 아저씨, 여자 번호는 함부로 따 가는 거 아니에요."
"뭔 소릴 하는 거야? 나 이미 아들까지 있거든! 반찬이랑 밥 좀 나눠 줄 테니까 전화하라는 거지! 하필 동희랑 나이 비슷해가지곤.. 핸드폰은 있을 거 아냐?"
"네. 있는데요? 근데 번호 주기는 싫은데. 제 전화번호 비싸거든요."
"얼만데?"
"만 원."
"미쳤네. 안 주고 말지. 야, 근데 아홉 살이 자취하니까 무섭진 않냐?"
"뭐, 힘들긴 한데 그럭저럭? 무섭진 않은데요. 여차하면 이 월광검이..."
"월광검이 지켜주냐?"
"아뇨? 이걸로 찌를 건데요? 어차피 전 어려서 촉법이고 순수한 척 연기하면 되죠. 아홉 살한테 뭔 의심을 하겠어요?"
"어휴, 무서워라."
다행히 농담조의 말투였지만 잠뜰의 눈빛 때문에 공룡은 소름이 돋았다. 마치 너도 찌를 수 있고, 라고 덧붙이는 듯했다.
공룡은 아까 사 온 라떼와 초코 케이크를 잠뜰에게 대충 넘겨주고 계단참을 후다닥 내려갔다.
"잠깐!"
잠뜰이 공룡을 불러세웠다. 뭐, 전화번호라도 말해 주려나?
"저 라떼 안 좋아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셔요. 초코 케이크보다는 체리 올려진 딸기 시폰 케이크가 더 좋고요."
사줘봐야 의미 없다.
그 말을 절실히 느끼며 공룡은 한 마디를 남기고 사무소를 떠났다.
"어쩔티비 그러니까 키가 안 크지"
・ ・ ・
공룡은 아까 잠뜰을 만난 여파에 짓눌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밖에 나갔다.
걷다 보니 걸음은 점점 가벼워지고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하루의 마지막, 공룡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공룡이 도착한 곳은 동희의 학원이었다.
현재 시간은 7시 30분. 평소보다 30분 늦는다. 공룡과 마찬가지로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들이 주변에 북적댔다.
아이들이 하나둘 나오고, 마지막으로 동희가 뛰쳐나왔다.
"아빠!!!"
그렇다.
공룡이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힐링타임은 바로 동희와 함께하는 학원 하원 시간이다.
"동희, 학원 늦게 끝났네?"
"네! 학원 선생님이 영화 보여주셨어요!"
"그래? 재밌었어?"
"완전! 아빠같은 멋진 퇴마사가 나오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부엉이랑 같이 귀신을 무찌르는 영화였어요!"
"그래? 결말이 뭐였어?"
"끝까지 못 보고 껐는데…담임선생님은 흐름 끊기면 안 된다고 계속 보자고 했는데 시간 너무 늦었다고 원장님이 끄고 갔어요."
"괜찮아, 다음에 보면 되지. 아빠랑 같이!"
"우와, 극장 가서 봐요?"
"그럴까? 근데 제목이 뭐였어?"
"어, 제목이…어…뭐였더라-"
공룡은 머리를 싸매고 있는 동희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으악! 뭐에요?"
"동희야, 기억 안 나면 지금 말하지 않아도 돼. 시간은 많잖아? 내일 쌤한테 물어보면 되지."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어, 그렇네. 내일은 그럼 뭐 하고 놀까?"
시시콜콜하고, 행복한 잡담. 보낼 때는 버스를 태워도 학원이 끝나는 저녁에는 꼭 걸어서 데려오는 것이 공룡의 규칙이었다. 동희와 함께라면 겨울 길거리 음식도 조금씩 사 먹고, 잡담을 나누는, 평소에는 쓸데없어 보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반짝거리게 되는 덕이었다. 반짝이는 눈과 갈색 머리카락을 한 부자가 똑 닮은 얼굴로 웃었다. 둘의 집이 도심에서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집이 보일 즈음부터는 맘껏 떠들어도 되었다.
"동희야, 저기 삼촌이다!"
"진짜요?"
그리고 저 멀리, 다시 봐도 공룡과 하나도 닮지 않은 동생이 사무소 벽에 기대어 있었다. 호리호리한 몸이 유난히 말라 보이고 광대뼈까지 내려올 기세인 다크서클이 사람을 피곤하다 못해 초췌해 보이게까지 만들었다.
"삼촌, 웬일이에요?"
"너 이 시간에 퇴근 아니잖아?"
"병가냈어. …아파서."
"삼촌, 아파요? 어디가 아파요?"
"속이 울렁거려서 재 보니까 열이 있더라."
"아프면 쉬어야죠! 왜 여기까지 힘들게 왔어요…"
"어? 동희는 삼촌이 오는 게 싫은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툭.
각별이 동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물끄러미 동희를 바라보던 각별이 무언가 여운을 지우려는 듯 갑자기 머리를 마구 헤집어 놓았다.
"장난이야, 장난. 딱히 안 아파. 그냥 일이 일찍 끝나서 왔어."
"네? 아, 다행이다~"
"시간 늦었다, 들어가서 일찍 자."
"네~"
동희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이상했다. 살을 에는 듯 차가운 바람에 각별이 휘청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너."
"?"
공룡이 허리춤에 찬 총을 '각별'의 코앞에 들이댔다. 그때 일 이후 영력이 깃들어 있는 총을 개조한 것이었다. '각별'이 주춤하며 당황했다.
"혀, 형?"
"그 소리 꺼내지 마. 귀신 주제에."
"형, 무슨 소리야. 내가 뭔 귀신이라는 거야. 난 이렇게 땅에 똑바로 서 있잖아…?"
"웃기시네."
공룡이 총을 장전했다.
"이 총은, 일반적인 장난감 총이야. 영력을 탄알로 써서 발사하는, 인간에게 개입할 수 없는 총이지. 네가 귀신이 아니라면, 쏴도 되겠지?"
"…젠장."
"적당히 하고 나와, 대가리에 총 맞기 싫으면. 거지같은 연기도 작작하고."
"음? 난 너랑 얘기하고 싶어서 왔는데?"
역시나 귀신이었어. 공룡은 긴장을 풀지 않고 총을 고쳐 잡았다.
"오늘은 운이 좋았어. 이 몸은 쓸데없이 눈이 좋단 말이야. 근데 오늘은 마침 단 걸 먹어 줬네? 경계가 흐트러지니까 정신도 약해져서 내게 손쉽게 몸을 뺏기지 뭐야?"
"안 궁금하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수다쟁이?"
순간 '각별'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각별'이 한순간에 다가와 멱살을 잡았다. 평소의 각별에 비해 어마무시한 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룡이 미소를 잃지 않자 '각별'은 평정심을 잃고 분노를 표출했다. 공룡의 손목을 쳐 총을 멀리 날려보내고 쇳소리 섞인 지옥의 음성으로 공룡을 협박했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빌어먹을 퇴마사."
"이미 말이 아니라 행동인ㄷ-"
퍽.
'각별'이 공룡의 광대뼈를 가격했다.
그 반동으로 공룡은 '각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공룡은 본능적으로 아릿한 통증이 뭉근하게 밀려오는 광대뼈에 손을 가져다댔다. 열이 후끈하게 올라왔다.
공룡이 고개를 돌려서 망정이지 코뼈가 부러질 뻔했다. 고개를 조금만 더 돌렸으면 완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공룡은 욱신대는 광대뼈를 뒤로하고 고개를 털었다. 그것이 아픔을 떨쳐주기라도 하는 듯.
"…호우! 힘 센데?"
"허세 부리지 마라, 인간…!"
"칭찬을 해도 지랄인 걸 보니까 내 동생 맞네."
"닥쳐! 난 그 나약하고 멍청한 인간이 아니다!"
"내 동생이 빈약하긴 해도 멍청하진 않아. 너보다 똑똑할걸? 의사니까. 의사 되기 더럽게 어렵다는데."
"의사 나부랭이 따위 개나소나 되지."
"그래도 곱게 못 뒤지고 남들한테 피해 주는 귀신 되는 것보단 어려울 것 같은데. 너 뭐 의사 지망생이라도 됐냐? 사람 살리는 의사를 왜 괴롭혀."
'각별'은 잠깐 머뭇댔다. 그러더니-
"모든 것은…"
갑자기 눈을 뒤집고 공룡에게 달려들었다.
"그분의 뜻대로…!!!"
"씨발 갑자기 왜저래!!!!"
탕-
당황하긴 했지만 먼저 총을 집어든 공룡의 승리였다. 뒤집혔던 눈이 돌아오고 각별이 당황한 얼굴로 축 늘어진 제 팔을 감쌌다. 주변에 뭔가 기분 나쁜 조각이 하나 나뒹굴었다. …조각? 공룡은 우선 그 뭔지 모를 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보다는 각별이 우선이었다.
"…형?"
"우리 얘기할 게 있을 것 같은데?"
"…"
공룡이 각별의 주위를 노려보았다. 검은 구름 같은 것들이 각별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각별이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바닥에 붙였다.
"왜 숨겼는데."
"뭐, 뭘."
"귀신, 보이는 거."
"…"
각별이 우물쭈물하다 한숨을 뱉었다.
통탄이나 씁쓸함의 한숨이 아닌, 짜증을 토해내는 한숨이었다.
"뭐, 내가 꼭 말해야 했어?"
"그래도 내가 퇴마사니까, 뭐라도-"
"세상 모든 귀신을 형이 다 죽일 수는 없잖아."
각별 주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퇴마 현장에서 질리도록 들어온 기분 나쁜 비웃음.
수백 개의 다른 목소리가 각별 주위에 맴돌았다.
미친, 저러고도 무당을 안 찾아갔다고?
각별이 다시금 심호흡하고 내뱉었다.
"이제 익숙해."
무슨 소리야. 익숙해질 수 없는데.
"잘 보이지도 않아."
거짓말하지 마. 언젠가부터 기분나쁜 곳에서는 흠칫 놀라면서.
"난 괜찮아."
거짓말 그만해.
"헛소리하지 마."
공룡의 입에서 겨우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웃음이 멈췄다.
"안 괜찮은 거 온몸으로 티내면서 괜찮다고 하지 말라고."
"그럼, 안 괜찮다고 했으면 형은 어떻게 했을 건데?! 걱정했을 거잖아!"
"그래, 걱정했을 거다. 난 걱정하면 안 되냐? 너만 걱정해? 그렇게 너만 걱정하고 너만 속이 곪아가니까 귀신도 나보다 널 더 좋아하는 거잖아? 아님 말고."
"형은, 걱정하면 안 돼."
"그러니까 왜?!"
"형은 걱정하면 웃음을 잃어버리니까."
공룡은 그 말에 멈칫했다.
"동희, 2년 전쯤에, 아팠을 때…형 진짜 많이 울었어. 회사도 안 가고 동희 옆에서 하루하루 애 말라가는 거 보면서 울기만 했다고. 형이랑 우는 모습, 진짜 매칭 안 되서…저건 형이 아니라고 생각 들 정도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동희가 입원해 있던 나날들은 공룡에게 비어 있었다. 그곳을 눈물로 전부 채울 만큼,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내가 진심을 전부 말하면? 그러면 형은 '그래그래, 무당 한 번 찾아가자. 안 되면 그냥 귀신 달고 다니고.'라고 할 수 있어?"
"…"
"못 하잖아!"
"젠장, 왜 의사 된 애가 눈이 밝아가지고…"
"형은 귀신들이 어떻게 보여?"
"검은 덩어리나 검은 구름…"
"믿기지 않겠지만, 난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다 보여.피부 거죽부터 표정, 장신구와 머리카락까지."
"…괴롭겠다."
"괴롭지."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두 사람의 대화는 멈춰 있었다. 공룡은 어색한 대화라도 이어나가려 눈길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 시선이 시의 가장 거대한 건물인 해광탑에 멈췄다.
"…수호신 님이라도 찾아가 보자."
"이 늦은 시간에?"
"거기 24시간 사격장 있어서 자주 가."
"의외네. 옛날 건물, 게다가 수호신을 모시는 곳에 사격장을 만들다니. 애초에 거기 진짜 수호신이 있긴 있어?"
"응. 난 믿어. 퇴마사에 귀신도 있는데, 설마 수호령이 없겠어?"
"하긴, 그것도 그렇네."
"아빠아빠!!!"
동희가 갑자기 퇴마사무소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튀어나왔다. 한 손을 등 뒤로 감춘 채였다. 신비로운 하늘색…갑옷?
"어,왜?"
"엄청 커다란 거북이가 뒷마당에 있었어요!!"
"거북이?"
"짜잔~!"
정말 거북이었다. 성인 팔뚝정도 길이의 바다거북이었다. 바로 담 너머에 바다가 있어서 거북이 있어도 신기할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거북이의 색이었다.
초록색도 갈색도 아닌 동남아 바다 일러스트 색.
채도 높은 하늘색을 온몸에 두른 거북이는 어둠 속에서도 독보적인 빛을 자랑했다.
"…이거 확실히 알려지지 않은 종이지?"
"확실히. 유전자 변형 거북이일수도 있고. 아무튼 간에 희귀한 케이스야. 당장 학회로 보내야-"
"그냥 키우면 안 돼요…?"
"엄, 동희야. 물론 키워도는 되지만 이건 하늘색 거북이잖아, 그치? 너 하늘색 거북은 처음 보지? 그래서 우리가 키우거나 용봉탕을 끓여 먹으면 아빠 감옥 가."
"어, 용봉탕 맛있겠다."
"내일 먹으러 갈까?"
거북이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음? 이 거북이, 영력이 장난 아닌데.
"형, 이 거북이 예사 거북이가 아닌데?"
"그래? 귀신이야?"
"아니, 그거랑 조금 다른-"
"어찌 되었든 일반 거북은 아니라는 거지? 한 번 쏴 볼까?"
이러면 좀 반응하려나. 역시나 거북의 눈에 공동지진이 일어났다. 그럼, 그 전에 동희부터.
"동희야, 잠시만 눈 감고 있어. 아무래도 거북이에 빙의한 귀신 같으니까 거북이도 같이 죽을 수가 있거든. 잔인할 수 있으니까 눈 감-"
"무슨 대화를 하는 게냐!!!!"
오우, 역시 귀신인가? 몸집에 맞지 않게 큰 목소리였다.
"아빠, 왜요? 뭐가 들려요?"
"조금 많이. 귀신 맞는 것 같아."
"쏘면 안 될 것 같은데…"
각별이 불안해했지만 공룡은 우선 장전부터 했다.
찰칵.
"마지막으로 할 말은?"
"네 이놈!!!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
"응, 모르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눈을 감고 골똘히 고민하던 각별이 다급히 소리쳤다.
"형, 잠시만. 죽이면 안 돼!!"
"얘가 누군데 그래?"
"무엄하도다!!!! 내가 바로 이 해광시의-"
"이분이 바로 이 해광시의-"
"수호신이란 말이다!!!"
"수호신이야!"
"…에엥?"
상상도 못한 정체였다.
예로부터 해광의 수호신은 평소엔 서른 정도 되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다니지만 해광이 위험에 빠지면 집채만한 괴수로 변해 백성들을 도왔다고들 하는데, 이렇게 작디작은 거북이라니?
"동희야, 혹시 근처에 어떤 형 있었어?"
"형은 없고, 어떤 아저씨가 뒷마당에 있었어요. 나이는 아빠랑 비슷해 보였는데. 아참, 뒷마당에 간 이유가 뒷마당에 그 아저씨가 있어서였어요! 내려갔는데 이 거북이가 있었고요."
그렇다면 대충은 말이 됐다.
"아빠, 이 거북이가 수호신이에요?"
"그래, 꼬마. 내가 바로 해광시의 수호신이다."
"되게 작네요?"
"무엄하도다!!! 감히 어디에 대고 작다고 논하느냐!! 내 잠시 힘을 뺏겨 이리 하찮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몸이 해광을 지키는 수호신이란 사실은 변함없단 말이다!!!!!"
거북이가 질러 대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안하무인인 공룡조차 주변을 살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겐 들릴 리 없지만. 각별은, 뭐 진작에 귀를 막고 있었으니 승리자인 셈이었다.
"자, 자! 수호신 님, 죄송합니다! 근데 늦었으니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게…"
"나는 조사해야 할 것이 있단 말이다! 가만, 네게서도 악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네놈도 야괴인 것이냐? 날 도로 바닥에 내려놓거라!!"
수호신이 거세게 버둥대자 힘이 약한 동희는 거북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 거북이가!"
"그 거북이, 거북이 소리 좀 그만하거라! 난 신성한 수호신-"
"됐고, 그 몸으론 조사고 뭐고 못 하니까 해광탑으로 돌아가시죠. 데려다드려요?"
"흠,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 해광탑은 됐고, 신세 좀 지겠노라. 이런 모습을 띄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너희 탓 아니냐."
"아?"
"못 들었느냐? 신세를 지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날이 늦었으니 이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도록 하지."
너무나 뻔뻔한 수호신의 태도에 공룡은 순간 이 집이 자기 집이 아닌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다행히 냉철한 각별이 저지했다.
"잠깐잠깐. 뭐요? 그게 왜 우리 잘못이고, 형 집은 왜 빌리는데요?"
거북이의 표정이 맹하게 바뀌더니 다시 본래의 위풍당당함을 되찾았다.
"아, 그걸 말하지 않았군. 나는 해광의 수호신으로서 최근 갑자기 야괴의 출현이 급증한 것에 의문을 품고 이 근처를 시찰하러 나왔다. 그런데 바다와 맞닿아 있는 너희 집에 불이 켜져 있어 잠시 와 보았도다. 헌데 생각해 보니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빈집이었는데 지금은 불까지 환히 켜져 있는 것이 괴이하여 야괴의 소행으로 여기고 뒷마당으로 들어왔다."
"잠시만요, 질문이요."
각별이 태클을 걸었다.
"이 몸이 지금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아빠, 저 졸려…요…"
"뭣이라? 하긴, 시간이 늦긴 했구나."
"동희야, 우선 그럼 들어가서 씻고 자자. 각별, 넌 수호신이랑 얘기할 거면 얘기하고."
"와, 진짜 요즘 형들 무섭네, 무서워~이 한겨울에 스물아홉, 꽃다운 나이의 동생을 동사시키려고 내놓는다고?"
"응 이제 곧 서른~"
"형은 곧 서른셋~"
"유치하구나."
"그래서 아까 하고 싶던 질문 말인데요, 오 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왜 야…괴? 그걸로 착각한 거에요?"
"크흠…! 내가 태어났을 때는 집을 짓는 데 십 년이 넘어가도록 걸렸다!! 집 하나 짓는 데에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이 들어가는지는 아느냐?"
"수호신 씨, 요즘은 십 년이면 아파트도 지어요;; 얼마나 옛날 사람인 거야?"
"내 이 도시가 생길 때부터 있었거늘…"
"뭐야 완전 할배네 할배!"
"뭐라?! 할배?! 이 썩을 놈이!! 그러는 너는 눈썹이 두꺼워 수리부엉이같이 생기지 않았느냐?!!"
치열한 공방전이 오갔다. 서로 부엉이, 할배라 부르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말씨름의 승자는…
"거참 밖에서 시끄럽네~동희 재웠으니까 안으로 들어오지?"
대화를 끊은 공룡이었다. 재우면서 저도 갈아입었는지 제복이 아니라 잠옷인 채였다. 둘은 우선 사무소로 들어가 손님 응대용 테이블에 앉았다. 수호신에게는 테이블 위에 방석을 얹어 자리를 마련했다.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기 전, 공룡이 한 가지 당부했다.
"수호신 님은 소리 지르지 말아 주세요."
"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자고로 수호신이란 어질고 친절해야 하거늘. 이 몸은 단지 목소리가 기품있는 것 뿐이다!"
"기품 지키다가 승천하시겠어요? 귀 아프거든요."
"…크흠. 내 목소리는 조금 낮춰보도록 하겠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아, 그 주거침입했을 때까지요."
"주거침입?! 잠시 들렸을 ㅃ-"
"조용히 좀 하라니까요."
"아예 입을 꿰메버리지 그러냐? 어쨌든 들어온 후,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야괴가 보이지 않더구나. 그러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위를 보니 꼬마가 이 몸을 빤히 쳐다보고 있지 않더냐? 시찰을 하러 나온 것이기에 기억 소거 도술을 사용하려다가 그만 힘이 다 빠져 이리 변한 것이다."
"아…"
어이없다.
그깟 도술 좀 썼다고 힘이 다 빠지다니.
"그래서 그게 동희 때문이라고요? 아니, 뭔 수호신이 도술 좀 썼다고 힘이 다 빠져요?"
"그 입 다물라! 최근 안 그래도 야괴들 때문에 부상을 입어 힘이 빠져서 그런 것이다. 너희가 아이를 좀 놀아 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수도 있지."
"동희는 얌전해서 책 읽는 걸 더 좋아해요."
"그렇더냐?"
"그런데요?"
"…그렇군."
누가 봐도 수호신이 잘못한 상황이었다. 수호신은 쏟아지는 둘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황급히 질문했다.
"그, 그런데 아까부터 네게서 느껴지는 악한 기운은 분명 야괴의 것인데. 혹, 최근에 야괴를 만난 적 있느냐?"
"방금 각별이한테 붙어 있던 야괴를 퇴마하긴 했어요. 아, 맞다. 그 조각."
"조각...?"
공룡이 주웠던 조각을 꺼내보이자 라더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이건 야괴가 봉인되어 있는 봉인석 아니더냐? 너희 이름은 무어냐? 영력을 쓸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일반인은 아닌 듯한데."
"아! 맞다, 소개를 잊었네요. 저는 해광시의 퇴마사, 공룡이라고 합니다. 얘는 제 동생 각별이고요. 위층에서 자는 애는 제 아들 동희에요. 원래 수호신 님을 찾아가려 했는데, 이런 모습으로 오실 줄이야."
"퇴마사? 호오, 퇴마사라니. 요즘 거의 없는 직업이구나. 그나저나 어떤 연고로 이 몸까지 찾아오려 했던 거냐?"
"아, 그게…"
"내가 설명할게. 제 눈이 너무 밝아서 문제입니다."
"얼마나 밝길래?"
"…귀신이 보일 정도로요."
"야괴를 말하는 것이냐? 뭐, 그 정도는 영력이 센 사람들은 다 보이는데...잠깐, 혹시 얼마나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이냐?"
"실핏줄, 모공, 움직임,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 전부 다 보입니다. 미치겠어요."
"흠...많이 심각하군. 너도 퇴마사가 되면 되는 일 아니냐?"
"그게, 얘 직업이 의사에요. 지금도 치료해야 하는 환자들이 많고요."
"병원...? 그곳에는 야괴가...아, 정신이 피폐해질 만 했군. 병원에 유난히 야괴가 많더구나. 죽은 곳을 알아보는 것인지...아니면 밤을 보는 눈을 알아보는 것인지."
"밤을 보는 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설명해 주겠노라.
먼 옛적부터, 내가 강림하기 전부터 귀신들은 존재했다. 사람들이 죽으면 귀신이 되니 당연할 수밖에. 그 귀신들은 죽은 자들의 도시, 해광(海恇)으로 기억을 잃고 이송되지. 이들을 범혼(凡魂)이라 부른다.
그중 일부는 기억을 찾는다는 금단의 물을 탐내지만, 이를 마시면 사실 인간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야괴가 되는 것이다. 너희가 귀신이라 부르는 영혼들 중에서도 선한 귀신과 악한 귀신이 있다는 말이다. 앞으로는 야괴라고 부르도록 하여라.
야괴들은 물을 건너 바다를 통해 육지로 올라와 인간들을 괴롭히지. 이 야괴들을 일반인들은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소수의 인간들은 볼 수 있는데, 이들을 '밤을 보는 눈'을 가졌다고 칭한다. 이들의 대다수는 그 정신이 능력을 감당하지 못해 자결하는 것으로 끝은 맞이한다.
이와 비슷한 능력도 있는데, 그들은 영력을 모아 야괴들을 퇴마할 수 있다. 이들은 '밤을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부른다. 보통 능력을 버리며 살지만, 기운이 좋은 사람이나 약간이나마 밤을 보는 눈을 가진 이들은 퇴마사를 업으로 삼지.
어찌 보면 각별, 네놈은 축복과 동시에 저주를 받은 게야. 그 누구보다 밝은 밤을 보는 눈을 가졌지만 밤을 지키는 파수꾼은 그 형이 되었으니..."
"그 능력...제가 양도받을 수는 없을까요?"
"밤을 보는 눈은 양도받을 수 없어. 그게 문제인 게다. 사람은 야괴가 보이지 않아 재능을 버리며 살고, 밤을 보는 눈을 가진 이들은 능력을 감당하질 못하니까 말이다. 이러니 요즈음 같이 야괴들이 끝도 없이 올라오다간 해광에 시민들이 살 수 없을 게야. 그러면 이 몸은..."
수호신이 목을 길게 빼 앞발을 바라보았다. 발바닥에 반짝이는 실금이 가 있었다. 잠시 목이 메인 듯 그 실금을 바라보던 수호신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야괴들을 막으려 하다가 소멸하겠지. 해광시에 한 명의 시민도 남아 있지 않으면 말이야."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수호신은 믿음으로 만들어진다고. 이 해광의 사람들은 다행히 대다수가 빈말로라도 수호신을 믿고 있지만, 그게 영원할까? 과연 건물이 저 혼자 무너지고, 물이 넘쳐 흐르고, 이곳저곳 불이 나도 수호신을 믿을까? 공상 속의 존재가 시를 지켜줄 리 없다며 방바닥의 먼지만도 못하게 취급할 수도 있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네게 의뢰가 밀려오고 있지 않느냐? 이러다가 수호신보다는 공룡, 너를 더 믿겠구나. 큰 위험이 터질 때만 도움을 준다는 아무 쓸모짝에도 없는 수호령보다는 즉각 달려와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인간이 낫지 않겠느냐."
"에이, 할배, 그런 소리 하지 마요. 뭐 2년 전쯤에 일을 시작한 퇴마사보다는 당연히 시에 탑까지 세워져 있는 수호신이 더 믿음 가지 않겠어요?"
"뭐 이 자식아?"
수호신이 씁쓸한 농담조로 던진 말을 각별이 가볍게 올려쳤다. 그 말을 또 공룡이 자연스럽게 이어받아 묵직한 분위기를 가벼이 바꿔 주었다. 수호신이 가볍게 웃었다. 역시 우리는 이런 데에도 재능이 있다니까.
"네놈, 꽤 괜찮구나."
"칭찬은 돈으로 환산해서 주시겠어요?"
"어, 저도 나눠 주시겠어요?"
"그러한 태도와 나를 부르는 호칭을 빼면 그럭저럭 괜찮다는 말이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이 해광시를 지키는 수호신, 라더라고 한다!"
라더.
동남아 바다색의 수호신 이름은 라더였다.
밤하늘을 머금어 짙은 남색인 해광의 바다와는 상반되는 색이었지만, 뭐 어떤가.
수호신이 이리도 이 시를 사랑하는 걸.
"너희 문제가 꽤 심각해 보이니 성심성의껏 도와보도록 하겠노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너희가 사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 그러기 위해선 얼굴은 자주 비쳐야겠지만, 바쁜 퇴마사를 보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이름을 부르는 것은 좀 그러니, 수호신 님 어떤가?"
"할배 어때요?"
"네 녀석은 아직도 그 호칭에 미련을 저버리지 못한 게야?"
"아 뭐, 할배 맞잖아요?"
"썩을 놈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공룡의 귀에 자그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북이…"
투명한 복층의 난간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동희가 보였다. 잠꼬대를 하며 거북이, 거북이를 되뇌이다 씩 웃었다. 아마 좋은 꿈을 꾸나 보다, 하고 마음이 따듯해졌다.
"그럼 공룡, 네 생각은 어떠냐?"
"네?"
"이 몸에 대한 호칭, 무엇으로 쓸지 말이다."
"역시 할배가 친근하고 좋지 않아?"
"부엉이같이 생긴 녀석이 헛소리를 끈질기게도 하는구나. 신성한 수호신을 친근하게 부르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거북이…아니, 거북 님은 어때요? 거북이잖아요!"
"…어?"
라더는 잠시 고민하다 밝은 얼굴로 답했다.
"그거 괜찮구나! 내가 마침 거북 수호신이니 그 정도면 적당히 괜찮을 듯하다."
"괜찮은데? 형이 웬일로 작명 센스가 좋지?"
"웬일이라니 진짜 너무한데?"
"형 동희 이름 싹싹하게 살라고 싹싹이로 지으려고 했잖아."
"그건 8년 전이고!"
"조용히들 하거라. 지금 머리를 정리할 겸 명상을 할 터이니."
"에이~할배, 그냥 자려는 거잖아요."
"네놈은 정말 단 한 마디라도 지고 살지 않는구나."
"당연하죠, 지면 냉혹한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하거든요."
공룡은 몇 번이고 말씨름을 벌이는 각별과 라더를 뒤로한 채 2층으로 올라가 바로 침대에 누웠다. 씻어야 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던 탓에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각별의 문제는...뭐, 어떻게든 되겠지. 우선은 피곤하다. 공룡은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천사 같은 아들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고른 숨소리. 다행이다,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밑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거북이의 대화를 자장가 삼아 공룡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각별 주변의 야괴들이 혀를 차며 떠나는 것이 느껴졌다.
・ ・ ・
"기상!!! 일어날 시간이다!!"
...?
뭐야?
웬 처음 듣는 목소리가...
맞다.
어제 수호신...왔었지.
공룡은 눈을 비비며 있어났다.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몸이 답지 않게 피곤했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였다.
잠깐,
여섯 시?!
공룡은 안 그래도 달아난 잠을 내쫓은 채 빠르게 1층으로 내려갔다.
각별은...알아서 이불 펴고 자고 있고. 라더가 위풍당당하게 그 얼굴 위에 서 있었다.
그래봤자 조그만 거북이지만.
각별이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비볐다.
"뭐야 이씨..."
"부엉이 같은 녀석. 어제 늦게 잠들더니만, 아침엔 늦게 일어나는 게냐?"
"...할배?"
"그래, 부엉이."
"지금 몇 시야...?"
"여섯 신데?"
"아 씨ㅂ...."
"욕하지 마."
"왜 그러느냐? 어서 일어나 일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
공룡은 말없이 라더를 들어 방석에 올려놓은 후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각별은 다시 돌아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자, 거북 님. 지금 몇 시죠?"
"여섯 시."
"제가 일어나는 시간은 보통 일곱 시 반이에요."
"그래서? 일찍 일어나는 게 좋지 않느냐?"
"그런데 늦게 잤잖아요."
"그렇지."
"잠이 줄면 졸겠죠?"
"아무래도?"
"자, 그럼 제가 오늘 손님이 퇴마사가 졸고 있어서 나가면 누구 탓?"
"네 탓 아니냐?"
"....에휴."
말이 통하질 않는다.
공룡은 부족한 잠을 보충하러 계단으로 올라갔다. 내쫓은 잠이 다시 슬금슬금 돌아오고 있었다.
"잠깐! 내가 어제 해결책을 찾아냈다!"
해결책?
해결책이...있는 거였나?
"완벽한 방법이지!"
"무슨 방법인데요?"
"혼을 형상화시켜서 밤을 보는 눈을 귀속시키고 범혼의 상태로 만든 후 데리고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
"잘 못 들었습니다?"
"요즘 말로는 유체이탈이라고들 하지."
"...하다가 죽는 거 아닌가요?"
"일시적으로는 괜찮을 게야. 한...하루에 4시간 정도는. 물론 후유증이 30분 정도 따르겠지만."
"네 시간이요?! 아니, 얘 직장도 있어요!"
"쉬는 날에 도우면 되지 않느냐?"
"그래도.."
"에이 c...내 얘기를 나 빼고 해요?"
결국 자는 데에 실패한 각별이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설명을 쭉 들은 각별은 예상치 못한 답변을 했다.
"그래요."
"ㅁ, 뭐?"
"그까짓 유체이탈, 사람 죽지도 않는다는데. 아오, 답답해."
"야, 너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 유체이탈이면 애초에 반쯤은 죽어 있는 거잖아?"
"아 c... 그거 이름 뭐였더라... 아무튼 그거 가진 사람 죄다 못 견디고 죽는다는데 쉴 때 벌이에 보탬되면 좋지 뭐. 형인데 벌이 늘어나면 돈 주겠지?"
"야, 지금 졸려서 상황 판단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은데, 일단 자고 일어나. 너 의사잖아. 거의 식물인간 상태가 되는데, 산소호흡기 달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러라지 뭐. 나 다시 잔다."
"야!"
"뭐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나한테 어쩌라고!"
각별이 소리를 지르고선 정적이 흘렀다. 위층에서 동희가 뒤척대는 소리가 확성기를 단 듯 크게 들렸다.
"나 잔다. 깨우지 마. 병가 쓰고 늦잠 잘 거야. 뭐 유체이탈인가 그거 할 거면 하든지."
"...미친놈인가."
각별이 다시 드러누웠다. 숨소리가 불안정하다. 그것이 공룡을 미치도록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럼 뭐, 힘도 약간은 돌아왔겠다. 본인 동의도 얻었으니 시작해 볼까?"
"잠시만요!"
공룡이 후다닥 복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무서운 것을 본 어린아이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됐어요. 이제 시작하세요."
"..."
라더가 푸스슷 웃음을 흘렸다.
"어린아이같긴. 별로 무서운 의식도 아니다. 단지 주술을 거는 것 뿐이지."
"...그래도요."
"걱정 말거라. 이 내가 지키는 해광의 이름을 걸고 절대 안 죽게 해 주지."
"와, 해광시 망했어요?"
"무어라?"
공룡도 푸흡, 하고 웃어버렸다.
"걱정 말거라. 오 초면 끝날 것이야."
"시작하면 말해 주세요."
"시작하겠다."
두꺼운 솜이불을 뚫고 밝은 푸른빛이 공룡의 등을 비추었다. 공룡의 마음에 넘실대던 불안이 고개를 내밀었지만, 공룡은 라더를 믿어 보았다. 각별을 믿어 보았다.
분명히 성공할 거야. 아니, 실패할 수도 있지만-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그리 숨어 있느냐?"
"어...벌써요?"
"그래."
공룡은 솜이불 너머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뭔가 금빛으로 일렁이는 것이 공중에서 푸드덕대고 있었다.
그리고 각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할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부엉이라니! 부엉이라니!"
"그 모습이 훨 잘 어울리는구나. 하하핫!"
...부엉이?
"원래 사람으로 구성하려 했는데, 5초 안에는 사람의 형상을 조각하는 것이 쉽지 않더구나. 누가 잔뜩 겁을 먹은 탓에 빨리 했으니, 어쩔 수 없지."
"할배!!"
동희는 각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 보다. 완전히 영혼처럼 변한 거야.
"아참, 공룡 네놈은 부엉이 녀석을 보지 못하는구나. 뭣들 하느냐?"
"이씨...."
어찌 보면 햇살같기도 한 광채가 공룡의 팔에 앉았다. 그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지며 팔에 앉은 부엉이가 제대로 보였다.
이 부엉이가 각별?
수리부엉이를 닮았는데, 각별의 피곤하고 짜증난다는 표정이 훤히 보여 각별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참을 수 없이 웃음이 번져나왔다. 아아, 성공했구나.
"뭐야! 형도 웃어? 난 심각하거든? 부엉이가 뭐야, 부엉이가!"
"푸하하하하!!! 아니 거북 님, 진짜 천재..."
"할배 진짜 나중에 가만 안 둘 거야!"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공룡은 웃음소리에 동희가 일어날 때까지 한참을 웃어댔다.
・ ・ ・
그 후론 탄탄대로였다.
평일에는 일반 사건들을 맡고, 주말엔 각별과 위험한 사건들을 맡았다.
야괴들이 자세히 보이니 일처리도 빨라졌다.
공룡의 명성은 해광시에 자자히 퍼졌다.
값도 싸고 실력도 좋다고.
물론, 잠뜰의 명성도 그와 못지않게 높아졌지만 말이다.
공룡이 거절했던 인터뷰는 전부 잠뜰이 가로채 신문의 헤드라인을 맡았다.
최근에 어느 추모공원에서도 검격을 뽐내며 뱀 야괴를 해치웠던가.
해광시의 유명 잡지사 <해광타임즈>에서는 '모던하고 젠틀한 신사 공룡, 화려하고 당돌한 천재 잠뜰. 누가 이 해광의 대표 퇴마사인가?!'라는 제목으로 한 코너를 장식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둘 다 바빠져 접점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해광초에서 퇴마 의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심지어 동희의 담임 선생님에게 말이다!
"예?! 퇴마요? 같이요??"
"네! 그, 잠뜰 퇴마사님과 공룡 퇴마사님이 꼭 해결해 주시면 했어서...원래 한 분만 부르려고 했는데, 아이들에게 투표가 딱 반반으로 나뉘어서요."
이 무슨 기이한 운명인가.
공룡은 허탈해하면서도 의뢰는 받았다.
문제가 있다니까. 아들 학교인데, 아버지가 안 가서야 되겠어?
의뢰 내용은 이러했다.
밤마다 학교에서 기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와 같은 웃음이 6학년부터 스멀스멀 학생들에게 전영되고 있다.
그 아이들은 학업에 집중하지 않고 시도때도 가리지 않고 웃어, 학급의 분위기를 흐린다.
정신과에서도 아무런 문제를 진단받지 못했다.
이런 의뢰는 보통 센 야괴인데. 게다가 전염된다고?
이런이런, 날 부른 이유가 있군.
"걱정 마세요. 아들 학교이기도 하니 꼭 해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그날 뵙죠.
본격적으로 퇴마를 하는 날은 이번 주 토요일. 사흘 남았다.
공룡은 우선 해광탑에서 수련을 하고 각별과 스케줄을 조정하기로 했다.
선생님이 돌아간 후, 낯익은 붉은 한복이 사무소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저씨! 잘 있었어?"
- 1부 完. 나머지는 포스타입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