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고양이 (https://www.postype.com/@catkitchen)
"나도 뱀파이어가 될게, 그럼 우린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어."
잠뜰의 주변을 둘러싸고 서 있던 이웃들이 잔뜩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먼저 말을 꺼낸 각별조차도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는 듯 흠칫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뭐?"
"... 뱀파이어가 되면, 그럼 이웃들이랑 같이 살 수 있다며."
"하지만 잠뜰, 그건... 저승의 법도를 어기는 일이야. 아니 저승의 법도뿐만 아니라 이승의 규칙도!"
"... 상관없어.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저게 정녕 우리가 아는 잠뜰이 맞는가. 그들이 아는 그녀는, 언제나 당당했고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가끔은 무모하다고 할 도전조차 꺼리지 않는 기꺼운 사람.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젓는 공룡의 표정 너머에서 본질적인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낮게 깔린 잠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연약하고 가녀린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흘러넘친 눈물이 그녀의 손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세월이 지나 하얘진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잠뜰의 온몸이 떨려왔다. 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절규하듯 외쳤다.
"나도 무서워, 나도 죽는 거 무섭다고. 얼마나 아플지 어떻게 될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아니, 사실 실감도 안 나. 내가 이렇게 늙은 것도, 이제 죽어야 한다는 것도. 아직도 죽음은 까마득한 먼 미래의 일 같은데, 오늘, 오늘 이 밤에 내가 죽는다잖아. 내가 이제 죽어야 한다잖아. 나 사실 너무너무 무서워.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그녀의 말이 마치 메아리처럼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집은 시끄러운 적막으로 가득 찼다. 빛바랜 책장 한구석에 꽂힌 수현의 동화가 보였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 받은 것이었다. 꿈 요정 수현은 동화로 성공한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있잖아, 현실은 동화와 달라서, 평생 행복하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대. 백설 공주도 신데렐라도 사실은 다 거짓말이래.
그날 밤, 한편의 잔혹동화가 펼쳐졌다.
장부에서 잠뜰이란 두 글자는 누군가 덧씌운 듯 깔끔하게 사라졌고, 잠뜰은 뱀파이어가 되었다. 그렇게 거추장스러운 과정은 필요하지 않았다.
잠뜰의 몸은 순식간에 그녀의 20대처럼 돌아갔고 점점 힘들어지던 식당 일도 거뜬히 해낼 만큼 체력도 좋아졌다. 잠뜰은 각별처럼 블러드 팩토리에서 주기적으로 피를 사 먹었고 밤에 활동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다른 이웃들과 무언가 서먹해진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밝게 인사하기보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무마하려는 게 느껴졌다. 전과 같은 건 불가능하단 걸 알면서도 잠뜰은 뒤돌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달이 기운 어느 밤, 잠뜰이 창가에 기대 새까만 물감으로 칠한 듯 먹먹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새벽바람은 꽤 차가웠다. 그녀가 잠시 눈을 감으며 바람의 결을 느꼈다. 눈을 감아도 그려지는 풍경에 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번듯하게 올라간 아파트와 아직 공사 중인 몇몇 개의 빌딩, 꽃이 잔뜩 심어진 예쁜 화단과 각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집들. 그녀가 별에 손 닿기라도 할 듯 팔을 뻗어보았다.
"야, 뭐 하냐? 혼자 영화 찍어?"
"아 깜짝아, 뱀 씨! 인기척 좀 내고 다닙시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내가 오는 것도 모른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각별히 잠뜰의 옆에 비스듬히 기대섰다. 잠뜰이 감은 눈을 뜨고는 조심스레 창문을 내렸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운 방을 창문 너머 달빛만이 비췄다. 그녀의 입이 무언갈 말하고 싶은 듯 몇 번 옴짝거리더니 이윽고 그녀의 속마음을 뱉어내었다.
"그냥요, 과연 뱀파이어가 된 게 잘한 일인가 하는,"
어둠 속에서 힐끗 보이는 각별이 팔짱을 끼며 그녀를 살짝 바라보았다. 잠뜰이 그에게 잠깐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허공을 응시하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후회해?"
"... 결국 언젠가 죽음은 다가오겠지. 뱀파이어 각씨도 나도, 꿈 토끼 수현씨도, 시장님도, 반인 반룡 공룡 씨도. 어차피 라더씨 같은 언데드가 아닌 이상 다 죽을 거 아니야. 갑자기 내가 언젠간 한 번 겪어야 할 일에서 도망친 겁쟁이 같아서. 남들 다 마침표 찍을 때 나 혼자 쉼표 찍은 느낌?"
"푸흣"
"뭐야? 나 꽤 진지하다고!"
비소를 흘리는 각별을 잠뜰이 노려보았다. 각별은 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게 너지. 남들 다 하는 거 안 하는 사람. 적어도 내가 본 너는 그런 사람이었어. 덕분에 이뤄낸 발전을 생각해 봐.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정체를 숨기고 살았던 우리가, 덕분에 이렇게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니는 거 아니겠어? 모든 이 종족들이 몇백 년 동안 힘을 합쳐도 안됐던 일을 네가 성사한 거라고! 네 그 고집불통 같은 성격에 자부심을 가져."
"... 그런가. 잠깐, 고집불통이라니? 진짜 오늘 라더 씨 열차 타고 싶나?"
잠뜰이 부러 과장된 몸짓을 지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항상 저런 식이라니까-. 그녀가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이러나저러나 잠뜰에게 각별은 소중한 이웃이었다. 험난한 뱀파이어 생활의 유일한 가이드이기도 했다. 잠뜰이 각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팔짱을 끼었다.
미안 미안-. 각별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멈추지 못하더니 이내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가 나간 후 잠뜰이 미끄러지듯 바닥에 앉아 벽에 기댔다. 나다운 거라-
부스럭-
"잠깐, 거기 누구야?"
각별의 말을 곱씹어 보고 있던 잠뜰이 벌떡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 누군가 몰래 숨어있다가 나뭇가지를 밟은 듯한 소리가 가 났다. 잠뜰 경계 태세를 갖추며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 매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후 검은 정장을 입은 레더가 무기가 없음을 증명하는 강도처럼 양손을 위로 올린 채 불쑥 튀어나왔다.
"라더 씨?"
"죄송합니다. 일부러 엿들으려던 건 절대 아니었고, 그냥 잠시 산책하는데 말소리가 들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걸 엿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큼"
잠뜰이 2층 창문에서 공룡이 잔뜩 심어준 꽃이 가득한 마당에 홀로 뻘쭘하게 서 있는 라더를 내려다보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마침 아무나 붙잡고서라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던 참이었다.
"라고 더 씨는, 저 다운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잠뜰 씨 다운 거요...? 아까 각별 씨 말 때문에 그래요?"
"아니 그냥, 그런 것도 있고 겸사겸사해서."
라더가 각별과 마찬가지로 은은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하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전, 잠뜰 씨가 굉장히 무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되게 위험한 사람? 힘든 길과 편한 길 중 굳이 굳이 힘든 길을 선택하는 어쩌면 미련한 사람이요. 하지만, 그걸 또 성공시켜서 놀라게 하죠."
"... 그런가요?"
"그럼요"
그날 밤 빛나는 달빛 아래 새로운 쉼표를 찍은 인간과 미침 표를 찍을 수 없는 인간이 함께 웃었다. 이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