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neul612149)
에투알 왕국의 성벽 위로 붉은 석양이 어둠을 밀어내기 전 마지막 빛을 뿌리고 있었다. 성 안은 불길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고, 왕좌의 방은 그 긴장감의 중심이었다. 라더 왕자는 왕위에 오른 후 끊임없이 혼란에 빠진 왕국을 수습하려 애썼지만, 그의 부드러운 성품과 약한 의지는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라더는 왕좌에 앉아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험난한 표정이었다. 그토록 다정하고 인간적인 왕자는 이제 남은 선택지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는 호위기사 덕개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나 덕개의 태도는 마치 왕에 대한 충성을 기계적으로 표하는 듯했다. 그는 평소 라더와의 관계에서 어떤 애정이나 인간적인 유대를 느끼지 못했고, 그의 충성은 명목상의 것이었다.
"전하, 이제 끝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저 저항하는 척이라도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대로 죽어버리시면… 그동안의 모든 것은 헛된 일이 될 테니까요." 덕개의 목소리엔 냉소적인 기운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라더를 보호해야 한다는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덕개, 너는 나를 비웃는 것이냐?" 라더는 허탈하게 물었다. 그의 눈은 이미 피로에 짓눌려 있었다. 왕위에 오른 이후 그의 생활은 끊임없는 고통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자신조차 자신을 지탱할 힘을 찾을 수 없었다.
"비웃는 게 아닙니다, 전하. 그저 상황을 현실적으로 보라는 뜻입니다. 지금 시민들은 성문 앞에서 전하의 목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하의 죽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전하가 무슨 결단을 내리든, 그들의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덕개의 말은 차갑고 무심했다.
“나는… 이 왕좌가 나를 잡아먹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나는 그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라더의 목소리는 깊은 한숨과 함께 터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며 점점 더 무너져가고 있었다.
덕개는 그런 라더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전하,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애초에 왕이 될 그릇이 아니었다는 걸요. 그저 당신은 운이 나빠서 이 자리에 앉게 된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너무 나빠졌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그들이 당신을 끌어내리고 말 겁니다. 뭐, 물론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라더는 덕개의 무심한 태도에 더욱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가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기사는 결국 자신을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덕개, 너는 왜… 그렇게 차갑게 말하는 것이냐?” 라더는 마지막으로 덕개에게 묻고 싶었다. 왜 자신에게 등을 돌렸는지, 그리고 그가 정말로 자신을 포기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차갑게요?” 덕개는 고개를 갸웃하며 비웃듯 말했다. “전하, 이 세상은 원래 차갑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약한 왕은 그저 이용당할 뿐이죠. 이제부터는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이제 당신을 지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큰 가치는 없으니까요.”
라더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어딘가에서 그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더 이상 덕개에게 무언가를 말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왕좌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시민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라더는 마침내 자신의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렇다면, 덕개. 나는 혼자서 이 자리에 남겠다. 너는 나가라.” 라더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결단력이 담겨 있었다.
덕개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뭐, 그럼 그리 하십시오, 전하. 저는 떠나겠습니다. 운이 좋길 바라죠.” 그렇게 말하며 덕개는 라더의 마지막 순간을 외면한 채 문을 닫고 사라졌다.
라더는 혼자가 되었다. 그는 다시금 천천히 왕좌에 앉았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가 성벽 너머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시민들이 들이닥쳐 그의 목숨을 앗아가리라는 것을 그는 알면서도, 그 순간이 오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왕국의 새로운 시대가, 그토록 긴 고통의 끝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라더가 왕좌에 앉아 눈을 감았을 때, 그 방 안에 남은 것은 오직 고요와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시민들의 발소리가 성벽을 넘고, 왕좌의 방으로 점점 다가오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지만, 라더는 그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마지막 순간을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들어온 것은 성난 시민들이 아니라 덕개였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와 라더 앞에 섰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고 냉정한 태도였다.
“아직도 여기 계셨군요, 전하.” 덕개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라더는 그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덕개, 너는 왜 돌아왔느냐? 너는 나를 버린 것이 아니었느냐?” 라더는 덕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에게는 덕개의 냉정한 시선이 너무나 낯설고, 이제는 그 어떤 기대도 걸고 싶지 않았다. 덕개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 바뀌어가는 듯한 기류가 감돌았다. 덕개는 천천히 검을 빼들고는 한 발짝 더 라더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검 끝이 왕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밑을 향해 있었다.
“전하,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왕국에 충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덕개는 무심한 듯이 말했다. “당신에게도, 그리고 이 왕좌에도. 그저 나 자신을 위해서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그저 나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쌓기 위해서 말입니다.”
라더는 그런 덕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너의 마음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하지만 왜 다시 돌아왔지? 나를 배신한 채로 떠나도 아무도 너를 막지 않았을 텐데.”
덕개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비웃음도 없었고, 분노도 없었다. 그저 허탈한 웃음이었다. “아무래도 저는 당신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당신이 죽는다면, 이 모든 혼란이 끝나도 저는 의미 없는 존재가 될 테니까요. 당신이 살아 있는 한, 저도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라더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는 이제 덕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덕개는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왕을 이용했을 뿐이지만, 그 목적의 끝에서 느껴진 허무함이 그를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의 목적은 이제 무엇이냐? 나를 지키는 것이 너의 최후의 의무라면, 넌 그 의무를 지키지 못할 것인데도.” 라더가 덤덤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 목적이겠지요, 전하.” 덕개는 검을 다시 칼집에 넣으며 말했다. “지금 시민들은 성문을 부수고 곧 이곳으로 밀려들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죠. 이 혼란을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직접 그들에게 나가는 겁니다.”
라더는 놀라며 덕개를 바라보았다. “나가라니… 시민들이 나를 원망하고 있지 않느냐? 내가 나가면, 그들은 나를 죽이려고 들 것이다.”
덕개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겠지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당신의 진정성을,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당신이 왕국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그들은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전하가 직접 나서서 그들을 진정시키고, 함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라더는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몸은 여전히 피로에 짓눌려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더는 무겁지 않았다. 덕개의 말대로, 그는 자신의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맞서는 것이었다.
“좋다, 덕개. 나가겠다. 하지만 네가 내 옆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을까?” 라더는 마지막으로 덕개를 바라보며 물었다.
덕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 속에는 이전과 다른 확고한 결심이 엿보였다. “물론입니다, 전하. 이번에는 진심으로 지킬 겁니다.”
그렇게 둘은 함께 왕좌의 방을 나섰다. 성난 군중들이 성문을 부수고 왕좌의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라더는 이제 두려움 없이 그들에게 나아갔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그리고 자신이 이 왕국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비전을 시민들에게 전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덕개는 라더의 뒤를 따라가며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언제든 왕을 지킬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히 직책 때문이 아닌, 라더를 진정으로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밖으로 나가자, 시민들이 성문을 넘어 왕궁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다. 라더는 성벽 위로 올라서서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왕으로서 여러분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분노를 이해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을 배신한 적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이 왕국을 다시 세우기 위해, 나와 함께 해주십시오!”
라더의 목소리는 강렬하게 울려 퍼졌고, 군중들은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덕개는 옆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과연 이 말이 그들을 진정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의 목소리는 금방 분노에 휩싸인 군중의 함성 속에서 희미하게 묻혔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전하려 애썼으나, 군중들은 이미 그들의 분노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덕개는 라더의 옆에서 차분하게 그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차가운 냉소가 서려 있었다.
"전하,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덕개는 조용히 말했다. 사실 그는 라더의 결단을 존중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대로 일이 흘러가는 것을 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라더는 덕개의 말을 들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다시 군중들에게 외쳤다. "나는 이 왕국을 배신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함께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때 군중 중 하나가 돌을 던졌다. 그 돌은 정확하게 라더의 이마에 맞았고,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라더는 충격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일어서려 했다. "나는—"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군중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왕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래도록 품고 있던 분노를 폭발시키며 라더에게로 돌진했다. 몇몇은 무기를 휘두르며 성문을 돌파했고, 라더는 그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덕개는 그 순간에도 검을 빼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차갑게 그 모든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덕개... 왜..." 라더는 마지막으로 덕개에게 손을 뻗었지만, 덕개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그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며 라더를 내려다보았다. "전하, 이건 피할 수 없는 결말입니다. 약한 자는 결국 강한 자에게 먹힐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요."
라더는 마지막 힘을 다해 덕개를 노려보았다. 그 안에는 배신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덕개는 그 모든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라더가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차분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라더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때, 시민들은 그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의 분노는 승리의 함성으로 바뀌었고, 그들은 라더의 죽음을 기뻐하며 왕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덕개는 왕좌의 방으로 돌아가, 피 묻은 왕좌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라더가 더 이상 없었다. 정확히는 숨이 붙어 제 눈앞에서 살아 숨쉬는 그가. 덕개는 천천히 왕좌에 앉았다. 차가운 웃음이 그의 입가에 번졌다.
"결국, 저는 이곳까지 이르게 되었군요."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허무함이 스며 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힘이었지만, 라더의 죽음과 함께 그가 느낀 것은 고독과 끝없는 공허뿐이었다. 덕개는 그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선택이었다. 왕국은 혁명 속에 빠져들었고, 덕개가 손에 쥔 것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라더의 죽음은 새로운 혼란의 시작일 뿐이었다. 왕좌에 앉은 덕개는 그 사실을 차갑게 받아들이며 어둠 속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