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11 HALL-A

사이버펑크 일상물

지구 반대편 베네수엘라라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만든 비주얼 노벨 게임. 사실 비주얼 노벨 게임은 역전재판이나 레이튼 시리즈처럼 게임 자체에 독특한 기믹이 있는 시리즈를 빼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플레이해본 적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이너해보이는 게임을 플레이하게 된 건 그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일러스트, UI, 폰트... 모든 것이 도트다. 도트. 난 도트 그래픽이 좋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말로 게임같은, 개성적인 그래픽이 좋다. 거기다가 뭔가 도트와는 상반되는 미래적인 분위기까지. 분위기에 홀린 나는 게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로 게임을 구매해버렸다. 이렇게 충동구매하면 안되는데...

게임의 구성은 이렇다. 방 안에서 뒹굴거리던 바텐더, 질은 바로 출근한다. 그곳에서 술을 만들고, 술을 먹이고,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게 끝이다. 스토리 보고 하는 게임인데 스토리에 커다란 기승전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게임의 끝을 맺어주는 사건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사건은 게임이 후반부가 되어서야 등장하고, 해당 사건 후에도 이야기가 그 사건 위주로만 돌아가도록 변하지도 않는다. 심지어는 비주얼 노벨의 필수요소라는 대화 선택지마저 없다.

그렇다면 이 게임은 무슨 재미로 하는 걸까 싶지만 웬걸. 재밌었다. 바텐더라는 직업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언론사 사장, 스트리머, 탐정, 전경, 학생, 말하기 곤란한 직업까지. 별별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폐업 직전의 바를 방문한다. 주인공은 그들이 원하는 술을 내주고, 그들은 자신의 일상이나 생각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매우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동시에 현실적이다. 이게 뭔소린지 설명하려면 일단 이 게임의 배경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주인공이 일하는 세계는 과학기술이 매우 발전한 미래세계다. 거리에는 로봇들이 사람 말을 쓰면서 돌아다니고, 통 속의 뇌가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고, 사람 말을 하는 개들이 회사를 차린다. 하지만, 기술의 화려함에는 이면도 있다. 공권력은 부패해 돈 많은 기업과 손을 잡았고, 뉴스에는 각종 사건사고들이 흘러나온다. 암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깔려있는 22세기 버전 할렘가, 글리치 시티 구석의 폐업을 앞둔 술집 VA-11 HALL-A가 우리의 주인공 질이 일하는 곳이다.

이처럼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곳이지만, 바를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묘하게 일상적이다. 우리도 한 번쯤 해봤을 법한 고민들과 생각들이 주를 이룬다. 연애, 학업, 진로, 일, 가족 등등. 거기에 매력적인 사이버펑크 세계관 한 스푼. 당장이라도 로봇과 사람이 전쟁을 벌이고 빅 브라더에 대항하는 해커 집단이 활동을 시작하도 어색하지 않은 세계가 배경이고, 실제로 게임 내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긴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질은 군인이나 반정부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바텐더다. 게임 세계관 내에서 벌어지는 사이버펑크한 사건들은 제3자인 주인공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단지, 그 사건과 연관이 있는 손님들의 입을 빌려 언급될 뿐.

바텐더인 질이 만나는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일화는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일상적 느낌을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이런 비현실적 세계에서의 일상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질의 휴대폰이다. 지금의 우리들처럼, 질 역시 퇴근 후에는 집에 가서 휴대폰을 만진다. 질의 휴대폰에 설치되어 있는 SNS와 익명 커뮤니티, 뉴스 앱 등은 질의 바 밖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2010년대와 닮아있는 20XX년대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전히 사람들은 아이돌에 열광하고, 짝사랑 때문에 고민하며, 무능력한 정치인들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 아주 까마득한 옛날에 쓰인 동굴 속 벽화에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 라는 글귀가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렇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변해도 똑같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로봇 경찰들이 돌아다니고 거리에는 항상 네온사인들이 빛나는 사이버펑크스러운 장소인 글리치 시티에서도 똑같다.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공간이라고 모두가 특별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도 소시민이 있고, 시시콜콜한 일상이 있다.

특출나게 대단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 없이도,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반전의 반전이 튀어나오는 스토리 없이도 이 게임은 플레이어를 글리치 시티라는 낯설면서도 친숙한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그러고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만든다. 똑같은 UI 속 반복되는 스프라이트들 너머로, 우리의 일상이 펼쳐지고 있는 글리치 시티에 매력을 느끼게 만든다. 이처럼 VA-11 HALL-A는 게임의 몰입도를 결정하는 것이 길고 디테일한 컷씬이 아님을 보여준다. 투박한 도트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게 가능하다. 매력적인 이야기만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