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vel's Spider-Man

스파이더맨식 오픈월드

나는 스파이더맨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마블 영화들을 좋아한다. 코믹스를 챙겨본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 개봉한 스파이더맨의 실사영화는 전부 관람했고, 남는 시간에 이것저것 정보들을 찾아본 덕에 스파이더맨의 세계관이나 등장인물같은 것들도 대충 알고 있다. 열성 팬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건 스파이더맨 게임이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현대 배경의 RPG. 사실 무난하게 재밌다는 평을 보고 그렇게 큰 기대를 하고 있진 않았으나... 웬걸.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취향이었다.

직관적인 시스템

제일 먼저 게임의 직관성을 칭찬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RPG에 있는 장비 강화나 스킬트리같은 디테일한 요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해야 되는게 너무 많다. 장비는 뭘 사야되고, 강화는 어떻게 해야되고, 스킬은 어느 순서대로 찍어야 되고... 물론 게임의 시스템을 완벽히 이해한다면 그걸 파고드는 데에서 오는 재미가 또 있겠지만 그게 귀찮을 때가 많다. 나는 빨리 돌아다니면서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고 싶은데 뭘 자꾸 시키고 고민하고 계산하게 한다.

반면 스파이더맨은 쉽다. 물론 스킬트리나 장비의 수집과 강화는 존재하지만, 시스템을 이해하는게 어렵지 않다. 스킬트리는 기동성, 공격, 방어 세 가지로 명확하게 분류되는 동시에 일직선 형태를 띄고 있고, 스킬 포인트의 습득도 어렵지 않기에 비교적 쉽게 모든 스킬을 마스터할 수 있다. 장비 강화 역시 일직선으로 이루어지고, 장비도 코스튬의 성격이 강하다. 누군가는 이런 시스템을 깊이가 없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으나, 군더더기 없이 액션과 스토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나는 좋게 봤다.

정말로 스파이더맨이 된 것 같은 액션

액션 역시 직관적이다. 스파이더맨하면 떠오르는 거미줄 액션을 훌륭하게 구현해냈다. 영화에서 봤던 스파이더맨의 움직임이 그대로 게임 속에 반영되었다. 그것도 매우 쉬운 방법으로. 이동을 할 때는 그렇게 디테일한 타겟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버튼을 누르면 알아서 적당한 곳에 거미줄을 쏘고 날아다닌다. 조작 자체는 별거 없지만 플레이어의 눈 앞에 펼쳐지는 빌딩숲의 모습이 이동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레이싱 게임을 연상하면 편하다. 마치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타고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스파이더맨의 특성을 살린 속도감 있는 이동은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든다. 빌딩숲을 날아다니는 쾌감이 상당해서, 빠른 이동 기능도 거의 쓰지 않게 될 정도다.

전투는 QTE로 이루어지며, 아무 키나 마구잡이로 눌러도 스파이더맨이 화려한 액션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너무 마구잡이로 누르다가는 나중에 고생 좀 하겠지만. 거미줄로 묶고, 묶어서 던지고, 던지던 걸 잡아서 빙빙 돌리고, 빙빙 돌리던 걸 다시 벽에 붙이고... 액션의 활용은 간단하면서도 무궁무진하다.

잠입 액션의 성격 역시 띄고 있다. 적에게 들키지 않으면 원킬이 가능하다. 적의 시선을 돌린 후, 적을 은밀하게 하나하나 처치해가는 과정은 화려한 액션과는 다른 재미를 준다.

하나같이 겁이 없는 스파이더맨의 주변 인물들 덕에 스토리 진행 중 플레이어블이 바뀌면서 잠입 플레이가 강제되기도 한다. 맨몸으로 킹핀의 본거지에 잠입한 메리 제인이나, 경찰이 가지 말라고 말리는 곳을 굳이 들어가는 마일즈 모랄레스로 종종 게임의 시점이 바뀐다. 해당 파트에서 게임 오버 화면을 굉장히 많이 봤고, 이딴 파트를 왜 만든거야 하면서 짜증도 냈지만... 결론적으로 재밌는 시도였다.

반면 쓸데없는 퍼즐들은 정말 왜 만든건가 싶다. 어려운 건 아닌데 원패턴이라 재미도 없고 게임의 흐름을 종종 잘라먹는다. 뭔가 RPG면 퍼즐 요소도 있어야지! 하고 억지로 집어넣은 느낌이 강했다. 까먹을 때쯤 되면 튀어나와서 귀찮게 한다.

(팬한테는) 매력적인 스토리

스토리에서는 팬들이라면 반가워할 많은 원작 캐릭터들을 등장시킴과 동시에 그들의 캐릭터성에 약간의 변주를 가했다. 시니스터 식스부터 노먼 오스본, 메리 제인, JJJ, 심지어 마일즈 모랄레스까지 나오지만 이들의 캐릭터성은 원작과 조금 다르다. JJJ는 피터 파커와 만난 적이 없고, MJ는 피터와 이미 헤어진 상태다. 특히 노먼 오스본과 해리 오스본의 캐릭터성이 크게 변화했는데, 나는 이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빌런이 된 동기라던가, 작중 활약이 예상과 크게 달랐다. 여러모로 새로웠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팬의 입장이다.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는 나는 와! 시니스터 식스! 그린 고블린 아시는구나! 하면서 곳곳에 등장하는 반가운 얼굴들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복선에 흥미로워했지만, 정말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만 아는 사람이라면 뜬금없이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뭔가 찝찝하게 끝나는 이야기에 답답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잘한 것들을 몰라도 메인 스토리를 이해하는데는 지장이 없고, 진입장벽 낮춘답시고 등장인물 여럿 잘라내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이거다. 무난하지만, 알면 더 재밌다.

오픈월드에서 친절한 이웃 되기

오픈월드에서 중요한게 또 뭐냐. 바로 맵이다. 맵이 넓어야 한다. 동시에 맵의 밀도가 높고 즐길거리가 많아야 한다. 그리고, 정말 넓이만 본다면, 스파이더맨의 맵은 꽤 넓은 편이다. 문제는 스파이더맨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거미줄을 쏘면서 빌딩 숲 사이를 날아다니는 스파이더맨은 맵을 걸어다니면서 주변을 탐색할 일이 없고, 당연히 맵을 디테일하게 살펴볼 일도 없어진다. 맵은 넓지만, 차보다 빠른 속도로 돌아다니는 게 가능한 스파이더맨에게 맵은 체감상 다소 좁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히려 이 점이 기존과는 다소 다른 매력의 오픈월드를 구현해냈다. 속도감 있는 오픈월드. 위에서 언급했듯, 이동 자체가 화려한 액션을 통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덕분에 맵의 세밀한 부분은 그냥 지나치게 되고, 맵의 디테일한 상호작용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경찰들의 SOS가 스파이더맨을 불러세운다. 맵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탐색하는 대신, 빌딩숲을 활보하는 스파이더맨을 크고 작은 이벤트로 불러세우고 특정 장소로 유도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PS4 스파이더맨은 '뉴욕의 친절한 이웃'이라는 스파이더맨의 설정을 오픈월드에 접목시켜 이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담아냈다.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빌런들만 잡는 게 아니다. 빌런을 잡으러 가는 길에 강도에게 고통받는 시민이 있으면 구해야 한다.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 길에도 깡패들이 난리치고 있으면 찾아가서 혼내줘야 한다. 통쾌한 거미줄 액션을 바탕으로 빠른 이동의 필요성을 크게 줄여버렸고, 동시에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렇게 목표 지점으로 날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자잘한 범죄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스파이더맨식 오픈월드

주관적으로 볼 때, 이건 굉장히 재밌는 게임이었다. 영화 속 스파이더맨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화려한 거미줄 액션, 이동하는 시간조차도 눈을 쉬지 못하게 만드는 속도감 있는 이동 방식과 빌딩 숲들... 거기에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플레이어를 불러세우는 자잘한 이벤트들까지.

물론 그 이벤트들의 진행 방식은 정해져 있고, 나름 차별화를 준다고 도입한 연구 미션이나 사이드 퀘스트들도 대부분의 경우 크게 참신하거나 대단하지 않다. 기껏해야 플레이에 핸디캡을 좀 줘서 난이도를 높이거나, 저 위에서 말한 90년대 퍼즐을 써먹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레드 데드 리뎀션 2>처럼 각각의 퀘스트들이 나름의 깊이감 있는 스토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래도, 스파이더맨이라는 강력한 파워를 지닌 캐릭터를 정면에 내세웠고, 그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를 게임 내에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파고들기나 자잘한 퀘스트들의 스토리, 또는 전략적 요소는 조금 부족할지 모른다. 대신에 인썸니악 게임즈는 웹 스윙이 선사하는 화려하고 속도감 있는 액션을 바탕으로 스파이더맨이기에 만들 수 있는 방식의 오픈월드를 구현해냈다. 스파이더맨이 무슨 캐릭터인지 알고만 있다면, 그냥 메인 스토리 밀면서 적당히 이벤트들 보기만 해도 보장된 재미를 선사한다.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잠재력에 비해 제대로 된 스파이더맨 게임이 거의 전무하던 상황에서 드디어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를 제대로 써먹는 게임이 나온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다른 매력적인 마블 캐릭터들도 게임으로 탄생할 수 있길 기대한다. 아이언맨VR같은거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