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iod of Newton (1596~1783)
데카르트 ~ 달람베르
Geometry of Descartes (x)
근데 철학의 아버지,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아래의 문구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 René Descartes (in his book "방법서설, Discourse on the Method", 1637).
데카르트 하면 좌표계를 빼놓을 수 없다. 직각좌표계는 영어로 그의 이름을 따 Rectangular Cartesian Coordinate system이라 한다. 좌표계를 생각하게 된 계기에 대한 설은 다양한데, 그중에 하나는 군 장교 복무 시절에 막사에서 날벌레를 보고 그 위치를 추적하려다 만들었다는 설이다. 그는 해석기하학(analytic geometry)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수학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한편 그는 방정식에 처음으로 x라는 미지수를 사용하였으며, 그의 책 "방법서설(1637)"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유럽의 30년 전쟁 때문에 군에 입대하였지만, 1633년 갈릴레이의 저작이 모두 불테워졌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과학을 버리고 철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정신은 분할 불가능하지만 물질은 분할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정신과 육쳬를 각각 두 실체로 규정한 심신이원론(Mind-body dualism)을 주장했다. 오! 이것은 조선시대 율곡 이이(1537~1584) 학파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아닌가? 실천철학에서 현실을 개척해야 하는 입장 때문에 존재의 현실적 요소인 기를 강조했다고 한다. (붕당의 시작이었다 ... 이 때까지만 해도 동양이 철학에서 서양보다 앞서 있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변호사, 현대에는 수학자로 유명하다. 페르마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수학은 취미로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이 더 유명하게 된 이유는 그가 그리스 수학자 디오판토스(Diophantus, 214~298)의 책 "산술(Arithmetica)"의 여백에 이 정리를 쓰고 "나는 이문제에 대한 놀라운 증명을 알고 있으나 여백이 부족하여 여기에 적지 않는다."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Cubum autem in duos cubos, aut quadratoquadratum in duos quadratoquadratos & generaliter nullam in infinitum ultra quadratum potestatem in duos eiusdem nominis fas est dividere cuius rei demonstrationem mirabilem sane detexi. Hanc marginis exiguitas non caperet." in the margin of the Arithmetica around 1637 ...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도전했으나 실패했으며 도전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줬다. 그러나 결국 1995년 영국의 수학자 앤드류 와일즈(Andrew J. Wiles)가 수학 학술지 Annals of Mathematics에 두 편의 논문을 출판하면서 세기의 떡밥 논란은 마무리되었다.
후크는 우리에게 후크의 법칙(Hooke's law)으로 친숙하지만, 폴리매스라는 칭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최초로 미소 스케일에서 생물을 탐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62년부터 Royal Society의 Fellow였으며, 1665년에는 세포(cell)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Micrographia (오른쪽 그림) 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빛의 굴절(refraction)을 연구하면서 빛이 파동이라는 것을 추론하기도 하였다.
후크의 법칙이라는 탄성학 법칙은 1660년에 발견되었으며, 스프링에 작용하는 힘과 변위는 선형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는 단순조화운동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데 쓰이기도 하였다. An elastic body or material for which this equation can be assumed is said to be linear-elastic or Hookean.
Micrographia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시대의 키맨이었으며, 그 유명한 뉴턴의 책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프리키피아)을 1687년에 출판하였다. 이 책은 이전의 많은 결과들을 통합하고 고전역학(classical mechanics)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빛에 관해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Opticks (1704)라는 책에서 음속을 처음으로 이론적으로 계산하였다. 뉴턴은 Trinity College(캠브리지 대학의 대표적인 칼리지; 여기서 칼리지는 현대의 단과대학 개념은 아니다. 해리포터 참고)의 Fellow 그리고 캠브리지 대학교 수학과의 Lucasian Professor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도 많은 영광을 누렸는데, 대표적으로 왕립학회의 회장(1703~1727)을 역임하였다.
스위스 바젤 출신으로 1676년 영국 여행 중에 보일과 후크를 만난 것을 계기로 과학과 수학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와 교류하며 그의 논문 "Nova Methodus pro Maximis et Minimis(1684, Acta Eruditorum)"을 통해 미적분을 동생 요한과 연구하였다.
야코프는 변분법(the calculus of variations)이라는 새로운 계산 방법을 개발한 사람이며, 또한 기초적인 수학 상수 e를 발견하였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업적이 있는데, 가장 큰 기여는 확률론(큰 수의 법칙,LLN, 최초 유도)에 있다.
우리에게는 공학수학 1계 상미분 방정식에서 베르누이 미분방정식으로 친숙하다. 그가 바로 야코프 베르누이 이다. y'+p(x) y=q(x) y^n
스위스 바젤 출신 수학자로, 큰형이 야코프이고, 그의 아들이 다니엘 베르누이이다. 박사학위 지도교수 중 한명이 그의 큰형 야코프(@.@)이다. 그리고 그의 대표적 제자들 중에는 다니엘과 오일러(Leohard Euler, 1707~1783)가 있다. 그는 약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약학을 전공하여 바젤대학에서 169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720년에 대학에 갓 입학한 오일러를 가르치면서 수학에 입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약학을 전공하면서도 수학을 공부한 그는 1693년부터 라이프니츠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수학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한편 프랑스의 수학자 로피탈(Guillaume de l'Hôpital, 1661~1704; 로피탈 정리의 그 로피탈)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그에게 미적분학을 가르쳤다. 요한이 프랑스를 떠난 후에 로피탈은 미적분학에 관한 저서를 1696년에 출간하였으며, 이 저서에 유명한 로피탈의 규칙이 처음으로 활자로 쓰였다(규칙 자체는 로피탈이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905년에 바젤에 돌아와서 수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라이프니츠의 학생으로써 요한은 라이프니츠-뉴턴 논쟁(Leibniz–Newton debate, 1699~1716; EBS-사이언스: 뉴턴vs라이프니치의 미적분 이야기)에서 1713년에 그의 편을 들었다.(종합설계 수업 등에서 한번쯤 만들어보았을 싸이클로이드에 관한 역사가 이 논쟁의 한 부분이다.) 한편 그는 가상일의 원리를 처음 제안한 것으로 유명한데, 라이프니츠의 개념을 발전시켜 1715년 피에르 바리뇽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후에 바리뇽이 저서로 1725년에 출간하였다.
스위스 수학자, 물리학자이다. 베르누이 가문에서도 뛰어난 수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네델란드 태생이다. 그는 수학을 역학에 적용한 것으로 유명한데, 유체역학 분야에서 잘 알려진 이름 베르누이가 바로 다니엘이다. 그의 저서 유체역학(Hydrodynamica, 1738)에서 베르누이 정리를 발표하였으며, 유체역학을 식으로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아버지 요한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들과 비교되는 '불명예'를 견디지 못한 요한은 그를 집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얼마나 천재였던거야...). 오일러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가까운 친구였다 (둘다 요한의 제자). 필자에게 매우 친숙한 오일러-베르누이 보 이론을 오일러와 같이 연구했으며, 보 이론의 기초가 된 탄성 곡선(elastica) 자체는 야코프 베르누이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진동계의 일반적인 움직임은 여러 고유 진동의 중첩으로 구성된다"에서의 중첩 원리를 1753년에 처음 도입하였다.
Statues of Isaac Newton and Gottfried Wilhelm Leibniz in the courtyard of the Oxford University Museum of Natural History, collage.
Daniel Bernoulli and his book Hydrodynamica (1738)
Methodus inveniendi lineas curvas (1744) - Euler's book
스위스 바젤 태생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논리학자, 공학자이다.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 아르키메데스, 뉴턴 등과 함께 수학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현대 수학에서 사용하는 기호, 표기법 등을 처음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만약 그의 책을 현대인이 읽는다고 해도 큰 괴리감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1723년에 데카르트와 뉴턴의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1726년에 음향의 전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727년에는 파리 아카데미 문제 풀이 경연에서 2등을 하였으며, 이후 매년 열리는 경연에서 총 12번 수상하였다고 한다.
요한 베르누이에게 수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13세에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20세인 1727년에 요한의 아들 다니엘 베르누이가교수로 있던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로 갔다. 1733년 다니엘이 러시아를 떠나자 오일러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26세에 수학과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그는 과한 연구로 인해 1735년, 28살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되었으며, 이후 1741년 베를린 아카데미로 옮겨가서 26년간 머물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하루 20시간 이상을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결국 백내장으로 다른 한 쪽의 눈도 시력을 잃게 되어 1766년부터는 맹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력을 잃은 후에 낸 논문의 양이 전보다 훨씬 많으며, 대부분의 계산은 암산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 나무위키, 안될과학:오일러 그는 누구인가)
오일러의 업적은 너무 많아서 다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이나,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은 예로는 오일러 공식, 가장 아름다운 수식, 오일러 방정식, 한붓그리기 등이 있다. 1734~1735년 경에는 x의 함수를 f(x)로 처음 표기하였으며, 1737년에는 원주율의 기호로 π를 채택하고, 1777년에는 허수 단위의 기호로 i를 썼으며, 합을 나타내는 기호로 ∑를 도입하였다.
곡선에 관한 유명한 책 Methodus inveniendi lineas curvas (1744)를 베를린에서 머문시기에 출판하였다. 한편 공학수학과 고체역학에서도 오일러의 이름을 볼수 있는데, 코시-오일러 방정식, 오일러 각, 보의 곡률, 좌굴임계하중 등이 대표적이다. 오일러는 유체장의 기술 방법도 고안하였는데, 특정한 구역를 지정하여 그곳에서의 시간에 따른 유체의 출입을 계산하는 방식이다. 이는 현대에 오일러리안 기술법(Eulerian or Spatial coordinate)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흔히 입자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랑그랑지안 기술법(Lagrangian or Material coordinate)과 비교된다. 고체역학에서는 비선형을 다룰 때 사용되며, 선형일 경우에는 두 방법이 모두 같은 결과를 보이며, 비선형에서는 두 방법이 모두 쓰이지만, 아무래도 관성좌표계에서 움직임을 추적하는 라그랑지안 방법이 더 선호된다. 비선형성이 매우 큰 경우에는 오일러리안이 보다 간결한 식을 주기 때문에 논문에서는 자주 쓰인다.
오일러는 18세기의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룩한 위대한 수학자 중 한 사람이며, 그의 사후에 많은 위대한 수학자들이 오일러의 업적을 칭송했다고 한다.
Pierre-Simon Laplace (1749~1827)
Read Euler, read Euler, he is the master of us all.
Carl Friedrich Gauss (1777~1855)
The study of Euler's works will remain the best school for the different fields of mathematics, and nothing else can replace it.
프랑스 파리 태생의 수학자, 철학자, 물리학자이다. 그는 12세에 현 파리 대학교의 전인 콜레주 데 카트르나시옹에 입학하여 카톨릭 신학을 공부하였고, 1735년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에 법학을 공부하여 1738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고 한다. 그의 제자 중 유명한 학생으로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 1749~1827)가 있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파동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달랑베르 공식이 있다. 유명한 달랑베르의 원리는 1743년 역학론(Traité de dynamique)을 저술하였을 때 알려졌다. 이 원리는 라그랑주 역학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1747년에 현의 진동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파동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달랑베르 공식이다.
한편 1752년에는 달랑베르의 역설(D'Alembert's paradox)로 알려진 내용을 처음으로 기술하였다. 비점성, 비압축성, 포텐셜 이론에 따르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의 항력은 0이라는 것이다. 유체역학에서 이 증명은 이후에 많은 연구를 촉발하였다.
D'Alembert's principle generalizes the principle of virtual work from static to dynamical systems by introducing forces of inertia which result in dynamic equilibrium. (His contribution was to demonstrate that the forces of constraint vanish.)
A general solution of the one-dimensional wave equation is referred to as d'Alembert's formula (1747).
D'Alembert's paradox: the drag force is zero on a body moving with constant velocity (1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