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결말』
@HHHey_bkak
연애의 결말은 두 가지이다. 완전한 남이 되거나, 완전한 우리가 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영원을 약속하는 아름다운 결말, 결혼. 어린 아카아시에게도 이러한 로망이 있었다. 왜, 동화를 보면 항상 결말은 ‘그렇게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가. 부모님의 결혼사진을 봐도,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흔한 로맨스 소설을 읽어도, 다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데, 왜 자신에게는 이러한 결말이 와주지 않는 것인지. 아카아시는 자신의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다 이내 눈을 돌리고 식당 옆 골목으로 들어가 담배를 물었다.
***
첫사랑이었던 대학 선배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게 한 장본인이었다. 누구와도 있어도 눈에 띄던 사람, 항상 사람들의 중심에 있던 선배를 아카아시는 조금씩 눈으로 좇고 있었고, 그 선배는 그러한 아카아시에게 먼저 다가왔다. 첫사랑과 첫 연애. 그러나 달콤한 줄 알았던 첫사랑과의 연애는 6개월이 채 되지 않고 막을 내렸다.
‘아카아시라면, 남자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미안해’
상처만 남은 첫 연애를 마친 아카아시는 이후 자신과 같은 성향의 사람들만 만나고자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된 연애를 한 건 아니지만. 두 번째 연애 상대는 바에서 만난 남자였다. 그러나 그와는 몸으로 시작해서 몸으로 끝난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그 이후 아카아시는 일회성 만남만을 지속했다.
그리고 현재의 세 번째 연애 상대. 연애와 결혼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한 아카아시가 처음으로 좋은 결말을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든 상대였다. 1주년 기념일,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일상적이지도 않았던, 사실 조금 많이 설렜던 그 날, 그는 아카아시에게 제 인생에 아카아시와 같은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라고,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고백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한 평생에서 이제 겨우 몇 개월 지나지 않았는데, 떨리는 손으로 아카아시의 손을 잡으며 고백했던 남자는 그 손으로 현재 제 눈앞에서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둘의 얼굴이 가까워지며 입술이 마주치는 것을 본 아카아시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라리 동거하지 않아서 다행인가….’
최근 연락이 뜸해지고, 오랜만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닌 핸드폰에 집중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아카아시는 어렴풋이 느꼈었다. 끝이 다가오겠구나. 사실 아카아시는 믿고 싶지 않았다. 1주년 기념일에 봤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렸으니까. 그러나 너무 쉽게 사람을 믿은 게 아니냐는 듯, 현실은 잔인하게도 아카아시에게 또 한번의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했다.
지금이라도 저기로 가서 무슨 상황이냐고 따질까. 자신의 애인이 있던 자리로 고래를 돌린 아카아시는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 술집에서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 것을 보며 하는 수 없이 원래 식당에서 나온 목적이었던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손가락만 한 작은 라이터는 손에 잡히지 않고 담배 케이스만 있는 주머니 속 아카아시의 손은 방황만 하고 있었다. 되는 일이 없냐, 오늘. 아카아시는 입에 문 담배를 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겨울이 오기 전, 저녁에 느껴지는 바람은 차가운 냄새를 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지. 아카아시는 불 붙이지 못한 담배 필터를 살짝 씹으며 바로 다시 들어가려는 순간 어떤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이터 없으시면, 이거 쓰세요.”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큰 키에 옅은 회색과 검정색이 섞인 올림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라이터를 건네고 있었다. 자신도 꽤 큰 키라고 자부하는 아카아시였음에도 남자는 아카아시가 고개를 살짝 올려야 눈이 마주치는 큰 키였다. 어두운 골목 사이에서도 밝게 빛나는 노란 눈동자, 자신도 모르게 멍하게 남자를 쳐다본 아카아시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라이터를 받아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하며 담배에 불을 붙인 아카아시는 라이터를 남자에게 돌려주곤 담배 연기를 뱉었다. 라이터를 다시 받아 든 남자는 주머니에 라이터를 넣곤 자리를 뜨지 않고 아카아시의 옆에 서 있었다. 뭐지, 담배도 안 피면서 왜 계속 여기 서 있는 거야. 아카아시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다 몸을 돌려 남자를 향해 섰다.
“저기, 혹시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
“…아. 그게, 음, 아니요.”
“그래요? 계속 쳐다보시는 것 같길래, 혹시 예전에 뵌 분인가 해서요.”
“그런 건, 아닙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뭐, 라이터 빌려주신 분한테 기분 나쁠 것까지야….”
자신의 고객이었나 싶은 마음에 건넨 말이었지만 그도 아니었으며, 정말 혹여나 일회성 만남을 즐기던 시절 잠시 지나간 사람인가 싶었으나 그마저도 아니었다. 하긴, 저런 남자를 쉽게 잊을 리가. 아카아시는 살짝 도톰한 니트를 입고 있었음에도 그의 몸이 굉장히 좋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낮지만 기분 좋은 목소리. 저런 사람을 만났다면 분명 자신은 단 한 번의 밤만을 보내지 않았겠지.
‘애초에 이쪽인지도 모르면서, 평가는.’
방금 애인과 이별 아닌 이별을 겪어서 그런지 괜한 외로움이 몰려온 듯했다. 그러니 처음 만난 사람의 몸을 평가하고 있을지도. 아카아시는 괜히 민망해져 고개를 돌리곤 차가운 밤바람에 뿌옇게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멍하게 쳐다봤다.
“…오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봐요.”
“네…?”
얘기,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안 갔나?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남자를 쳐다봤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아. 초면에 좀, 그랬죠?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도 많으시네요. 뭐,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맞죠. … 방금, 애인이 다른 남자랑 키스하고 있는 걸 봤거든요.”
“아…. 그렇, 군요.”
“최근에 관계가 좀 소원해져서… 그래서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네요.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지만.”
괜스레 가볍게 말하는 아카아시의 대답에 남자는 자신이 할 말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카아시는 그저 타들어가고 있는 담배를 톡, 톡 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남자가 입을 열려는 순간, 아카아시의 핸드폰에서 벨이 울렸다.
“그…”
“잠시, 전화가…. 네, 선배. 아, 아니에요. 바로 옆 골목이요. 네. 네, 지금 갈게요.”
전화를 끊은 아카아시는 핸드폰에 뜬 시간을 보곤 당황했다. 맞다, 나 회식 중이었지. 잠시 담배 피우겠다며 자리를 비운 아카아시는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갑자기 일어난 탓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화로 인해 말이 끊긴 남자는 옆에서 아카아시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찾는 것 같던데, 얼른 들어가 보세요.”
“아, 죄송해요. 회식 중이었어서…. 라이터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인사를 마친 아카아시는 골목을 벗어나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카아시가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본 남자, 보쿠토 코타로는 작게 숨을 내뱉곤 자리를 벗어났다.
***
주말 동안 아카아시는 바쁘게 지냈다. 늦게까지 이어진 회식으로 오전까지 숙취에 시달리긴 했으나 마음을 비우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집을 청소했다. 애인은 어제 같이 있던 남자와 결국 하루를 보낸 것인지 아카아시의 핸드폰에는 라인 하나 오지 않았다. 애써 연락 없는 핸드폰을 무시하며 집 청소를 시작한 아카아시는 그간 애인에게 받았던 선물과 그의 물건들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물건이 하나둘 제 자리에서 사라지며 조금은 쓸쓸하게도 느껴졌다. 어린 시절처럼 울며 하루를 보내는 시기는 이미 지났으나 그래도 물건을 정리하면서 남은 감정의 잔해까지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결국, 아니었네.’
행복한 연애와 꿈같은 결혼. 이미 미련을 버려서 큰 상관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번 애인은 평생이나 결혼, 마지막과 같은 말들을 자주 했던 터라 아카아시조차 내심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회의적인 태도가 그를 질리게 만든 것인지, 그저 말로만 그렇게 표현했던 사람이었던 것인지, 결국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택했다. 이제 자신의 연애는 행복한 결말 따위 정말로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아카아시는 천천히 물건들을 박스에 정리하곤 장롱 깊숙한 곳에 넣었다.
주말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다시 바쁘게 일에 집중해야 하는 월요일 아침, 아카아시는 출근 후 자신의 사무실에서 미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요일은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푹 쉬었음에도 불구하고 늦은 오후 애인에게 온 연락으로 인해 아카아시의 기분은 월요일인 오늘, 여전히 좋지 않았다.
「나 사실 다른 사람 생겼어. 미안. 답장은 안해도 돼.」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건데. 배신감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차였다고 생각이 드는 말투 때문인지 왠지 모를 우울함에 아카아시는 괜히 자신의 앞에 있는 웨딩브로셔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명색에 직업이 웨딩플래너면서, 본인의 연애는 왜 이 모양인지.
그래, 누군가의 행복한 결혼을 만들어주는 걸로 만족하자. 행복한 결말만이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닐 테니. 새드 엔딩을 그리는 자신의 연애와는 달리 자신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 미팅이 끝나가며 아카아시는 자신의 앞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커플을 보곤 자신의 플래너에 일정을 적곤 날짜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러면, 드레스 투어는 이날 하시는 걸로 잡아놓겠습니다. 혹시 다른 변동사항이 있으실까요?”
“아뇨, 없어요! 자기야, 너무 기대된다. 그치?”
밝게 대답한 여자는 자신의 옆에 앉은 남자의 팔짱을 끼곤 어깨에 기대 웃었다. 두 남녀의 행복한 모습을 마주한 아카아시는 자신도 모르게 부러움을 느끼다 이내 생각을 지우곤, 드레스샵 브로셔와 명함 등을 정리해 커플에게 전달했다. 명함을 받아 든 여자는 아카아시를 슬쩍 보곤 입을 열었다.
“근데, 플래너님. 혹시 오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네? 아, 아뇨. 왜 그런….”
“아니시다면 다행인데, 오늘 플래너님 분위기가 평소랑 다른 것 같아서….”
“아…. 별일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혹시, 주말에 시간 있으시면… 전시회라도 보러 가시는 게 어떠세요? 제가 티켓은 드릴게요. 기분이 안 좋을 때 전시회같은 데 가면 좋더라구요. 아,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받은 건데 저는 못 갈 것 같아서요.”
“네? 아뇨, 괜찮습니다. 괜히 제가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저희 웨딩 플랜도 엄청 꼼꼼하게 챙겨주시고, 이런 플래너님 만나기 힘들다던데. 항상 감사해서 그래요.”
여자는 가방에서 편지봉투처럼 생긴 봉투를 꺼내곤 그 안에 있던 티켓을 꺼내 아카아시에게 전했다. 얼떨결에 티켓을 받은 아카아시는 그 위에 쓰인 글자들을 읽어내려갔다.
‘보쿠토 코타로 사진전, 그리워하는 시간에서’
“이 사진전, 엄청 유명한 전시에요! 시간이 되면 제가 갔으면 했지만… 뭐, 이렇게라도 플래너님이 가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들고 다니길 잘했네요!”
“감사합니다…. 꼭 시간 내서 가볼게요.”
티켓을 전해준 여자는 해맑게 웃으며 남자와 함께 사무실을 나갔다. 내 기분이 그렇게 안 좋아 보였나? 아카아시는 핸드폰을 들어 얼굴을 비추곤 자신의 표정을 살폈으나 어두운 화면 속에는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이 있었을 뿐이었다. 평소와 똑같아 보이는데…. 그러나 사람의 기분은 단순히 표정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사실을 아카아시는 몰랐다.
***
이번 주는 유난히도 빠르게 지나가 아카아시는 전 애인을 생각할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기억은 점차 지워질 것이고 그 또한 술자리에서 가볍게 얘기하고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될 테니. 금요일 저녁, 아카아시는 퇴근 후 샤워를 하곤 캔 맥주 하나를 꺼내 들고 TV 앞으로 갔다. TV에선 이미 몇 년 전 유행하던 드라마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드라마를 감흥 없이 보고 있던 아카아시는 그저 손에 든 캔 맥주만 홀짝이고 있었다. 만일 자신의 연애가 드라마였더라면, 매일같이 시청자 게시판에는 항의가 올라왔겠지, 너무 뻔한 막장 스토리라고.
‘그러고 보니 저 남자 주인공, 그때 그 남자랑 분위기가 비슷하네.’
지난주 회식, 자신에게 라이터를 건네준 남자를 떠올린 아카아시는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에 그를 비춰보고 있었다. 높게 올린 머리와 큰 키, 낮은 목소리는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으나, 주인공을 자세히 본 아카아시는 이내 그가 결코 드라마 속 주인공과 닮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 먹은 맥주 캔을 들고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에 맥주 캔을 내려놓은 아카아시는 대충 걸린 자신의 가방을 보곤 순간 잊고 있던 물건 하나를 생각해냈다. 전시회 티켓, 언제까지지? 가방을 열어 내부를 뒤진 아카아시는 가방 구석에 반쯤 접힌 티켓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안 갈 수도 없고…. 이번 주는 그냥 집에서 쉬려 했는데.’
애석하게도 전시회는 이번 주 주말까지로 적혀있었다. 그래도 호의로 준 티켓을 이렇게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아카아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주말 일정을 수정하며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느지막하게 일어난 아카아시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갤러리 앞에 도착했다. 이미 입구부터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으며 다들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유명한 전시회였나, 미리 기본적인 정보라도 알고 올걸. 때늦은 후회를 하며 아카아시는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갤러리 내부 또한 바깥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다만, 밖과는 달리 조용한 분위기로 모두 사진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카아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진을 하나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사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카아시었으나 조용한 분위기와 정적인 사진들은 아카아시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이래서 기분이 안 좋을 때 전시회에 오면 좋다고 하신 건가. 다음 미팅 때 커피라도 사 드려야겠네.’
아카아시가 처음으로 들어간 1관의 주제는 ‘첫사랑’이었다. 사진을 하나씩 감상하던 아카아시는 작가의 첫사랑이 분명 자신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느꼈다. 자신의 첫사랑은 아픈 상처를 남겼으나 이 작가의 첫사랑은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청량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한여름의 햇빛이 느껴지는 듯한 사진들 속에서 아카아시는 자조적으로 자신의 첫사랑과 작가의 첫사랑을 비교하며 전시관을 돌았다. 누군가에게 첫사랑은 추억이고, 애정이고, 그리움이겠지. 1관 전시가 끝나고 바로 이어진 2관에 들어선 아카아시는 입구에 적혀져 있는 주제를 차분히 읽어내려갔다.
‘그리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시간은 결코 내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그리고 희망. 그 순간이 오길 바라는 나는 그저 그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라. 첫사랑을 말하는 것인지, 작가가 꽤 로맨틱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아카아시는 걸음을 옮겨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2관 또한 사람이 꽤 많았으나 1관에 비해 크기가 큰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런지 오히려 사진과 자신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점점 전시에 몰입하며 사진을 감상하던 아카아시는 2관의 중심 가장 큰 사진이 걸려 있는 곳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청록색 푸른 숲과 숲 사이에서 번지듯이 퍼진 빛. 그리고 숲과 빛을 담고 있는 호수. 그저 자연을 찍은 것이라고 보이는 이 사진은 왠지 모르게 사진 속에서 오래된 그리움이 담겨있다는 감상을 느꼈다. 멍하게 사진을 보던 아카아시는 시선을 내려 우측 하단에 적힌 제목을 읽었다.
‘계기’
계기라, 그리움의 계기겠지. 아카아시는 제목을 해석하면서 사진 앞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청록색으로 뒤덮인 숲을 담은 호수, 전 애인도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었는데. 잊어버리고 있던 전 애인이 이렇게 다시 생각날 줄 몰랐던 아카아시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옆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때 이전에 들었던 낮지만 기분 좋은 목소리를 가진, 어젯밤 드라마를 보며 생각했던 그 남자, 그가 아카아시의 옆에서 말을 건넸다.
“또 만났네요, 우리.”
저번 주 금요일 늦은 저녁, 도톰한 니트를 입었던 남자는 오늘, 그때와 같이 머리를 세우고 검정에 가까운 차콜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저렇게 입으니까 다른 사람 같네. 아카아시는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그때 갑자기 헤어져서.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했어요.”
“여기는, 혼자 오신거에요?”
“아, 네. 티켓을 받아서…. 그쪽도 혼자 오셨나 보네요.”
“네, 뭐. 혼자라면 혼자겠네요. 어때요, 전시회?”
“음… 사실, 전시회를 많이 다녀보질 않아서…. 그래도 작가의 감정이 와닿는 느낌이 들어요. 제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네? 뭐가….”
“작가님…! 여기 계시면 어떡해요. 인터뷰 일정, 못 들으셨어요? 얼른 가요, 얼른.”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등장한 여자는 목소리를 낮춰 아카아시 앞에 있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을 걸었으나 원래도 조용했던 공간이었기에 남자 가까이에 있던 아카아시에게는 선명하게 들렸다. 그런데, 작가님이라니. 남자는 아카아시를 보곤 난처하게 웃으며 자켓 안에서 명함 지갑을 꺼내곤 명함 한 장을 아카아시에게 건네며 말했다.
“갤러리 뒤 정원에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잠깐,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한, 두 시간 뒤에 갈 듯한데. 기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친 남자는 그를 작가라고 부른 여자와 함께 전시관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자리에서 벗어난 남자의 빈 자리를 보며 아카아시는 자신의 손에 들린 명함을 쳐다봤다.
사진작가, 보쿠토 코타로
명함에는 자신이 지금 있는 전시회의 주인, 보쿠토 코타로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 설마 지금 작가 앞에서 작품 평가한 건가…?’
민망함에 귀 끝에 빨갛게 열이 오른 아카아시는 어서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으나, 그래도 전시회는 끝까지 보고 싶어 괜히 귓불만 만지작거리며 사진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전시를 모두 본 아카아시는 전시관을 빠져나와 그 앞에 열린 기념품샵으로 눈길을 돌렸다.
‘차라리 커피 대신 이런 거 사드리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나도 하나쯤은… 사볼까.’
기념품샵에는 전시되었던 사진들을 가지고 만든 공책과 카드, 엽서 등 다양한 상품들이 있었다. 자신에게 티켓을 준 고객을 위한 선물들을 꼼꼼히 고른 아카아시는 명함 크기의 작은 플라스틱 카드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자신이 아까 발을 옮기지 못했던, 가장 커다란 사진이 그려진 카드를 하나 집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
그가 기다려달라고 한 카페는 갤러리 정원과 이어져 있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아카아시는 자리를 잡고 유리창 건너 정원을 바라봤다. 갤러리답게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에는 아카아시로선 의미 모를 조형물들이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그가 말한 두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저번 주 금요일, 그리고 오늘. 우연적인 만남이 두 번이나 이어진 상황에서 아카아시는 그를 만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작가라니. 그런 거였으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작가 앞에서 감정이 어떻고 그런 말을 하다니. 또다시 민망함이 몰려온 아카아시는 머리를 감싸고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너무 늦었나요?”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깜짝 놀라 위를 쳐다봤다. 언제 온 것인지 보쿠토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아카아시를 쳐다보곤 건너편에 앉았다.
“아, 아니에요. 저도 이제 막 앉은걸요.”
“제가 기다려달라 했으니, 커피는 제가 사려고 했는데. 이미 주문하셨길래, 같이 가져왔습니다.”
“아뇨, 뭘요. 감사합니다.”
아카아시는 앞에 높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자 향긋한 커피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보쿠토는 그런 아카아시를 보고선 자신도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그런데, 저는 왜 보자고 하셨는지….”
“그날, 그쪽이 신경 쓰여서요.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오늘이었네요.”
“아, 그때….”
“그래서, 그때 그 애인이랑은… 헤어지신 건가요?”
“네, 뭐. 그렇죠….”
“그래도 잘했네요. 그러면 속상하지는 않아요? …아, 이런 얘기하긴 좀 그런가…?”
“음…. 그래도 괜찮은 거, 같아요. 그런데 명함 보니까, 작가님이시던데… 죄송해요. 작가님 앞에서 작품 평가하는 꼴이었을 텐데…. 혹시 기분 나쁘셨을까봐 걱정이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먼저 물어본걸요.”
“다행, 이네요. 아, 저는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명함은… 지금 없어서, A사 웨딩플래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카아시, 케이지. 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 아카아시는 괜한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보쿠토를 마주한 순간들은 모두 어둠에 가려져 있어서 잘 몰랐으나, 밝은 곳에서 본 보쿠토의 얼굴은 자신의 기억보다도 더, 잘생겼었다. 나 사실 얼굴에 약했었나…? 정적이 흐르면서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지는 것을 느낀 아카아시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가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보쿠토는 어색한 공기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차분히 마시며 자신과 계속해서 눈을 맞췄다.
“전시회는 어땠어요? 아까도 물어보긴 했지만… 그래도, 더 듣고 싶어서.”
“완곡하게요, 아니면… 솔직하게요?”
“편한 대로, 그냥 그쪽 감상이 듣고 싶어서요.”
“사진 전시회는 처음이었는데, 그래도 뭔가, 느껴졌어요…. 작가님이 누군가를 많이 그리워하나 보다…, 이런…?”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던 거죠? 저희 만난 사진 앞에 계속 서 있던 거, 봤어요.”
“그런가 봐요. 왠지 모르게 시선이 자꾸 가서…. 많이 그리우신가 봐요. 첫사랑, 맞죠?”
“많이 그리워했죠, 이젠 안 그래도 되지만.”
“아, 죄송합니다. 괜한 얘기를 했나 봐요, 제가.”
“아뇨, 이제 만나서요. 그래서 그랬던 거에요. 다른 이유는 없고.”
보쿠토의 대답에 아카아시는 안도하며 다시 커피잔에 손을 가져갔다. 다시 못 보는 줄 알았네. 저 남자는 왜 저렇게 말을 헷갈리게 한 거야. 민망함에 괜히 속으로 투덜거린 아카아시는 커피를 마시며 보쿠토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보쿠토는 은은한 미소를 띈 채 아카아시를 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첫사랑과 그리움을 주제로 전시하는 작가가, 이제는 그리움이 사라져서 이상한가요?”
“아뇨. 첫사랑, 만나셨다면서요. 그러면 된 거죠. 잘되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막 만나기 시작했으니, 잘해봐야겠죠. 저는 그 사람을 예전부터 알았지만, 그 사람은 저를 이제 처음 봤으니까요.”
“분명 잘 될 거에요. 처음 본 저도 작가님 감정이 느껴졌는걸요. 그분도 분명히 아시지 않을까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는 대답 없이 그저 아카아시의 눈을 바라보며 살짝 웃을 뿐이었다. 이제는 아까와 같은 어색함은 조금 사라진 상태였다. 보쿠토에게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와 대화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편안한 대화 속에서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자신과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것과 1년 선배였다는 것, 그의 첫사랑이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선배이니 편하게 대해도 된다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아카아시, 이렇게 불러도 되는 거, 맞지?”
“물론이죠, 보쿠토상. 아, 저도 이제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코타로라고 불러도 돼, 아카아시는.”
“그래도 선배님이신데, 어떻게 그렇게 하나요. 그럼 이제 일정은 다 끝나신 건가요?”
“음… 사실, 아니. 내일까지 전시라. 이제 슬슬 가야 해. 아카아시는, 이제 집으로 가는 거야?”
“네. 아쉽네요. 그래도, 저희 인연, 신기하잖아요.”
“아, 내일 일정 괜찮으면, 저녁이라도 같이 먹는 거 어때? 나도 아쉬워서….”
“저야 괜찮은데, 보쿠토상은 괜찮으세요? 마지막 날이신데 갤러리 사람들이랑 먹어야 하지 않나요?”
“괜찮아. 그러면 전시 끝나고 연락할게. 연락처… 알려줄 수 있지?”
“뭘 그런 거까지 물어보시나요. 주세요, 핸드폰.”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건넨 그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하나하나 누르며 ‘아카아시 케이지’로 저장했다. 습관적으로 잠금 버튼을 누른 아카아시는 잠금화면에 뜬 보쿠토의 배경화면을 보곤 그를 쳐다보자 보쿠토는 살짝 당황하며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대화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보쿠토는 생각보다 자주 당황했고, 당황한 순간의 그는 목덜미가 살짝 빨갛게 올라왔다. 지금도 목덜미가 조금 빨간 것을 보니 자신의 배경 화면을 보인 것이 민망했으리라.
“보쿠토상도 그 사진, 좋아하시나 봐요. 우리 통하는 게 많네요.”
“그러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야. 이 전시회를 연 이유이기도 했고. 나한테는 중요한 사진이라.”
앉은 자리를 정리하면서도, 아카아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순간에도 보쿠토의 붉은 목덜미는 원래의 제 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부끄러움이 많은 건가. 아카아시는 갤러리를 나와 이미 어두워진 밖을 보곤 열차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미 보쿠토에게 라인이 와 있었다.
「아카아시 오늘 전시 와줘서 고마워」
「아, 그리고 무슨 음식 좋아해?」
***
일식을 좋아한다는 아카아시의 답장에 보쿠토가 데려간 일식집은 깔끔하고 조용했다. 그런 분위기에 맞게 음식 또한 정갈했고 아카아시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만이 차려졌다. 가볍게 한 잔 어떠냐는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는 당연히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맛있는 음식과 술은 둘 사이의 분위기를 더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럼 보쿠토상은 전시 끝나면, 이제 뭐하세요?”
“원래는 다음 전시 준비를 하려 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겨서, 일정을 조금 미뤘어.”
“아, 첫사랑, 만나셨다고 했죠? 연락은 해보셨어요?”
“응, 다행히. 어제 처음 연락해봤는데, 많은 얘기는 못했어. 괜히 부담, 스러울까봐.”
“에이, 자기를 그렇게 오래 그리워했다는 사람인데. 저라면 엄청 좋을 것 같은데요?”
“…그래? 아카아시는 그러면 좋을 것 같아?”
“네, 저라면요. 근데 저는 연애랑은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럴 사람도 없을 거구요.”
“왜, 그렇게 생각해? 널 계속 좋아했던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음…. 제 연애는 다 좋지 않게 끝났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딱히 미련은 없네요. 그냥 저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만들어주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약간의 취기는 아카아시를 솔직하게 만들었다. 행복한 연애, 꿈같은 결혼. 그런 것은 자신에게 없을 것이라고, 그저 자신은 다른 사람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전부일 뿐이라고. 아카아시는 자신의 연애사가 그리 좋지 않은 결말들을 맞이했음을 이야기하며 젓가락으로 자신의 앞접시에 있는 음식을 콕, 콕 건드렸다.
“그렇지 않아. 너에게도 분명, 있을 거야. 그런 결말.”
단호한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쳐다봤다. 마주친 보쿠토의 눈은 단호한 목소리와는 슬픔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보쿠토상이 그렇게 말해주시니, 기분은 좋네요. 감사해요.”
늦은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온 아카아시는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느끼지 못한 취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찬 바람을 맞으며 볼에 올라오는 열과 취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가만히 서 있었다. 둘 다 술을 마신 탓에 보쿠토는 대리운전을 부르기 위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금방 식당 밖으로 나왔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네. 아카아시, 괜찮아?”
“아, 보쿠토상. 네, 괜찮아요.”
몸에서 올라오는 열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차가운 저녁 바람이 아카아시에게는 기분 좋게 느껴졌다. 매일이 이런 기분이라면.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이 제 옆에도 있더라면. 미련… 없는 줄 알았는데. 기분 좋은 바람은 아카아시의 기분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도 살짝씩 흔들고 있었다.
“보쿠토상의 첫사랑은… 참, 부럽네요.”
“…왜?”
“그냥요, 그럴 것 같아요. …사실, 전시회에서도 그랬어요.”
대답이 없는 보쿠토를 쳐다보자 그는 아카아시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식당에서 나오는 작은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어렴풋이 붉어진 듯도 했다. 아무 대답이 없는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는 조금 민망해진 것 같아 다시 고개를 돌리곤 입을 열었다.
“괜한 소리를 했네요, 제가. 어쨌든 보쿠토상의 사랑은, 저와 달리 잘 되셨으면… 좋겠어요.”
보쿠토의 차를 타고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한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차에서 내렸다. 몰려오는 피로를 참고 겨우 몸을 씻어낸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라인을 보내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보쿠토에게서 라인이 먼저 도착해있었다. 보쿠토상은, 참 빠르네.
***
한결 편해진 관계로 인해 아카아시는 그와 연락하는 일이 많아졌다. 일요일 저녁, 술김에 자신이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다는 민망함이 남아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보쿠토와의 연락은 솔직히, 좋았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그와 함께 대화하는 것은 아카아시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던데, 보쿠토가 그런 사람인 듯했다. 오늘은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퇴근 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등 일상적인 대화가 라인과 전화로 이어졌다. 가끔 시간이 맞으면 퇴근 후 가벼운 맥주 한잔을 하거나 저녁을 먹기도 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쿠토와 이러한 관계를 이어간 지 벌써 2주, 아카아시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약간은 들떠있는 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플래너님, 요즘 연애하시나 봐요. 표정이 엄청 좋으신데요?”
자신에게 전시회 티켓을 건네 준 커플의 미팅이 있는 날, 건너편의 여자는 흐뭇하게 웃으며 아카아시에게 물었다. 그들과 미팅을 시작하며 아카아시는 그날 전시회에서 산 기념품들을 전달하며 감사 인사를 했고, 역시 자신의 판단이 맞지 않았냐는 여자의 물음에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떠올리곤 웃으며 대답했다. 전시회, 생각보다 더 좋더라구요. 보쿠토 생각을 해서 그런가, 귀신같은 타이밍에 아카아시의 핸드폰 화면에 보쿠토의 라인이 떴다. 그는 자신이 먹은 점심 사진과 함께 아카아시에게 무엇을 먹었는지 물어보고 있었다. 라인을 확인한 아카아시는 간단하게 답장한 후, 다시 여자와의 대화로 돌아온 아카아시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대답했다.
“연애요? 아니에요. 그냥 요즘 사람을 자주 만나서 기분이 좋은가 봐요.”
“음…. 아닌 것 같은데…. 방금 핸드폰 보는 플래너님 눈빛이 완전 우리 남편 연애할 때랑 똑같다구요! 저번에 우울해하셨던 거랑 완전 다른데요, 뭐.”
연애라니, 그저 자신은 일상을 공유하고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생겼다는 것에 기뻐할 뿐이었다. 첫사랑과 이미 좋은 만남을 가지고 있을 보쿠토가 들으면 황당할 소리였다. 그러다 아카아시는 최근 보쿠토와의 연락과 만남에서 그가 만나게 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보쿠토상은 첫사랑인 사람이랑 지금 잘되어 가고 있는 건가? 요즘 말씀이 없으시네.’
커플과의 미팅 후, 아카아시는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퇴근시간에 맞춰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라인을 보냈고 아카아시는 답장을 쓰다 이를 지우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보쿠토상, 지금 전화 괜찮으세요?”
‘아카아시? 웬일이야? 퇴근하고 바로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 있어?’
“아뇨, 별일은 없습니다. 그냥 궁금한 게 생겼는데, 전화가 빠를 것 같아서요.”
‘아카아시가 먼저 전화를 주다니, 기쁘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그… 저기…, 첫사랑이라는 그분이랑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해서요. … 그냥 요즘, 별말이 없으셔서….”
생각해보면 그냥 물어봐도 될 일이었는데, 왜 이렇게 입이 잘 안 떨어지는지. 천천히 말을 전한 아카아시는 잠깐의 정적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괜히 물어봤나, 혹시 잘 안되신 건 아닌가, 아니면… 이미 잘 되어가고 있는 건가. 짧은 시간 사이 아카아시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 음…. 잘 되어가고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 생각보다 눈치가 없어서. 그래도,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아! 그게 궁금해서 전화한 거야? 으음, 다른 이유로 전화한 거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알겠습니다. 집 도착하면 라인 드릴게요.”
‘뭐야, 아카아시! 용건 끝났다고 이렇게 바로 끊는 거야? 나 서운해.’
말끝을 늘이며 투정 부리는 보쿠토의 표정이 상상된 아카아시는 피식 웃으면서 역을 향해 걸어갔다. 역까지 가는 길까지만 이야기하자는 보쿠토와의 통화는 아카아시가 지하철에 타면서 끝이 났다. 빈 자리를 찾아 앉은 아카아시는 방금 전 통화를 곱씹으며 미소 지었다. 보쿠토는 보기보다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근데 그분이랑 잘되고 계셨구나…. 말씀이라도, 해주시지.’
왜인지 모를 서운함이 몰려온 아카아시는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놀랐다. 서운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요즘 너무 친하게 지내서 그런가, 보쿠토가 그 사람과 잘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서운하게 다가왔다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아카아시였다. 하긴, 자신은 보쿠토에게 만난 시간에 비해 유독 친근함을 많이 느끼고 있었지만 보쿠토는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아카아시는 찜찜한 마음을 덮어두곤 지하철에서 내렸다.
***
지하철에서 덮어둔 찜찜한 마음은 예상 밖으로 아카아시를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었다. 그날 보쿠토에게 서운하단 생각이 들었던 아카아시는 요즘, 보쿠토와의 연락을 조금씩 줄였다. 보쿠토에게는 요즘 일이 바빠 만나기 어렵다는 등의 핑계를 댔지만 사실 아카아시는 이전에 느낀 자신의 감정에 어떻게 보쿠토를 대해야 하는지 어려워지고 있는 참이었다. 처음엔 그저 친하게 지내는 사이에 말해주지 않았다는 점이 서운했나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쿠토가 첫사랑과 잘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카아시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아카아시는 이미 이 감정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망했네….’
어느 순간부터일까. 같이 처음 저녁을 먹은 날, 그의 첫사랑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였나, 아니면 그의 전시회에서 숲 사진을 본 그날인가. 누군가를 그렇게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워서 그랬던 것일까, 정말 그게 아니라면, 처음 그가 자신에게 라이터를 빌려준 그 순간부터 이미 그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인가. 다신 연애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아카아시였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보쿠토는 자신의 마음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자조적인 마음은 결국 보쿠토와 같은 형태의 애정을 바라고 있었다. 아니, 그냥 보쿠토 코타로란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있는 걸 인정하는 게 맞을 것이다. 다시는 연애 따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항상 새드 엔딩 뿐이었던 자신의 사랑이,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믿어달라고 아카아시에게 계속해서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래도, 보쿠토상은… 이미, 첫사랑 만났잖아.’
시작도 하기 전 접힌 마음은 아카아시를 아프게 만들었다. 마음은 계속 그가 좋다고 하지만, 이성은 그에게는 이미 짝이 있으니 마음을 접으라고 자꾸만 소리쳤다. 차라리, 모른 척하고 좋아한다고 말이라도 해볼까. 아냐, 괜히 그러지 말자.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계속되는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아카아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러 지금은 자신의 마음을 꼭꼭 가두곤 보쿠토의 연락을 피하는 것만이 아카아시가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카아시는 사무실에 앉아 보쿠토와 한 라인을 읽고 있었다. 보쿠토에 대한 마음을 인정은 했지만 거리를 두자고 다짐한 그 순간부터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나눈 라인을 습관처럼 되돌려 보았다. 일상적인 대화와 사진들, 취향을 물어보는 질문과 대답,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분명, 서로 애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대화들을 읽어내려가며 아카아시는 핸드폰을 꺼버렸다. 바쁘다며 연락을 피한 것도 이미 3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보쿠토는 매일같이 자신에게 일상을 묻는 라인을 보냈다.
「아카아시, 점심 먹었어?」
「오늘 날씨 춥대, 꼭 겉옷 잘 챙겨가!」
「나 오늘 다른 갤러리랑 계약했어! 이런 날 누가 축하해줬으면 좋겠는데~」
「축하드립니다, 보쿠토상.」
「아카아시! 그럼 오늘 나랑 놀까?」
「오늘도 좀 바빠서요, 죄송해요.」
3번에 한 번 정도 답장한 자신의 라인을 바라보며 아카아시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연락은 첫사랑한테나 하지, 왜 자신에게 해서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는가. 이건 자신을 헷갈리게 만든 보쿠토의 잘못도 없지 않다고 생각하며 아카아시는 핸드폰을 뒤집고 다시 일에 집중하려 노력했지만 아카아시의 머릿속은 이미 보쿠토로 가득 찬 상태였다.
‘오늘은 그냥 일찍 퇴근해야겠네. 이후 미팅도 없으니….’
아카아시는 자신의 팀장에게 몸이 좋지 않아 일찍 퇴근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곤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후 4시, 퇴근까지 2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나 아카아시는 그 두 시간 내내 보쿠토 생각만 하고 있을 거란 생각에 이른 퇴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팀장의 허락이 떨어진 것을 확인한 아카아시는 바로 자신의 사무실을 닫고 엘레베이터로 향했다. 집에서 맥주 마시면서 영화나 봐야지. 무슨 영화를 봐야 보쿠토 생각을 지울 수 있을지 고민하며 아카아시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1층에 도착해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 아카아시 앞에는 자신이 그토록 피했던 보쿠토가 서 있었다. 어떤 여자와 함께.
“어, 아카아시. 안 그래도 라인 남겼는데, 어디가? 이니면…, 벌써 퇴근인가?”
보쿠토의 옆에 있는 여자는 아카아시를 흘깃 쳐다보고는 먼저 엘리베이터에 타며 보쿠토를 향해 말했다.
“코타로, 나 먼저 올라갈게.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얘기하고 와.”
“응, 알겠어.”
여자에게 대답한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할 말이 많은 듯해 보였다. 아카아시는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름을 부르는 사이, 그리고 이곳, 웨딩 회사. 아카아시의 머릿속은 이미 보쿠토의 옆에 있던 여자가 첫사랑이라는 그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며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손목을 세게 잡았기에 아카아시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보쿠토상, 얼른 올라가세요. 기다리시겠어요. 저도… 퇴근, 해야 하고요.”
“괜찮아, 지금은 너가 더 중요하니까. 아카아시, 많이 바빴다면서. 아니면, 나 피한 거…였어?”
“…제가, 보쿠토상을 피할 이유가, 왜 있겠어요. 그냥 좀… 바빴어요. 그것보다, 손 좀, 놔주세요.”
“놓으면, 또 피할 거잖아….”
헷갈리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데, 왜 자기가 더 상처받은 표정을 하는 거야. 자기가 지금 누구랑 어디에 와 있는 줄 알고.
“일단, 놔, 주세요. 피하지 않을 테니까.”
자신을 피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카아시 말에 보쿠토는 그제야 손목에 준 힘을 풀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카아시의 손목을 잡고 있는 상태였다. 대화를 하기 전까지는 잡은 손목을 놓지 않을 듯한 보쿠토의 행동에 아카아시는 화가 났으나, 여기는 회사였다. 겨우 이성을 잡은 상태로 보쿠토를 끌고 회사를 나온 아카아시는 건물 뒤편 사람들이 자주 지나지 않는 골목을 찾곤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보쿠토상. 저, 연락 피한 거 아니에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거짓말. 아카아시 지금, 내 눈 제대로 못 보잖아.”
“그보다 보쿠토상, 첫사랑이랑 잘 되어가는지 모르시겠다면서, 벌써 결혼 얘기까지 나왔나 봐요. 축하드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옆에 계신 분, 첫사랑, 맞죠? 그렇게 그리워하던. 이제는, 그분이랑 잘…”
삐딱하게 말을 시작한 아카아시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눈치도 없는 눈물이 자꾸 흘러나와 아카아시의 말문을 막았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그냥 말이라도 해볼걸. 짜증나. 분명히 보쿠토상도 그 여자한테 다정하게 굴겠지. 이름을 부르고 서로의 영원을 약속했겠지. 그래, 그러니까 여기까지 같이 왔겠지. 이미 보쿠토와의 관계는 예전 같을 수 없었다. 이를 깨달은 아카아시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세게 닦아내며 눌러 온 마음을 터트렸다.
“제가, 얘기했었죠. 항상 제 연애는, 끝이 좋지 않았다고. 그래서, 연애도, 결혼도 미련은, 버렸다고. 그런데, 왜 자꾸,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어요? 보쿠토상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이미 알고 있는데, 왜, 마음이 가게 만들어요? 차라리 가만히라도 있지. 사람 속도 모르고…. 그래놓고 결국, 그 사람이랑, 여기까지 왔잖아요. 제 눈에 띄지라도 말던가.”
말을 쏟아낸 아카아시는 아무 말 없는 보쿠토를 쳐다봤다. 보쿠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덜미는 붉게 물들고 있었다. 당황하면 붉어지는 보쿠토의 목덜미. 이를 본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왜 지금 자신의 말을 듣고 당황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아니면, 같은 남자가 보쿠토상 좋다고, 그래서, 대답하기도 싫은, 거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카아시, 그러니까 넌 지금 내가, 아까 만난 사람이랑 결혼…”
“코타로라고 불렀잖아요. 그리고 여기 웨딩 회사인데, 남녀가 둘이 오면, 당연히…”
“그 사람, 우리 누나야. 둘째 누나. 안 닮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오해할 줄이야.”
이게 지금 무슨…. 그러니까, 그 여자는 누나였고, 나는 그걸 오해했다…? 순식간에 머리가 차갑게 굳은 아카아시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무슨 진상짓인가. 자기 혼자 오해하고 울고 따지고. 아카아시는 지금 당장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도망칠까.
“아카아시, 고개 좀 들어봐. 괜찮으니까, 응?”
“아니요…. 못해요…. 그리고, 첫사랑은 이미… 만나셨다면서요.”
그렇다. 보쿠토는 이곳에 같이 온 여자가 자신의 누나라고 말했지만, 첫사랑은, 아직 누군지 모르지 않은가. 아카아시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입만 오물거리며 투덜거렸다.
“저번에, 잘 되어가고 있다면서요. …제가 한 말은, 그냥 잊어주세요. 죄송해요.”
“아카아시, 나는 너가 알고 있을 줄 알았어. 눈치가 없는 줄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이것도 모르진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고.”
보쿠토는 고개 숙인 아카아시의 볼을 붙잡고 자신과 눈을 마주 보게 했다. 민망함에 눈동자만 도르륵 굴린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눈을 쉽게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깔았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인지 보쿠토의 손이 닿은 양쪽 볼이 뜨거워졌다.
“같은 고등학교의 첫사랑. 내가 널 만난 날, 그때 이미 만났다고 했지. 그리고 그 뒤로 우리 계속 만나고 연락하던 시간들, 내가 너한테 했던 말들. …그런데, 그걸… 하나도, 몰랐다고….”
“그러니까, 지금, 보쿠토상은…”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말을 듣곤 그제야 눈을 올려 보쿠토와 눈을 마주쳤다. 노란색의 눈동자와 청록색의 눈동자 안에 서로의 얼굴이 담겼다. 보쿠토의 노란 눈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아카아시는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아니면 당황한 것인지, 그 모두가 복합적으로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부어오른 눈가를 엄지 손가락으로 살짝 쓸고는 아카아시를 껴안았다.
“아카아시, 일단은. 너도 내가, 좋다는 거, 맞지…?”
“…전, 포기하려고 했어요.”
“너무해. 나 진짜 오래 기다렸는데…. 사실 조금 속상하기도 해.”
“그래도 그게 저였으면, 말해주셔도 좋았잖아요…. 괜히 사람 마음만 고생시키고….”
“네가 날 처음 본 날. 그때를 아는데 어떻게 말하겠어. 차근차근 다가가면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도….”
“근데 정말 몰랐던 건, 아카아시가 나빴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안겨있는 아카아시는 여태까지 자신이 무슨 오해를 했는지 부끄러우면서도 보쿠토가 그리워하던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 벅찰 정도로 기뻤다. 그러다 갑자기 든 생각에 보쿠토의 품을 벗어나곤 물었다.
“그런데, 보쿠토상. 저희 그때 초면이라면서요. 그 전에 만난 적, 있었어요?”
“저녁에 만난 날, 말하는 거지? 아카아시한테는 그때가 초면이었을테니까.”
“아니, 그러면 보쿠토상은 이미 알고 말 거신 거에요?”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눈 보고 나서 확신했어.”
“눈이요…?”
“응, 눈. 눈 보고 알았어. 아카아시 눈은 무성한 숲을 담은 호수 같거든.”
그러면서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하곤 씩 웃으며 아카아시의 손을 잡았다.
“사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지금은, 안 해줄래.”
보쿠토는 장난스럽게 잡은 손을 흔들거리며 아카아시를 바라봤다. 해가 지고 밤이 오는 시간,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태양을 등진 보쿠토는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보쿠토를 바라본 아카아시는 물어볼 것이 잔뜩 있었지만 잠시 삼켜두고, 보쿠토와 같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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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결말은 두 가지이다. 완전한 남이 되거나, 완전한 우리가 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영원을 약속하는 아름다운 결말, 결혼. 어린 아카아시에게도 이러한 로망이 있었다. 왜, 동화를 보면 항상 결말은 ‘그렇게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가. 부모님의 결혼사진을 봐도,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흔한 로맨스 소설을 읽어도, 다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데. 한때 나에게는 새드 엔딩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나에게도 새드 엔딩이 아닌 영원을 함께할 수 있는, 행복한 결말이 찾아온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등을 껴안고 잠든 보쿠토를 향해 몸을 돌리곤 보쿠토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뜬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꽉 껴안고는 씩 웃으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보쿠토를 바라보며 아카아시는 감정이 넘쳐흐르는 듯했다.
우리의 연애는 이제, 완전한 우리가 되었다.
사진작가 보쿠토 코타로 X 웨딩플래너 아카아시 케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