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잉120 (B120).』
@blue__reun_
누구에게나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아주 평범할 수도 있고,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일 수도 있다. 내가 직접 느끼기 전까지는 언제 그런 순간이 올지, 그 순간이 오긴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고도 꿈 같은 순간은 그 선배와 사귀게 된 순간인데 이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이렇게 글로 남겨본다.
선배와의 첫 만남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였다. 내가 선택한 전공은 항공운항과로 비행기 기장을 꿈꾸며 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선배는 나보다 한 학번 위였고, 이미 과에서 유명한 선배였다. 누구나 그렇듯 과 모임을 가장한 술자리에서 한 번씩 만나 술을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친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학번이 다르지만, 항상 함께 다니는 사이가 되었고, 내가 3학년, 선배가 4학년이 되었을 때 같은 실습을 듣게 되었다.
그 수업은 항공기 모형을 타고 직접 조종해보는 실습이었는데 선배와 나는 짝을 이루어 함께 실습했었다. 선배가 주 조종사 자리에 앉고, 내가 부조종사 자리에 앉아 실습하던 도중 기상 악화로 인한 돌발 상황이 발생하였다. 당연히 실습이고, 실제 하늘을 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여러 알림음이 울리니 정신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옆의 선배가 훨씬 당황한 듯 보였고, 나는 정신을 차리고 선배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보쿠토상, 저 믿으시죠? 제가 선배는 꼭 살릴게요. 진정하고 비상착륙 준비하시죠.”
내 말에 선배는 조금 진정하고 함께 비상착륙을 할 곳을 찾으며 최대한 고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인지 기상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고 하고, 비상착륙을 할 수 있는 곳도 마땅치 않아 추락해버렸다. 그저 모형에 앉아 화면을 보며 하는 실습일 뿐이었지만 추락했다는 안내 화면과 비상 상황을 알리는 경고음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실습이 끝나고 교수님의 피드백을 받는 시간에 나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그 상황에 관제탑과 교신할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관제탑과 교신을 했으면 훨씬 빠른 대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기내에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고, 내 미래 직업도 그런 쪽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선배가 기장이 되어 하늘을 날 때 내가 관제탑에 있으면 도움이 많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부터 내가 선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이미 선배는 4학년이고, 기장이 되고 싶다는 꿈이 확고했기에 나는 기장이 되어 함께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관제탑에서 선배를 돕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선배는 나와 같은 곳에서 함께 나아가길 원했었는지 조금씩 우리 사이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한순간에 남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선배의 취업 준비와 나의 새로운 발걸음은 우리 둘의 사이를 조금씩 멀어지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연락의 빈도가 줄었고, 그동안 나는 관제사가 되기 위한 자격증을 따서 관제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몇 년 동안은 일과 사람에 적응하느라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신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된 후에는 어엿한 관제사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던 선배라 그런 건지 비가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을 때면 자꾸만 선배 생각이 났고, 비행기 기장이 되어 하늘을 날고 있을 선배 생각에 가끔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게 더 나았을까? 하는 작은 후회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 후회는 잊어버리라는 듯 며칠 동안 맑고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었고, 나는 후회를 마음속 깊숙이 묻어버리고 일에 더욱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폭풍이 몰아치기 전엔 늘 날씨가 평온한 법이라던데 그 말에 틀린 게 하나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정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날이 지나가고 너무나도 흐리고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가 찾아왔다. 비행기가 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의 날씨였지만 그대로 운항하는 비행기들은 꽤나 많았다. 그렇게 우리 공항에도 여러 비행기가 오가고, 잠시 숨을 돌리며 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교신 요청이 왔고, 점심시간과 겹쳐 자리를 비운 사람이 여럿 있을 때라 나는 곧장 교신 요청을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기는 보잉 120, 현재 기상 상황 악화로 인해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는 중이다. ”
그리웠던 선배의 목소리와 달갑지 않은 현재 상황에 나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빠르게 답신을 보냈다.
“ 현재 고도를 알려주기를 바란다. ”
그러자 선배도 나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잠깐의 정적 후 대답이 돌아왔다.
“ 현재 고도는 상공 약 8,000m 지점이다. ”
그렇게 보잉 120의 위치를 확인하는 도중 다급하게 교신이 왔는데 이는 나도, 선배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 여기는 보잉 120, 우박과 낙뢰가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회피 비행을 시도하겠다. ”
상황은 자꾸만 안 좋아지고, 일단 회피 비행으로 위기는 넘긴 듯했지만,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우박과 낙뢰로 인해 비행기에 파손이 생겼고, 자동조종장치까지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기장은 기체가 흔들리면서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잃어 선배와 나만이 교신을 통해 이 상황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자동조종장치에 이상이 생긴 탓에 선배도, 나도 고생은 좀 했지만 어떻게든 공항 인근 상공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첫 번째 착륙 시도에 활주로가 아닌 인근 산 쪽으로 돌진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여기서 이미 우리 둘은 학생 때 겪었던 실습이 떠올라 반쯤 패닉이 오려고 했었다. 솔직히는 나보다 선배가 너무 당황한 게 보였기에 그때처럼 선배를 다독였다.
“ 선배, 저 기억하시죠? 그리고 여전히 믿으시죠? 이번엔 정말로 선배를 살릴게요. 지금 근처 산 쪽으로 가고 있으니 빨리 기체를 왼쪽으로 돌려 활주로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
나는 교신을 통해 선배의 멘탈을 챙겨주고, 다시 활주로로 돌아올 수 있게 도움을 줬다. 그렇게 첫 번째 착륙은 실패로 돌아갔고 두 번째 착륙을 시도하다가 기내의 신호가 먹통이 되어 관제탑과 비행기의 교신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 연료마저 바닥을 보여 착륙을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시도마저 실패하고 연료까지 부족한 상황이 되자 우리는 관제사가 직접 레이더로 기체의 위치를 활주로 중심선 방향으로 유도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5초에 한 번씩 기체의 위치를 유도하고, 일정 수준의 고도 강하를 도왔다.
세 번째 시도 만에 선배는 육안으로 활주로를 확인할 수 있었고, 무사히 단 한 명의 사망자 없이 비상착륙에 성공할 수 있었다.
“ 여기는 보잉 120, 덕분에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다. 고마워, 아카아시. ”
선배의 목소리에 안도한 나는 그제야 헤드셋을 벗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잠깐 멍하니 앉아있다가 선배가 어떤지 두 눈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활주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조금 전 비상 착륙한 비행기는 활주로 한가운데에 서 있었고, 이미 비행기의 전방 부분은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승객들이 빠르게 대피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 눈은 선배만을 찾아 헤맸다.
승객들이 모두 내리고 난 뒤 비행기에서 내리는 선배의 모습에 비를 맞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선배를 향해 뛰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의 모습은 전보다 훨씬 멋있었고, 내 심장은 여전히 선배를 바라보며 뛰고 있었다.
“ 보쿠토상.. 괜찮으신 겁니까..? ”
“ 응, 아카아시 덕분에 살았어. 진짜 아카아시를 믿었더니 성공할 수 있었던 거야. 아카아시가 그때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고 해서 좀 원망스러웠는데, 이젠 어디에 있던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나아가고 싶어. 아카아시가 없는 삶 이제 그만할래. 나랑 연애하자. ”
“...진짜.. 너무 보고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보쿠토상과 함께 나아가고 싶어요.. ”
그렇게 우리는 빗속에서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고도 꿈같은 순간이다.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줄어들어 갈 때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다가와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으며 말했다.
“ 케이지, 뭐해? 일? ”
“ 아뇨, 그냥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을 추억으로 남기는 중이었달까요. ”
그렇게 대답하며 아카아시는 저장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인 보쿠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 배 안 고프세요? 저녁이나 먹을까요? ”
아카아시의 말에 다른 건 다 잊었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고기를 먹자는 보쿠토와 그런 보쿠토가 귀엽다는 듯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카아시. 두 사람의 비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또 어떤 일들이 남았을지는 모르지만 아마 둘이서 함께라 영원히 잘 헤쳐나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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