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cident』
@LL_819
필연과 우연, 그 사이 어딘가
아카아시 케이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구두를 신었다. 아침부터 무언가가 잘 풀리지 않는 날이었다. 왠지 다른 날보다 늦게 눈이 떠지고, 의자에 걸쳐 놓았던 교복 넥타이가 안 보이고, 분명 전날 밤 다 챙겼다고 생각했던 가방에 뭐가 하나씩 빠져 있는 그런 날. 지각을 피하기 위해서는 달려야만 했다. 머리카락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툭툭 털어낸 후 문을 벌컥 열고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친 뒤 아카아시는 정신없이 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구두를 똑바로 신으려는 마음보다 지각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던 건지, 아카아시의 구두는 뒤가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신발 정도 구겨 신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넘어지면 다치기야 하겠지만 큰 상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발 그렇게 신고 뛰면 넘어져! 다쳐!"
이 아파트에 이사를 온 이후로 말을 나눠 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의 눈에 들어온 건 문을 살짝 연 채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는 한 남자였다.
"...?"
너무나 당당한 그의 태도에, 일면식 한 번 없는 사이였지만 아카아시는 순순히 구두를 제대로 신고 인사 없이 다시 계단을 향해 몸을 틀었다.
"조심해!"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저 사람은 뭔데 가뜩이나 되는 일도 없어 짜증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인가. 뭔데 이름도 모르는 옆집 꼬맹이를 걱정하는 거지. ...꼬맹이도 아니지. 난 고3인데. 짜증에 짜증이 더해진 마음을 뒤로하고, 아카아시는 서둘러 학교로 향했다.
*
아카아시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3년 내내 가만히 앉아 공부만 했다기에는 배구 동아리를 하고 있었고, 이제 앞으로도 배구의 길을 걸을 것이 아니라면 슬슬 은퇴를 해야 할 시기였다. 딱히 배구에 큰 흥미도 없었다. 당장 오늘부터라도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오늘, 아카아시가 분명 전날에 챙겼다고 생각했지만 가방에 없어서 아침부터 한참을 찾아 헤맸던 건 동아리 퇴부 신청서였다.
*
아카아시는 늦은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더 지쳐보이는 멍한 눈으로 문 앞에 서서 손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 작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응?'
분명, 분명 주머니에 들어 있어야 하는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가방까지 뒤적여 봤지만, 열쇠는 없었다.
"하... 진작에 도어락으로 바꿨어야 했나."
허무한 듯 중얼거리며 문 앞에 털썩 주저앉은 아카아시는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아.'
배터리가 2% 정도 남아있던 휴대전화는 아카아시가 시각과 배터리 잔량을 확인한 순간 맥없이 꺼져버리고 말았다. 까만 액정에 비친 아카아시의 눈은 그날따라 더욱 공허해 보였다.
"진짜 되는 게 없네. ..."
"저기..."
"으아악!"
아카아시가 짜증을 작게 내뱉은 순간, 누가 옆에서 아카아시의 어깨를 쿡 찔렀다. 아카아시는 펄쩍 뛰어오르며 그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돌아본 그곳에는 오늘 아침에 보았던 옆집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카아시가 친 곳이 꽤나 아팠던 모양인지 손등을 후후 불고 있었고 아카아시는 황당하단 얼굴로 가만히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계속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무슨 일 있어?"
"...그쪽 저랑 오늘 처음 본 사이 아니에요?"
"맞아."
"그런데 왜 자꾸 아는 척해요? 오늘 아침에도 그렇고. 지금도"
"하지만 그러다가 진짜 다친단 말이야."
아카아시의 말을 툭 끊고 걱정 가득한 눈으로 그 남자가 말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목구멍 뒤로 쏙 넘어가버린 아카아시는 몇 초간의 침묵 뒤에 그냥 대화 화제를 돌려버렸다. 아카아시는 그 남자의 행동을, 그 남자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네, 그건 둘째 치고, 계속 그렇게 반말하실 거예요?"
"너 고등학생 아니야?"
"맞는데요."
"난 성인인데?"
“..."
아, 이 사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그 남자와는 절대로 평범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내가 너보다 형이야!"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이번에는 왜 또 부른 건데요?"
반쯤 포기한 듯 맥아리 없이 묻는 아카아시에 옆집 남자는 뭔가 잘못해서 변명하기라도 하는 듯 횡설수설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옆집에서 뭔가 계속 소란스럽길래... 귀찮게 하려던 건 아니고... 무슨 일 있나 싶어서..."
"...누가 잡아먹어요? 왜 그렇게 누구한테 혼나고 있는 사람처럼 얘기해요."
"너 내가 쓸데없이 참견해서 화난 거 아니야?"
팩트를 정확하게 짚어버린 남자에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네, 잘 알고 계시네요. 아카아시는 한숨을 푹 쉬고 대답했다.
"아니요, 화 안 났으니까 좀 똑바로 얘기해 봐요."
아카아시의 한 마디에 남자는 화색이 돼서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게 무척 오랜만인 것 마냥, 한껏 들떠 보이는 투로.
"너, 지금 집에 못 들어가고 있는 거야?"
"네."
"아무도 안 계셔?"
"...네."
"우리 집 올래?"
"네... ...네???"
들려오는 뻔한 질문들에 성의없이 네네, 하고 대답하던 아카아시는 곧 자신이 어떤 질문에 무슨 대답을 했는지 뒤늦게 깨닫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아, 실수했다.
"밖에서 그러고 잘 거야? 더운데?"
"..."
"괜찮아, 나 나쁜 사람 아니야!"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계획은 아니었는데. 아카아시는 얼떨결에 오늘 처음 본 사람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 한여름에 밖에서 계속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카아시의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었다. 열쇠집도 문을 닫은 이 시간에 기꺼이 집을 내어주겠다는 옆집의 친절하신 분을 만났으니.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무언가... 나중에 엄청 귀찮아질 만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
옆집의 구조는 아카아시의 집과 무엇하나 빠짐없이 똑같았지만 집 안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너무나 달랐다. 그 남자의 집은 온통 배구와 관련된 것들 투성이였다. 배구공은 물론 팔꿈치와 무릎 보호대, 대회 우승 메달, 선수복까지... 이게 배구 박물관인지 사람이 사는 집인지 도저히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름... 보쿠토 코타로...'
아카아시는 메달과 상패에 적힌 남자의 이름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까 서로 이름도 몰랐네.
'이건 고교 봄철 대회 준우승 메달...'
아카아시가 학교에서 배구를 하며 단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것. 그런 대회의 메달들이, 그 남자의 집에는 당연하다는 듯 걸려 있었다. 이 사람... 혹시 배구 선수인 걸까. 아카아시는 멍하니 집 입구에 전시되어 있는 수많은 배구의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거기 서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목욕물은 받아놨으니까 더우면 씻고, 또 빈방에 이불이랑..."
손님맞이에 정신이 팔린 남자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카아시에게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있었다. 저 사람은 뭔데 나를 저렇게 챙기는 걸까. ...내 첫인상 좀 싸가지 없지 않았나.
"아, 네."
전시되어 있는 물건들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아카아시는 남자가 있는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참, 우리 통성명 안 했지. 난 보쿠토 코타로야!"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합니다."
"이름 예쁜데, 마음에 들어!"
혹 보쿠토가 본인을 케이지라고 부르기리도 할까, 아카아시는 미리 쐐기를 박아 넣었다.
"아카아시라고 불러주세요."
"걱정 마~ 나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야."
예의는 모르겠고 눈치가 없는 거겠죠... 아카아시는 입 밖으로 나올 뻔 한 말을 간신히 속으로 삼키고 열심히 이불을 펼치는 보쿠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보쿠토 코타로는 갓 스무 살이 된 성인이었다. 어느새 부턴가 아카아시의 옆집에 이사 와, 어느새 부턴가 같은 건물에서 아카아시와 함께 살던 사람. 한마디로 아카아시의 이웃이었다. 보통이라면 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나이이지만, 보쿠토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보쿠토는 배구선수다. 아니, 배구선수였다. 어렸을 때부터 배구와 함께 자란 보쿠토는 평생 배구밖에 몰랐던 어린 아이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에이스로 불리며 코트를 날아다니던 보쿠토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전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에이스로 활약했다. 세간에서는 장차 미래의 일본 배구계를 빛낼 스파이커, 이런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사람이었다. 실제로 꽤 여러 프로구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보쿠토를 데려가기 위해 서로 눈치싸움을 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했던 사람이 어쩌다가 대학교도 다니지 않는 백수(...)로 살게 되었느냐. 보쿠토는 배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배구를 사랑하는 만큼 뛰어난 실력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보쿠토는 더 이상 배구를 할 수가 없었다. 하면 안 됐다. 그래서 배구를, 자신의 인생의 절반을 넘게 차지해온 배구를 포기했다.
*
"그런데 보쿠토 씨."
"응?"
'...이게 무슨 상황이람.'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카아시는 방바닥에 보쿠토와 마주보고 앉아서 주먹밥을 먹고 있었다. 씻고 나온 아카아시에게 '에이스의 마음가짐' 따위가 적힌, 오래 입은 듯한 헐렁한 반팔 티와 바지를 내어준 보쿠토는 이내 거실로 아카아시를 부르더니 주먹밥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다. 내가 오늘 처음 본 옆 집 사람이랑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주먹법이 맛있어서 별 말 없이 먹고 있는데, 보쿠토가 자기를 너무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진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다.
"왜... 주먹밥을 먹다가 저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는 거죠."
'애초에 왜 처음부터 나랑 정반대로 마주보는 위치에 앉았는지도 모르겠어...'
"...잘 먹어서!"
아카아시의 질문에, 보쿠토는 세상 행복한 사람처럼 활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네?"
"엄청 잘 먹어서. 주먹밥 좋아하나봐."
"아, ...네. 좋아해요."
아카아시는 손에 들린 명란젓 주먹밥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이 사람에게 호의를 사고 있는 걸까. 그때 앞에서 산만하게 몸을 꼼지락거리는 보쿠토에 아카아시의 시선이 보쿠토로 향했다. 보쿠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아카아시 앞으로 바짝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너 배구하지 않아?"
"그걸 어떻게...?"
보쿠토의 질문은 아카아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난 이 사람과 경기에서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그렇다고 아카아시가 배구 선수로 유명한 것도, 아카아시네 학교가 배구로 유명한 곳도 아니었다. 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나 너 본 것 같아. 인터하이 예선전에서!"
아.
"플레이하는 걸 봤어. 꽤 실력있는 세터던데. 그거 보면서 나한테도 토스 올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지, 아마."
"..."
아카아시는 그건 자신이 아니었을 거라 말하려 했지만, 포지션까지 정확하게 말해버린 보쿠토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보다 실력 있는 세터라니, 대체 내가 뭘 하는 걸 봤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아카아시는 의문이었다. 아카아시는 평범한 세터였으니까. 규칙이 시키는 대로, 스파이커에게 공을 올려주는 평범한 세터였으니까.
"근데 배구를 하는데도 날 몰랐다고? 나 꽤 유명했는데... 무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에이스였다고!"
"그야 배구에는 관심이 없으니까요."
"..."
아카아시의 말끝을 딱 잘라내는 칼 같은 말투에 보쿠토의 입은 움직임을 멈췄다.
"관심 없어요. 배구 같은 거."
정말이었다. 아카아시는 배구에 관심이 없었다. 관심을 끄고 싶었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해보자면, 배구와 엮이기 싫었다. 이 한 마디가, 아마 아카아시가 보쿠토 앞에서 해보인 말들 중 가장 진심이 담긴 말이었을 것이다.
"...아쉽네. 잘 하던데."
보쿠토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아카아시의 시선을 피했다. 대화가 끝나려나 싶었지만, 아카아시는 오늘 처음 본 이 남자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오늘 아침에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카아시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들을, 이 남자는 무려 첫 만남에 실행하였다. 아카아시는 자기와 너무 다른 이 남자가 너무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어떻게 살고 있는 지. 생각해보면 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보쿠토 씨는 저기 현관 앞에 걸려 있는 것들 보니까 우승도 꽤 하신 것 같던데... 구단에서 스카웃 제의 들어오지 않았어요?"
아카아시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보쿠토가 '정말로' 실력이 있는 선수였음을, 아카아시는 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알아 차렸다. 현관 신발장 위에 있던 배구공이며, 벽에 걸려 있는 상패들... 하지만 현재의 보쿠토는 선수가 아니었다. 분명 이 정도면 지금 당장 코트에 투입돼도 손색없을, 어쩌면 국가대표까지 될 수 있는 실력의 선수가 될 수 있을 텐데.
"들어왔었어."
지금까지 아카아시가 본 보쿠토의 모습 중 가장 차분했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혹시 내가 건들면 안 되는 무언가를 건드린 걸까. 아카아시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해놓은 거 보면 배구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고 오히려 좋아하는 쪽일 거 같은데요."
"어른들에겐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지."
차분했던 모습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잔뜩 허세 부리는 듯한 얼굴로 말을 하는 보쿠토에 아카아시는 그럼 그렇지, 싶었다. 내가 잘못 느낀 거겠지.
"저랑 나이도 별로 차이 안 나면서 폼 잡지 마세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정말로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듯 아카아시를 쳐다보는 보쿠토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그냥 바보가 아닐까 생각도 해봤지만 아카아시는 더 이상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기 싫었다. 그래, 이 사람이랑은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가 없어.
"앞에 걸려 있는 상장만 봐도 몇 년도에 몇 살이었는지 다 나와 있는데... 그리고 그냥 나이가 별로 안 많아 보여요."
"그러면 나 스무 살인 것도 알겠네... 그런데도 나한테 누구누구 씨 같은 호칭을..."
"네. 저는 이게 편해요."
"그래? 아무튼 저쪽 방에서 자면 돼. 난 먼저 들어간다!"
손가락으로 거실 바로 옆방을 가리키며 보쿠토가 일어났다.
'...12시.'
시계를 쳐다보니 정확하게 자정이었다. 막 사는 것 같이 보이는 이 사람에게도 생활패턴이란 건 있는 걸까. 아카아시도 곧 방으로 들어갔다. 목이 너무 커서 한 쪽 어깨가 보일 것 같은 반팔과 바닥에 질질 끌리는 바지가 아카아시는 낯설기만 했다.
*
창 너머로 들어오는 따가운 햇살에 아카아시의 눈이 저절로 떠졌다. 오랜만에 받는 강렬한 자연광에 아카아시는 순간 불안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토요일이구나.'
주말에도 이렇게까지 늦게 일어나 본 적이 별로 없었던 아카아시였기에 뭔가 낯선 기분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보쿠토 씨의 집...'
천천히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척척 이불을 정리하고, 거실로 나간 아카아시의 눈에 쪽지 하나가 들어왔다.
"이걸... 그냥 바닥에..."
방바닥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그 종이 조각은 사실 쪽지라고 할 것도 없어 보였다. 시원시원한 글씨체로 적혀 있는 말들은 누가봐도 보쿠토가 쓴 것들이었다.
[난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갈게! 열쇠는 네 교복 바지 뒷주머니에 있더라. 정리하는데 뭐가 툭 떨어지더라고. 집 잘 들어가! 부모님 걱정하실라.]
"...진짜 그냥 되는 게 없는 날이었구나, 어제는."
정말로, 그날은 그날따라 무언가가 잘 안 풀리는 날이었다. 그런 날에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만났다. 보쿠토와 인연을 쌓았다. 그 많고 많은 불시착 속에서 소중한 인연 하나를 만난 날. 인연을 만들어간 날. 그날은,
*
"그래서, 그 옆집 꼬맹이란 애랑 하룻밤을 보냈다고?"
생각보다 큰 목소리에 보쿠토는 다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반대편에 앉아 있는 남자의 입을 막았다.
"아씨, 좀 작게 말해!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그 사람이 한 말 때문이었는지, 급하게 일어나는 탓에 의자가 끌리며 난 큰소리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이미 가게 안의 사람들은 보쿠토와 남자를 그다지 좋은 의미가 담기진 않은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알았어, 근데 그게 왜 뭐 어쨌기에 오랜만에 보는 나와의 이 소중한 자리에서 그... 아카시아?"
"아카아시!"
"아카아시 이야기를 하는 건데?"
남자가 심드렁한 얼굴로 거의 다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꽂힌 빨대를 휘휘 저으며 물었다. 보쿠토는 잠시 당황한 듯 했다. 본인의 관심사라면 앞뒤 안 가리고 냅다 입부터 여는 보쿠토였다. 이유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없다. 그냥 하고 싶으니까, 그게 다였다. 그리고 그건 반대편에 앉아있는 저 남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아니, 뭐 사람 사는 얘기하는 데 뭐 있나... 그냥 어제 있었던 일 말하는 것뿐이라고!"
"왜 화를 내고 그러냐, 알았어 알았어."
키득거리며 남자가 보쿠토를 진정시켰다. 둘은 한참을 이야기했다. 언젠가 꿨던 개꿈 이야기, 대학교 교수님 뒷담, 학창시절 웃겼던 추억들 따위로 정신없이 웃고 떠들었다.
"근데 진짜 신기하지 않냐? 진짜 그냥 갑자기 문 열고 싶어져서 열었는데 걔가 신발 구겨신고 뛰어가고 있었다니까."
어느 순간 아카아시는 다시 둘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보쿠토 혼자만 신나는 이야깃거리. 남자는 지겹다는 듯 영혼 없는 대답을 했다.
"그래. 정말 신기하구나."
"...너 내 얘기 들을 생각 없지."
"앗, 들켰다."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실실 웃는 남자의 앞에서, 보쿠토는 생각보다 진지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로.
"아카아시도 고교 배구 선수야. 인터하이 경기장에서 본 적 있어."
"진짜?"
"세터더라. 진짜 잘하던데. 배구엔 관심없대."
"..."
"3학년이라 공부해야 한다고 은퇴하겠대. ...나 아카아시가 올려주는 토스를 때리고 싶어."
남자는 보쿠토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보쿠토의 황금빛 눈동자가 더욱 빛났다. 무언가를 지독하게 갈망하는 눈빛. 남자는 그의 그런 눈을 지난 몇 년 동안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지금, 아카이시라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토스를 때리고 싶다하는 보쿠토의 저 눈은 세상에서 가장 빛났으리라. 분명 그랬을 것이라 남자는 믿었다.
*
"아카아시, 너는 왜 배구에 관심이 없어?"
"...어,"
보쿠토의 황당한 질문에 아카아시는 말문이 턱 막혔다. 배구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던 게 벌써 3개월 전이었다.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하지만, 이번 건 확실히 당황할만 했다 생각하며 아카아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냥, 관심 없댔는데 배구 선수 하길래. 보통은 안 그러잖아. 할 거 없어서 그런 동아리를 들어갔을 리는 없고. 가뜩이나 공부도 해야 해서 바쁜 시기일 텐데."
그런 것이 궁금하다면 보통 왜 관심도 없는 배구부에 들어갔냐 같은 질문을 했겠지만, 보쿠토는 왜 배구에 관심이 없냐는 질문을 했다. 그리고 보통이라면, 약간 당황한 뒤에 관심이 없는 데에 이유가 있겠냐 같은 대답을 했겠지만, 아카아시는 대답을 망설였다.
"...맞아요. 그래서 2학기 때는 퇴부하고 공부에 더 매진하게요."
"그래서 왜 관심이 없는데?"
...역시 이 사람이랑은 평범한 대화는 절대 못하겠어. 아카아시는 한숨만 크게 쉬었다. 아주, 아주 크게.
"하아......"
"없다고 해도 괜찮아. 나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네, 맞아요. 그냥 관심 없는데, 어쩌다 보니 그냥 배구부에 들어갔어요. 어쩌다 보니."
화를 내는 듯한 투로 '어쩌다 보니'만 계속 강조하는 아카아시에 보쿠토는 이상함을 느꼈다. 보쿠토가 보았던 아카아시의 얼굴은 증오와 두려움에 잡아먹힌 것만 같았다. 하지만 보쿠토는 그 사실을 은연중에 깨달았을 뿐, 의식적으로는 알아채지 못하였다.
*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카아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기억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과거의 기억들을 견딜 수 없었다. 하나씩, 하나씩 기억에 밟히는 이 느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카아시의 뇌는 점점 기억 속에 잠식되었다. 그렇게 깜깜한 새벽에 옆집의 문을 쾅쾅 두드리다가 다급히 밖으로 나온 보쿠토를 본 것이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쏴아아아아아...
"...엄,마......"
비가 유난히 많이 내리던 10년 전의 어느 날.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빠를 보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카아시의 아빠는 배구를 좋아했다. 아카아시도, 그런 아빠를 보며 언젠가는 아빠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가질 것이라, 세계 최강의 배구 선수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을 바라였다.
아카아시의 아빠가 죽기 전날의 저녁, TV로 프로구단의 경기를 보는 아카아시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그런 아카아시의 눈은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공을 따라다녔다.
"케이지, 배구공 가지고 싶어?"
"응!"
"정말로?"
"응! 케이지는 배구 좋아해! 사랑해!"
고개를 끄덕거리며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아카아시는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빠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아빠가 남긴 것은 그 당시의 아카아시에겐 너무나 커다란 배구공 하나. 그 공은 아카아시의 보물이 되었다. 아카아시가 고작 6살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9살의 아카아시에게 배구공보다도 훨씬 큰 불행이 닥쳐왔다. 항상 아빠를 보러 갈 때마다 품에 배구공을 소중히 안고 가던 아카아시였다. 바람이 불고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탓에 그날 처음 공을 놓쳤고, 그 공은 차도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굴러갔다. 곧 귀가 찢어질 듯 울리는 경적소리와 함께 아카아시는 자신의 발밑으로 굴러온 배구공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보인 건, 도로에 쓰러져 있는 엄마였다. 아카아시의 발밑에 있는 배구공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카아시에게 더 이상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된 날. 남겨진 건 배구공 하나뿐이었던 날. 그날 이후로 아카아시는 이모네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얌전히. 편하게 지내라는 이모의 말에도 아카아시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 정말로 쥐 죽은 듯 그곳에서 살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아카아시는 독립을 하였다. 엄마와 아빠가 남긴 돈은 전셋집을 구하기에 충분했다. 아카아시는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 한 마디와 함께 그곳을 나갔다. 하나뿐인 보물이었던 배구공을 손에 들고. 그리고 그 배구공은 새롭게 살게 된 집 안 어딘가에 방치되었다. 아카아시는 배구가 싫었다. 아빠와 했던, 세계 최고의 배구 선수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배구부에 들어갔다. 그것뿐이었다. 배구 선수가 된 데 다른 이유는 없었다.
고등학생이 된 후 시작한 동아리 활동으로 전보다 훨씬 바빠진 아카아시는 매번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늦어졌다. 싫은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아카아시의 보물은 아카아시의 마음속에서 점점 잊혀졌다. 가족과 배구에 관한 추억도, 기억도. 배구는 그냥 학교에서 듣는 수업처럼 의무의 일종이 되었다. 이제 배구는, 아카아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
"받아."
"...감사합니다."
아카아시는 잔뜩 창백해진 얼굴로 보쿠토가 건네 준 녹차를 받았다. 말없이 조금씩 차를 홀짝이는 아카아시를 보쿠토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관찰하듯 뚫어지게. 그제야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자신의 손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 보쿠토 씨."
"어, 어 왜?"
"...왜 제 손을 그렇게 보고 계세요."
아카아시는 손이 컸다. 보쿠토가 한 손으로 겨우 감싸는 컵을 아카아시는 여유있게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보쿠토가 본 아카아시의 손은 크고 예뻤다. 배구를 함에도, 세터임에도 눈에 띄는 상처나 굳은살 하나 없었다.
"예뻐서."
보쿠토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상황인데 기분 탓이겠지...'
“아, ...그렇군요.“
어렸을 적에 아카아시의 부모님은 아카아시의 손을 만지며 '우리 케이지는 손이 정말 예뻐. 꼭 네 손이 예쁘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이랑 결혼해야 한다, 알았지?'라는 농담을 넌저시 던지곤 했다. 보쿠토의 대답에 아카아시의 머릿속에 다시 과거의 기억이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윽,"
컵을 바닥에 툭 내려놓으며 머리를 움켜쥐는 아카아시에 보쿠토는 당황하며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또 아파? 벼,병원 가야하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그냥... 좀만 기다리면, 괜찮아져요......"
"근데 진짜 아까는 너 죽는 줄 알았어."
조금 진정이 된 아카아시를 앞에 두고,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
"문 여니까 애가 사색이 돼서는 살려달라고 비는데, 진짜... ......그냥 몸을 못 움직이겠더라."
"죄송합니다. 저도 갑자기 왜 그랬는지는..."
면목이 없다는 듯 아카아시가 고개를 푹 떨구고 말했다.
"그,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거의 정신 잃고 울면서 부모님을 찾았어."
"...제가요?"
"응. 네가."
처음이었다. 남에게 자신의 밑바닥을 보여준 것이. 그리고 그게 하필 옆집 남자 보쿠토 코타로라는 것이, 아카아시는 두려웠다.
"..."
아카아시가 아무 말도 못하고 손을 떨기 시작하자 보쿠토가 아카아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잡았다. 꼭, 아주 꼬옥.
"괜찮아, 괜찮아. 사람이라면 누구든 사연 하나쯤은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보쿠토의 얼굴은 꼭 아카아시를 닮았었다. 깊은 과거에 빠져있는 것 같은 눈동자. 헤어 나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과거에...
아카아시는 곧 입을 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보쿠토의 품에 안겨 말을 했다. 아카아시의 눈물이 보쿠토의 어깨를 축축하게 젹셨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쿠토는 받아주었다. 천장에서 세는 빗방울을 대야에 담 듯, 자신의 마음을 비워낸 공간에 아카아시의 고통을 담았다. 아카아시의 모든 감정을 담았다. 아카아시의 모든 것을. 소중히 담았다.
*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한 달. 시간이 흘렀다. 아카아시가 처음으로 남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날, 그날 이후로 아카아시와 보쿠토 사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몰랐다. 자신이 보쿠토에게 느끼는 이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사랑이라 정의하기에 아카아시는 아직 사랑을 몰랐다. 사랑을 느껴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사랑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아카아시였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이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내 옆집의 보쿠토 코타로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20살 백수 X 고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