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것』
@lemong
여름이 물러갈 무렵이었다. 햇살조차 여물었는지 와이셔츠를 걷지 않아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에어컨 없이 창문을 연 아카아시는 제습처리를 거치지 않은 버석한 바람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훈풍과 온풍 사이에서 온도를 가늠하던 찰나 누군가가 교수실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많은 사고과정이 혀 밑을 덜걱거리며 스쳐갔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타대학에 잠시 발 들인 초청 강사임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였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말이지. 귀찮음 보단 저번주에 종강했어야 할 특별 강의를 질질 끄는 학과 사무실 때문에 드잡이 할 기력이 없었다. 어떻게든 뽑아 먹고 등쳐먹으려는 인간들은 학력과 지능 상관없이 존재했다. 또라이 일정 법칙을 신봉하는 아카아시는 지금 문을 열고 들어설 사람이 부디 또 다른 빌런이 아니길 바랬다. 그의 평화롭고 일상적인 퇴근을 망칠 빌런.
문을 연 사람은 뜻밖에도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였던 교수님이었다. 먼 길을 온 모양인지 다소 지쳐보이는 외양을 제외하고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전보다 더 좋아 보이십니다."
하지만 병을 앓고 있는 그에겐 이것 말고 건넬 수 있는 안부 인사가 없었다. 노신사는 쿠션감이 별로인 소파에 앉아서 잠시 동안 숨을 골랐다. 그는 들고 온 서류 봉투를 넘겼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장난기가 서린 눈이 보드러운 여름의 햇살마냥 빛났다. 정정하시군. 아카아시는 웃음을 지으며 건너편에 앉아 봉투를 열었다.
"프랑스에 포럼, 여기서 못 보내준다고 했지?"
"첫 인사부터 많이 섭섭합니다?"
"네가 잘했으면 말을 말어. 제자 녀석이 코흘리개한테 얌전히 구니까 내가 열불이 터져서, 거 참."
"그 코흘리개 손에 제자 연구비가 달렸습니다. 제가 그냥 계시라고 했잖아요."
"니가 하도 그래서 조용히 논문이나 가져왔지. 또다른 네 논문."
영어와 불어로 적힌 초대장과 묵직한 서류철. 군데군데 비져나온 인덱스와 손때가 탄 겉 표지가 그의 스승다웠다. 아카아시는 논문을 꺼내기 전 잠시 침묵하였다. 감이 좋지 않았다. 좋은 얼굴을 하고서 제자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 저 교수님의 유일한 낙임을, 대학원 시절부터 알았다.
"뭐해. 얼른 봐."
쿨럭, 쿨럭... 은사는 해묵은 기침을 토해냈다. 아카아시는 세월의 파도에 가라앉아 밭은 숨을 내쉬는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입을 막았던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 손. 아카아시는 치료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 새로 처치받은 신약은 어떤지 물어보기보다는 말없이 종이를 넘기기를 택했다. 그를 돕는 것은 자신의 능력 밖이었다.
바스락 거리는 봉투가 몇 년 전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낯익은 제목. 대학원 시절에 완성하지 못했던 논문이었다. 포럼에서 공동저자가 아닌 사람이 대신 발표하는 것은 흔하진 않았으나, 거동이 불편한 그는 충분히 학회에서 이해해주는 범위였다. 아카아시는 초청장과 함께 동봉된 비행기 표를 확인했다. 오늘 밤이었다. 찬찬히 굳어가는 제자를 향해 스승은 잊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급한 일정이 잡혀서 말이지."
"하아... 제발, 교수님?"
"오냐, 제자야."
저렇게 하고서 또 허둥대는 자신을 감상하겠지. 화를 낼 수는 없고, 칭찬은 더더욱 안되겠다. 아카아시는 서류를 재빨리 정리했다. 공항까지 밀릴 도로를 생각하니 또 열불이 치솟았지만, 어느덧 왜소해진 체구로 낄낄거리며 여유를 부리는 그에게 뭐라 말을 할 수 있을까. 제자된 자신이 굴러야지.
"비행기에 내리면 내 손주 녀석이 있을 꺼야."
"양심은 있으시네요. 머물 곳은 마련해두셨죠?"
"그럼, 그럼. 그 논문, 10년 만인가? 그래도 한 달 뒤에 발표니 충분하지?"
"제자 나이는 건들지 마세요. 8년 만입니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어느새 깔끔한 정장 복장으로 돌아왔다.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으니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실내였다.
"2주면 됩니다."
"이런. 자네를 너무 과소평가했군. 다음엔 이주 전에 오겠네."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스승을 보며 아카아시의 눈이 짜게 식었다. 저 인간은 도대체 뭐가 재미있어서 아껴해도 모자랄 제자를 저리도 괴롭힐까. 오늘의 순탄한 퇴근길이 졸지에 분노의 질주로 뒤바뀔 지경이었다. 아카아시는 에어컨이나 제대로 끄라며 그에게 잔소리를 퍼붓고는 서둘러 주차장을 향했다.
짐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교수실을 둘러보던 늙은 이는 혀를 쯧쯧차다 말았다. 굴러오는 복을 제대로 양손에 쥐었는지 배웅까지 해줘야 마음이 편했다. 그의 눈에 아카아시는 그저 투박한 안경을 쓴 채 교수실을 두드리던,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이었다. 그건 지금 계속해서 전화 중인 손주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어찌나 전화를 해댔는지 휴대폰이 뜨끈하다 못해 배터리가 닳고 있었다.
[아, 할아버지-]
여보세요 할 겨를도 없이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찡얼거리는 상대방에 잠시 얼탱이가 없던 그는, 니 나이가 몇 살인데 용돈가지고 징징대냐며, 좀 전에 멈췄던 구박을 이어갔다. 밝기 그지없는 음색이 핸드폰에서 새어나왔지만 외조부의 입가는 연신 씰룩거리기 바빳다. 그 아이의 월급에 비하면 잉크 점 만한 용돈이다. 손주는 자기 방식대로 안부인사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왜 일본에 오지 말라는 거야-]
"저택 청소는 외주 불러서 잘 했느냐, 손주야."
[할아버지, 일본에 ATM기 회사 부도났어? 내가 직접 가서 현찰로 받아도 되는데-]
물음에는 바로 대답 안 하면서 계속해서 일본 타령이나 하는 것이 꽤 볼만했다. 왜 저리 난리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 큰 녀석의 어리광을 모두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손주의 상태를 보면서 딱히 말썽을 피우지 않았음을 캐치했다. 그럼 손님 맞이 라는 중요한 문제는 넘어가도 될 것이었다. 아직 철들지 못한 외조부는 좀 전의 제자에게 못 다한 장난을 손주에게 조금 쳐볼까 싶었다.
[나 오랜만에 구단에서 휴식 줬는데 일본 가면 안 될까?]
"흠.. 조건이 있다, 코타로. 그 손님 귀국할 때 같이 와."
[에에에- 뭐.. 그렇게 할께.]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이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지라 상대는 곧이곧대로 알겠다고 답했다. 좀 전의 제자와는 영 딴판이었다. 에잉, 더 큰 반응을 기대했건만. 놀릴 맛이 부족했던 외조부는 결국, 그에게 한가지 더 조건을 내걸었다.
"손잡고 오면 입원한 병원 알려주마"
[그.. 그분 남자라고 하지 않았어?]
"할애비는 열려 있단다."
[... 손주는 좀 닫혀있어도-]
"손잡고."
[...]
****
보쿠토는 커피를 다시 들이키려다, 컵에 손을 대자마자 침묵을 깨는 얼음소리에 도로 손을 거두었다. 운동선수 스케쥴 상 12시 넘어서 까지 깨어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의지와는 반대로 생체시계가 잠 좀 자라고 아우성이었다. 때문에 그는 공항에 오자마자 커피 한 잔을 이미 비운 상태였다.
몇 잔 더 사야 했나... 아츠무한테 졸음껌 좀 받을 껄. 빨간 불에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은 보쿠토는 가죽 운전대 위에 손목을 걸치며 옆을 바라보았다. 얄쌍한 손가락이 검은 양복 재킷에 덮이지 못하고 비죽, 튀어나왔다. 잘 정돈된 손가락 끝은 어둡게 번져 있었다. 외조부의 손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보쿠토는 그것이 잉크 자국임을 알아차렸다. 손?
손을 잡아?
"...크흠"
'그나저나 진짜 조용하게 자네...'
벌쭘하게 시선을 돌린 보쿠토는 그의 안경이 담긴 투명한 플라스틱 통을 흘끔 바라보았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작은 수납공간에 잘도 들어가 있다. 보쿠토는 그가 안경까지 꼼꼼하게 케이스에 넣어두고 잠을 청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도대체 어떤 반응 보여야 했었는지 고심했다. 일단 놀라웠으나 겉으로 표하진 않았다. 짐도 없이 내렸다던 사람이 어디에 안경통을 가져온거지..? 어떻게 한 사람한테서 그런 형편없는 준비력과 꼼꼼함이 공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졸림이 가득한 얼굴로 또랑또랑 건네는 첫모습에 비해 비교적 유순해진 신경으로 조수석에 앉은 것도 그랬다. 보쿠토는 만난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그가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외조부의 편애적 시선을 벗어난 '그'라는 존재가.
어쨌건 간에, 비행기에서 내린 후부터 계속해서 이어진 두통에 그는 조수석에서 잠들었다. 지나가는 말로 '비행기 두통'을 앓는다고 했다. 꽤나 능숙하게 조수석 의자를 뒤로 젖히며 설명하길래 보쿠토는 그러시군요-하며 넘어가 버리지 않았나. 그게 뭐야? 전세계의 배구 경기장을 돌아다니느라 나름 비행기를 꽤 타봤다고 자신하는 보쿠토였지만, 그는 자신과 동료들이 건장한 운동선수라는 걸 가끔 까먹곤 했다. 뭐 어딘가에 그런 병이 있겠지- 하며 넘어가려 했지만 다시 시선은 돌고돌아 조수석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정자세로 사람이 잘 수 있지?'
지금까지 한치도 흐트러짐 없는 모양새였다. 눈 밑에 드리워진 다크써클을 보니 그럴 만도 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그래도. 그러고 보니 이사람, 우측 통행 운전이 어렵다면서 자신에게 운전을 부탁했었지. 그냥 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만 보쿠토는 왠지 그냥 넘겨서는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보쿠토가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좌측 통행이었다면, 저 피곤한 얼굴로 공항에서 저택까지 직접 운전했을까? 돌연 운전석에서 안경을 추켜세우며 멋들어지게 드라이브를 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맨 얼굴도 말끔한 편에 속했지만 보쿠토는 그가 안경이 꽤 잘 어울리는 사람이란 걸 느꼈다. 그가 안경을 착착 접어 안경통에 넣는 게 어쩐지, 당연한 물리 법칙에 속한다는 듯이.
아무튼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보쿠토는 자신을 조수석에 태우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부정하고 싶었다. 키도 크고 근육도 많은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 근육과 키가 운전실력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영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체력! 그래, 체력은 자신이 더 뛰어날 것 아닌가. 오오-하며 속으로 맞장구를 치던 보쿠토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해가 저문 파리의 길은 어둡다기 보단 조용했다. 어두움은 헤드라이트를 키면 될 일이었지만, 적막은 차 안에서 어찌할 문제가 안되었다. 이미 도심 지역을 벗어난 지 한참이었기 때문에. 음악을 틀 수도 없었던 차 안은 오로지 남자의 곤한 숨소리 뿐이었다. 새근새근거리는 안락함이 때로는 귓바퀴를 타고 야시시하게 번지는 것은 졸림 때문이어야 했다. 그때마다 괜스레 커피를 홀짝였더니, 어느새 차가운 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할아버지 탓이라며 또다를 이유를 찾은 보쿠토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어쩌자고 그런 얘기를 해서는! 지구 반대편에서 악랄하게 웃고 있는 외조부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러다 손에 페티쉬라도 생길까 겁이 났다.
집 근처로 점점 가까워지면서 주택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서있는 거리에 헤드 라이트 밝기를 낮추던 보쿠토는 문득, 이 도로 끝에 있는 급 커브 길이 생각났다. 좌회전으로 핸들을 꺾으면 분명 남자의 자세가 흐트러질 것이었다. 나한테 믿고 맡긴 건데! 쏠려서 깨면 안되는데? 우왕좌왕하다 결국 보쿠토가 선택한 것은 남자의 어깨를 손으로 미리 잡는 것이었다. 그것도 행여 옷에 닿을까 미세한 공기층을 남겨둔 채로.
매너 손 납셨군! 기어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조종하던 보쿠토는 잔뜩 긴장해 털을 부풀린 올빼미처럼 보였다. 그래서 였다. 가로등 때문에 아카아시의 눈이 움찔거리고, 잠시 몇 번의 깜박임이 이어지다, 결국 의식이 돌아온 찰나를 보쿠토가 보지 못한 이유가.
'눈부셔...'
두통은 사라졌으나 계속해서 눈을 찌르는 불빛이 불쾌했다. 아카아시는 눈을 감으며 짧은 휴식을 취했다. 선선한 유럽의 날씨로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되었지만, 자신을 배려해서 인지 차 안은 약한 미풍이 돌고 있었다. 교수님 손주라고 했지... 그 분의 고약한 장난기는 안 닮은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의식의 밑에서 뭉근하게 풀어지는 자아를 즐겼다. 얼마만의 숙면인지 몰랐다.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온 모양이었는지 몸도 솜사탕 풀어진 것 마냥 가볍기 그지없었다.
갑작스러운 장시간 비행에 쌓인 피로가 한 몫을 했겠지만, 사실 아카아시는 잠자리가 바뀌면 늘 뒤척였다. 나른한 채로 외국에, 그것도 누군가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있다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그 부분에 있어서 운전한 상대방에게 나중에 감사인사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잠깐 남자의 한숨이 있었던 것 같았으나, 아카아시는 그것이 급 커브길에 들어서기 전 스스로에게 넣는 귀여운 기합임을 알지 못했다. 곧이어 차체가 방향을 바꾸었다. 아직 몸에 힘을 주고 있지 않았던 아카아시는 이렇다 할 겨를도 없이 왼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부드럽게 왼쪽 어깨를 받치는 손길이 있었다.
손?
아카아시는 수면에 빠지려는 의식을 단박에 건져 눈을 떴다. 아직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살짝 뜨인 눈으로 양복 위에 겹쳐진 남자의 손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앙 다문 턱과 핏줄이 불거진, 운전대를 잡고 있는 다른 손. 아, 이 남자, 매너 엄청 좋네. 아카아시는 잠시잠깐 실례되는 생각을 한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가만히 고개를 두었다. 살짝 뜬 눈으로 보기에도 상대는 엄청 긴장한 상태였다. 그게 급 커브 길에서 자신이 흔들릴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이었다니. 어깨를 받쳤던 손은 커브가 끝나자마자 스르르 떼졌다. 아카아시는 수면의 늪에서 발을 찰박찰박 적시다 골똘히 생각했다. 불빛이 아스라히 멀어지고 있었다. 수마가 그를 유혹하며 아무 생각 말라 속삭였다.
'귀여워.'
그래, 그는 여기에 가까웠다. 상대에 대한 매너에 대한 점수를 메기다 볼펜을 떨어뜨리듯, 아카아시는 다시 의식을 놓아버렸다. 그는 믿어도 된다고 여기면서.
***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눈을 뜬 아카아시는 황당하다 못해 스스로의 기억이 의심될 지경이었다. 손? 아니, 손은 아카아시가 딴지 걸려는 부분이 아니었다. 귀여워? 믿어?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침대?구두도 벗었잖아? 한꺼번에 몰려오는 물음표는 답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을 뛰어다녔다.
아카아시는 어제의 기억을 몇 번이고 복기하다 결국, 자동차 안에서 잠깐 깬 것 이외의 기억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자동차에서 꺼내 침대까지 데려다 줬을 그 남자도 집에 없었다. 젠장할! 아카아시는 방에 연결된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 세수부터 했다. 정신이 맑아지면서 사고회로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쯤이야 광택이 차오를 정도로 회복된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자동차에서 저택의 침대까지, 자신이 곤히 잘 수 있었단 말인가. 무슨 염동력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인 남자를 깨우지 않고 옮기다니.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나오니 베드 테이블에 놓인 잠옷과 평상복이 보였다. 재킷마저 옷걸이에 잘 정돈 된 걸 본 아카아시는 혀를 내두르며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생각보다 조금 컸다. 흰색 무지티가 살짝 엉덩이를 덮을 정도였고 바지도 한 번 접어야 했다. 그 남자의 센스인지 배려인지 벨트를 메자 아슬아슬하던 허리춤도 정돈 되었다. 아카아시는 그를 찾기 위해 방을 나서기로 했다. 아침도 먹어야 했기에.
저택은 조용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장식이 많았지만 눈을 즐겁게 하는 요소들이 어우러져 심미안을 자극했다. 공간 효율성이 극악인 원형 계단을 걸어오면서 건축가의 로망이 얼마나 저택에 녹아있는지 절절히 보였다. 아카아시는 주방 앞을 지나치려다 탁자에 놓인 접시를 보았다. 야채를 어떻게든 쑤셔 넣고자 애쓴 모양인지 랩을 뚫을 기세로 쌓인 샌드위치가 있었고, 옆에는 동물 모양 메모지가 탁자에 붙어 있었다.
[아침 안 드시면 점심 없음!]
뭘까. 아카아시는 아침을 먹고 점심도 먹으라는 배려인지, 정성을 다해 차린 아침을 감히 너 따위가 안 먹는다면 점심 또한 얄짤 없다는 경고인지 헷갈렸다. 독은 없겠지. 설사 잘못 되더라도, 그는 이미 손주를 만났다는 것과 교수님네 저택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메세지를 통해 알렸고, 이는 민형사상 증거가 될 것이었다. 랩을 벗기자 향긋한 로즈마리와 고소한 베이컨, 익숙한 마스카포네 크림치즈 냄새가 올라왔다. 허기진 배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비행 중에 먹은 석식을 제외하고 입에 댄 것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 잘 먹겠습니다."
저택은 바닷가 절벽 위에 지어졌다. 전날의 고요한 하늘에 바다 또한 얌전했다. 이어지는 파도들이 작게 부서졌다. 아카아시는 오션 뷰를 즐기며 아침을 해치웠다. 서재에 들어가 논문과 관련된 자료를 확인하고서 저택을 나섰다. 좀 전에 부엌에 난 창문으로, 해변을 뛰고 있는 남자를 봤기 때문이었다.
절벽을 내려가는 계단은 꽤 가팔랐지만, 신경써서 만들었는지 안정감 있었다. 저택의 벽과 같은 색의 아이보리 페인트 칠은 주변 광경과 잘 어울렸다. 아카아시는 해변가에 발을 들였다. 사각거리는 모래소리가 생소한 걸 보니 지난 몇 년 동안 바다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났다. 그의 은사인 보쿠토 교수님은 이 저택에서 방학을 보내시면서 대학원생인 자신을 과제 지옥에 던졌다. 언젠간 초대해줄 것이라며 박사과정 통과를 조건을 내걸었을 때 그 빡침이란... 어째서 이렇게 아름다운 잔물결을 보면서 지구 반대편의 교수님 밖에 떠올릴 것이 없는지. 참 기구한 인생이라 생각하며 혀를 찼다. 멀리서 누군가의 인사가 들려왔다.
"--요!"
굳이 멀리서 인사하는 그의 모습에 아카아시는 손을 작게 들어 답했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인 걸 확인하자, 혹여나 저택에 함께 지내는 동안 기가 빨리는 것은 아닐지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해변에 찍힌 발자국을 보니 이미 남자는 3~4바퀴 런닝을 한 모양이었다. 시차 때문에 늦게 일어난 것도 아닐텐데 벌써 이만큼이나 달렸다니. 손주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하셨더라.
"안---세요!!"
스포츠 계열이었던 것 같은데. 굳이 아카아시가 기억을 꺼내보려 하지 않아도 레그 레깅스까지 차려입은 그의 다부진 몸은 운동선수 이외엔 다른 직업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올라간 팔에 반팔 상의가 살짝 들려 탄탄한 복근이 드러났다.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걸까. 아니, 해맑게 웃으면서 모르는 척 복근 자랑을 해도, 상대가 자신이라면 오히려 고의성이 없다고 봐야 했다. 아카아시는 생각을 마치고 다시 손을 들어 화답해주었다. 그는 평가를 상향조정했다. 다정함의 지수는 그가 만나본 사람들 중...아마 지금 입은 옷도 그의 것이겠지. 최상위였다.
쉬는 날이어도 런닝을 쉴 수 없었던 보쿠토는 해변가에 나온 남자가 무척 반가웠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고심해서 고른 벨트도 했고, 그가 현관에 꺼내 두었던 샌들을 야무지게 꿰차고 왔다.인사도 두 번이나 받아줬어! 구단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만 인사하라고 잔소리를 들어 늘 속상했던 보쿠토였다. 다시 팔을 들어 그에게 붕방대며 인사한다. 은은한 미소를 달고 있는 그를 보자 저절로 함박미소가 지어졌다. 하루에 여러 번 인사한다고, 에너지 좀 아끼자던 사람들의 우스갯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보쿠토는 이 아침 햇살을 그도 받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런닝을 위해 나올 때보다 더 내리쬐는 게 정상일 것이었다. 지금 한낮은 아니더래도, 좀, 많이 작열하는게 정상이잖아! 은은한 미소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보쿠토는 결국 5번의 인사를 하고, 5번의 인사를 받았다. 남자의 곁에 와 런닝을 멈추자 거친 숨이 갈무리 되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아차차. 달리기와 동시에 멀리까지 숨을 내뱉었으니, 폐활량이 조금 위험하긴 했다. 무릎에 손을 대고 허리를 숙여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아침 잘 먹었어요."
쿵, 쿵,
"고마워요."
쿵쿵쿵, 심박근이 멈출 줄 몰랐다. 가벼운 런닝이라 얼굴까지 땀이 날 리는 없었지만, 보쿠토는 괜시리 얼굴을 정돈하고 턱까지 토토톡- 손으로 훔친 뒤 고개를 들었다. 상기된 얼굴은 햇살 아래서 그늘없이 미소를 그렸다.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자며 그는 앞장섰다. 어째서 저택에 사는 자신보다 남자가 더 능숙한 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보쿠토는 그의 조언에 곧이곧대로 계단의 손잡이를 잡았다. 신발을 벗으려고 고개를 숙이자,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샌들, 저한테 사이즈가 딱 맞더라고요. 고마워요."
뭐라고 답할 새도 없이 남자는 부엌으로 향했다. 씻고 나오면 얘기하자면서. 보쿠토는 부엌을 넘어 있는 자신의 방에 가기 위해 그쪽을 향하려다 멈췄다. 지금 당장 가는 것은 어째 부끄러웠다. 정확히는 남자와의 물리적 거리감을 가지고 싶었다. 보쿠토는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가 샤워실로 직행했다. 더운 숨결이 차가운 물에 묻혀 식어갔다. 그의 말에는 거절 할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 있는 것 같았다. 맞는 말을 하는 것 뿐이어서 그런가. 자신에게 '고마워요' 2연타를 날린 상대와 땀 흘린 채로 대화 나누는 것도 모양 빠지긴 했다.
그렇게 찬 물을 끼얹으며 보쿠토는, 너무 급하게 들어온 나머지 갈아입을 옷을 까먹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샤워부스 안에서 소리없이 절규했다. 가운 따위, 라면서 없애버린게 원인이었다. 유럽 구단에 들어가 이 저택에 살기 시작할 때부터 슬금슬금 버렸었다.
이유인 즉 보쿠토는 수건 하나 허리에 두르는 것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구단 내에서 그렇게 하다 몇번이나 등짝을 맞았는지 모른다. 탈의실 안에서만 허용되었기에 집에서만큼은 편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하지만 손님이 있는 마당에 그가 그럴 수 있을 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벽 수납장을 아무리 쳐다봤자, 없던 샤워 가운이 뿅하고 나타날 리가 없었다. 1층에 있는 자신의 방까지 주방을 몰래 돌아 갈 자신도 없었다. 문득 2층에 손님 방이 생각났다. 나, 천재인가? 그 곳은 손님 맞이를 위해 미리 자신의 옷으로 채워두지 않았는가!
2층에 그가 있진 않겠지. 보쿠토는 화장실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 복도를 스캔했다. 부엌에서 무언갈 준비하는 지 달그락 거리는 식기소리가 한창이었다. 좋아. 보쿠토는 거의 비밀 요원이 된 것 마냥 조용하면서도 신속하게 복도를 달렸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조심스레 잠그고 한편으로, 이 집은 자신의 공간인데 이렇게 눈치 볼 것 까지 있을까 싶었지만, 저택에 손님이 있는데 손님방을 쓰는 건 실례가 아닐까 싶고, 하여 보쿠토는 선수로서의 짬밥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었다.
***
2주일 걸릴 거라 큰소리 쳤던 발표 준비는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되었다. 보쿠토는 시내까지 나가야 있는 체육관에 매일 갔고, 아카아시는 그 덕에 고요한 저택에서 집중할 수 있었다. 그가 챙겨준 샌드위치나 샐러드 덕분에 끼니를 놓칠 일이 없었다. 일본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건강해진 기분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웃기지만 이 말은 포럼 준비를 마쳤다는 얘기를 들은지 5분만에 보쿠토가 물은 질문이었다. 아카아시는 저녁 전까지 서재에 처박혀 있었고, 상대는 저녁 이후에 거실에서 1시간 정도 버티다 잠을 자러 들어가야 했다. 둘은 2주동안 서로 얘기할 일이 잘 없었다. 그렇다고 통성명이 이렇게나 늦어졌냐 하면... 주어없이 감사인사를 남발하는 건 아카아시 쪽은 편했고, 보쿠토는 인사 하나로 만사해피한 인물이기 때문. 그리하여 통성명은 보쿠토의 궁금증과 기대를 오래동안 끌고 나서야 이뤄졌다.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보쿠토 코타로입니다!"
이어서 외조부와 헷갈린다는 이유로 '코타로 씨'로 불리게 된 보쿠토는 어버버 거렸다. 그러면 자신도 '케이지'라고 부르는 게 맞지 않냐며, 땡깡 부릴 요량으로 말 한마디 던졌다. 하지만 그는 조금 생각하더니 바로 오케이 수락을 내렸다. 정작 보쿠토는, 잘못 했는데도 사탕을 받아버린 아이처럼 어떨떨하면서도 이 달콤한 포상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직감이 들었지만.
"케.. 케이지 씨?"
저녁을 끝내고 거실에 앉아있자 아카아시가 차를 가져왔다. 보쿠토는 앞에 놓인 찻잔에 손 댈 생각도 잊고 물었다. 그럼 저쪽은 산들바람이 스쳐지나간 마냥 답한다. 왜요, 코타로씨? 작은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상대의 대답을 꽤 기다렸다는 것을 자각하곤 했다.
"아, 그..."
이렇다 할 반응이 없어도 그는 기다려주었다. 보쿠토는 그의 친절이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나 날뛰던 코트에서 뚝 끊긴, 체육관 밖을 처음 나서는 공기. 아카아시가 설탕을 녹이고, 우유를 부어 밀크티를 완성할 때까지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최선은 이거였다.
"파리에, 맛집! 가보실래요?"
식사를 마친 사람이, 그것도 후식까지 야무지게 챙긴 사람이 꺼낼 말인가 싶긴 했다. 하지만 보쿠토는 어쩐지 잘 꺼낸 화제이다 싶어 계속 얘기를 늘어놓았다. 인스타를 뒤져 플레이팅을 보여주자 관심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보쿠토는 좀 더 빨리 얘기를 꺼낼껄 싶었다.
방금 저녁으로 먹은 건, 그러니까 처음으로 이름을 부르며 마주한 자리에서 내온 건, 간단한 스파게티였다. 메뉴가 아쉬운 것을 만회할 찬스였다. 게다가 보쿠토는 그가 정갈하게 젓가락을 놀리는 모습을 꽤 즐겼던 터였다. 다른 음식들도 지금처럼 먹을까? 그런, 조그마한 의문. 입술 옆에 묻은 소스에 조금이라도 시선이 쏠릴만치면 바로 휴지로 지우는 모습.
프랑스는 처음인 걸까? 묻고 싶은 질문은 많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나긋나긋하지만서도 단호한 음색 때문인지. 목젖에서 올라올 질문들이 오늘은 가슴께에서 멈추어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남아있었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영 생소했다.
"여긴 칵테일 바인가요?"
그가 가르킨 사진은 다름 아닌 심야까지 여는 로컬 술집이었다. 짧은 찰나였지만 보쿠토는 칵테일이 맛있던 그 아늑한 공간을 떠올렸다. 동네 사람만 오는 매우 작은 곳이지만, 라운지 바와 호프 분위기, 프라이빗을 지킬 수 있는 공간이 섞인 특이한 펍이었다. 따라서 자신같은 공인도 무리없이 외출할 수 있는 좋은 매장인데다, 심지어 사장은 보쿠토가 속한 구단의 팬이었다. 일반인인 아카아시를 데려가도 괜찮은 곳이라 생각이 들자 보쿠토는 그에게서 휴대폰을 돌려받으며 물어볼 기회를 엿보았다. 희고 곧은 손가락이 손 위를 스쳤다. 잡을까.
"... 로컬이예요. 가깝습니다."
"여기, 언제 여나요?"
살짝 늦은 반응이었지만 자신의 물음에 착실히 대답이 따라왔다. 저녁에 켜두는 거실의 붉은 등 때문이었는지 그의 뺨은 살짝 발그레한 복숭아 빛이었다. 나도 저런가..? 아카아시는 바닥을 보이는 찻잔으로 눈을 살짝 돌렸다. 물끄러미 고개를 숙인 그의 머리 위로 가보지 않겠냐는 물음이 떨어졌다. 대단치 않다는 듯 밝게 말하는 상대였지만 아카아시는 그게 아님을 단박에 알았다.
9시를 넘어선 시간.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 해변을 뛰며 런닝을 하는 운동선수다. 낮에는 왕복 1시간 걸리는 체육관에 가서 대학교 선수들과 운동을 하기에, 그의 하루 운동량은 성인 기준 최소한의 수면시간을 요했다. 아카아시가 추측하기로 그의 예상 취침시각은 늦어도 11시. 공항에서 그를 태울 때도 약간 잠겨있는 목소리가 이제서야 이해가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함께 가게 되면 그는 생활 리듬을 깨뜨리게 된다. 프랑스에 도착해 한번도 우측통행을 몰아보지 못했기에, 그는 자신을 위해 운전을 해야 했고, 또 운전을 위해 술을 마시면 안됐다. 그리고... 운동선수잖아. 아카아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괜찮다고 답하기로 결심했다. 함께 갈 이유에 비해 걸리는 점이 더 많았다.
복잡한 그의 속마음을 눈치챌 리가 없는 남자는 식은 찻물을 입 안으로 털었다. 단숨에 홍차를 해치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트레이를 들어 주방으로 옮겼다. 아카아시는 컵을 식기세척기에 넣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코타로 씨. 오늘은 말고 다음에 갈까요?"
그는 살짝 머뭇거리며 덮개를 닫았다. 점점 의기소침해지는 어깨를 바라보면서 아카아시는 속으로 이게 아닌가, 싶어 다시 말을 덧붙였다.
"너무 늦었기도 하구요. 코타로 씨는 운동선수시니까, 일찍-"
"저, 저 일찍 잘 필요 없어요, 하루 정도는."
구부정하게 있던 그가 갑자기 일어섰다. 허리 춤 정도에서 단숨에 천장을 뚫을 기세로 시야가 옮겨지자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연히 체감되었다. 다부진 체격은 아무리 헐렁한 옷을 입어도 가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카아시는 오늘 아침에도 해변에서 그와 인사를 나누지 않았나. 10번은 넘게. 선명한 복근도 10번 넘게 보았고.
반걸음 뒤로 물러섰던 아카아시는 자신보다 더 쩔쩔매는 그의 태도에 의아함과 묘한 안도감이 들어, 그만 피식 웃음을 지었다. 급하게 입을 가린 손에 그의 시선이 언뜻 닿였지만, 아카아시는 살짝 보이는, 언제 꺼내놓았는지 모를 차 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이의 다정함은 중독될 것 같아.
"하루 정도는 괜찮다구요?"
아카아시는 조수석에 올라타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다음날의 스케쥴에는 이상이 없는지. 그의 주량은 어느 정도이며, 펍 근처에는 대리운전이 있는지, 치안은 괜찮은 동네인지. 그는 여유롭게 대답하며 부드러운 운전을 이어갔다. 꽤 자주 가는 펍인 모양이었다. 여차하면 2층에서 숙박하면 된다는 답변에 만족한 아카아시는 질문 공세를 멈췄고, 거의 비슷하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자신의 휴대폰이었다.
"받으세요!"
아카아시는 시차를 계산하며 지금 쯤 일본의 시간을 가늠했다. 휴대폰에 발신인을 확인하자 없던 두통이 다시 생길 판이었다. 아카아시는 죄송하다며 그에게 실례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 네, 학장님."
***
펍에 들어서자 그처럼 유명한 사람이 왜 추천했는지 알 듯 했다. 바 테이블도 있었고 3~4인용 단체석도 많이 놓여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파티션이었다. 거의 벽처럼 솟은 파티션 덕분에 서있어도 옆자리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음악 또한 잔잔하면서도 꽤나 베이스가 커 남성의 낮은 음역대는 쉽게 묻혔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은, 바닥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약한 불빛이었다.
꽤 특이한 구조였기에 평소라면 흥미가 동했을 터였으나, 방금 학장을 통해 한껏 실랑이를 벌인 아카아시는 한 잔의 맥주가 절실했다. 아카아시는 익숙한 체형의 남성을 찾고서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바텐더는 눈치껏 그의 주문을 받았고, 아카아시는 바 테이블에 엎드린 그의 옆에 앉았다. 맥주 1잔과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잔. 바텐더에게 얼만큼 마신거냐며 잔을 가르키자 그는 위스키 병을 가르키며 손가락을 4개 폈다. 통화를 길게 한 것도 아닌데.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에 아카아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술이 센 편이었으나, 이렇게 단시간에 들이부으면 취하고 싶다고 간에게 떼쓰는거나 다름 없었다.
"너무 빨리 드셨는데."
아카아시는 공인인 그를 위해 벗겨진 모자를 다시 씌웠다.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입이 벙긋거렸으나 음악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를 깨우기 위해 어깨를 흔들자 귀찮은 듯 꿈쩍도 않아 아카아시는 정녕 자신보다 10kg은 더 나가 보이는 남성을 업고 가야 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잡았을 때는 거의 체념 상태였다.
그는 아카아시의 손을 덥썩 잡고서 자리에서 그대로 일어서버렸다.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싶어 난감하던 찰나 바텐더가 맥주를 든 채로 얼어붙은 것이 보였다. 처음 있는 일인 듯하여 아카아시는 왜 인지 샐쭉해지려는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 어쨌거나, 무리해서 그를 옮길 일은 없어졌다. 이상한 술버릇은 계속해서 아카아시를 붙잡고 있었지만.
파티션에 둘러싸인 테이블로 이끌자 그는 익숙한 듯 구석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아카아시는 건너편에 앉으려다 손을 당기는 남자에 의해 제재를 받았다. 그는 바텐더가 놓고 간 맥주가 흐르든 말든 손 잡는 게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놓아 달라 해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이것이 술버릇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손을 떼기 위해 용을 썼다.
그러나 운동선수의 악력은 상당하였고, 오히려 자신이 다칠까 봐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난리를 쳤다. 실랑이는 생각보다 길었다. 바텐더가 와서 안주를 놓자 아카아시는 포기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왼손으로 맥주를 홀짝이자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얇게 썰린 훈연 소시지와 간단한 고기요리. 짠 음식에는 손을 안 대는 게 몸에 배였는지 그는 별 반응없이 자신을 응시했다. 손을 잡은 상태로.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그의 얼굴은 예나 다름없이 건강한 혈색이 돌았다. 동공이 풀렸네. 아카아시는 그의 귀여운 행패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따끈한 그의 손바닥이 자신의 손을 생각 이상으로 부드럽게 다루었다. 굳이 그의 생각을 읊자면, 손을 빼기 위해 분위기 좋은 로컬 펍에서 땀을 빼는 것보다 얌전히 손난로에 잡히는게 나았다. 훨씬. 그가 맨정신이었다면 이런 손장난은 얄짤 없었으나, 어떡하나. 그는 취했고, 자신은 그에게 신세를 지는 사람이다.
그것도 오늘도 지나버리면 끝인.
복잡한 실타래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어느새 비운 맥주 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자 보쿠토가 슬쩍 자기 몫을 밀었다. 반 쯤 남아 거품도 슬슬 사라지고 있는 맥주. 평소라면 거절했겠지만, 아카아시는 어정쩡한 자신과 비슷한 그 잔을 들기로 했다. 서늘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자 딱히 나쁘진 않았다. 가만, 여기 코타로씨가 입을 댔던 곳인가?
간접키스인가 싶어 그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시큰둥한 마음에 그만두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게 프랑스에서 먹는 마지막 한 잔이란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잡힌 오른손을 꼬물거려 보쿠토와 깍지를 꼈다. 놀래서 몸을 움찔거려도 아카아시는 신경쓰지 않았다. 발로 탁자를 심하게 찼는지 덜컥거리는 진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렇게 진창에 뒹구는 자신을 그는 잡고 있었다. 친절하기도 하지. 음악에 묻혀 아카아시의 웃음은 보쿠토에게 닿지 않았다. 엉망진창이야.
"손..."
옆에서 알코올 냄새가 훅 풍겼다. 보쿠토는 자신의 말이 안 들린다고 여겼는지, 조심스럽게 상체를 그쪽으로 기울여 말했다. 손, 잡아도 돼요? 아카아시는 그의 말 하나하나의 억양까지 정확히 들렸으나, 노란색 홍채에 정신이 팔려 그만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부끄러운지 그는 고개를 숙이다가도, 손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기억이 돌아온 듯 번뜩 고개를 들어 묻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아카아시는 장난끼가 발동해 마치 못 들은 척, 그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 입을 벙긋거려 그에게 답하기도 했다.
왜요?
몇 번 반복되자 장난인 줄 눈치챘는지 보쿠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깍지 낀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상대의 손목을 가볍게 쓸었다. 굳은살이 배긴 손가락이 스쳐 지나가면서 얇은 뼈마디를 쓰다듬고, 곧이어 손바닥 안으로 들어와 오목 진 부분을 손톱으로 긁었다. 아카아시는 맥주 잔을 탁자에 거의 떨어뜨리듯 놓아버렸다. 와, 방금은 완전, 이런 플러팅은 처음인데,
멍한 머릿속에서는 사실, 남자의 플러팅 자체가 처음이라는 생각도 반짝 들었다. 등허리에서 오소소 소름이 올라오면서 팔이 절로 굽어지려고 했다. 애써 힘을 주며 아카아시는 버텼지만 되려 손깍지를 세게 잡아버린 격이 되었다. 안으로 손가락을 파고들 수 없자 보쿠토는 손장난을 멈추고 그에게 얼굴을 가져갔다.
"난 분명.. 케이지한테 물었는데."
귀에 입술이 닿이는 감각이 생경했다. 보쿠토는 오른손으로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고개를 돌려 피하려던 아카아시의 몸짓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잠깐 피했다 되려 허벅지까지 맞닿아버려 아카아시는 헛숨을 삼켰다. 가슴 앞을 지나가는 그의 팔은 단련된 근육이 천을 튀어나올 기세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귓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숨소리도, 천을 뚫고 느껴지는 허벅지의 열기도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목울대를 타고 거칠게 흐르는 음색이 온 세상을 채워갔다.
"케이지, 손 잡아도 돼?"
어깨에서 손을 놓으려다 그의 턱을 살살 손 끝으로 매만졌다. 고개 들어봐. 귀에 속닥거리자 목을 파르르 떨면서 숙여졌던 고개가 스르르 올라왔다. 청록의 눈. 보석과도 같은. 마주칠 때 마다 깊은 구석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는 기분이었다. 가까워. 어떡해. 가깝다고.
더 가까워지고 싶어.
그의 옷을 입은 눈 앞의 남자가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라운드 넥을 당최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입혔을까. 양쪽 쇄골의 오목한 흔적을 따라 훑다가도 옷에 가로막혀 끊기기 일쑤였다. 맞잡은 손을 놓아야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놓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의 허락을 어떻게든 구하고 싶어 애걸복걸하는 것처럼.
취해서 그런가? 이게 고작 취해서 보이는 착각인걸까? 모르겠다, 라고 스스로 답하면서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답을 기다렸다. 턱 밑의 연한 살결과 맥주가 조금 묻은 입가로 손가락이 오갔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그에게 고정할 수 밖에 없었다.
"... 네. 잡아도 괜찮습니다."
보쿠토는 허락이 떨어지자 이제부터 정정당당하게 손을 만질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고 탁자 위에 손깍지를 올리는 것까지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보쿠토는 살짝 혼난 뒤 맥주를 마시는 그를 구경했다. 남은 오른손으로 턱을 받쳐 술김에 그에게 뻗지 않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잠잠한 그를 보자 왠지 심심하기도 했던 아카아시는 손깍지를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코타로 씨 술버릇이예요?"
보쿠토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마치 술버릇이면 전부 용서해주겠다는 뉘앙스가 섞였지만, 그렇게 일반화로 오늘의 일을 평범한 카테고리에 넣기 싫었다. 원인 되는 외조부의 발언을 그와 함께하는 공간에서 꺼내기도 싫었다. 그와는 어떤 다른 것들로 엃히기 싫었다.
케이지는, 자신의 10번의 인사도 받아주는 착한 사람이어야 했다. 손이 말랑하고 안경이 잘 어울리는 사람. 늘 안경통을 어디선가 꺼내오지만, 검지에 잉크 자국을 남기는 허당미가 있는 사람. 식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면서 감사인사는 꼬박꼬박 하는 예의바른 사람. 하지만 오늘의 그는 어떠한 사람이라 정의하기 어려웠다.
턱선이 얄쌍하여 자꾸만 만지고 싶은, 귓가가 뜨거울 때면 애써 맥주를 마시며 시선을 돌리려 하는, 그런. 눈을 마주칠 때 마다 이상야릇하여 숨을 참게 되고, 고개를 돌려도 다시 보고 싶어 떼 쓰고 싶은. 생각을 이어가다 보쿠토는, 마지막 한모금을 삼키고 입가를 정리하는 아카아시에 시선이 쏠렸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꼼꼼하면서도 허둥댈까. 한 번 밖에 오지 않은 저택에 자신보다 더 빨리 적응하면서도, 바다를 볼 때는 늘 새롭다는 듯 미소를 지을까. 남들에게 한 번도 알려주지 않은 장소를 데려오게 만들고, 기다림과 불안감을 주어 이렇게 취하게 만들었을까. 내가 어떻게 당신을 정의할 수 있지, 케이지?
대답이 없자 아카아시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코타로 씨. 나지막하지만 힘있는 목소리. 그에게 최면을 거는 눈동자가 불빛 아래서 점점 가까워졌다. 세상에. 그가 무엇을 묻든, 심지어 그의 은행계좌 비밀번호라던가, 구단도 모르게 들어둔 보험이 있는지 물어도 다 대답해줄 자신이 있었다. 코타로씨?
"술버릇이예요?"
"잡고 싶었어."
취중진담. 보쿠토는 기억나는 어린 시절보다도 방금의 대답에 더 진심이 담겼다고 확신했다. 그라면 알아볼 것 같았다. 아무하고나 손을 잡는 사람 따위가 아님을, 그 만을 향한 흔들림과 머뭇거림을 버티다 못해 쓰러진 자신을, 오래동안 간직한 떨림이 무거워 망연자실한 자신을, 그는 눈치챌 것 같았다. 절박함에 까발려진 속내가 달콤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대담한 사랑고백엔 수치심과 후회가 따르는 법이었다.
잡고 싶었어. 보쿠토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탁자에 머리를 쿵-받았다. 여지껏 손 잡아놓고 허락받던, 뻔뻔하고도 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나무결 따라 이마가 눌리면서 술이 살짝 깬 것 같았다. 멍 들었으려나. 불에 덴 것처럼 이마가 화끈거렸지만 튼튼한 몸이니 괜찮겠지 싶어 놔두었다.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방금은, 정말, 변명할 것도 없이, 100% 사심이 들어간 플러팅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도 정말 혼신의, 전력의, 진심을 다한 플러팅. 무슨, 회심의 일격이라도 되는 마냥 뱉은 스스로가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이마를 좌우로 짓누르며 신음을 흘리자 작은 손가락이 어깨를 톡톡 다독였다. 보쿠토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카아시는 그의 올곧음에 약했다. 발딱 앉은 보쿠토를 보면, 그는 그냥 아카아시 존재 자체에 약한 것 같았지만.
살짝 봉긋하게 부푼 이마를 쓰다듬자 보쿠토는 그마저도 눈부시다는 듯 눈을 감았다. 가만히. 그의 손가락이 이마를 타고 내려간다. 잘 정리된 눈썹과, 움푹 들어간 아이홀, 적당히 높은 콧대, 그리고..
잡고 싶었어요. 요 발칙한 말이 나온 입술에서 아카아시는 손가락을 멈추었다. 고작 맥주로 취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아카아시는 그의 답변을 머릿속에 얌전히 두었다. 그의 청력은 정상 기압을 전제로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러니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낮았다. 손을 내리자 보쿠토는 대담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만지다가도, 자신보다 비교적 말랑한 손바닥에 원을 그리듯 꾹꾹 눌렀다. 그런 그의 모습은 새로 산 장난감을 애지중지하는 어린아이의 것과 비슷해보였다. 보물이라도 된 것 마냥 가까이 가져가 손금을 보지를 않나, 잘 정리된 손톱과 지우지 못한 잉크 자국을 감상하기도 했다.
안팎으로 쪼물딱거리다 다시 손깍지로 돌아간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왼손에 들린 포크와 반이나 남은 햄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자신 때문에 못 먹은 것은 아닌지 물었으나 아카아시는 예의상 괜찮다고 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진짜로 먹어보라며 얇게 썰린 햄을 가르킬 때는 괜시리 오기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예상대로 여러 겹이 포크에 꿰뚫려 뭉텅이 째 올라왔지만. 보쿠토는 실실 웃으며 바텐더에게 젓가락과 이름모를 칵테일을 주문했다.
오른손을 풀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아카아시는 얌전히 그에게 젓가락을 양보했다. 일본에 돌아가면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연습해야겠다 다짐하며. 보쿠토는 햄을 작게 벌린 입에 넣어주었다. 생각 이상으로 맛있었다. 짭쪼름한 맛이 강하긴 했으나, 뒤를 이어 훈연한 고기의 풍미가 적절히 따라왔다.
해안가의 이름을 따왔다는 칵테일은 이름만큼 푸른 빛이 선명하진 않았다. 천장의 불빛이 약한 탓이었다. 유리잔의 얇은 목을 살짝 돌리자 아침 햇살을 담은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입을 대기 전 도수를 묻자 보쿠토는 펍에서 그런 것까지 계산하냐며 신기한 듯 그를 쳐다봤다. 뭐, 그 다운 질문이긴 했다.
"나처럼 취하진 않을 정도 일꺼야."
"취한 건 아시나봐요?"
"취했...취했지만, 이거, 술버릇 아니야. 케이지."
보쿠토는 억울하다는 듯 손깍지를 당겨와 뺨에 부볐다. 일순 그의 얼굴이 물감 풀어지듯 달아올랐다. 눈망울이 아카아시를 향해 일렁거리다, 귀까지 빨개진 스스로를 아는지 지그시 잠겼다. 후- 한숨을 내뱉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간 홍조는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옮겨갔다. 목덜미마저 붉게 번지자 보쿠토는 팔딱팔딱 뛰는 가슴을 겨누기 힘들어 뺨에서 손깍지를 때냈다. 조금 술기운이 풀리나 싶었는데, 손을 허락해주는 그에게 더 이상은 칭얼거리지 않기로 했는데. 보쿠토는 여지껏 잘 참고 있었던 스스로가 무장해제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 질문이 하고 싶었다. 아- 쓰라린 속에 번진 취기가 타오를 듯 그를 아프게 했다. 안돼, 안돼 하지 않을 꺼야. 내일 떠나야 하냐고 묻고 싶지 않아.
비참한 마음에 들이부은 술 탓이었다. '학장'이라는 사람이 외조부 저택에 온 아카아시에게 어떤 말을 했을 지도, 어떤 관계인지도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다음 주에 있다는 포럼, 2주 동안 틀어박혀 있던 저택의 서재, 악화된 할아버지의 건강, 아끼는 제자라 입이 닳도록 말하던 젊은 교수. 둔하고, 바보 같아서,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데 만족해서, 가만히 놔두지 못해 헐뜯고 비방하는 사람들 틈에서 상처 받아서, 그래도 버티는 것에 만족해서, 속이 터진다는 그 교수.
그랬기에 첫 만남 부터 기대가 컸다. 그 기대를 뛰어넘을 만큼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행여나 포럼에 방해가 될까 싶어, 일부러 체육관도 멀리 잡아서 연습을 나가는 것 까진 좋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는 보쿠토의 머릿속 지분을 넓혀갔다.
불안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사회 초년생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넘쳤고, 자존심을 내세우진 않았으나 심지가 곧은 내면을 드러낼 뿐이었다. 저녁 시간 이후 거실에 머무르는 자신의 짧은 여가시간을 함께 즐겨주었다. 천성이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하는 보쿠토를 쉽게 받아주었다. 정작 본인은 혼자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빤히 보였지만, 그것도 보쿠토가 아카아시에게 관심이 있었기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다.
그는 평범해 보이는 데, 그리고 착하게 행동하는 데에 도가 튼 사람같았다. 하지만 보쿠토는 알고 있었다. 그건 스스로를 주변에 파묻히게 내버려두는 버릇이란 걸. 그는 훨씬 더 다정함에도 그걸 굳이 뻐기거나 알려주지 않는다. 행동 하나하나에 깊은 사려감이 담겼고, 보쿠토조차 그가 어디까지 계산했는지 모를 때도 많았다.
그래서 더 속이 배배 꼬였다. 고작 누군가의 전화 하나에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그가. 똑 부러지게 잘만 말하면서 오늘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그가. 손깍지를 풀기 위해 끊질기게 노력하지 않는 그가. 갑자기 장벽을 낮춰 자신의 일부를 허락한 그가. 남의 약한 점을 파고들지 않는 사람이 무슨 바람이 들어 자신을 술버릇 가지고 놀리는지 보쿠토는 알 것만 같았다.
그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리는 게 싫다. 오로지 자신 때문이길 바랐다. 그와는 어떤 다른 것들로 엃히기 싫었다.
그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 것이었다. 그를 기다리면서 술 한잔에 다짐 하나씩. 한 모금에 떫은 짝사랑을 달래주고. 취기는 그가 떠날 것이란 강렬한 예감을 잠재우기 위해 보쿠토 스스로 받아들인 독이었다. 묻지 않을 꺼야.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을 뜬 보쿠토는 마주친 눈에 당황스러웠다. 비장한 속마음과는 다르게 어버버거릴 뿐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뚫어지게 보고 있었지?
"무슨 생각해요?"
화악- 터질 듯 붉어진 뺨에 아카아시는 봐주지 않는다며 다시 같은 질문을 물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코타로 씨. 어느새 비운 칵테일 잔을 내려놓고 보쿠토의 것에 손을 갖다 댈 때까지 보쿠토는 어찌 답해야 하나, 어떻게 빙 에둘러 말하여 그의 집요함을 떨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 없었다. 케이지 씨 생각이요. 저는 당신 생각을 했어요, 케이지 씨. 보쿠토는 다시 얼굴 탁자에 박았다. 그나마 이번은 회복이 빨랐다.
반면 아카아시는 좀 전의 칵테일 덕인지 늦게 올라온 취기 덕인지, 아님 맘에 쏙 드는 답을 맞춘 보쿠토 때문인지, 매장 안에 깔린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기분이 고취된 듯 다시 칵테일 목을 잡고서 살살 돌리는 모습에 보쿠토는 사고방식이 마비되어갔다. 서서히 흐르는 푸른 빛을 따라가다 보면, 얇지만 도톰한 입술과 잔이 맞부딪히는 경계선이 미치도록 야했다. 넓게 퍼진 원형의 잔이라 신중히 붙인 입술이 작은 물결에 적셔졌다. 진득히 달라붙는 시선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농밀했다.
한 모금 머금고 잔을 내린다. 음미하는 찰나가 꽤 길었으나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입에 알코올이 들어있는 지는 아마 이 세상에서 보쿠토만이 알아맞힐 것이었다. 여상히 삼켰지만 입가에 묻은 술이 아롱거려 빛났다. 보쿠토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그만둬, 손가락으로 조심히 쓸어올리고, 됐어 거기까지, 여남은 촉촉함에 시선을 빼았겼다. 코타로 씨. 코타로씨?
입술이 오물거리며 이름을 불렀다. 보쿠토는 그게 괜시리 좋아 대답을 늑장 부리며 베시시 웃었다. 코-타-로-씨. 오무리다 퍼지고, 다시 오므리다 펴진다. 그 단순한 순서를 되풀이하면 그의 이름이 불렸다. 케이지가 왜 모른 척 다시 질문하게 만들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입술의 형체로 자신가 완성되는 순간은 생명의 탄생이 담긴 신비였다. 케이지의 코타로. 보쿠토는 중독된 사람처럼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쓸어 내렸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도, 이런 기분일까?
"술 버릇이예요?"
"잡고 싶었다니까..."
아카아시는 같은 질문에도 착실히 대답하는 그를 귀여운 듯 쳐다보았다. 그의 생각을 다시 내뱉게 하고 싶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손깍지의 이유를 각인하는 것. 흐려진 정신 속에, 아직 달디단 여린 속내에 박아 넣는 문장. 게 중에서도, 좀 전 자신을 떨리게 한 그의 속내가 아직까지 이어지는 지, 떠보고 싶은 게 컸다. 눈을 마주치다 가벼운 웃음을 함께 터뜨렸다.
손을 잡고 싶었다, 라...
아카아시는 아무렇게나 놓아버렸던 문제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각보다 단순한 변동 사항이 존재했고, 그는 아주 흔쾌히 검토할 용의가 있었다. 눈 앞의 남자 자체가 변수였다. 아카아시는 떨리는 한숨을 숨기며 현실을 직시했다. 비정상적으로 빠른 심박수. 마주칠 때마다 짜릿함이 감도는 신체적 반응. 맞잡은 손에 습기가 차여도 놓지 않는, 놓기 싫은 마음. 그리고- 잡고 싶었다, 라.. 어쩜 말도 이쁘게 하는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에 이런 변수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포럼은 학장의 거지같은 제안만으로도 충분히 포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그는.. 이 사람을 어떻게 포기하지? 손을 잡고 놔주지 않는 보쿠토의 행동을 보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을 두고, 일본으로 갈 수 있을까? 아카아시에게는 드물게 찾아온, 결론이 정해진 명제.
깍지 낀 손을 탁자 위로 올린다. 따끈한 그의 손은 여름의 복숭아처럼 발간 빛이었다. 이 탐스러운 빛은 아카아시의 손 안에서 과실을 맺었다. 심지어 매혹적인 향을 뽐내지 않는가. 배가 고파왔다. 침을 삼키며 손을 잡아당기자 보쿠토도 무언갈 느꼈는지 시선을 따라왔다.
그는 손을 잡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요. 나도 그래요.
"그럼 놓지 마세요, 코타로 씨."
말문이 턱 막힌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는 그제서야 참은 숨을 쉬듯, 수면 위로 올라온 인어처럼 웃었다.
배구선수 보쿠토 X 대학교수 아카아시
중학교 때 둘의 만남이 이어지지 않은 가상의 유니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