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말 한 마디에 국가의 교육정책도 들썩거렸다. 그가 인문학, 그리고 일본의 선불교 등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그가 익혀던 한자의 서체에 대한 경험이 아이폰 설계에도 담겨지게 되었다고... 인문학 교육을 설파한 그의 연설이 그동안 홀대되었던 인문학으로서는 너무나 반가운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나라의 정책은 그리그리 하여 들썩 거렸다.
과거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주라기 공원 영화 한 편이 국내 자동차 산업 수출액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 해서, IT 융성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다. 과거에 유전자 공학에서 한국 연구팀의 우수성이 소개되었고, 그 배경에는 젓가락 기술도 있었다 해서, 젓가락 경영대회까지 열렸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 사랑도 국내에서는 또 천박한 인문학 키우기 열풍으로 연결되고 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정체성 없이 흔들리기만 할건가? 최근 창조경제와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연결하기는 하는데,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기존의 마케팅 정석을 통째로 거부한 방식이다. 즉, 창조를 위해서는 파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모두가 다 싸이같이 기존 방식을 거부한다면...? 시스템이 안돌아 갈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누가 기존의 고등학교 시스템을 거부하고 최고의 대학에 최고의 성적으로 입학했다고 하자. 모두가 그리하면 교육시스템은 붕괴될 것이다).
과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게 인문학 사랑일까? 인문학이란 과연 자연과학, 공학과 접목하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그런 차원에서의 학문일까? 작금의 우리나라에서 화두로 삼고 있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융합은 인문학의 순전성을 천박한 목적성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창조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숙성의 인내를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숙성이 아니라 속성을 요구한다. 그래서 많은 청소년, 청년들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선 액션을 취한다 (수학문제 하나를 갖고 요리조리 고민할 시간 없이, 하루에 50문제씩 마구 풀어내는 액션이다). 여기에다가 이제는 인문학 융합이라는 명목하에 인문학에 대한 액션까지 더해야 한다. 인문학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다 취하려고 하지 말자. 우리에게 주어진 24시간 중에 뭘 하나를 하려면,... 인문학의 즐거움에 빠지는 시간을 단 몇 분만이라도 가지려면 다른 의무에서 그만큼 해방되어야 한다. 그래야 인문학의 욕조에 몸을 담그고 사색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시험이나 기타 성과로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혹 누가 알까? 그러다가 어느 누가,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문학을 즐긴 결과로 수년 후에 새로운 창조의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신문을 보니까, 독일의 괴팅겐 막스플랑크 연구재단의 발터 슈튀머 소장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 "연구자들이 정치인이나 공무원에게 간섭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자연법칙을 연구하는 기초과학은 어떤 결과가 나와도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초과학 연구에서 실패란 말은 성립되지 않지요"...
부러운 대목이다. 한국의 과학자들은 비록 다년 과제라 할지라도 매년 매기간마다 성과보고서 쓰기가 바쁘다. 연구보다는 행정업무 처리에 신경써야 할 일도 비일비재하다.
아울러 주목할 점은, 지난 세월동안 BK 등의 연구로 수많은 과학인재가 배출된 것은 고무할만한 일이지만, 이들 과학인력들이 박사나 석사 학위 취득 후 국내에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내년부터 시작된다는 포스트BK로 또 많은 연구자들이 배출되겠지만, 넘치는 연구의욕과 젊음의 도전과 창조력을 갖춘 이들에게 안정적인 연구환경은 언제 제공될 수 있을까?
워싱턴 디씨 근처에 미국 국립보건원(NIH)에만 한국인 포닥이 200명 넘게, 많게는 300명이 있다. 인근의 NIST에도 100여명 있다. 이들을 두뇌수출이라 해석할 게 아니다. 국내에 마땅한 기초과학 연구 인프라가 있다면 이들이 비록 해외에서 연구경험을 쌓는다 하더라도 5년, 10년 하면서 이국땅에서 비정규직으로 계속 지낼 필요는 없지 않을 것인가.
기초과학 연구가 확대되지 않는다면, 복잡계의 이 21세기를 우리는 앞서 나갈 수 없다. 이젠 BK나 여러 유사 프로그램을 통해서 학위생들을 배출하는 것 이상으로 이들의 졸업 후 연구환경을 조성하는데에도 투자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