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한 번은 읽어봐야 할 책으로 제임스 브래들리의 "임페리얼 크루즈"를 권한다. 각국의 이익을 추국하는 복잡한 게임환경의 국제정세에서는 내 말을 하려는 것보다는 상대의 마음을 먼저 읽을 줄 알아야 한다. 100년 전... 우린 국제정세에 어두웠다. 그 당시 일본은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마음을 읽을 줄 알는 카네코 켄타로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켄타로는 부지런히 영문의 글을 써서 일본을 해외에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문화코드를 읽어야 경제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
임페리얼 크루즈를 읽은 후, 카네코 켄타로에 대한 요약 글
카네코 켄타로라는 인물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에 일본의 입장을 설명할 특사” 또는 일본 최초의 “미국 로비스트”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제임스 브래들리의 책, '임페리얼 크루즈'에서 표현된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해당 인물 설명에 적절한 용어로 여겨진다.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생이자, 메이지 정부 시대의 첫 해외 유학생들 중 한명이었던 카네코 켄타로는 하버드 대학 법학과에서 당시 유명한 변호사였던 웬들 홈스 주니어 지도 하에 1878년 법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 입장에서 굴욕적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영향을 미쳤던 시어도어 루즈벨트와의 만남은 당시 주미 일본 대사였던, 다카히라 대사의 소개로 국무부의 헤이 장관을 소개받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타 인종이나 민족에 비해 앵글로 색슨족이 우월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예외적으로 카네코 켄타로에 대해서는 파트너로서의 역할이 가능한 인물로 인식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본을 문호개방정책의 동반자로 인식하였다.
카네코 켄타로는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미국 수장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심리와 사고를 파악한 뒤, 그의 구미에 맞는 전략으로 파트너로서의 일본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이후 카네코 켄타로와 시어도어 루즈벨트 사이의 여러 차례의 비공식적인 만남의 결과물로, 일본식 먼로주의에 입각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졌다. 이렇게 한국이 일본에 속박되어가는 중에도 한국의 고종과 관료들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명시된 조약만 믿고, 국제정세의 파악에 어두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일본의 카네코 켄타로라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의 역할이다. 카네코 켄타로는 미국 수뇌부의 사상과 요구를 파악한 뒤, 일본의 부흥을 위해 이에 부합하는 행동을 했고, 그들이 원하는 결과물을 얻었다. 반면 한국은 명시된 조약의 내용만 믿고 감정에 호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미국의 파트너가 아닌 도움을 구걸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과거는 과거이다. 이는 과거를 잊고 생각하지 말자가 아닌 과거 경험을 거울삼아 당시에 범했던 실수를 미래에는 되풀이하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참담했던 과거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한국의 카네코 켄타로를 양성하고 활용해야 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화된 사회에서 형식적으로 확보 가능한 해외 경험 및 네트워크에 안주하지 말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한국 관련 국제 지정학적 문제들을 유연하게 풀어갈 수 있는 진정한 외교 전문가 또는 로비스트를 양성하여, 글로벌 동반자로서의 한국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Kaneko_Kentar%C5%8D
2017년 1월
며칠 안 있으면 도널드 트럼프의 미 행정부가 출범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실리를 추구한다. 그러한 점에서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 속에서 미국의 실익을 추구한 데어도어 루즈벨트와 닮은 점이 있다. 데어도어 루즈벨트가 당시 대한제국의 존재를 무시했기 때문에 가츠라-태프트 밀약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러-일 전쟁에서 이긴 국가가 루즈벨트의 지원을 받을 운명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승리했고, 그 결과 루즈벨트는 일본을 동북아시사 패권의 일인자로 인정하여 이 지역의 정치적 파워를 맡기고 미국은 필리핀으로 향했던 것이었다.
2017년 오늘날 한국민은 과거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백여년 전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주요 강대국이 앞서 나갈 때에 구한말 정권은 개화파와 수구파 간에 정쟁만 일삼았다. 그 결과는 주권의 상실이었다.
지금 4차 산업혁명의 거센 쓰나미가 몰려오는 시점에, 대한민국호는 리더쉽을 갖춘 함장과 지혜와 경험을 갖춘 1등 항해사가 부재한 가운데 좌초되어 있다. 그 와중에 미국, 중국, 일본은 자국의 실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파상공세를 펼치고 있다. 120여년 전의 데자뷰다.
과거의 역사는 돌이킬 수 없겠지만, 경로의존적(path-dependent)인 미래의 우리 역사는 각성된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
2015년 7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쓰라-태프트 밀약(Katsura-Taft Agreement)은 "러일 전쟁 직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1905년 7월 29일 당시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회담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화 기록이다. 이 기록의 내용은 미·일 양국이 모두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록에는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본-미국 관계를 다룬 대화에 대한 각서(memorandum)만이 있었다" (http://ko.wikipedia.org/)
기본적으로 데어도어 루즈벨트는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과 갈등으로 이들의 에너지가 소진되어 동북아 지역에서 러시아와 일본 모두 영향력이 감소되기를 바랬다: "I would like to see the war ending with Russia and Japan locked in a clinch, counterweighing one another, and both kept weak by the effort". (from "D Roosevelt Rex", by E. Morris). 이러한 그의 정책은 루즈벨트가 평생 집착하던 중립과 밸런스의 개념과도 맞았다고 한다 (Morris 위의 책, p.382, 383~): “Roosevelt's life long obsession with balance. He loved the poised spin of the big globe in his office, the rhythm of neither-nor sentences."
한편, 필리핀 총독을 지냈던 태프트는 대한제국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필리핀의 통치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일련의 소요사태가 있었던 필리핀을 방문하여 미국의 지배를 공고히 하도록 확인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지만, 필리핀 외에도 일본에도 머물렀다. 그곳에서 일본 수상인 가쓰라와 만나게 되었고, 이들의 회의는 결국 밀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즉,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되,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약정을 받고자 하였다.
Bulli Pulpit (by Doris Kearns Goodwi), 432-433에서 발췌
"Although Taft’s primary mission was to the Philippines, the expedition also made stops in China and Japan, where Taft secretly met with Japan’s prime minister, Taro Katsura.
.... Unchecked for the next twenty years, this meeting would have lasting consequences for the region.... Roosevelt had closely followed the evolution of this conflict. From the start, he had sympathized with Japan’s desire to oversee affairs in Korea, to keep a strong hold on Port Arthur, and to return Manchuria to China. ... He was delighted when Taft contacted him in late April to affirm that Japanese were interested in having US president facilitate peace talks. Concealing the fact that the Japanese had initiated the process, Roosevelt sent letters to both sides. He requested that they “open direct negotiation for peace”, offering his service “in arranging preliminaries as to time and place of meeting”.
Now Roosevelt received accolades: “It is recognized all the world over as another triumph of Roosevelt the man. The New York Tribune editorialized: ”It was America alone that assumed the responsibility. It is to America alone that the world will give the credit.“....Katsura made it clear that “Korea being the direct cause of our war with Russian”, it was “of absolute importance” that after the war, Japan should control Korea “to the extent of requiring that Korea enter into no foreign treaties without the consent of Japan”. In return, Taft sought assurance that Japan did “not harbor any aggressive designs whatsoever on the Philippines”
즉, 일본은 대한제국이 다른 나라와 외교를 맺으려고 할 경우, 러일전쟁과 같은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할 위험이 있고 이는 미국도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미국 측에 전달하였다. 이 내용으로 태프트는 미국에 전보를 보내었다.
"Taft promptly telegraphed a memo of the entire exchange to the President. “If I have spoken too freely, or inaccurately or unwittingly”, he concluded, “I know you can or will correct it” Roosevelt’s reply...“Your conversation with Count Katsura absolutely correct in every respect. Wish you would state to Katsura that I confirm every word you have said.”
이렇게 하여, 1905. 9.5에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의 Peace Treaty 가 체결되며, 테어도어 루즈벨트는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윌리엄 태프트는 테어도어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매년 봄이 되면 미국 워싱턴 DC는 벚꽃축제로 들썩인다. 테어도어 루즈벨트에 이어 대통령이 된 윌리엄 태프트의 영부인이 주도하여 일본 벚나무 수천그루를 워싱턴에 심은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역사는 이렇게 비비꼬였다. http://www.history.com/this-day-in-history/japanese-cherry-trees-planted-along-the-potomac
이 벚나무의 일부가 한국의 제주도 종이라는 사실을 지금 와서 주장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문화는 그것을 받아서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재창조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은 그것을 문화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그들의 목적에 맞게 성취하였다.
우리도 우리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3.1 운동은 제국주의 열강 시대에 민족의 자주권을 평화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시도로서 높이 평가받긴 하지만, 그것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이 존재한다. 또한 3.1운동은 미국의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의 Fourteen Points for Peace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출간된 Glenn Beck의 Dreamers and Deceivers에서 우드로 윌슨은 Dreamer가 아닌, Deceiver의 유형으로 소개된다. 저자는 우드로 윌슨을, 20세기 희대의 사기꾼의 하나로, 경제학에서 no-ponzi condition, ponzi game이라는 용어를 만들 정도로 유명한 Charles Ponzi와 나란히 deceiver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우드로 윌슨이 미국 국민과 세계를 대상으로 기만한 것은 그의 건강이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구상할 1918년 1월 무렵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overriding belief in his own abilities"를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 병약하였던 그는 더욱 쇠약해져서, 1919년 3월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3.1운동 직후) 파리강화조약에 참석할 무렵에는 사실상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기도 힘든 정도였다. 주치의의 기록에 의하면, 체열이 39.5도까지도 상승하였다. 이후 미국에 돌아와서도 그는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힘든 정도로 건강이 망가진 상태였고,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영부인과 주치의 정도뿐이었다고 한다. 우드로 윌슨의 두번째 부인이자 영부인이었던 Edith Bolling Wilson (포카혼타스의 후손이라고 함)은 우드로 윌슨이 병약해지자, 1919년 10월 이후 사실상 내각을 지휘하였다. 우드로 윌슨의 이같은 행위에 영향을 받아, 이후 대통령의 직무와 권한을 제대로 수행하기 힘든 경우에 부통령이 대행할 수 있도록 헌법 제25조가 수정되었다고 한다.
3.1운동이 성공한 것으로서 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당시 서구의 열강들에게 제대로 된 메시지 전달이 이루어져야 했다. 제국주의 열강으로 부상하고자 하는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국은 자치적인 국가운영이 이루어질 수 없는 후진적인 국가라는 점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은 3.1운동을 통해서 서방세계에 한국의 자치적인 정부수립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고, 국민들의 자치의식 역시 증명되어야 했다.
20세기 전반 제국주의 시대 통틀어 우리나라의 3.1운동과 같은 전국적으로 조직적이며 평화적인 운동의 다른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처럼 대단한 운동을 펼쳤지만, 그 반향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우리가 외치면 세계가 들어줄거라는 생각을 가졌지만, 3.1운동의 대단한 거사 이후에 어떻게 이 목표를 이룰 것인지에 대한 post-action 계획이 부재하였다. 그리고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당사자인 대통령은 거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