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2019 문예창작공모전 소설 당선작
국어국문학과 20161033 류정은
1
「아늑하게 잘 꾸몄지만 수수한 거실. 뒷배경 오른쪽에 난 문은 현관으로 통하고, 뒷배경 왼쪽의 다른 문은 헬메르의 서재로 통한다. 두 문 사이에는 피아노가 있다. 왼쪽 벽 가운데에는 문이 있고, 더 앞쪽에 창문이 있다. 창문 가까이에는 둥근 탁자와 팔걸이의자, 작은 소파 하나. 오른쪽 벽에는 뒤쪽에 문이 하나 있고, 그 벽의 무대 정면 쪽에는 타일이 붙은 난로가, 그 앞에는 팔걸이의자 몇 개와 흔들의자 하나가 있다. 난로와 옆문 사이에는 작은 탁자가 있다. 벽에는 동판화가 걸려 있다. 도자기와 자그마한 장식품들이 놓인 선반, 양장본 책이 여럿 꽂혀 있는 작은 책장이 있다.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고, 난로에는 불이 타고 있다. 겨울날.」
*Henrik Johan Ibsen <인형의 집> 서막 (민음사)
빳빳한 베이지색 모직 코트를 걸친 노라가 가벼운 걸음걸이로 무대에 등장한다. 관객은 모두 노라의 흥얼거림과 몸짓에 집중하고 있다. 흥겨운 동작으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 노라는 이제 막 첫 대사를 내뱉으려 한다.
미로는 그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무대를 바라보았다. 주인공을 맡은 여배우는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몸짓은 가볍고 매끄러웠으며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특히 표정연기가 일품이었다. 그녀는 눈썹을 얼마나 치켜올리거나 내려뜨려야하는지, 미간을 어느 정도로 찌푸려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풍부한 표현력이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행동임을 알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연극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번 극은 인류 역사를 새로 쓸 경이적인 사건이라 대서특필되어 전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조용했던 객석도 커튼콜 때가 되자 모두가 기립하여 박수갈채를 보냈다. 환호성 소리 사이에서 간간이 휘파람 소리도 들렸다. 모두가 이 역사적인 순간에 자신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미로는 관객석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를 보냈다. 사람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미로는 입꼬리를 양쪽으로 힘껏 당겨 치켜올렸다. 속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이내 눈도 살짝 접어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얼굴 근육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무대 아래에서는 싫은 역할만 해야 해. 나는 무대 위가 좋아.”
그 언젠가 자신이 내뱉은 말이었다. 이제야 이 말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깨달았다. 관객들의 시선은 주인공에게 쏠려 있었다. 그러나 미로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연극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2
소극장에서 상영하기로 했던 연극이 갑자기 몸집을 불렸다. 공연장이 커지고 소품의 퀄리티가 높아졌다. 모두가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내 감독이 미로를 슬쩍 불러냈을 때 미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됐다.
"이렇게 갑자기요?"
미로는 황망해져 물었다.
"미안해. 윗사람들 사정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네, 네 하고 수그리는거 외에 할게 있나…"
감독은 눈썹을 팔자로 휘며 말했다. 난처하다는 듯이 미로의 오른쪽 팔뚝을 쓸어내리며 사과하는 얼굴에는 실실거리는 웃음이 배여 있었다. 미로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감독의 손은 허공에 어색하게 떠있다가 물러났다. 순간적으로 감독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원래는 다른 방법으로 공개하기로 했는데 좀 더 인간다운 면을 보여주고 싶다나.”
그녀에게 극장은 삶이었다. 자신을 찾는 사람이 없을 때에도 미로는 매일 아침 극장으로 출근했다. 배역을 맡았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극장에 몸담은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미로는 이번 일에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할 수 있었다. 다만 자신의 역할을 빼앗아간 '그것' 의 모습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번 일로 로비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분명 적지 않은 액수를 받았을 것이다.
“네가 고생이 많다. 그래도 이번에만 참아줘. 다음에는 원하는대로 하게 해줄게." 미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감독은 덧붙였다. 미로는 네. 하고 대답했다. 감독은 자꾸 입맛을 다셨다. 번들거리는 얼굴이었다. 그는 기어코 미로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가. 미로는 궁금했다.
모든 것이 최고급이었다. 들러리를 서주는 대가였다.
우습게도 그것의 이름은 ‘노라’라고 했다. 주인공을 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이번 극을 연기하게 되면서 새로 붙인 이름인지, ‘노라’라는 이름을 가졌기에 이 배역을 가질 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결국 미로 자신은 '노라'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미로는 자존심이 상했다. 감독은 미로가 노라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것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이 어딘지 어색했다. 연구소와 감독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감독은 노라를 완벽한 여배우로 만들기 위한 단계에 미로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로는 내심 그것이 우스웠다. 미로는 자신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라 하니,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노라와의 만남은 평범했다. 노라가 먼저 미로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미로는 노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주 인사했다. 미로는 순간 노라가 인간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노라의 관절은 매우 부드럽게 움직였고 표정 또한 자연스러웠다. 가끔가다 보이는 한 박자 느린 반응 또한 그를 신중한 성격의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미로는 알았다.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실은 노라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 뿐이었다.
“네가 할 연극이 어떤 건지 알아?”
미로가 노라에게 물었다.
“헨리 입센의 <인형의 집>을 각색한 거에요.”
노라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작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노라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간단하면서도 명료했다.
“그건 인터넷에 접속한거야?”
미로의 물음에 노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제 머릿속에 있어요.”
노라는 ‘내장되어 있어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
노라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어째서 노라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노라는 연습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한 번만 입력하면 되니까. 노라는 인간보다 효율적이었고 연기는 완벽했다.
미로는 노라를 관찰하고 노라는 미로를 관찰했다. 하루는 미로가 노라에게 말했다.
“<인형의 집>이 처음 상영되었을 때 노라는 그냥 집을 나가기만 했잖아.”
“그것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죠.”
노라가 대답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로가 말했다.
“지금 결말은 마음에 들어?”
네가 연기할 이 연극 말이야. 미로가 덧붙였다. 노라는 흠 소리를 내며 말을 흐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미로가 다시 물었다. 노라는 눈동자를 굴렸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집을 나가는 것만으로는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니까. 노라가 남편을 죽이는 결말로 개작되기도 했었어요. 그 편이 관객들한테는 더 즐거울 테니까…”
“그거 말고. 너 말이야. 나는 네 생각이 궁금해.”
미로가 노라의 말을 끊었다. 노라가 미로를 가만히 응시했다. 적당한 대답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저의 생각이 중요한가요?
노라가 머리를 갸웃 기울였다. 미로는 노라의 대답이 왠지 모르게 만족스러웠다. 미로와 노라가 마주 웃었다.
3
연노란색의 암막커튼이 집 전체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미로가 거실로 들어오자마자 불이 켜지고 난방장치가 가동됐다. 미로는 청록색의 패브릭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소파는 이번에 새로 장만한 것이다. 패브릭 소재는 관리하기 어려울까 싶어서 망설였는데 막상 사고 나니 별거 아니었다. 소파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모노톤의 가구들 사이에서 선명한 청록색 소파는 동떨어진 듯 하면서도 잘 어울렸다. 그래서 미로는 소파에 엎드린 채 손끝을 세우곤 멍하니 푹신하고 보들한 소파의 감촉을 느끼곤 했다.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
미로는 늘어뜨렸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앞이 깜깜해지며 현기증이 느껴졌다. 왼손으로는 관자놀이를 짚고 오른손으로는 소파 등받이를 잡아 몸을 지지했다. 어지럼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몇 초 동안 그녀의 마음은 다시금 차분해졌다.
미로는 비척거리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장대 위에는 화장품이 잡다하게 널려 있었다. 그것을 느릿하게 정리했다. 거의 바닥을 드러낸 병들이 몇 개 있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보였다. 미로는 노라를 생각했다. 그게 어떻게 표정을 지었더라. 노라의 연기를 따라서 속으로 수백 번 연습했었는데 막상 해보려니 잘 되지 않았다. 미로와 노라는 생김새가 전혀 달랐다. 미로가 생각하기에, 노라는 좀 더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노라의 환한 미소를 따라 지을 수가 없었다. 미로는 노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신의 얼굴과 비교해보았다. 본래 미로는 자신의 시원시원한 눈썹과 눈꼬리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조금 더 동글동글한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미로는 얼굴을 뜯어보면서 바뀌었으면 하는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얼굴은 마치 노라를 닮아있었다. 생각이 생각을 물며 이어졌다. 미로의 기분이 순식간에 저조해졌다. 미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기계 주제에 어딜.
미로는 단순한 것이 좋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마음을 잔뜩 흔들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인테리어를 새로 해볼까? 미로는 주위 공간을 둘러보았다. 하얀 카라 화분에 눈이 갔다. 카라는 예전 작품에서 소품으로 사용한 조화였다.
카라는 비록 가짜였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처럼 보였다. 문득 다시 화단을 가꿔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미로는 식물을 키우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키우던데 왜 자기는 매번 죽이고 마는지. 시들어버린 식물을 바라보며 섭섭하진 않았지만 아쉽기는 했다. 사실 식물이 죽는 이유는 명확했다. 식물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매번 키우기 어려운 화초들을 사오니 식물이 시들어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는 관리가 쉬운 선인장을 키워보라고 했다. 하지만 미로는 어렸을 적 선인장 가시에 찔려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선인장은 너무 뾰족해서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미로는 투박한 선인장 보다는 향기롭고 다채로운 꽃이 좋았다. 애정을 쏟는 일은 많은 노력을 요한다. 그렇기에 미로가 꽃을 시들게 하는 원인이 명백하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미로는 조화 옆에 플로럴향이 나는 방향제를 함께 두는 것으로 집을 장식했다. 그러면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향도 생화보다 진하고 넓게 퍼져서 훨씬 만족스러웠다. 미로는 새로 들여놓을 꽃을 어떤 색으로 살지 고민했다. 빨간색도 좋을 것 같고 분홍색이나 보라색도 예쁠 것 같았다.
4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미로는 소원해진 연인에게 줄 선물로 꽃다발을 샀다. 관계에 익숙함과 단조로움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미로는 지금 시기가 지나가면 편안함과 안락함이 찾아올 것이라 믿었다. 꽃다발을 들고 남자친구의 집을 방문한다는 사실이 왠지 낯간지러워 자꾸만 멋쩍은 듯 수줍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미로는 여러 가지를 상상했다. 이 꽃을 받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대로 연락하지 않고 찾아가 깜짝 놀라게 할까? 아직 식사 전이겠지? 외식을 하자고 할까? 나는 집에서 먹는 것도 좋고….
미로는 즐거운 상상을 하느라 연인에게 연락을 남기지 못한 채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 뒤늦게라도 방문 소식을 알릴까 하다가 결국 깜짝 방문을 하기로 했다. 그의 오래된 아파트 앞에서 미로는 자신이 꽤 오랜만에 이곳을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다음에 이사할 날이 오면 그때에는 너도 함께였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무심결에, 혹은 그런 분위기에 함께 그리던 미래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자신과 그가 함께 사는 날이 머지않았음을 막연하게나마 느꼈다. 갑자기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미로는 뛰듯이 계단을 올라 그의 집 현관문 앞에 섰다. 비밀번호를 누르려다가 문득 그가 곤란해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꽃다발을 들고 연인의 집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미로를 부끄럽게 했기에 서둘러 검지손가락을 들어 초인종을 눌렀다.
응답은 없었다.
미로는 두 번을 더 누르고 나서야 그가 부재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갑자기 힘이 쭉 빠지고 허탈했다. 그에게 연락을 하려다가 일단 그의 집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다시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도 자신은 그의 집에 자유롭게 출입해도 되는 것일까.
그때 아래층에서 큰소리를 내며 누군가 계단 위로 뛰어올라왔다. 미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였다. 침입자를 경계하던 그의 날 선 표정이 미로의 얼굴을 보자 누그러졌다.
“난 또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잖아.” 그가 거친 숨을 고르며 말했다.
미로가 그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돈해주었다. 그 사이 문이 잠기는 바람에 그가 다시 비밀번호를 눌러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미로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문을 열다 말고 미로를 돌아보더니 난감하게 웃으며 10분만, 아니 5분만을 외쳤다. 어질러진 집 안을 보여주기 싫다는 덧붙임에 미로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그는 문을 아주 조금만 연 뒤 잽싸게 그 틈으로 들어갔다. 그 모양을 보고 미로는 아직 우리 사이가 많이 멀어진 것은 아닌 것 같아 내심 기쁘고 설렜다. 이번에는 꽃다발을 들고 문 앞에 홀로 서 있는 것이 민망하지 않았다. 충동적이었지만 그의 집을 방문한 것은 잘한 일 같았다.
1인 가구의 조촐하면서도 생활감 있는 집안 풍경은 변한 것이 없었다. 많이 어질러 놨던 것은 아닌 모양인지 집 안은 깨끗했다. 그가 뒤에서 미로를 감싸 안았다. 미로는 연인과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꽃다발을 건네줬고 그는 기쁘게 받았다. 늦은 점심을 배달시켜 함께 먹었다. 그리고 나란히 누워 게으름을 피우다가 키스를 하고….
미로는 행복으로 충만해졌다. 미로가 샤워를 하고 나오니 그는 통화 중이었다. 얼핏 듣기에 업무 얘기인 것 같아 조용히 안방 침대에 드러누웠다. 자꾸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여기에서 자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잠옷으로 입을 것이 필요했다. 예전에 두고 간 옷가지들이 장롱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그의 통화가 길어지는 듯 싶어 직접 찾아 입기로 했다. 미로가 흥얼거리며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여자가 있었다.
급하게 치우기는 했는지 바짝 말라서 빳빳해진 마른빨래와 두어 번 입은 듯한 옷이 헝클어져 장롱 안에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옷가지 사이에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마네킹 인형이었다. 미로는 인형을 옷장에서 끌어냈다. 옷가지들은 인형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인형은 알몸이었고, 그가 이것으로 무엇을 했을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손 안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소름끼쳤다.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통화를 마친 그가 놀란 표정으로 미로를 보고 있었다. 미로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싸움을 하듯 한참을 말 없이 대치했다. 결국 그는 먼저 등을 돌렸다.
그는 이 끔찍한 것을 처리하겠다고 했다. 난처해 보이는 그의 표정 속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읽혔기에 미로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미로는 그가 말한 바를 당장 실행하기를 원했고, 그는 그렇게 했다. 일반쓰레기로 분류된 그것은 커다란 쓰레기봉투 안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어딘가에서 톱을 꺼내오더니 깔끔하고 정확하게 인형의 사지를 절단했다. 그가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에 미로 역시 무덤덤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물고기나 생닭은 손질하기 꺼려하던 그가 능숙하게 인형을 토막 내는 모습에 미로는 현관으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문고리를 움켜쥔 미로가 쥐어짜듯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나는 잠시 나가 있을게."
목소리는 볼썽사납게 떨렸고 약간의 쇳소리가 났다. 미로는 그것이 부끄러워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미로는 정처 없이 걸었다. 절단된 인형의 모습이 자꾸만 자신을 뒤쫓는 것 같았다. 영영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화는 더더욱 나지 않았다. 노라가 보고 싶었다. 적어도 노라는 살아 있었다. 미로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날이 막 어둑해졌을 무렵 그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 그는 방 안에서 자고 있었다. 그의 코골이를 들으며 미로는 거실 한 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자고 있어서 다행이이었다. 지금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미로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현관으로 몸을 틀었을 때 무언가가 미로의 시야에 잡혔다. 현관 바로 옆에 봉투에 담긴 인형이 놓여 있었다. 반투명한 비닐 안으로 산발이 된 여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두 볼은 발긋했고 입꼬리는 미미하게 올라가 있어서 마치 수줍어하는 모양새였다. 인형의 머리가 미로 쪽을 향하고 있었기에 미로는 그가 일부러 봉투를 저곳에 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에게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나한테 화가 났기 때문에? 나는 왜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지? 미로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자기 자신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사고가 마비되어 도통 생각이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미로는 코골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으로 비척거리며 들어갔다.
5
미로는 아파트를 나왔다. 손에는 커다란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 미로는 자고 있는 그의 방으로 몰래 들어가 캐리어를 꺼냈다. 그리고 빠르게 인형이 담긴 봉투를 넣었다. 모든 일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비이성이 이성을 이긴 순간이었다. 미로는 캐리어를 내려다보았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여행을 앞두고 그와 함께 장만한 가방이었다. 그 때 캐리어에는 서로의 사랑을 증명하며 구매한 커플 옷과 기념품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토막 난 여자가 있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미로는 인형을 보면 화가 치밀기보다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미로는 이것을 노라와 많은 시간을 보낸 탓이라고 생각했다. 미로는 그가 무서웠다. 그리고 인형이 불쌍했다. 이것을 지켜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리어의 바퀴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분명 방에서 자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이 소리가 마치 그가 쫓아오면서 나는 발소리 같았다. 그래서 미로는 앞만 보며 걸었다.
거리는 활기가 가득했고 상점마다 캐럴이 흘러나왔다. 흥겨우면서도 달콤한 노랫소리였다. 미로는 무작정 걸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걸어도 캐럴이 들리지 않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걸음이 빨라질수록 캐리어가 덜컹거렸다.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러운 캐리어를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손잡이가 미로의 손에 꽉 달라붙어 있었다. 미로는 손잡이를 움켜쥔 오른손을 영원히 펼치지 못할 것 같았다. 뒤늦게 슬픔이 몰려왔다. 진심을 다해 울고 싶지 않았기에 지금은 연기를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미로는 자신은 무대 위에 있으며 앞에는 수많은 관객이 있다고 상상했다. 이어서 이전에 연기한 비운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그제야 미로는 울음을 연기할 수 있었다.
미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캐리어를 끌고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맸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이 되자 추위와 피로가 몰려왔다. 계속 밖에 있다가는 감기라도 걸릴 것 같았다.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는 행복과 낭만으로 포장된 날이다. 미로는 행복했던 지난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듯 밝은 표정이었다. 얼굴을 찡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많은 분노와 슬픔은 다 어디로 숨는 걸까. 미로는 갈 곳 없이 떠돌다가 결국 극장으로 갔다. 해도 뜨지 않은 야심한 시간에 공연장에는 싸늘한 기운이 가득했다.
무대에 조명 하나가 켜져 있었다. 소리에 집중하니 간간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 먼저 와 있는 것 같았다. 미로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무대 바로 뒤는 자질구레한 소품들과 박스들이 잡다하게 널려 있었다. 그 너머로 남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미로는 가까이 다가가 높이 쌓인 박스 뒤에 서서 그들을 엿보았다. 밀회를 즐기는 연인은 감독과 노라였다.
감독은 노라에게 지분거리고 있었다. 노라는 예의 그 은근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눈동자만이 낯선 손을 쫓고 있었다. 주인공은 새장 밖으로 나갔지만 그 곳은 단지 무대 뒤였을 뿐이다. 감독이 노라의 가슴을 주물거리고 치마를 들추는 동안 노라는 가만히 서서 감독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미로가 발소리를 죽이고 감독의 뒤로 가까이 다가갔다. 감독은 노라를 탐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지만 노라는 고개들 들어 미로를 발견했다. 미로가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가져다댔다. 노라가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세요.”
목소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밝게 나왔다. 뒤에서 쏟아지는 조명 탓에 감독과 노라의 위로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감독은 깜짝 놀라며 얼어붙었다. 심장께에 손을 올리고 숨을 잔뜩 들이마시며 나온 허억 소리가 감독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알려주었다.
불쑥 튀어나온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본 뒤 감독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감독이 소리를 질렀다. 미로는 대수롭지 않을 듯 말했다.
“오늘이 첫 공연이잖아요. 두근거려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죠.”
슬쩍 눈동자를 돌렸다가 노라와 눈이 마주쳤다. 저것의 입꼬리는 여전히 미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뭐하시는 거에요?” 미로가 재차 물었다.
“네가 알 거 없어.”
감독은 떳떳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난처해 보이지도 않았다. 미로를 성가셔 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드디어 첫 공연이에요. 오늘은 참아 주세요.”
미로는 더 이상 감독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미로가 난처하다는 듯, 그러나 부드럽게 타일렀다. 불만이 가득해 보이던 그는 결국 노라를 미로에게 떠넘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감독이 완전히 가버리자 미로는 노라의 앞으로 다가갔다. 노라가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건넸다. 미로는 대답 대신 손등으로 노라의 볼을 쓸어보았다. 손가락에 와 닿는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매끈했다. 아름다웠지만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차가운 손끝을 통해 부드러운 피부의 온기가 느껴졌다.
“기분이 불쾌하신가요?”
노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불쾌함이 읽혀서요.”
미로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노라가 자신의 표정에서 불쾌함을 읽어내자 그는 정말로 불쾌해졌다.
“네가 내 기분을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노라는 예의 그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미로는 이것에게서 감정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라에게는 감정이 필요 없었다.
미로가 노라의 머리와 옷을 정돈해주며 말했다.
“나는 네가 감독을 싫어했으면 좋겠어.”
“왜요?”
“나는 감독이 싫으니까.”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노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천진하게 말했다.
“아까처럼 단 둘이 있지 마.”
말이 날카롭게 나와서 마치 명령조처럼 들렸다. 미로는 노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노라도 미로를 마주 바라보다가 평온한 어투로 다시 물었다.
“미로는 저를 싫어하나요?”
“나는 너를 싫어하면 안 되는 거야?”
노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미로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안될 것은 없죠.”
노라가 대답했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여전히 눈썹은 찡그린 채였다. 노라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말했다.
“조금 슬퍼요.”
미로가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벌리기도 전에 노라가 말을 덧붙였다.
“당신에게 미움 받으면 저는 슬프답니다.”
갑자기 미로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미로는 노라의 감정표현은 모두 거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노라의 행동 중에서 논리적으로 계산되지 않은 것들은 없었다. 그러나 미로는 노라에게 속을 수밖에 없었다. 미로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잠깐 만날래?”
미로는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인데요?”
미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이라고 말했다. 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단 둘만 만나는 거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미로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6
고위 공무원과 기업인들이 객석 가득 앉아 있었다. 유명 배우들도 눈에 띄었다. 모르긴 몰라도 기자들도 잔뜩 초청했으리라. 사실상 연극 공연이라기보다는 제품 발표회에 가까워보였다. 연극은 완벽했고 노라는 배우로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연극이 끝난 뒤 장내가 소란스러웠다. 열기와 환호에 미로는 정신이 없었다. 노라는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노라의 뒤로 자신과 동료 배우들이 배경처럼 서 있었다. 미로는 노라의 뒷모습을 보았다. 조명 때문에 마치 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구석에 서 있는 자신이 유독 초라해 보였다. 미로는 앞으로도 이렇게 노라의 뒷모습을 바라볼 날이 많을 것을 예감했다. 미로는 노라처럼 될 수 없었다.
노라는 책임 연구원을 따라다니며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노라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더더욱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감탄했다. 그들은 노라의 머리칼과 피부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쓸어보며 과학의 발전을 찬양했다. 미로는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그 모습을 모두 관찰했다. 사람들은 미로를 지나쳐 노라에게로 달려갔다. 미로는 어떤 사람과 어깨가 부딪혀 몸을 휘청이기도 했다. 모두가 자신을 지나쳐 등을 보이며 멀어져갔다. 미로는 노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노라가 아까와 같이 눈썹을 찡그려 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미소를 보이며 사람들을 상대했다.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새벽 내내 떠돌다가 극장에 들어와 몇 시간 쪽잠을 잔 것이 다였다. 그래서 미로는 자신과 노라가 사용하는 배우 대기실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는 와인과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선물로 두고 간 모양이었다. 미로는 홀로 노라를 기다리며 오늘 공연한 연극을 복기했다. 새벽녘에 목격한 감독과 노라를 떠올렸다. 대기실 구석에 있는 캐리어를 떠올렸다. 이제야 알았다. 캐리어에 들어가 있는 인형은 노라가 아니라 미로 자신이었다. 모두가 연기를 하며 산다. 모두가. 사람들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만을 원할 것이다. 그것은 미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해낼 수 없었다. 아무리 발악하고 발버둥 쳐도 자신은 결국 절망감과 패배감만을 맛볼 것이다.
대기실 문이 열리며 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로는 생각했다. 내가 ‘노라’를 연기했어도 오늘과 같은 환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었다. 사람들은 기계이자 인형이자 인간인 노라를 원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로는 노라처럼 연기할 수 없었다.
모든 일은 순식간이었다. 미로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와인병의 목을 강하게 움켜쥐고 노라의 머리통을 향해 내리찍었다. 병의 바닥이 머리에 닿기 전 노라의 눈은 크게 확장되어 살인자의 모습을 가득 담았다. 뒤로 넘어가는 노라의 머리채를 잡고 다시 한 번 병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병이 깨졌다. 물풍선에 바늘 끝을 가져다댄 것처럼 와인이 터져나왔다. 노라의 몸이 완전히 무너졌다.
미로는 눈동자만 내려 미로를 응시했다. 와인에 젖어 붉게 물든 옷이 마치 피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달큼한 와인의 단내 사이에서 미로는 강렬한 쇠비린내를 맡았다. 이것은 노라가 쏟아낸 피가 아니다. 와인이다. 그러면 이 비릿한 냄새는 무엇일까. 미로는 눈앞이 흐려지는 기분에 비틀거리며 목만 남은 병을 떨어뜨렸다. 웅덩이를 위로 떨어지며 튀어 오른 핏방울이 미로의 신발코와 바짓단에 선명한 자국을 새겼다.
미로는 순간 무릎에 힘이 빠져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였다가 간신히 균형을 찾았다. 심장은 힘껏 펌프질을 하고 있었지만 피는 순환하지 못하고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미로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허리를 숙이며 천천히 무릎을 접었다. 모든 행동은 슬로모션 비디오처럼 느리게 이루어졌다. 노라가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엎어져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손을 노라에게로 뻗었을 때 미로는 역겨움을 참을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다시 미로를 장악했다. 그는 이 본능적이고 야만적인 느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미로는 창백한 낯빛으로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미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힘을 너무 꽉 준 탓에 손톱이 미로의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지만 미로는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미로는 천천히 일어났다. 당장 이 극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미로는 노라를 지나쳐 가면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미로는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은 소복하게 쌓이지 못하고 녹아버려 땅이 질척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은 무언가 쓸쓸한 느낌이 든다. 행복을 모두 연소시키고 남은 찌꺼기들이 가라앉아 있다. 미로는 오늘도 거리를 헤매야했다. 캐리어 끌리는 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웠다.